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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미술 관련 도슨팅 준비를 하면서 참고한 책인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을 역임한 저자가 2002년 한국 근대미술 100점 선정 전시 이후 그 당시 전시 도록을 기본으로 하여 근대미술 입문서 성격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우리의 전통 미술과 서구의 근대 미술이 만나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던 1900년부터 196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며, 한국적 정서 속에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어떻게 발현되고 조형화되고 있는지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명작 위주라기보다는 미술사적 맥락에 맞춰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보면서 근대기에 활약한 우리나라 회화 작가들과 작품들을 잘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고희동의 "자화상"부터 소개된다. 인상화 화풍으로 사물의 순도를 강화하기 위해 사용한 밝은 원색과 분할적인 터치가 눈길을 끌었다. 1930년대 한국 표현주의 미술의 대표격인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 역시 대상을 단순화하거나 왜곡함으로써 나타나는 형태의 파격을 통해 내면에 잠재된 감성의 울부짖음을 극명하게 드러냈다고 소개된다. 구본웅은 서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적 유모의 실수로 허리를 크게 다쳐 평생 꼽추로 살아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구본웅은 이종우에게 유화의 기초를 배우고 김복진에게 조소를 배우면서 미술계에 입문한다. 1952년 서울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졸업한 권영우의 "바닷가의 환상"은 전통적인 수묵채색 기법이 주종을 이루던 1950년대 후반에 추상형식을 과감하게 도입하여 비구상적 화면을 구현함으로써 한국화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작품으로 필선을 강조하면서 대상을 대담하게 생략하고 변형시키는 회화적 기법이 눈에 들어온다. 화면 속에서 구체적인 대상들이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상태로 만남으로써 데페이즈밍 효과를 통해 생경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옥연의 "고향"은 짙은 서정적 화풍으로 구상과 추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우리나라 특유의 향토적인 정서와 환상적인 분위기가 어우러져 있다고 소개된다. 그는 초기에 구상적 화가들이 주로 다루었던 목가적 서정주의 작품으로 시작했지만 1957년 파리 아카데미 뒤페에 수학하면서 1960년까지 당시 프랑스의 앵포르멜 추상주의에 동조하여 새로운 화풍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 당시 추상회화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데, 일제강점기 김환기와 유영국 등에 의해 비롯된 모더니즘 운동, 1950년대 후반 모던아트협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구상과 추상을 종합하고자 한 주지주의 경향의 모더니즘 운동, 이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추상표현주의 계열이 있다고 한다. 해강 김규진은 영친왕의 스승이었으며 천연당 사진관과 고금서화관을 운영하며 서화연구회를 창립해 후학을 양성했는데, 청나라에 유학하여 8년간 중국 전통 서화 공부했으나 마흔이 넘었을 때 나라가 일본의 수중에 들고 영친왕이 볼모로 끌려가자 그때부터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문인화류, 특히 묵죽도에 전념했다고 한다. 운보 김기창은 청각 장애인으로 극한 상황과 시련을 끝내 이긴 인간 승리자이며 한국 화단의 걸출한 여성작가인 우향 박래현과 작가적 동지애와 연인, 그리고 부부로서 함께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어릴 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신경을 잃은 후, 어머니 손에 이끌려 이당 김은호 화백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1931년에서 1953년까지 주로 향토적 소재를 극사실적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여 표현했으나 광복 후 1950년대에 다양한 조형 기법을 시도했다고 한다. 즉, 극세밀 채색화로 시작해 광복 후 평생 반려이자 예술적 동지인 우향 박래현을 만나 자기 작업을 다시 한번 일신하면서 시정 풍경이나 도회적 일상 같은 우리 삶의 모습을 직관적으로 파악한 후 활달한 운필을 통해 대담한 생략과 대상의 특성을 단순하고 명확하게 포착했다는 것이다. 1975년 1만원권에 사용되고 있는 세종대왕 표준 영정을 제작한 이가 바로 김기창이라 한다. 김은호는 정확하고 품위 있는 선묘, 극세밀한 서양화법을 차용해 나름의 채색화를 이룩했다고 소개된다. 즉, 섬세한 표현 기법에 장식적인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전통 채색화의 바탕 아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는 것이다. 그는 안중식, 조석진 문하에서 전통회화기법을 배웠고, 한말 최후의 어용화사로 활동했으며, 김기창, 장우성 등을 길러냈다고 한다. 5만원권 신사임당 표준영정 그림과 5천원권 율곡 이이 표준영정을 그린 이가 바로 김은호라 한다. 표준영정이란 한국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민족적으로 추앙 받고 있는 선현들의 영정 난립을 방지하기 위해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정한 영정을 말하는데, 김은호가 1937년 금채봉납도를 제작하면서 친일화가로 낙인 찍힌 탓에 표준영정 제작 및 사용에도 이슈가 많았다고 한다. 김인승은 정확한 관찰력과 뛰어난 데생 실력을 바탕으로 다수의 인물화를 제작했는데, 그의 작품 속 배경과 인물들은 당시로서 파격적이고 매우 도회적인 감각을 지녔다고 한다. 여러 가지 진귀한 장식품이 놓인 부유한 가정집을 배경으로 하면서 표현 기법의 달인답게 철두철미하게 대상을 관찰한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형상화시켰다고 한다. 김주경은 광복 후 월북했기 때문에 그의 회화적 실체에 대한 접근이 어렵지만 오지호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원색 화집인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을 출간한 인물로 심미주의적 미학, 빛으로 충만한 색채를 구사했다고 한다. 중앙고등보통학교 미술실에서 이종우의 지도로 데생을 공부했던 그는 오지호와 함께 우리의 미술이 한국의 향토와 풍광에 뿌리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적 자연을 바탕으로 한 인상주의적 화풍을 정립시켰다고 한다. 김환기의 "론도"는 일본 유학 시절 추상미술의 바람이 한창 미술계를 휩쓸던 시기에 제작한 것으로 커다란 그랜드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과 이를 듣는 사람들을 구성적으로 단순화하여 그린 것인데, 한국 추상미술의 서막을 연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고 한다. 그는 청년기에는 한국적 주제의 구현에 천착하면서 달과 산, 구름, 나목, 백자와 여인 등 한국적 풍류를 형상화함으로써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변용해 새로운 한국 문인화적 유화의 전형을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내며 신사실파를 조직해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한 이력도 눈길을 끌었다. 그의 또 하나의 작품 "산월"은 스케치풍의 간결한 구도와 담백한 채색이 특징으로 화면에는 첩첩 산과 바위, 그리고 구름이 있고, 달은 익살스럽게 산 밑에 걸려 있으며 마치 호수 표면에 비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 작품의 구체적인 자연의 소재들은 화면 안에서 자유롭게 조형적 자율성을 누리고 있고, 자연과 교감하고 있는 풍류적인 정서가 물씬 드러난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의 파리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자연의 형태를 더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추상적인 표현으로 이행하게 되는데, 결국 그는 한국인의 오랜 정서를 통해 다듬어진 대상을 조형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김흥수는 1955년 프랑스로 유학하고 1961년 귀국한 뒤 추상과 구상적인 화면이 공존하는 조형주의로의 작품을 전개했는데, 이후 1977년 구상과 비구상, 동양화와 서양화 요소를 하나로 융합한 하모니즘 회화를 발표했다고 소개한다. 우리나라 최초 유화가인 나혜석이 파리 몽마르트 근처에서 캉캉 춤을 추는 댄서를 묘사한 "무희"는 인상파 화풍을 근간으로 하였으나 대담한 터치와 생략, 그리고 속사에 가까운 붓놀림으로 주제 의식을 고취시킨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1927년 세계일주를 떠나며 파리에 체류하면서 야수파 화가인 로제 비시에르에게 수학했다고 하는데, 이전의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둔 회화에서 벗어나 사실을 주관적으로 재구성하고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대상을 조형적으로 단순화시키면서 색채를 강렬하게 구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소개된다. 도상봉은 춘곡 고희동으로부터 처음 유화를 접했으나 일관되게 아카데믹한 자연주의적 시각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자연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화폭에 옮기기까지 철저하게 대상을 이해하고 연구했는데, 화면을 튼실한 구도와 색채로 구현하여 한국의 전형적인 사실주의를 완성시켰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소박하다 못해 질박한 것이 특징이라 소개하고 있다. 류경채는 광복 후 1949년 제1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화단에 등장했는데, 1950년대에는 자연을 감각적인 색채와 추상적인 해석으로 재구성하는 화풍을 선보였고,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하학적 추상과 마티에르가 강조되는 화풍으로 서정적 추상화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의 "폐림지 근방"은 한국적 산야를 상징하는 듯한 적갈색의 경사면이 상호 대칭적으로 중첩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 몇 그루의 나무들이 수직의 저항을 보이고 있다고 소개한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조선 향토색론의 또 다른 형태로 광복 후 우리의 자연과 산하를 새로운 감각과 기법을 통해 담아내고자 했던 시도라 한다. 문학진은 광복 후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1세대 작가로 1950년대 후반 새로운 조형언어를 실험했다고 한다. 그는 순수 자연을 대상으로 이를 분석하고 재결합하는 서정적 추상주의로부터 탈피하여 인물이나 정물 등 구체적인 대상을 분석해서 주관적으로 변형하고 이를 다시 조합하는 방식의 조형어법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는 학창시절 화가 조르주 브라크에 심취했기 때문에 인물이나 정물 등을 재해석하고 이를 다시 구성하는 입체파적 화법을 구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노수는 청전 이상범을 사사했고, 광복 후 서울대 미대 첫 입학생으로 들어가 김용준과 장우성의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전통 동양화에서 절제된 색채와 선묘의 융합을 통해 남종화의 화격과 북종화의 감각적인 채색 기법을 근대적인 감각으로 조합하여 새로운 한국화의 전형을 창출했다고 평가 받는다고 한다. 박래현의 "노점"은 종이에 수묵담채로 그려 1956년 제5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인데, 전통 수묵 채색화에서 보이는 평면성과 서양의 현대회화에서 보이는 반추상성을 결합시켜 시정풍경을 그린 것이라 한다. 형상을 단순화하고 대신 장식적인 담채를 얹어 서양의 입체파가 도달한 조형적 방법론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어낸 것으로 수직의 건물들이 열지어 솟아 있는 이른 아침, 장사를 준비하는 노점의 여인들을 건물 앞에 겹쳐서 배치했고, 여인들의 갈색 또는 동갈색 피부색은 생략된 신체와 더불어 그로테스크한 특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매우 이국적 느낌을 전달해주고 있다고 평한다. 그녀의 이러한 초기화풍은 1960년대 마티에르 시대, 1970년대 표현주의 시대로 바뀌어간다고 설명하고 있다. 박성환의 "한강대교"는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인해 한강 인도교가 끊어져 건널 수 없게 되자 다시 한강대교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어렵게 한강을 건너는 전후 풍경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작가 자신의 내면을 반영하면서 늘 여기서 물건도 사고 소주잔도 걸치고 했으나 중간에 끊어진 다리의 형체에서 전쟁의 참상과 우리 시대의 비극적 단면을 볼 수 있음을 증언했다고 한다. 박수근은 가난으로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고, 살아생전에 끝내 그 가난을 벗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근대 유화를 우리 식으로 소화하고자 했던 열정을 통해 이 땅의 서민들의 삶의 모습과 이야기를 묘사한 그는 독자적인 화풍 정립을 위해 대상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요약해 나갔고, 여기에 적절한 부분에 소품을 두고 단순화 되어가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박수근만의 투박하고 질박한 마티에르와 암갈색, 또는 회갈색의 단색조 화면도 강조하고 있는데, 그는 말년에 가난으로 왼쪽 눈의 백내장에 대한 수술시기를 놓쳐 한 쪽 눈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박득순은 자연 풍경과 꽃을 주제로 한 정물, 그리고 젊은 여인상과 나부를 주 소재로 삼아서 인물화와 초상화에 탁월한 묘사력을 바탕으로 사실적인 생명감을 표현한 작가로 소개하고 있다. 그의 "부인상"은 자연주의적 화풍으로 근대회화의 아카데믹한 입장을 충실히 견지해온 작가의 회화관이 반영되어 있는데, 어두운 배경과 인물의 밝은 대비는 고전적인 화면에 생동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며, 약간 아래로 향한 시선과 포개어진 두 손은 전통적인 한국 여인상을 나타내고 있고, 화실 내 책장과 도자기는 화가의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전형적인 국전 화풍의 작가로 국전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근대회화의 자연주의적 사실주의를 승계하면서 대상의 철저한 묘사와 명암의 대비를 통해 충실하게 구상적인 신념을 표출했다고 한다. 박상옥은 향토성 짙은 소재와 색채로 구상회화를 그리며 풍경화와 인물화를 통해 정감 어린 추억 속 정경들을 소재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한일"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친숙하게 볼 수 있었던 동네 풍경과 골목 안 풍경을 소재로 삼았고, 세부묘사는 생략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움직임도 그리 명확하게 묘사하지 않았으며 인물의 이목구비도 또렷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소재를 더욱 토속적이고 정감 있어 보이게 하는 효과를 내는데, 전체적인 색감은 황갈색이 주조를 이루어 토속성이 배가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 주로 보이는 구도는 화면의 중심을 비워두고 등장인물들이 원형을 이룬 배치가 많은데, 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비어 있는 중심으로 끌어들여 텅 빈 정적을 유도하기 위함이라 설명한다. 박영선은 일제 강점기 선전의 삼총사 중 하나로 아카데미 화풍을 고수했으나, 1955년 프랑스 파리로 새로운 미술을 찾아 떠난 뒤 최신 미술경향들을 만나게 되고 추상적 표현을 시도했다고 한다. 면 분할, 구상과 추상의 자연스러운 공존, 입체주의 화풍과 앵포르멜 화풍이 가미된 서정적인 추상 작품들을 제작했으나, 귀국 후 다시 사실주의 화풍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변종하의 "우화A"는 그가 파리로 건너가기 전인 1950년대 제작한 청년기 작품인데,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가 열기를 더해 갈 즈음의 시대적 취향을 드러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구체적 형상을 단순화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동양화의 선묘를 연상시키는 단순한 새의 형상은 물감의 얼룩으로 묘한 분위기의 바탕과 일체를 이루면서 작품을 서정적 풍경으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소개한다. 그는 초기에는 매우 설화적이고 구상적인 화면으로 구체적 대상이 화면의 중심을 이루는 작업으로 출발했으나 프랑스행 이후 다분히 변형되고 서술적으로 변모한 구상과 추상이 혼재된 작품을 구현하며 현실 비판적인 우화, 해학이 주조를 이루는 작풍을 통해 개성적 화풍을 전개해 나갔다고 한다. 안상철은 한국 전통 회화를 혁신한 작가로 국전을 통해 성장했는데, 전통화법을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주제를 택하는 방법에서는 늘 새롭고 신선한 시각을 유지했다고 한다. 굵은 필획과 신선한 구도로 전통 수묵화 토대 위에 현대적인 감각과 공간을 형성하려는 실험을 계속하면서 자연의 일부를 확대하여 클로즈업 시키는 구도도 실험했다고 한다. 1954년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뒤 1956년 제5회 국전에 "전"을 출품해 상을 받았는데, 이 그림은 지금까지 전통 회화에서는 주제로 삼을 생각을 못했던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을 묘사하고 있다. 추수하고 난 뒤의 그루터기들이 점점이 반복되어 화면을 가득 채우고, 논둑을 이루는 곡선이 작품의 단조로움을 깨드리고 원근감을 살려주어 주제가 갖는 평면성을 넘어 깊이 있는 공간으로 끌어들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국에 정통 인상파를 도입하고 최초로 한국의 자연을 주제로 조형화를 시도한 작가인 오지호에게 인상주의 화풍은 밝고 맑은 한국의 자연을 그리기 위한 가장 좋은 회화적 수단이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 "처의 상"은 화면의 배경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오른편을 붉은 색조로, 그리고 나머지는 어둡게 처리하여 인물의 흰 저고리와 얼굴 윤곽을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했고, 옥색 치마 곳곳에 표현된 붓 자국과 흰색의 강조, 저고리의 옷 주름 처리에 사용된 엷은 청색은 인상파 화풍의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일본 유학시절부터 추상 세계에 몰입하여 평생 순수추상의 영역에 머물던 유영국은 순수 기하학적 요소인 원, 면, 선과 같은 조형의 원형적 요소를 통해 직접 비구상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했다고 소개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산, 길, 나무 등 자연적 소재를 거시적인 시각으로 분할하여 추상적인 구성 요소로 사용하면서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과 강렬한 색채를 통해 지적 아름다움과 음악적 울림을 자아냈다고 하는데, 결국 유영국 회화의 발단은 자연이라면서 청색은 산줄기를 휘돌아 나가는 강을, 검은색은 깊은 산의 계곡, 녹색은 수목, 노란색은 산을 비추는 태양빛, 붉은색은 황토 흙의 대지를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마동은 춘곡 고희동의 지도로 그림의 기초를 배웠고 이종우에게도 회화를 배웠는데, 그의 작품은 단단한 화면 구성에 힘찬 필치, 약간 어두운 색조를 배경으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사물과 인체들이 밝은 빛을 내면서 견고하게 구축된 느낌을 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몰락한 이씨 왕가의 후손으로 19세기 프랑스 인상파 영향이 짙은 사생화를 주로 배웠던 이봉상은 광복 이후 인상주의 화풍을 벗어나 야수파 또는 표현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화풍으로 변모했다고 소개한다. 강렬하고 주관적인 색채, 거친 필촉, 대담한 생략, 평면적인 분할, 토속적인 마티에르 등 이봉상의 작품은 나무, 수풀, 산, 새와 같은 주위의 자연 풍경과 실내 인물을 주된 소재로 하여 가능한 설명적 요소를 배제한 뒤 주제를 직접 부각시키고 있다고 한다.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를 절묘하게 구사한 작가로 나이프를 사용해 독특한 질감을 만들고 붓 터치를 이용해 표현주의적 요소도 가미하는 독특한 필법의 화가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상범은 초기에 스승 안중식을 이어 남북종 절충 화풍을 보여주지만 점차 독자적인 필법을 구축하게 된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항상 야산과 수목, 농부 등이 등장하는데, 보통 낮은 야산을 긴 횡폭에 펼쳐 놓으며, 물기가 없는 붓을 비벼서 갈필로 나뭇잎을 표현하고, 먹의 농담을 조절해 근경과 원경을 표현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18세기의 진경산수는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다운 격을 갖춘 특정 자연에만 관심을 가진 반면 근대기 이후 실경산수는 우리 눈에 익은 일상적인 자연, 주변의 숲과 나무, 야트막한 언덕과 집을 소재로 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이응노는 해강 김규진에게 그림을 배운 이후로 일본에 가서 새롭게 서양 미술과 유화 기법에 눈을 떴다고 한다. 관념적인 회화로부터 벗어나 현실적인 풍경화를 그렸지만, 과감하게 생략하고 대상의 일부를 강조하면서 핵심만 담아내는 특유의 표현법을 창안했다고 한다. 대구 출신의 이인성은 인상파적 감각주의를 바탕으로 조선 향토색론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화가인데, 일본 유학시절부터 인물과 풍경을 결합시켜 이후에는 푸른 하늘과 붉은 대지를 대비시켜 작품 속에 대기감을 느끼게 해주는 한국적인 향토미를 담아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 전쟁 중 총기 오발사고로 안타깝게 사망했다고 한다. 이종무는 고희동에게 그림을 배운 이후 도쿄 유학생 그룹의 마지막 세대로 활동했던 인물인데, 초기에 구상적 화풍을 통해 대상을 자연주의적 시각으로 화폭에 담아내던 시절 제작한 "자화상"을 소개하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 그려 넣은 원탁과 그 위에 놓인 과일과 국화꽃이 꽂혀 있는 화병이 왼쪽에 서 있는 화가와 무게 중심을 이루어 구도상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소년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벽에 걸린 캔버스의 소묘가 작가의 탄탄한 조형 능력을 은연중에 과시하고 있고, 화가의 붉은 상의와 청색의 바지가 조화로운 대비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후 색채 추상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자연주의적 시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종우는 부유한 지주 집안 출신으로 주시경 선생의 장녀와 백년가약을 맺었으며, 도쿄미술학교 졸업 후 귀국하여 후학을 지도하다 1925년 다시 프랑스로 유학길에 올라 3년간 유화를 배웠다고 한다. 그는 파리에서 사실적이고 자연주의적인 화풍의 구상회화를 완성하여 나름의 아카데믹한 화풍을 창안했으며, 야수파적인 주관적 표현도 가미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회화적 업적은 일본을 통해 이입된 한국 근대 유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프랑스 유학을 통해 서양의 진면목을 그대로 공부해서 서구의 전통과 시각으로 우리의 자연을 대상화 한 것인데, 1928년 프랑스에서 귀국 후 일제 하에서 화가들이 선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화단 정치에 집중하는 것을 깊이 우려하면서 화단과 현실에 등을 돌리고 술로 망국의 한을 달랬다고 전해진다. 그는 선전이 일본 식민지 문화 통치 수단임을 인식하고 선전에는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침없이 활발한 터치, 자유로우며 힘이 넘치는 화면으로 국전풍의 화풍을 자랑하는 장리석은 주로 한국전쟁 중 제주도 피난 시절 겪은 풍토적 소재 중 해녀의 일상 모습이나 그늘 밑에 서 있는 노인, 복덕방 노인 등 소박한 서민적 주제를 대담한 터치와 풍부한 색채로 밀도 있게 표현했다고 한다. 1958년 제7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그늘의 노인"은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와 바닥을 확대시켜 주변을 생략했고, 주제의 뒷면에 내리쬐는 태양빛을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여 주제를 강조했다고 한다. 명암의 강한 대비, 굵은 붓 터치의 힘찬 흐름, 두꺼운 마티에르, 구도면에서도 전체적으로 화면 상단 우측에서 하단 좌측으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오른쪽 손과 머리의 방향, 왼손, 비스듬히 놓인 우산으로 이어지는 사선으로 처리하여 그림에 넓이를 더했는데, 이 그림은 한 시대를 살고 나서 하릴없이 일상을 보내는 무기력한 노인의 모습을 대담한 터치와 풍부한 색채를 사용해서 묘사한 것이라 한다. 장욱진은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과 같이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아카데미즘에 대한 거부, 전통적 요소의 현대적 번안, 근본적인 조형 요소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동화적인 순진무구한 미술을 추구했다고 한다. 삶과 자연이 합일을 이루는 도교적 세계, 즉 현실을 초월한 미술을 추구했던 작가이며 새 그림, 특히 까치를 즐겨 그렸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195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더욱 단순하고 간결해지기 시작했지만 작품의 밀도감과 치밀함은 상대적으로 높아졌다고 한다. 정규는 극도로 표현을 아끼는 금욕적인 조형 사고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대상에서 출발해서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로 접어 들어간 작가로 1960년대 들어서면서 도예 분야에 집중했다고 한다. 작품의 대상이 되는 소재들은 군더더기가 모두 제외되고 기본적인 형태만 남아 화면을 구성하는 하나의 단위로 작용했으며, 이후 기하학적 추상으로 발전했다고 소개된다. 정창섭은 광복 후 우리 손으로 마련된 학제를 통해 교육받은 첫 번째 세대인데, 서구의 앵포르멜 미학을 동양적 미의식으로 수용, 발전시킨 작가로 언급되고 있다. 1951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했으며, 초기에는 구체적인 대상을 해체하고 이를 다시 구성하면서 일반적인 의미의 반추상적 화풍을 선보였지만, 이후 화면의 강렬한 색채효과와 질감과 함께 원의 기하학적 이미지를 활용하였고, 이후 한지를 사용한 물성이 가득한 작품을 선보였다고 한다. 그의 초기작품인 "공방"은 어느 한 조소작가의 작업실을 묘사하고 있는데, 세 사람이 기본적인 윤곽만 남은 채 철저하게 해체되어 있으며, 예리한 선묘와 속도감을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아카데믹한 화풍을 바탕으로 대상이 있는 추상과 대상을 떠난 순수 추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작가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한다. 천경자는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선명한 색채와 환상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화풍을 창안했는데, 1969년 프랑스로의 유학과 유럽과 남태평양 여행을 통해 화려하고 파격적이면서 설화적인 채색화로 유미주의적 경향의 화풍을 정립시켰다고 설명한다. 월북작가는 최재덕은 벽화 같은 구도를 차용하여 현실 생활의 일면을 표현하였으며, 평면적인 가운데 장식적이지 않은 독자적인 표현주의 기법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한묵은 1950년대 초 전통적인 구상화풍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섰는데, 대상들이 부분적으로 해체되고 작가의 의도에 의해 화면 안에서 재조합 되면서 시각의 일루전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평면적인 구조로 나아갔다고 한다. 원래 서정적인 구상화로 출발하여 한국전쟁에 종군화가로 참여하면서 폐허, 궁핍, 이산 등을 목격하고 이러한 정서를 작품의 주제로 다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구상적이며 후기 입체파적 경향의 서술형 회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1961년 프랑스로 건너가 반회화적 소재를 사용하는 일종의 콜라주 작업을 시도하고, 회화의 물질성과 순수성의 구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책의 맨 뒤에는 저자가 한국 미술의 근대성에 대해 논한 글이 실려있다. 우리에게 근대성은 서구화와 일맥 상통하며, 문화적으로는 서구 모더니즘의 수용과 전개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원래 글씨와 그림을 아울러 이르는 서화라는 말이 미술이란 용어로 바뀐 것도 근대화 이후였는데, 수묵화와 수묵채색화가 주를 이루던 전통 회화가 19세기 말 서양과의 교류를 시작하면서 입체감과 원근법 등 서구 미술의 조형적인 요소들을 수용하고 이를 반영한 그림들이 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서화는 미술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근원은 17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지만, 한국 미술에 있어서 커다란 변혁기를 이루는 19세기 후반이 실질적으로 외래 문화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문화적 틀을 교류하며 취사 선택하는 과정이자 시기였다고 한다. 한국 전통 회화의 장르 중 특히 채색화는 오랜 동안 궁중과 사원에서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종교화, 장식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18세기 들어 경제가 발달하고 중산층이 등장하면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이 이른바 여항 문인층으로 성장하여 문화적 소비자로 자리하면서 미술이 대중문화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으며, 민간 생활과 그 미의식을 반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1910년대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에게 미술이란 사치이며 현실 도피 수단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고유의 미술을 세우고 전개하는 것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일제에 항거하는 방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 미술의 근대기로의 이행은 타율적인 측면이 강하며, 대체적으로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화를 배운 이들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3.1 만세 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노동, 청년, 여성운동 일어나면서 개화자강 사상 일어났다고 한다. 이에 발맞춰 근대적 자주적 미술단체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1922년에 시작된 선전으로 인해 한국 미술의 왜색화, 식민자화, 아카데믹한 보수적 미술이 중심이 되는 경향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일제 파시즘 체제의 강화로 한국 민족 말살 정책이 등장하던 1930년대에는 조선 향토색론이 등장했다고 한다. 선전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일본인 화가들이 내세운 조선적, 반도적 특징이 향토색론의 등장에 많은 역할을 했다면서,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지방색, 동양풍의 유행에서 비롯된 미의식의 발로였다고 한다. 또한 이것은 미곡 증산 등의 목적으로 장려한 농업과 농촌을 중시하는 중농주의의 결과물이자 국내 농촌 계몽 운동과 괘를 같이하고 있다면서, 결국 조선 향토색론은 자주적인 화가들의 우리 미술에 대한 관심의 성과물이자 일제의 예술까지 계도하려는 민족 말살 정책의 한 수단으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1930년대 일본 미술의 큰 특징은 신일본주의라고 하는 서양 미술의 모방으로부터 벗어나 일본적 정감과 풍토를 표현하고자 시도했다는 점인데, 이를 통해 구성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먼저 수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1940년대에는 일본의 태평양 전쟁 참전으로 정신적, 물질적 공황이 최악에 다다르며 전시회 도록도 발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는 지방색 위에 시국색을 한층 나타내도록 일제가 주도했다는 것이다. 1950년 6.25 전쟁 와중에는 문화 예술계가 니힐리즘과 실존주의에 젖어 있었으며, 국전은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선전의 아카데믹한 자연주의적 화풍을 고수했다고 한다. 특히 특정 화파나 인맥이 장악하고 있는 국전 때문에 분란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1950년대 말 새로운 미술이 한국 화단에서 세를 더할 수 있었던 것은 6.25 전쟁 전후로 새로운 미술에 대한 정보가 급증했으며 전위적인 미술 운동에 대한 높은 관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 이후 새롭게 설립된 한국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젊은 화가들이 졸업하고 화단에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흐름과 역사를 일별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이 책에서 소개하지 못한 많은 화가들이 존재하지만 한국 근대 미술의 큰 흐름을 읽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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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미술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는데 구매했던 책들 중에 가장 쉬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림 한 개에 대해서 작가의 설명이 담겨있어서 작가, 작품 그리고 당시의 사조에 대해서 쉽게 쓰여있다. 물론 다른 여러 그림과 작가들도 있지만 작가도 공정한 기준에서 근대미술의 모범 사례가 될만한 작품으로 선정한 듯 하다. 다른 어떤 책보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 독자들이 한국 근대미술에 친숙해지기를 개인적으로 바래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