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학사상에서 어떻게 이런 책이 나왔지 싶다. 표지가 귀여워서 봤는데 출판사가 문학사상이라니.. 앞뒤가 안맞잖아요? (총균쇠 리커버 언제 해주신건가요?) * 그건 그렇고 무라카미씨는 정말 수필을 잘 쓰시네요. 걸리는 부분도 없고 사방에서 개가 짖는 와중에도 잘 읽었습니다. 몇 개의 에피들은 먼 북소리에서도 이미 다룬 내용이어서, 조금 괘씸하긴 했지만 적당히 봐줄만 했습니다. * 좌우지간 문학사상에서는 얼른 총균쇠 리커버 얼른 해주세요 |
|
아는 분께 소개 받아 구매했습니다. 하루키 책 엄청 많은데 이런 에세이가 있는 줄 몰랐네요. 에세이도 소설처럼 술술 잘 읽히는데 또 작가의 어떤 고민이나 삶의 무게가 느껴져서 매력적입니다. 소설은 호불호도 있을거같은데 그런분들은 이 에세이 추천. |
|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의 '이윽고 슬픈 외국어' 에세이 리뷰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에세이가 진국입니다. 전 소설보다 에세이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냥 별 내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재밌습니다. 그냥 주변에 두었다가 한 장 두 장 씩 읽는 재미가 있어요 |
| 이 책을 읽으면서 하루키가 1991년부터 2년간 미국에 살면서 그 안에서 나름대로 동화되려 노력했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하루키가 왜 이쪽이 열심히 하면 상대방도 꽤 적극적으로 받아주는 문화가 미국에 있다고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러한 외국살이의 경험을 통해 현재의 하루키가 있게 된 것임은 분명하다. |
| 오랜만에 다시 읽었는데 시대를 감안하면서 읽으니 조금 새롭네요. 예전 판에는 그림이 없는데 여기에는 있군요. 여러가지 얘기가 나오는데 옛날 얘기이고 일본인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지만 술술 읽힙니다. 젤다의 그림이 나오는 부분이나 다른 여러가지 말들이 기억에 남네요. 잘 봤습니다. |
| 이 책은 하루키가 미국에서 머무는 동안 기록한 생각과 경험담이 담겨 있다. 외국어에 대한 하루키의 솔직한 의견과 자신의 영어회화실력에 대한 고백도 담겨 있다. 이 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루키의 매력적인 점은 스스로 이방인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며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채로 그 경계에 서서 느낀 것들을 써내려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인도 미국인도 토니 타키타니도 아닌 그냥 1인칭의 ’나‘인 하루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책에서 나는 아무런 편견 없이 그의 글을 통해 낯선 세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
|
몇년전 조깅을 하다가 이사를 하면서 그만두고 코로나로 인해서 다시 운동화를 다시 신었다. 공교롭게도 달리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확행.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읽게 되었고,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하루키의 색다른 통찰력이 재미있었고 마음에 들었다. 특히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 같은 연필, 물건에 어떤 이미지가 정착이 되면 그다음에는 이미지가 물건을 규정하게 된다는 건 색다르며 명확했다. 그래서 하루키의 책을 한 권 더 읽기로 했다. 바로 슬픈 외국어에서 개정판으로 출간된 이윽고 슬픈 외국어이다. 이윽고라는 말이 정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 찾아봤는데, 얼마 있다가, 또는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 라는 의미.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 슬픈 외국어. 이게 모호한 듯 하면서 확 와 닿았다. 재미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 소소한 일상에서 관점을 달리하고, 감동을 쉽게 받아야 한다. 쉽게 말해서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을 말하는 건 아닐까? 거대한 음모, 진기한 경험, 환상적인 풍광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다. 이번에 미국을 다녀왔는데, 그랜드 캐년 정말 크더라를 듣고 나면 정말 큰가 보다라고 밖에 생각이 안 든다. 대신에 아침에 출근하는데 목욕탕 옆을 지나갔어, 그때 내 옆을 지나가던 아가씨 샴푸 향기가 얼마나 향긋한지라고 하면 퇴근할 때 그 목욕탕을 옆을 가보고 싶어 질지 모른다. 나야 소설가가 아니니, 적절하게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의 말에 박수를 치며 옳다구나 했다. |
|
나도 외국에서의 생활을 한번쯤 상상해 본적은 있다. 기껏해야 1주일 정도 여행으로 외국 나가본 놈이 뭘 알겠냐마는 아무래도 이런저런 걱정부터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말하는 언어가 통하고 나와 같은 문화권의 사람들과 어우러져 사는 것이 아무래도 일상적인 스트레스 적인 면에서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여전히 진한 하루키의 글 냄새가 나는 전형적인 에세이집이다. 충분한 몰입감을 선사해주는 그의 두꺼운 소설도 좋지만 이렇게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도 나는 무척 좋다.71114https://blog.naver.com/ho5yah/221710871114tps://blog.naver.com/ho5yah/221710871114ps://blog.naver.com/ho5yah/221710871114 https://blog.naver.com/ho5yah/221710871114 |
|
이책이 원래 오래전에나온건데 절판이되어 이윽고슬픈외국어로 출간됐다. 나도 소문듣고 사게됐는데 많이 기대되는 책이다. 받자마자 읽지는 바빠서 못했는데 정독해서 읽어야겠다 한번에 다읽을 생각이다 이책이 원래 오래전에나온건데 절판이되어 이윽고슬픈외국어로 출간됐다. 나도 소문듣고 사게됐는데 많이 기대되는 책이다. 받자마자 읽지는 바빠서 못했는데 정독해서 읽어야겠다 한번에 다읽을 생각이다
|
|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에세이를 읽고 있으면(다 읽어본 건 아니지만) 꽤나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쪽 끝에는『무라카미 T』처럼 생각없이 페이지를 술술 넘기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 쪽 끝에는 꽤나 진지하고 성찰적인 어조로 씌여서 읽는 사람도 인상을 쓰고 머리도 쓰게 만드는 책이 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나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같은 책들이 그렇다. 사실 이런 책도 말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고 어떤 사람들한테는 간단한 내용일지 모른다. 그냥 나만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슬프게도). 그러나 어렵게 읽기 시작하면 정말로 어려워진다. 이번에 읽은『이윽고 슬픈 외국어』는 어느 쪽인가 하면 확실히 인상을 쓰게 만드는 쪽이었다. 두 번 읽었는데도 아직 손에 잡히는 게 없다. 그러나 지난 번에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를 읽었을 때처럼 여러 번 읽는다고 해서 꼭 손에 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거의 다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경우도 있어서 일단 쓴다. 이 책은 서두에 밝힌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미국에 체류하면서 겪었던 일을 소개하고 거기서 느낀 소감을 풀어놓은 책이다. 꼭 에세이라서가 아니라 쉬운 말로 쓴다는 작가의 신념에 따라 어렵고 전문적인 이론 같은 건 없다. 말 그대로 실제 겪었던 일과 실제 했던 생각을 쓴 글이다. 본 것과 느낀 것이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예컨대 첫 번째 챕터에서 보스턴 마라톤에 대해 쓸 때는 홉킨턴이라는 조용한 마을에 느닷없이 나타난 수만 명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막 달릴 준비를 하고 적당히 흥분하고 적당히 뜨거워진 사람들과 등 뒤에서 슬슬 이글거릴 준비를 하는 태양의 약간 업된 표정 같은 게 떠오른다. 그리고 동시에 ‘한 번 해머로 내려치는데 1달러인 차’도 떠오른다. 보스턴 마라톤이 아니면 소음 한 번 날 것 같지 않은 이 조용한 마을에 있는 이 차는 그곳에 모인 수만 명의 흥분한 얼굴, 두근거리는 기대감과 순식간에 저울의 평형을 맞춰버린다. 보스턴 마라톤은 말 그대로 달리는 대회다. 대회라고는 하지만 거기에는 경쟁도 없고 먼저 가는 사람에 대한 질투나 뒤떨어지는 사람에 대한 멸시 같은 것도 없다. 애초에 42.195km를 달린다는 행위 자체가 무용한 행위인 것이다. 무용한 행위를 하면서 거기에 필사적으로 어떤 의미 같은 걸 덧붙여봤자 광대 분장을 하고 정색한 얼굴처럼 분위기만 썰렁해진다. 42.195km라는 거리는 차로 가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지만 달려서 가기에는 상당히 먼 거리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굳이 달려서 갈 필요가 없는 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내뱉고 경련이 일어나는 다리를 주무르고 때론 주저앉았다가 때론 비틀거리기도 하면서. 그렇게 해도 무용하다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그러는 동안 거기에는 무해함이라는 게 생겨난다. 우리는 지금 온 힘을 다하고 있지만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달리는 몸은 그런 말을 한다. 보스톤 마라톤은 말 그대로 보스턴에서 개최하는 지역 대회지만 매년 전세계에서 지원자가 몰려서 참가 경쟁이 상당히 치열한 국제 대회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원래 다인종 다문화의 용광로 같은 곳이긴 하지만 이렇게 문을 열어두고 자, 오세요, 라고 하는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해진다. 가본 적은 없지만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지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을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다. 인종과 나이, 성별, 이념, 패션, 장애 등등 온갖 라이프 스타일이 섞여서 하나같이 몸에 열기를 뿜어내며 앞으로 뛰어나갈 준비를 한다. 상상만 해도 장관이다. 게다가 그 출발지는 타임스퀘어 같은 곳이 아니라 홉킨턴이라는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마을이다. 그야말로 비일상, 마법 같은 축제인 것이다. 그런데 그 한곁에 1달러를 내면 해머로 내려칠 수 있는 자동차가 있다. 이미 숱하게 내려쳐서 자동차는 원래 기능을 상실한 건 물론이고 외관도 구겨질대로 구겨져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달릴 준비를 하는 곳에는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거기에 돈만 내면 내려칠 수 있는 무언가가 형편없이 구겨진 채로 방치되어 있다면 어쩐지 망설여진다. 뭔가 속은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 속은 듯한 기분은 저자의 후기에 나온 표현을 빌리면 “자명성을 지니지 않은 언어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 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특별한 것은 있지만 당연한 것은 없다. 눈을 사로잡는 건 사방에 널려 있지만 내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 있기 위해서는 자의든 타의든 여기에 맞게 스스로를 변형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굴절된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원래의 내 모습이 무엇인지 알지만 여기에서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스스로를 굴절시켜야만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어쩐지 그 굴절된 모습이 자기 자신에 좀 더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고 원래의 내 모습이라는 게 점점 흐려진다. 시간이 더 지나면 그런 것이 있기는 했었는지조차 희미해지고 단지 지금과는 다른, 어떤 모양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는다. 그것은 사라졌다고도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상황과 맥락이 일치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다시 소환될 수 있을 것만 같다. 흔히 상대화라고 하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걸 의미하지만, 말과 다르게 실제로 상대화를 한다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 자기 자신 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해도 그것은 자기가 생각한 타인이지 타인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말은 배려나 예의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상대화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히려 상대화라는 건 자기를 닮지 않았지만 자기라고 주장하는 것과 자기와 닮았지만 자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아닐까. 이 책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자명하지 않은 언어에 둘러싸인 나와 자명한 언어 속에 있는 나, 이 두 가지의 나 중에서 어느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니라 그 둘 사이의 접점을 찾는 것이다. 내가 온전하지 않은 나와의 접점을 찾을 수 있을 때, 즉 내가 아닌 무언가와의 접점을 발견할 수 있는 다음에야 우리는 타인과의 점접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화라는 건 분명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사이에는 상당히 길고 험한 고갯길이 있다. 그걸 넘지 않고 단숨에 도달해버린다면 그건 상대화도 배려도 아닌 그저 착각이거나 혹은 오만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작가가 조우한 굴절된 자기 자신의 일화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이발소 일화였다. 뭐, 자기를 잽(일본인을 비하하는 말)이라고 부른 사람도 있고 카센터에서는 꽤 험한 꼴도 당했다고 하지만 그런 건 어떻게 생각하면 굴절된 자기 자신이라기보다는 그냥 안 좋은 일에 속한다. 모욕이라면 어디서든 당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일본의 단골 이발소가 아닌 미국에서 처음 머리를 잘랐을 때 거울에 비친, 이제까지 보지 못한 자기의 얼굴은 그 굴절을 상당히 직관적으로 대면시켜준다. 일단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집 근처 이발소에도 가보고 영국에서 머리를 잘라보기도 했다고 하는데 결론적으로는 하나같이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심지어 일본인의 머리를 많이 잘라봐서 일본인의 머리라면 전문가라고까지 말한 영국의 한 바버샵에서 머리를 잘랐을 때는 한동안 바깥으로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심지어는 자기만의 신념을 버리고 미용실까지 가보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고 한다. 머리를 자르는데 무슨 신념까지 필요한가 싶기도 하지만, 작가의 말로는 나이든 뭐든 그런 요소들을 내려버려두고 순전히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때 ‘사내’보다 더 자기한테 어울리는 말은 ‘사내아이’다. 사내아이의 조건은 세 가지인데 그건 ‘운동화를 신고’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며’ ‘일일이 변명하지 않는’ 것이다. 셋 중 하나만 충족해도 안 되고 두 개만 충족해도 안 된다. 사내아이로 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세 개 다 충족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이발소를 버리고 미용실을 택함으로써 작가는 사내아이의 아이덴티티를 포기했다. 좀 안타깝지만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끝내 머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사진을 딱히 찾아본 적은 없어도 책 표지에 있는 프로필 사진을 보면 그렇게 특별히 머리에 신경쓰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없다. 기본적으로 짧고 단정하다는 느낌이고, 그 나이대의 머리라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누가 잘라도 특별한 차이가 없을 것 같아 보이는데 본인은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 이것은 사실이다. 머리가 짧든 길든 혹은 화려하게 꾸미든 수수한 타입이든 머리에는 자기만이 인정할 수 있는 모양이 있다. 거기서 조금만 달라져도 어?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굴절된 자기 자신이라는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머리와 비슷하다. 외국에 나갔다고 해서 갑자기 외관이나 가치관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건 아니다. 단지 비행기를 좀 오래 타고 낯선 사람들과 지내게 되는 것뿐이다. 요컨대 변화라고 한다면 저편에 있는 것이지 이편에서 일어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어떤 변화가 생긴다. 머리의 모양이 미묘하게 달라지듯이, 신념이나 가치관의 어느 한 부분이 자연스럽게 탈락하듯이. 일전에는 하나의 연속성을 가진 완전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갑자기 세트 구성으로 바뀌어서 교환 가능한 부분들의 집합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로봇처럼 이 부분의 솔루션은 다른 제품이 낫겠네요, 아 그래요? 그럼 그걸로 해주세요, 하는 식으로 테크니컬하게 교환한다는 말은 아니다. 명확한 의지와 확실한 모양을 가지고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보니 어느 틈엔가 바뀌어 있더라 쪽에 가깝다. 단지 그것이 전에는 바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낙차가 있다. 다만 이러한 낙차는 꼭 외국 생활을 해야만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자국에서도 내가 원하지 않는 모양으로 머리를 잘라주는 미용실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도 외국에서는 자기를 둘러싼 자명하지 않은 언어 속에서 어떤 슬픔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자국에서는 그런 종류의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자명한 언어는 또 자명한 언어대로 그것이 정말 자명한 것일까 의심하는데서 오는 슬픔이 있다고. 그건 어떤 계기로든 한 번 굴절이 일어나면 그때부터는 연속해서 굴절이 발생하고 그 굴절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무언가 사이의 접점을 찾아내는 일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말하자면 상대화라는 건 기술이 아니라 업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말하는 슬픔이라는 건 우리가 무엇이 되었든 결국은 그것이 아닌 것으로 바뀌어갈 것이며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의지만으로 주관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무력함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수없이 많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공장을 볼 때의 기분과도 비슷하다. 뭔가가 열심히 돌아가고 뭔가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데 내가 할 일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한계라든가 절망이라든가 하는 말을 좀 생생하게 해주고 싶어서 쓴 건 아니다. 오히려 느껴지는 것은 삶에는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이 되어가면서 점점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역설적인 순환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에서 작가는 프린스턴 대학에 있을 때 대학원생을 상대로 일본문학강의를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 어떤 학생은 레포트로 제출한 텍스트를 구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요시유키 준노스케의 <나무들은 푸른가>라는 작품이었는데 원서를 구할 수가 없어서 영역본을 구해 읽은 후 평가를 했다는 내용이다. 작가는 여기서 그 영역본을 다시 일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해보는데 이걸 순서대로 하면 원서 → 영역 → 일역이 된다. 말하자면 이야기는 하나인데 계속해서 포맷이 바뀌면서 느낌이랄까 분위기랄까 아무튼 종합적인 무언가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한 사람에게는 내적 통일성이라는 게 있고 그래서 우리는 다섯 살 아이든 팔십 세 노인이든 그것을 모두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외양은 다르다. 생각도 다르고 경험도 다르다. 만나는 사람도 지향점도 다르다. 어쩌면 같은 것보다 다른 것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나 자신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이지만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한 사람의 일생이란 어떤 면에서는 계속해서 외국어로 번역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문은 하나지만 번역하는 언어에 따라 이야기는 계속 달라진다. 그러다보면 원문은 어느새 원문이 아니라 하나의 판본이 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아이에서 출발하지만 꼭 그 아이가 진정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거다, 라고 생각했던 날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바뀌었다. 이건 아닌데, 라고 생각한 적은 아마 그것보다 훨씬 많았을 테지만 어쨌든 그것도 바뀌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 씌어진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외국어로. 그것은 때론 다 알아들을 수 없고 때론 아예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2025년 6월 24일부터 2025년 7월 4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