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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속에서 살았고, 언어에 기대에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꽤 긴 시간 동안 읽으며 생각에 잠겼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불시에 찾아오는 발작 증세,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았던 순간에도 그가 달려가는 곳은 ‘언어’라는 집이었다. 살면서 지치고 힘들 때, 마음을 일으키기 쉽지 않을 때, 사람의 어떤 말보다 책에서 만난 한 줄의 글에서 깊은 위로를 얻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따금 내 내면에서 만사가 무너지고 모든 게 힘들 때면 단어들로 돌아가고 싶어. 한쪽 구석의 작은 책상에 지금 작업 중인 번역 원고가 놓여 있어. 난 가끔 그곳으로 도망치지.”
10년 전 갑자기 아내를 떠나보낸 레이랜드는, 아내가 남기고 간 부재의 공간을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로 채워간다.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 내 감정은 어떠한지를 모두 편지에 담아낸다. 나에게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의 조각들을 글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그때 펜을 찾고 메모장을 여는 이유, 이제 곧 날아가 버릴 현재를 놓치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을 좋아한다. 사람이란 어떤 나라, 어떤 건물에서가 아닌, ‘언어’라는 집에 머물며 사는 존재이다. 그 언어의 집이 비슷한 구조로 지어진 사람을 만날 때 나의 고향, 나의 근원을 만나는 느낌을 받곤 한다. 레이랜드가 친구 패트를 만날 때 그랬던 것 같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다음 날 레이랜드는 패트를 만나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한다.
“검은 달.” 레이랜드의 말을 킬로이가 받았다. “잿빛 나날.”
마치 암호처럼 주고받는 두 사람의 짧은 대화 속에 내 마음은 한참 머물러 있었다. 나에겐 이런 친구가 있을까? 말 없음조차도 위로가 되어 주는 사람, 한마디의 말로 내 영혼에 빛을 비춰 주는 그런 사람. 오랜 시간 길에서 담배를 밟아 비벼 끄면서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 패트의 모습에서, 레이랜드는 친구의 진심을 느낀다.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듣는다.
그가 자신의 병이 오진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그는 많은 것을 정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잃었다고 생각한 삶이 다시 찾아왔다. 열린 시간이 그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오히려 그때부터 자신이 세운 목표에 대한 절박함을 잃어버렸고, 그의 삶은 다시 흔들린다. 출판사를 넘긴 돈으로 친구들을 도울 수 있음에 만족을 느끼다가도,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의사를 향해 분노를 참지 못하기도 한다. 레이랜드가 마냥 천사표가 아니라서, 지극히 인간적이어서 더 좋았다.
누군가가 쓴 글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 그는 꽤 긴 시간을 번역가로서 살아왔다. 저자와 텍스트 사이에서, 저자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한 거리까지 느낄 수 있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작하지 못한 어려운 숙제 하나가 있었다. 자신의 글을 쓰는 것,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왜 나더러 직접 글을 쓰지 않냐고 했지. 워런 숀 삼촌의 권고처럼. 난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그걸 묻는 걸 좋아하지 않고, 프란체스카가 묻지 않아서 기뻐. 내가 나 자신에게 그 질문을 하며 괴로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글을 쓰는 일, 지금까지 해 오지 않았던 일이다. 그는 번역 중인 책의 언어 속에서만 살았다. 그 언어 속에 사는 것이 익숙했고, 자신에게 맞는 옷이라 여기며 지냈다. 그런데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목소리가 자꾸만 말을 걸어온다. 레이랜드 자신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번역하는 글의 근원이 자신 안에 있으며 그것을 빚고 만든 사람도 자신이지만, 결국 타인의 도장이 찍힌다는 사실을.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얻는 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언어,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알지?’
길을 잃은 듯 멈춰선 레이랜드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길을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는다. 원본이 없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허공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자신의 언어를 읽을 생각을 하면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매일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배경을 떠올리고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설정해 본다. 그 속에서 관계가 생겨나고 그들 사이에 대화가 오가기 시작한다. 더듬더듬 그려지는 이야기 속에서 그는 자신에게 더 가까워지는 글을 쓰게 된다. 나의 언어를 찾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매일, 계속’ 쓰는 것, 그저 한 걸음씩이라도 발을 내딛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상상으로 하는 작업, 자신의 말과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글쓰기였다. 고유한 미래를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이 일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나에게도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나는 쓰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나의 앞날을 확언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것이 내가 평생 살아야 할 ‘나의 집’이라면 꽤 오랜 시간 함께 하지 않을까.
“친밀함은 나눌 수 없습니다.”
나에게 더 가까워지는 글을 쓰고 싶다. 나와 다르지 않은 친밀함을, 그 진실함을 담아내고 싶다. 살아 있는 내가 진짜 나를 만나기 위해 나아가는 만큼, 나는 자유로워지겠지. 그러니, 멈추지 말고 나아가야겠다. 발밑에 단단한 땅을 딛고 다시 서야겠다. 언젠가 내 고유한 내면의 목소리가 내 삶의 울림이 되어 들릴 수 있게.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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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 전에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을 읽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봤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제레미 아이언스는 묘하게 아빠를 닮아 있어 마음이 쓸쓸했고, 내 남편의 늙은 후 모습 같아 마음이 짠해지기도 했다. 뭐랄까. 공부하는 남자, 학문하는 남자들의 어떤 전형 같은 모습. 몸에도 삶에도 군더더기라고는 전혀 없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지만, 이젠 늙어버린, 한 사람의 모습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해서 오래오래 여운이 남았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또 다른 작품인 『언어의 무게』에도 역시 나이 많은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남자는 학자라고는 할 수 없을 지 모르지만 평생 언어를 다룬 사람이라는 점에도 이전의 인물들과 닮았다. 그리고 이번 소설에도 기차가 등장한다. 근대 문명의 시작을 연 상징과도 같은 기차는 그래서 현대사를 관통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인생도 그가 거쳐왔던 수많은 역들에서의 기억들의 합으로 요약될 수 있고, 그의 세대의 역사 역시 그런 식으로 축약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세대를 뭉뚱그려 이러이러하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의 위험성은 분명 존재하지만, 지금은 사라지거나 희귀해진 내 아버지 세대의 어떤 낭만이나 열정, 인간성과 그것의 고결함과 고귀함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우아한 소설이었다. 이런 소설을 읽으면 나이듦에 대해 조금은 초연해진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팠던 나같은 사람에게 나이듦이란 병듦과 거기에서 수반되는 고통과 삶의 많은 장애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들을 감당할 미래가 벌써부터 두렵고 숨막히기 마련인데,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되는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그 순간에도 무언가 인생을 불밝힐 '점화'의 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때로는 과거의 기억들이 그 연료가 되어준다는 것이 위로가 된다. 나이가 들수록 삶을 되돌아보면 회한만 가득하다고 하지만, 어떤 과거는 미래를 살아갈 동력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런 기억들이 내가 거쳤던 역들이 많이 쌓여있길 희망한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을 읽다보면 유럽에 대한 어떤 동경이 생기는데(실제로 가보면 이렇게 아름답지는 않다. 기차 여행은 대개는 고되고 불쾌한 경험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윤색(?)된 낭만마저도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그게 미화나 과장이 아니라 실재의 모습일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때의 동경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유럽, 어떤 특정 국가나 지역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실제로 존재했던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 그런 아름다움을 내 인생에 남기고 심은 열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이렇게 마무리되는 인생이라면, 그 끝도 두렵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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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메르시어의 장편소설 <언어의 무게>는 제목 그대로 언어가 인간의 삶에 어떤 무게로 작용하는지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이탈리아의 어느 출판사 사장이자 번역가인 레이랜드는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 삶을 정리하던 중, 이 판정이 의사의 실수로 인한 오진이었음을 알게 된다. 뜻밖의 상황에 혼란스러워진 그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삼촌에게서 물려받은 런던의 저택으로 향한다. 어린 시절 레이랜드는 동양학자였던 삼촌을 동경하며 번역가를 꿈꿨지만, 보수적인 아버지는 그의 선택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학업을 중단한 채 가출해 낯선 도시를 떠돌며 독학으로 공부했고, 마침내 번역가로 성공한다. 평생 ‘타인의 언어’를 다루며 언어가 주는 기쁨을 누려온 레이랜드. 그러나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그는 이제는 삶을 되돌아보며 ‘남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만의 언어’, 자기 삶의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는 자각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소설은 레이랜드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교차하며 보여준다. 죽은 아내에게 편지를 쓰며 과거를 성찰하고, 오랜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언어와 삶의 본질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는 주인공.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언어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며, 동시에 자유와속박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레이랜드는 왜 그토록 외국어에 집착했을까.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단어와 문법을 익히는 것을 넘어, 그 언어가 품고 있는 다른 민족의 정신세계와 관습, 역사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는 가출 후 다양한 언어를 익히며 각 언어가 가진 고유한 사고의 틀을 경험하고 사유를 확장했다. 이러한 과정은 보수적인 가족 환경에서 형성된 제한된 시각을 뛰어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모국어가 가족과 사회의 기대가 담긴 ‘속박의 언어’였다면 그가 스스로 선택하고 익힌 외국어는 ‘자유와 해방의 언어’였다. 이 작품은 다양한 유럽 언어가 가진 고유한 특성과 ‘말맛’을 보여주며 비슷한 의미의 단어가 각기 다른 언어로 표현될 때 드러나는 국가와 민족의 특성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언어의 ‘섬’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이런 경험을 직접적으로 느끼기 어려운 점이 너무나 아쉬웠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유럽의 문화와 언어가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소설은 안락사 문제를 비롯한 첨예한 사회적 이슈를 다루기도 하고, ‘하얀 카르텔’, ‘검은 카르텔’ 등의 언어유희를 통해 사회 모순을 비판하며 주제를 확장한다. 지적인 탐색이 너무 깊었던 탓일까. 진부하지 않은 주제와 탄탄한 문장력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무겁게 다가온다. 문장은 철학적이고 추상적이며, 인물들은 감정보다 사유에 치중한다. 그래서 그들의 고뇌가 깊지만 다소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생활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삼촌의 런던 저택, 부유한 생활, 번역가로서의 성공 등 모든 환경이 지나치게 이상화되어 있어, 인물들의 내적 갈등과 고민에도 현실적 공감이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몰입하기 어렵고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언어와 존재의 관계, 삶의 유한성, 그리고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깊은 사유를 표현한다. 무엇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영국과 이탈리아의 곳곳을 묘사하는 문장들이 마치 그 곳을 직접 여행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덕분에 나도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영국과 이탈리아의 거리를 누비며 그들이 보고 느꼈던 것을 경험하고 싶어졌다. 「모든 것은 이름이 불리고 이야기된 후에야 실제로 존재했다. 레이랜드가 찾아 나선 게 아니라 그게 그에게 와서 부딪쳤다. 처음부터 그랬다. 언어 없이 사물에 도달하기를, 사물과 사람과 감정과 꿈에 닿기를 원할 때도 자주 있었지만 언제나 그 사이에 언어가 다시 끼어들었다.」 (p.21) #언어의무게 #파스칼메르시어 #비채 #김영사 #책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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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메르시어는 본명인 페터 비에리로 『삶의 격』 『자기 결정』 등 철학서를 발표한 철학자이자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등 장편소설을 쓴 소설가다. 『언어의 무게』는 2020년에 출간한 작품으로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오진으로 삼촌이 물려준 런던의 저택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내용이다.
사이먼 레이랜드는 출판사의 사장이자 번역가이기도 하다. 죽은 아내가 물려준 출판사를 다른 사람에게 팔고 마지막을 준비했다. 방사선 사진의 이름이 바뀐 걸 확인하지 않은 의사의 오진으로 불행한 나날을 보냈다. 아내의 출판사가 있던 트리에스테를 떠나 새로운 삶을 위해 런던으로 돌아왔다.
옆집의 케네스 버크를 지켜보거나 시내를 걸어 다닐 뿐이었다. 무엇을 하며 삶을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야 했다. 언어의 울림으로 평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어가 주는 기쁨, 즐거움, 희열. 언어는 그의 삶을 관통했다.
번역가이자 출판사를 경영해오며 만난 작가와 번역가들과의 에피소드와 아내와 각별했던 기억들, 아내를 잃고 상실의 아픔을 겪었던 가족은 서로를 안아주는 사람이 되었다. 슬픔의 무게를 견디는 방법이었다.
레이랜드는 케네스 버크와 친구가 되고, 러시아어로 된 책을 바스크어로 번역하는 안드레이를 비롯해 소설가 프란체스카 마르케세는 새로운 소설을 쓰고, 출판사를 경영하는 린과 숀 크리스티는 새로운 상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소설 『비 오는 나날』로 성공을 거둔 메리 앤 애쉬퍼드는 더는 글을 쓰지 않는다. 이들과 교류하며 레이랜드는 더 이상 번역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나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새로운 환경은 새로운 삶을 향한 발걸음이다. 딸 소피아는 의사 면허는 따겠지만 의사가 되지는 않겠다고 했고, 아들 시드니는 법학이 아닌 다른 일을 해볼 거라고 했다. 레이랜드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기로 한 것과 같다. 어떤 것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삶이 달라지는 것 같다. (작성중)
#언어의무게 #파스칼메르시어 #비채 #책 #책추천 #문학 #소설 #소설추천 #독일소설 #독일문학 #유럽소설 #페터비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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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1/3 밖에 읽지 못한, 리뷰라기 보단 독중감에 가까운 사견. 파스칼 메르시어는 고민없이 모든 것을 팔아재끼는 배금주의가 기본이 된 세상 속에서, 여전히 우리가 팔지 말아야 하고 지켜야 하는 근원적 가치가 있으며, 명품과 한강뷰 아파트를 사는 것 외에도 인간을 고결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자이자 소설가임. 그의 철학 서적 중 읽은 것은 <삶의 격> 밖에 없지만.. 내 생각에 저 책보단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는 것이 위의 주장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임. 약 19년의 세월이 지나 발표한 본 작품도 같은 주제의식을 좀 더 깊어진 사유와 문장을 통해 변주하고 있음. 동어반복이 아니라 변주라는 것에 방점을 찍고 싶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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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책의 표지만 보고 구입했는데 택배 박스에 벽돌 같은 책이 들어있어 깜짝 놀랐다. '이것이 언어의 무게구먼...' 읊조리며 박스에서 꺼냈다. 책의 줄거리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은 번역가이자 출판사 대표인 한 남자가, 그 진단이 오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일어나는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으며 주인공 레이랜드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궁핍을 보며 세미콜론과 쉼표를 고민하는 일에 자괴감과 죄책감을 느끼는 안드레이와 그런 그에게 두 가지 모두 의미 있는 선택임을, 중요함에는 차등이 없다는 다정한 확신을 전하는 버크, 병에 걸린 어머니를 보호하며 그로 인해 상처받지 않도록, 돌봄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마음 쓰는, 엄마를 새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말하는 숀, 한없이 다정한 태도로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자녀들, 그 외에도 다 서술하지 못 한 사려 깊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들을 읽으며 조용히 주변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생각했다. 특히 버크 같은 친구이자 이웃이 레이랜드에게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나도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버크 같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고, 나 스스로도 옳지 않을 일에 용기를 낼 수 있는 버크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은 어렴풋하고 피상적으로 떠돌던 느낌에 명확한 언어를 부여해 이름 짓는 과정 같았다. 독서를 하다 보면 느낌표 또는 물음표가 반짝하고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잠시 멈추고 그 느낌을 잘 갈무리한다. 그 느낌이 곧 내 사고를 확장시키는 도구가 된다. 그런데 이런 느낌을 갈무리하는 일이 쉽지 않다. 특히 일상에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일이나, 오랜 관습에 의해 무비판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일들은 더욱 그렇다. 느낌을 명확하게 정리해 보기도 전에 관성처럼 감정을 단정하는 말들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말을 줄여야 하는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이런 점에 있다. 내 상황과 감정을 정확하게 들여다보지 않고 관습적으로 뱉어내는 말들로 인하여 내 감정이 잠식당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병으로 인해 인생에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달은 레이랜드는 '내 인생의 시간으로 뭘 했지?'p10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사람은 누구나 장단의 차이만 있을 뿐, 유한한 시간을 가진다. 그러나 일상 속 인간은 시간을 그저 배경 변화의 일부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레이랜드 또한 비슷했을 것이다. 아침이 저녁이 되고, 다시 아침이 되는 삶 속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진단받은 순간 그의 모든 시간은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가 된다. 책의 중후반부 레이랜드가 있는 런던을 방문한 안드레이는 런던에서 있었던 일을 기쁨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 기록을 '현재를 잡아두는 것'이라 서술한다. 이는 삶의 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만드는 일이다. 숙제이기 때문에, 위인들이 썼기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한 장면에 고심한 감정의 이름을 붙여 한정된 시간의 밖으로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일기를 쓴다. 이렇게 일상을 기록하는 일은 시간의 흐름과 현재를 감각할 수 있는 '시정'이 영향을 준다. 시정은 맥락상 '시적인 정취' 정도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나는 이 시정의 다른 이름이 예술이라 느꼈다. 취향이 계급이 되어가는 시대의 예술이 아니라 윌리엄 모리스가 역설한 '일상의 예술화'와 궤를 같이 하는 예술 말이다. 빼앗긴 보물을 되찾듯 생활 속에서 능동적인 창조와 발견의 기쁨을 얻는 순간들을 시정으로 여기며 그 순간을 잡아두는 것. 현재를 감각할 수 있는 계절과 자연의 변화에 나만이 기억할 수 있는 곳에 의식의 책갈피를 꽂는 것. 유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를 감각할 수 있는 이런 예술적 순간이 시정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얼마나 실속이 적은 일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단 하루도 제대로 감각하지 않은 채로 다음 장으로 넘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둘러말하기를 피하는 나의 언어는 직접적, 효율적인 특징을 가진다. 이런 화법을 써온 이유는 가장 효과적인 전달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런 생각에 물음표가 떠오른 사건이 하나 있었다. 며칠 전 생일을 맞아 생일파티를 하고 온 아이가 "**이가 다정하게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줘서, 기뻤어요."라고 말을 했다. 문득 여태껏 내가 했던 말들에 상대의 감정이 고려의 대상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전했던 축하에서 나의 진실한 축하가 진정 전해졌을까. 이 책을 다 읽고 생각해 보니, 나의 언어에는 마음이 실려가지 않았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의례적 목적으로의 내 언어에는 아이가 말한 다정이 없었던 것이다. 언어에 다정을 싣기 위해서는 말하는 주체인 내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수레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선전포고문처럼 톡 보내는 나 자신, 반성하자. 책의 중간중간에는 레이랜드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가 나온다. 나는 이 편지를 일종의 요약 전달본 처럼 느끼기도 했는데, 그 분량이 만만치 않아 역자가 고생을 많이 했겠구나 생각을 했다. <언어의 무게>는 출판사에서 번역가를 찾지 못해 2-3년 동안 애를 먹고, 저자의 전작인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번역한 전은경 번역가에게 다시금 부탁했다는 일화를 봤다. 나 또한 이 책은 저자도 저자지만, 번역가에게 박수를 꼭 보내야 할 것 같다 생각한다. 책의 제목이 무려 <언어의 무게>이고 두께는 '어마어마한'<언어의 무게>인데 여린 살갗같이 섬세하게 번역해낸 것이 대단하다. 이 책은 AI를 이용한 번역이 대두되고 있는 세상에서도 사람이 번역을 해야만 하는 이유처럼 느껴진다. 섬세한 감정과 철학적 영역에서 AI가 과연 사람과 같을까. 이런 다면체적 '언어의 무게'를 오롯이 전달할 수 있을까. 다른 존재가 언어를 흉내 내어 전달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읽고, 쓰고, 느끼는 순간에 의식이 깃든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많은 존재들 중 인간만이 문자와 언어를 가진 이유가 이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오늘 나의 의식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을까. 안락사, 돈 여러 가지 화두들을 스무스하게 던져주어 읽는 내내 내 삶을 반추해 보게 만들었던 책이다. 후반부 책을 쓰는 이야기에서는 텐션이 조금 떨어지는 느낌이 있었지만, 여러모로 좋은 영향이 더 많았던 책이었다. 저자의 다른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도 조만간 읽어볼 예정이다. |
| 파스칼 메르시어의 언어의 무게. 얼마전에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던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너무 마음에 드는 장정으로 다시 나와 기쁜 마음으로 구매했는데 파스칼 메르시어의 다른 책이 리스본행 야간열차 만큼이나 예쁜 장정으로 나오다니.. 바로 구매했습니다. 물론 장정만이 아니라 너무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님의 책이라 구매했지만요. 페터 비에리라는 본명으로 출간하신 삶의 격, 자기 결정, 자유의 기술도 두고두고 필사할 만큼 너무 사랑하는 책이지만 리스본행 야간열차나 언어의 무게처럼 긴 호흡으로 가야하는 책들도 너무나 좋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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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 중 언어는 생각을 담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는 메시지가 계속 생각나네요. 언어의 무게는 언어와 생각, 우리가 말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말들이 사실은 생각을 전달하기엔 너무 부족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인상 깊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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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읽는 내내 작가가 구현해내는 단어와 문장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했었다. 언어의 무게 또한 매우 아름답고 우아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지만,그렇게 친절하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한 번으로는 부족한 재독,삼독이 필요한 책인거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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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파스칼 메르시어의 책 <언어의 무게>를 읽고 적는 리뷰글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스포일러에 예민하신 분들은 읽지 않으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전작에서도 느끼지만 쉽게 읽히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독자를 끌어들이는 강인한 힘이 있다. 나중에 재독하면서 천천히 다시 작품의 깊이를 음미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