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와 드라마. 두 가지 관계가 있다. 하나는 대중화다. 힘들게 문자로 읽을 것 없이 치밀하게 연출된 드라마를 멍청하게 보고 있기만 해도, 역사는 너무나도 명쾌하게 머리 속으로 들어온다. 반면, 드라마는 동시에 역사를 왜곡하기도 한다. 너무나도 쉽고 명쾌하게 역사를 받아들이게 하므로 이로부터 또다른 문제를 파생시킨다. 얼마전까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던 <태조 왕건>과 같은 드라마는 이같은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왕건이라는 인물의 차분하고 인내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호족이라는 이름의 지방세력을 결혼을 통해 자기 편으로 끌어안는 치밀한 모습 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묘사된다. 또한 단지 무자비한 폭군으로만 인식돼 있는 궁예라는 탕아를 시대의 걸출한 인물로 되살려 놓기도 했다. 궁예에 대한 해석이 다분히 승자의 입장에서 쓴 역사의 탓임을 굳이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건 드라마 제작 회의에서나 있을 일이다.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시대의 영웅에 어울리는 모습만을 그릴 뿐이다. 그러나 역사의 무비판적 수용, 그것이야말로 드라마의 가장 큰 해악이 아닐 수 없다. 책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역사학자가 쓴 글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알 듯 모를 듯 약하게) 개인 의견이 반영되기는 하지만, 문자 매체는 그 특성상 처음부터 비판적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일단 저자의 논리는 충실히 따라가 주고 볼 일이다. 궁예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학계 전반에 큰 이의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왕건의 역성혁명(또는 폄하해서 그저 군사 쿠데타)에 대해서는 여전히 평가가 엇갈리는 것을 본다. 김갑동 교수는 궁예를 그 자체로 희대의 영웅으로 그리긴 하지만 왕건의 창업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견해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점차 자기만의 성에 갇히게 된 궁예 자신이 역성혁명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또다른 책 <슬픈 궁예>(이재범 저)는 다른 시각을 보인다. 궁예는 도덕적인 파탄 끝에 왕건이 아닌 누구에게라도 쫓겨났어야 하는 인물이 아니라 무려 18년 동안 패서인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쿠데타를 준비해 온 왕건과의 권력투쟁에 몰락했다는 것이다. 다소 객관적인 시각만 유지한다면, 후자의 관점이 훨씬 더 설득력을 갖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만 후삼국 시대의 세 영웅, 궁예와 견훤, 왕건을 일본 전국시대의 세 영웅,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비견하는 대목은 한 번 되짚어 볼 만하다. 울지 않는 두견새는 두견새가 아니라며 가차없이 죽인다는 오다, 그리고 두견새가 울지 않더라도 울때까지 기다린다는 도쿠가와의 성격은 양길에게서 불과 300명의 부하를 빌려 길을 떠나 3년만에 나라를 세운 궁예와 그 궁예 밑에서 18년을 웅크리고 지낸 왕건과 다를 바가 없다. 어디 궁예 밑에서만 웅크리고 있었을까. 왕건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끝까지 신라를 종주국으로 모시는 모양새를 잃지 않았다. 이미 망한 나라나 다름없던 신라의 왕위를 받기 위해 14년을 더 기다린 정성도 놀랄만 하다. 오다의 인질 노릇에서 토요토미의 막료를 거쳐 결정적인 순간에 정권을 획득한 도쿠가와와 정확히 닮은꼴이다. 후삼국 통일의 역사에서 혁명가와 창업가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마련이라는 역사적 사실도 다시 확인한다. 기존 질서를 뒤엎는 것과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얘기다. 예컨대 신라라는 구체제 모순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만한 골품제를 무너뜨린 건 궁예의 힘이라 할만하다. 반면 혼란기를 거치면서 확립된 호족 세력을 귀족이라는 이름으로 새 질서에 편입시키고 과거제도(정확히는 광종 때 시행했지만)라는 새로운 귀족 선발제도를 도입한 것은 왕건의 몫이었다. <슬픈 궁예>의 입장에 따르자면 왕건이 채택한 제도의 대부분이 궁예의 것을 이어받은 것이라는 점에서 이같은 지적에는 다소 논쟁의 여지가 따른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왕건은 500년 왕조의 창업에 성공했고 궁예는 당대의 군주로 끝났다는 역사적 사실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면, 결국 시대가 원한 새질서를 창조한 사람은 역시 왕건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 흥미롭게 읽히는 또하나의 부분은 훈요십조의 제8조와 관련된 부분이다. 이른바 호남인 차별조항이라고 일컬어지는 부분인데, 그 위작설의 논리와 한계 설명이 흥미롭다. 즉, 왕건 자신의 세력기반 가운데 하나가 나주 지방이고 개국공신 가운데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신숭겸 역시 전라도 곡성 지방 출신인데 호남인 차별 조항을 훈요십조에 남겼을 리 없다는 것이 위작설의 근거다. 여기에는 훈요십조가 거란의 침입으로 잠시 사라졌다가 최항의 집에 보관돼 있던 것이 후세에 전해졌다는 점에서 위작의 가능성을 더한다는 설명도 덧붙여진다. 그러나 저자는 이같은 위작설은 나머지 조항이 너무도 타당하다는 점을 들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하고 부정한다. 오히려 차별을 규정한 호남인의 범위를 문자 그대로 차령산맥 이남 금강 이북 지역으로 한정할 경우,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고려와 후백제의 경계로서 수시로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면서 왕건의 속을 썩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왕건 자신이 이같은 조항을 넣었을 개연성이 있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500년 왕조의 창업주로서 할말은 아니었다는게 저자의 지적이다. 말인즉슨 맞다. 혼란기에 살아남기 위해 다소간 입장이 불분명했다 하더라도 그 혼란기가 끝난 마당이라면 마땅히 군주된 자는 "내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끌어안아야 했다. 500년 왕조의 문을 열기는 했지만, 그 자신 결국 개인적인 배신을 잊지 못하는 한 인간에 불과했었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훈요십조가 나오려면 아직도 한참 남은 듯 하다. 드라마에서는 훈요십조의 제8조를 어떻게 다룰지 사뭇 궁금하다. 적어도 왕건이 다시 드라마로 다뤄질 때까지 많은 사람들은 드라마가 말하는 훈요십조의 제8조 해석을 진실로 알게 될테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