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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는 것도 인생 방법 중 하나, 이선주 작가의 '단지 커피일 뿐이야'
"받아들이는 것도 인생 방법 중 하나, 이선주 작가의 '단지 커피일 뿐이야'" 내용보기
그렇게 아무런 시간 제약 없이 골목을 걷다 보니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구인가. 이름은 강산이고 나이는 열여덟. 그 외에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은 뭐가 있을까?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 엄마가 아빠가 돌아가시고 일 년 만에 재혼했다는 것? 새아빠는 런던 커피라는 카페를 운영한다는 것? 새아빠가 나쁜 사람이길 바랐다는 것? 그래서 새아빠의 손
"받아들이는 것도 인생 방법 중 하나, 이선주 작가의 '단지 커피일 뿐이야'" 내용보기

 

그렇게 아무런 시간 제약 없이 골목을 걷다 보니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구인가. 이름은 강산이고 나이는 열여덟. 그 외에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은 뭐가 있을까?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 엄마가 아빠가 돌아가시고 일 년 만에 재혼했다는 것? 새아빠는 런던 커피라는 카페를 운영한다는 것? 새아빠가 나쁜 사람이길 바랐다는 것? 그래서 새아빠의 손아귀에서 엄마를 구해 내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는 것? 그것도 아니면 커피 냄새를 못 맡는다는 것?

이런 식으로는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라는 사람을.

-p127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괜찮은 게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으니까.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보다 지금 덜 행복한가? 엄마가 재혼하기 전보다 덜 불행한가? 수치로 확인할 수 없으니 잘 모르겠다. 다만 이제 세상에는 내가 원치 않는 일도 일어난다는 걸 안다. 아빠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는 건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다. 뉴스에서 봐도 남의 일이라고 여겼다. 엄마가 아빠가 죽고 일 년 만에 재혼할 거라는 것도. 나는 결코 상상해 본 적 없는 일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런 걸 사람들은 인생이라고 부르는 걸까.

-p175

 

어쨌든 올 여름 재범이는 사랑을, 나는 커피 냄새라는 혹을 얻었다. 앞으로도 커피 냄새를 극복할 수 없을 거라는 즐거운 확신과 함께.

왜 즐거운 확신이냐면, 커피 냄새를 맡고 속이 울렁거릴 때마다 아빠를 잊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게 아빠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만약 언젠가 커피 냄새를 맡아도 아무렇지 않을 때가 온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을 것이다. 아빠를 온전히 떠나보냈다는 신호니까. 그러니 더 이상 극복하기 위해 애쓰지 않을 것이다. 그냥 받아들일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일은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세상에 있다는 것. 이것 또한 내가 커피 냄새라는 혹과 함께 얻은 깨달음이다.

그리고 이를테면 아빠의 죽음과 새아빠의 등장 같은 것.

-p181

 

 

 

커피 냄새를 맡지 못하는 열여덟살의 산이는 갑작스레 아빠를 잃게 된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빠가 다니던 '런던커피' 카페 사장님과 재혼한 엄마를 산이는 이해할 수가 없다. 커피 냄새만 맡아도 토악질이 나는 산이는 대체 왜 엄마가 런던커피 사장과 재혼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여러 생각을 한 끝에 산이는 엄마가 사기를 당한 게 분명하다는 결론을 짓는다. 새아빠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기 시작한다.

 

열여덟살밖에 되지 않은 산이에게 아빠와의 이별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른이어도 누군가와의 이별은 쉽게 털어내기 어려우니까. 그런 산이에게 갑자기 새아빠가 생겼다는 소식은 청천벽력이었을 테다. 나를 산이에게 대입해봐도 그렇다. 산이와 같은 반응이었을 거라는 데에 백퍼센트 확신한다. 일탈이 섞인 산이의 일상이 반복된다. 엄마의 한 마디보다 친구의 한 마디가 더 친근하게 느껴질 법한 10대 시절, 산이 곁에는 친구 재범이가 있다. 우당탕탕 싸우기도 하고 삐지기도 하고 연락 두절일 때도 있지만 혼돈의 카오스를 겪는 산이에게 재범이는 든든한 힘을 주는 친구다. 술을 먹고 홧김에 새아빠의 카페 문을 박살내서 벌로 카페에 나와 일을 해야 할 때도 재범이는 산이와 함께다. 재범이가 있었기에 산이는 새아빠에게 가식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가게 되었던 것 같다. 가면을 쓰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마주하고 부딪치는 것, 그게 산이와 새아빠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였다.

 

커피 냄새를 너무 싫어하는 산이가 커피 냄새를 극적으로 잘 맡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커피 냄새는 여전히 싫은데 커피 냄새를 맡으면 커피를 마시던 아빠의 모습이 연상되니 이것으로 상쇄시킬 수 있을 것 같다고 산이는 말한다. 나는 이런 산이가 참 좋다. 받아들이는 것, 인생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고 내 인생을 주무를 때 필요한 방법이기 떄문이다.

 

이선주 작가는 청소년 문학 소설을 많이 쓴 작가인데, 작가가 쓴 책을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포인트가 있다. 10대를 겪고 있는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에게 다가온 인생 문제를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딪치고 뒹굴다가 번뜩, 아 인생은 이런 거였구나.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을 누구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 안에 녹여 말한다. 아이들이 이선주 작가의 이야기를 읽다가 그렇네, 이거였네 하며 무릎을 탁 치며 인생의 방향키를 다시 쥘 수 있게 되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s*****5 2023.04.2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