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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본의 유명 작가인 우치다 다쓰루가, 개인적으로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상을 라캉의 정신분석 사상을 가져와 읽으려는 시도로, 그 두 사상 간의 공통점 및 함께 언급함으로써 상호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부분들을 찾아서 본인이 생각하는 그 사상의 해석을 정리한 책이다. 참으로 재밌게도 서문에서 저자는 이 책은 레비나스의 사상에 대해서 독자로 하여금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도록 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이로 인해 레비나스의 이론이 더 이해가 안 되니 차라리 레비나스를 직접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썼다고 말한다. 도대체 왜 이러한 말을 할까? 이 책의 이후를 읽으면 저자의 "욕망"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을까? 첫 번째 장에서 그는 우선 난해함에 대해 말한다. 레비나스와 라캉 두 사람은 모두 특유의 난해한 텍스트로 악명이 높기로 유명한데, 왜 그들의 텍스트는 그토록 이해가 어려울까? 저자는 그 두 사람이 일부러 독자로 하여금 이해하지 못하게끔 하도록 어렵게 썼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렇게 난해하게 의도하고 쓴 것일까? 그 이유는 무엇이 쓰여있는지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기보다는 독자에게 '무언가를 시키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럼 과연 그 무언가는 뭘까? 바로 텍스트 너머에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를 물음을 던지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를 아이의 물음법이라고 한다. 마치 어른이 아이에게 뭐라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할 때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So what?)"이라는 물음으로 그가 말하는 표층적 의미 아래에 깔린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 즉 "욕망"을 쫓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어른"으로써의 라캉, 레비나스의 화법이라는 것. 이후 이어지는 장에서는 텍스트와 읽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저자는 텍스트의 의미란 일의적(하나의 의미만을 갖는것)이지 않고 읽는 이에 따라 무한할 수 있다고 한다. 즉 텍스트란 무한한 독해 가능성을 기진 완전기호라는것이고, 이를 위해선 읽기 방식의 훈련이 필요하다 한다. 레비나스의 저서에선 탈무드의 예를 많이 드는데, 탈무드는 본래 구전된 것을 문자로 기록 한, 어떻게 표현하면 "냉동보존" 된 구전이며 이를 대화를 통해 해동해야만 본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이 탈무드의 텍스트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계속 주석이 붙으며 의미가 증식하고 있다. 따라서 "결정적 의미"를 가진 탈무드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시대에 따라 율법도 바뀌고 해석이 바뀔 수도 있으므로 소위 결정적 의미를 가지려는 노력에 대해 모든 랍비들이 끊임없이 반론을 제기하므로 존재할 수도 없다고 한다. 이 책의 표현에 따르면 "최종적 합의"에 도달하지 않음으로써 텍스트의 해석을 영원히 개방상태로 놔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읽기 방법을 익히기 위해선 훌륭한 스승이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이러한 스승의 역할을 저자는 레비나스나 라캉과 같은 사람들이 한다고 한다. 여기서 스승은 특정한 지식을 전달해 주는 역할이 아닌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앎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우치도록 돕는 기능적인 역할 임도 덧붙인다. 그럼 스승들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깨우치도록 할까? 이는 일종의 "수수께끼"를 통해서이다. 그럼 이러한 수수께끼는 어떠한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바로 반복과 전언 철회라는 방식을 통해서이다. 특정한 독특한 행위를 한 번만 본 경우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같은 행위가 반복된다면 "저 행동에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행위자의 의도 기저에 깔린 의미를 알고 싶은 "욕망"에 불을 붙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반복된 두 번의 행동(혹은 메시지)은 정확히 똑같아야만 해당 행동에 생명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사라지는, 취소선에 의해 철회되는 "전언 철회"로써 기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후 장에서 타자를 언급하기 앞서 저자는 죽은 자에 관해 논한다. 죽음에 대해 장례를 치르는 것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던, 인간과 유인원을 구분 지은 행위이다. 장례를 했다는 것은 죽은 자가 발휘하는 놀랄만한 힘에 관한 앎이 인간성의 핵을 이룬다는 의미이고 때문에 고대로부터 많은 사상가들은 죽은 자와 장례제도라는 문제에 끌렸다고 말한다.장례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따지면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확실히 나누는 것(존재론적 사고, 화법)이라 볼 수 있다. 한편 기존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팽배하던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공동의 경험을 하게 된다. 이후로 유럽인들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정확히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왜 살아남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살아남아있다는 사실조차 죄처럼 느껴지고 자책하게 되는 그 상황에서 레비나스는 죽은 자를 죽은 자로써 이 세계에 살도록(존재하도록) 하는 것 또한 잘못일 수 있어, 죽은 자를 진정으로 죽게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선 존재론적인 어법으로 그들을 언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후 이러한 죽은 자들이 어떻게 제 삼자이고 절대적 타자가 되는지에 관해 저자들은 각종 소설과 예시들을 들며 설명한다. 전반적으로 알듯 말듯 , 그리고 특히 후반부의 죽은 자와 관련된 부분 이후로는 사실상 내가 과연 이 책을 이해하면서 읽는가에 대한 의구심만 가득히 가지며 마무리했던 독서였다. 물론 서문에서도 저자가 밝히듯 애초에 이 책은 레비나스의 사상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아리송하게 만들어 그의 원전에 직접 접근할 계기를 만드는 게 목적이라고 한 것이라 하면, 나라는 독자에게는 언젠가(만 미래에)는 레비나스의 글을 직접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했다는 것에서 그 목적의 최소 절반은 이루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날이 오더라도 이 책이나 레비나스의 책 모두의 텍스트를 내가 스스로 읽고 이해할 날이 오진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책에도 말했듯 텍스트의 완전한 종결, 최종적 합의에 도달하는 것을 레비나스는 전혀 원치 않을 것이고 그럴 수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과 레비나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냐고 물으신다면, 앎과 내 삶에 대한 욕망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열린 마음과 지치지 않는 정신과 자세를 갖추고 이를 유지하기 위함이지 않을까 싶다. #레비나스타자를말하다 #우치다다쓰루 #세창출판사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독서스타그램 #독서 #책읽는날개 #독후감 #도서후기 #도서감상 #책추천 #도서추천 #독서습관 #독서기록 #매일의독서 #독서취미 #취미 #서평 #책읽는직장인 인상적인 구절들 "레비나스의 제안은 텍스트를 읽는 행위 그 자체를 '사건'이라고 보는 방식의 읽기를 시도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독학자이기를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단적으로는 지금 읽고 있는 바로 이 텍스트를 쓴 사람을 '스승으로서의 타자'로 여기고 스승이 가진 '수수께끼'를 욕망하는 방식으로, '표류'에 발을 내딛는 읽기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화폐가 그렇습니다. 화폐는 그것을 뭔가와 교환해 줄 사람과 '다시 한번 만나지 않는 한' 무가치입니다. 화폐를 소유한 사람은 '교역 상대와 아무래도 다시 한번 만나야 한다'는 심리적 압력을 계속 받습니다. '갖고만 있어서는 무가치'라는 상품 성격 그 자체가 화폐의 상품 가치를 구성합니다. 우리는 상거래에서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은 채 '경제적 가치'라는 말을 사용하며 그러한 것이 마치 상품과 서비스 안에 내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경제적 가치'는 그 '물건' 안에 자존하는 것이 아니라 '교역이 유지되었다'는 사실이 가져오는 사후적 효과입니다. 교역을 동기 짓는 것은 '상품 그 자체에 내재하는 가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품의 내재적 가치' 그 자체가 교역이라는 '최초의 일격'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 가치가 있는 것이 교환된 것이 아니라 교환됨으로써 '가치'라는 개념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사정은 언어의 커뮤니케이션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을 동기 짓는 것은 '말의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송신인은 '말의 의미'를 수신인에게 선물하고 수신인이 답례 의무의 압력을 느꼈다는 사실의 효과로서 사후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먼저 주체가 있고 그것이 타자를 지향한다는 지금까지의 자아 중심주의의 인습적인 도식을 뒤집습니다. 먼저 타자의 접근이 있고 타자의 접근에 대게 늦게 '응답하는 자'로서 주체가 등장합니다. 레비나스의 유책성-응답 가능성이라는 조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주체의 '절대적 뒤처짐'을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주체는 타자에 뒤처져 나타납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지성뿐입니다. 라캉은 그것이야말로 인간과 기계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기계는 '기호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단지 거기에 있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기계는 그것을 뭔가 기지의 틀에 담던지 혹은 전혀 무시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기호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단지 거기에 있을 때' 결정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것 앞에 판단중지를 하는 '나'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훌륭한 인간적 능력이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인간성을 기초 짓습니다. 라캉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나누는 경계선을 확실히 볼 수 없습니다. 왜 살아남았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에 죽은 자는 유명을 달리할 수 없는 채로 산 자의 세계를 어렴풋이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고의 신화 작가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이유 없이 살아남은 자'들도 또한 '생사의 경계'에 분절선을 긋는 큰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생사의 분절선을 굿는 것, 그것이 죽은 자를 조문하는 일'입니다. 이 경우 조문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무의미하게 죽은'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무의미하게 살아남은' 자신들의 살아남음이라는 사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내가 받은 박해에 관해서조차도 유책입니다. 단 유책인 것은 나 혼자입니다. 나의 '근친자들' 나의 '민족' 그들은 이미 타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나는 정의를 요청합니다. '내가 받은 박해'에 관해서조차도 나는 유책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레비나스 윤리의 엄청남을 상징하는 말로서 반복해서 인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박해'를 받으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하노버 수용소 사이에 존재했던 격절에 관해서, 그리고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 사이에 존재한 격절에 관해 레비나스 자신이 맛보았을 터인 자책에 관해서 생각한다면 내가 받은 박해에 관해서도 나는 유책이다'라는 레비나스의 말은 결코 사변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신체의 깊은 곳에서 배어 나오듯 분출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책인 것은 나 혼자입니다!'라는 말의 비통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죽는 것'을 존재하는 것에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존재'의 일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죽게 하기' 위해서 산 자가 해야 하는 일은 죽은 자들을 결코 '존재론의 어법'으로 말하지 않는 엄청난 금욕입니다. 죽은 자들은 존재론의 어법으로 말하는 한 '여기'에 없으므로 얼마든지 '여기서' 이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의 어법이란 '산자의 공용어'입니다. 산 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필경'산 자의 말'(로고스) 뿐입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에는 닿지 않고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이어받을 수도 없습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죽은 자를 대신해서' 말하고자 하는 산 자는 그렇게 입에 담은 순간 ' 신분 사칭자'가 됩니다. 그것은 "나는 입법자다"라고 선언하는 자가 그 권위의 원천을 나보다 상위의 심급에서 찾는 순간 사칭자가 된다고 하는 라캉의 지적 대로입니다. 그래서 산 자에게는 '죽은 자를 위해서/죽은 자를 대신해서'말할 권리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자는 존재한다'라는 것을 자명시하는 존재론의 어법뿐이고 그 어법이야말로 그 죽은 자들을 연옥으로 몬 바로 그 폭력의 공용어, '권력의 어법'과 다름없습니다. 우상숭배가 가장 심각하게 신을 모독하는 행위로 취급받는 것은 그것이 타자를 '존재론의 어법'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절대적 초월성은 시각과 촉각으로 인해 더럽혀집니다. 이러한 사실은 유대교도에게는 거의 상식에 속합니다. 그래서 레비나스가 타자의 '얼굴'의 현전을 맞이하는 '나' 측의 몸짓을 '지향한다'는 특이한 동사를 통해 지시한 것이 연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얼굴'을 지향하는 것은 얼굴을 보는 것도 만지는 것도 아닌 무엇보다도 먼저 '말을 거는 것'입니다 '결코 현실 세계에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을 결코 현실 세계에 존재하게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죽은 자를 조문하는' 일의 본의입니다. 이렇게 해서 레비나스는 윤리적 주체의 기초 짓기와 '죽은 자의 진혼'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철학적인 곡예를 구축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죽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을' 운명에 있습니다. 그 점에서는 '죽음'은 완전히 평등하고 비개성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그 누구도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가를 '죽는' 주체로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자는 누구도 아직 죽은 적이 없고, 타인의 죽음을 대신해서 죽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먼저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 유책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모든 행위에 앞서서 이미 유책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환대하면 '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추방하면 '주'에게 저주를 받는다는 식으로 '주'가 인간의 사후에 주체적 결단을 평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환대인지 아니면 추방인지를 선택하기에 앞서서 추방한 것에 관해서 이미 유책입니다. 이 부조리한 테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일단 인습적 시간의식과 손절해야 합니다. 레비나스가 '시대착오'와 '시간의 절단'이라는 특수한 술어로 그 시간개념을 말하는 것은 다 나름의 연유가 있습니다. 레비나스적인 시간은 과거로부터 미래를 향해서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과거를 향해 흐르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인데,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를 최종적으로 기초 짓는 것은 나에게 명령을 내린 신이 아니라 신의 명령을 '외상적인 방식'으로 듣고만,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이 나 자신의 선성의 최종적인 보증인이어야 합니다. 신에 대한 두려움이, 신의 공정한 재판에 대한 예감이 나를 선으로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지향은 나의 내부에서 발로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로 스스로 '주'를 쫓아내고 그 벌을 '주'로부터 받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하면 그 유책감은 단순한 '징벌'에 대한 공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선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공포에 떨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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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선생의 문장에 익숙한 독자라면 큰 어려움은 없겠으나, 레비나스를 비롯한 2차대전 전후의 독일-유럽 윤리학에 대한 전반 지식이 없으면 다소 난이도있게 느낄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부분부분마다 저자가 마음의 스승 레비나스와 그의 사상에 대한 존경을 공유하고자 시도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으니 이에 대한 평가는 다소 갈릴지도. 이거 150자가 대체 얼마큼이길래 자꾸 150자를 넘기라고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나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