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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로마의 귀족 안디바와 복음서 저자 누가가 주고받은 가상의 편지들을 통해 전개됩니다. 이야기는 안디바가 누가의 학술적 저작(누가복음)을 접하며 시작됩니다. 초기 안디바는 예수를 "세상 물정 모르는 무책임한 사상가"로 치부합니다. 특히 "빌려주되 되받기를 바라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로마의 명예와 보답 시스템인 '후원 관계'를 파괴하는 사회적 위협이라고 비판하며, 예수를 반사회적 광신도로 여깁니다. 그러나 누가와의 대화가 깊어지면서 안디바는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목격하며 혼란에 빠집니다. 하나는 기존 로마의 가치관과 기복 신앙을 결합한 칼란디온의 모임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과 계급을 초월해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며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안토니우스의 모임입니다. 안디바는 후자의 공동체에서 로마의 냉혹한 위계질서가 아닌, 진정한 '가족적 유대'와 '선함'을 발견합니다. 또한 누가는 편지를 통해 빌라도의 잔혹성과 당시 유대 민족이 겪었던 가혹한 경제적 수탈(성전세와 로마의 세금) 등 예수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설명하며, 예수의 사역이 단순히 종교적인 사건이 아니라 억눌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였음을 변증합니다. 결국 로마의 영광을 쫓던 안디바는 예수의 길을 따르기로 결단하며, 요한계시록 2장 13절에 언급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로서 순교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소설을 넘어, '복음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고 전복적인 메시지였는가'를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우리는 흔히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종교적 수사로만 듣지만, 안디바의 눈을 통해 본 이 메시지는 로마 제국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선언이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안디바의 심경 변화입니다. 지적 호기심으로 시작된 탐구가 삶의 기초를 뒤흔드는 신앙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매우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로마식 '기브 앤 테이크' 문화에 젖어 있던 그가, 아무런 대가 없이 서로를 돕는 안토니우스 공동체의 모습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 장면은 오늘날 이기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도 큰 울림을 줍니다. 또한, 누가가 설명하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빌라도의 악행, 소작농의 고통 등)은 성경 텍스트 뒤에 숨겨진 입체적인 역사를 보게 해줍니다. "역사는 정황이 내용을 결정한다"는 책 속의 문구처럼, 예수가 왜 그토록 치열하게 사역했는지를 이해하게 돕습니다. 안디바가 결국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주(Lord)'라고 부르던 황제 대신 '나사렛 예수'를 선택하는 마지막 장면은, 편안한 신앙생활에 안주하려는 현대인들에게 "당신에게 예수는 진정 누구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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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장 13절엔 순교자 안디바의 이름이 딱 한 줄 등장한다.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미국 베일러대 종교학 교수인 저자는 이 한 가지 사실, 로마 황제 숭배를 강요받은 안디바가 순교했다는 팩트에서 시작해 독자들을 1세기 소아시아로 초대한다. 에베소에 살던 안디바가 누가복음 저자인 누가와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설정이 참신하다. 단순한 상상력을 토대로 완성된 이야기가 아닌 고고학적 발견과 역사적 성찰이 뒷받침하는 점도 흥미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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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딱딱하고 갖춰진 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원래는 했었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삼위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성경도 다양한 장르의 모양을 빌려서 기록되었었다. 그렇기에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성경이, 그리고 신앙이 유지 전달 보존 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도구로써 다양한 글의 장르가 사용되고 그것을 통해서 상황을 이해하고 바라 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즐거운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소설 형식으로 1세기의 모습을 알려주는 많은 글들이 (북오븐 출판사에서 나왔던 책이나 .. ~에서 일주일 같은 책들이 그런 것처럼) 주는 유익은 생각보다 배경과 그 배경을 통해서 본문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준다는 점이 아닐까,
책은 안디바라는 사람이 초대교회에 보냈던 편지 중에 사라진 편지라는 컨셉?으로 글을 진행한다. 그리고 그 글을 풀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글의 내용은 픽션일지라도 그들이 겪었을 믿음을 살아내기 위한 여정은 성실하게 담아내고 있어서 색다르고 신선하지만 다르지않은 방향성을 찾아 볼 수 있도록 시야를 넓혀주고 있다.
좀 상관 없는 말일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보면 1세기 교회와 교회 공동체에 대한 연구는 실질적인 필요성은 떨어지는 일일 것이다. 당시의 시대와 상황 속에서 기록 된 말씀을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것이 가지는 의미 그들이 그렇게 했었던 본질적 이유는 사실 그들의 상황을 모른다고 하여도 적용 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시에 대한 이해가 주는 유익이 있다면 그 상황에서 본질을 향한 눈과 몸과 마음을 지켰던 이들에게 주어진 말씀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가 아닐까,
또 같은 맥락에서, 이성적 학문적 영역의 배움과 적용이 현장에서 얼마나 피와 살을 깍아가며 다가서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도 동시에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깊이 있는 이해, 본문에 대한 더 명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 신학을 한 이들에게 1세기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지만 그것을 전달할 때에는 1세기의 날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생각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책임감이, 1세기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갈수록 동반 되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