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끔찍한 신탁 때문에 버림 받은 아이가 끝내 '정해진 신탁'대로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정해진 운명'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비극을 통해서 '그리스 사람'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일설에는 그리스의 비극이 현실보다 더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그리스 사람들은 '상대적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최소한 현실에서는 저런 비극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니 얼마나 다행이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닥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슬픈 이야기를 통해서 눈물을 쏟아내는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를 거침으로써 삶의 활력소를 되찾을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평가에 더 솔깃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펑펑 울고 나면 한결 속이 시원한 느낌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이디푸스 왕>이 보여주는 비극은 좀 갑갑한 느낌이 든다. 아무리 끔찍한 비극이 펼쳐진다고 해도 '인간의 노력'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고, 비극이 덜할 수도 있어야,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할텐데, '한 번 정해진 운명'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 전개에 어쩌라는 거냐는 반문이 끝없이 되묻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정해진 운명은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으니 신의 뜻 앞에 '순종'하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순종'한다면 끔찍한 운명은 피할 수는 있는가? 그럴 수도 없다면 '순종'하는 의미가 무색해질 뿐이잖은가 말이다. 그런 까닭에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적당한 교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도덕적인 문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기는 했다. 결코 쉽게 판단을 내리기 힘든 '난제'를 던져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은 '고전의 축약본'이긴 하지만, 단편적인 내용만 수록된 책들과는 달리 오이디푸스 이야기로 이어지는 3부작 <오이디푸스 왕>,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 그리고 <안티고네>를 모두 수록되어 있어, 전체적인 줄거리를 대략적으로나마 모두 살펴볼 수 있는 매력적인 책이다. 특히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는 단독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거의 없으니, 이 책이 아니고서는 3부작을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담고 있는 '도덕적 딜레마'를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는 책도 바로 이 책밖에 없다. 먼저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과연 오이디푸스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분명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해서 네 명의 자식까지 낳는 반인륜적인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친아버지가 오이디푸스를 어릴 적에 내다버렸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랐다. 그래서 자신을 길러진 '양부모'를 친부, 친모로 알고 자랐을 뿐이다. 그런데 거기서도 똑같은 신탁,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해 자식을 낳을 것이다"이란 신탁을 받았기에 양부모 곁을 떠나 방랑을 하던 차에 그만 '친아버지'와 말다툼 끝에 죽이고 만 것이다. 그 사이에 오이디푸스는 영웅이 되었다. 괴물 스핑크스를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서 말이다. 그렇게 영웅이 되어 홀로 된 왕비, 즉,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와 오이디푸스는 결혼을 하고 왕과 왕비가 되어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그런데 자식을 넷이나 낳는 동안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는데도 불운한 일들이 왕국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까닭은 '왕국내에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부정한 사람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란다. 너그럽고 현명한 오이디푸스는 그 부정한 사람을 찾아 왕국에 다시금 평화를 가져다주려 했는데, 그만 그 부정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큰 슬픔에 빠져 스스로 자신의 눈을 멀게 하고 왕국에서 쫓겨나게 된다. 분명, 오이디푸스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부정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에게 죄를 묻기에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오디이푸스는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테베의 영웅이 된 뒤에 자신이 '테베의 왕자'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친아버지를 살해하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낳는 일을 제정신으로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이디푸스의 친부, 친모도 자신들이 죽여 버린 자식이 장성해서 되돌아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지른 죄에도 마땅히 벌을 내려야만 하는가? 독자마다 다른 결론을 내릴 것이다. 물론 이유도 다를 것이고 말이다. 다음 이야기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는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와 큰 딸 안티고네가 오랜 방랑의 세월을 마무리하고 속죄를 받는 시점에서부터 '난제'가 시작된다. 바로 테베의 왕위 자리를 놓고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전쟁도 불사했기 때문이다. 애초에는 첫째 아들 폴리네이케스가 왕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숙부 크레온와 짜고서 둘째 아들 에테오클레스가 반란을 일으켜 첫째 아들을 왕국에서 내쫓고 왕위에 오른다. 이에 불복한 첫째 아들은 '외국의 용병'을 모아서 빼앗긴 왕위를 되찾으려 쳐들어가고, 둘째 아들과 숙부는 이에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여기에 불운한 신탁 하나가 또 등장하게 된다. [둘 중 아버지를 모시는 쪽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이다. 내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서 내다버린 아버지를 모셔오려는 두 아들의 눈물 겨운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아버지인 오이디푸스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가? 결론은 양쪽을 모두 돕지 않고, 제3자의 힘(테세우스 왕)을 빌어 두 아들 모두 벌을 주는 것이었다. 이때 독자들은 또다시 난제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자신을 버린 아들을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라고 말이다. 부모의 처지에서 곤경에 처한 자식을 못 본 척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 것인가? 그런데 '제3자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쯤은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 아버지라면 당연히 자식을 도와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인지만, 그 자식들이 애초에 아버지를 내다버린 원죄가 있다면, 괘씸해서라도 돕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꽤씸하더라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인데, 어찌 두 아들을 벌주기 위해서 '제3자(테세우스, 이웃의 왕)'에게 이득을 내어줄 수 있겠느냔 말인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이디푸스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누구를 돕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도덕적인 판단이란 말인가? 마지막 이야기 <안티고네>는 더 끔찍하다. 결국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결전을 벌인 끝에 모두 죽고 숙부 크레온이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테베를 지킨 둘째 아들 에테오클레스는 구국의 영웅으로 추대하며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룬 반면에, 첫째 아들 폴리네이케스는 '외국군'까지 끌고 와서 조국을 공격한 반역자였기에 그의 주검을 들판에 방치하고서 그 누구라도 주검에 손을 대거나 묻어주거나 슬퍼한다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새로운 국법을 정해버린 것이다. 허나 아무리 국법이라고 하지만 '혈육의 장례식'도 치루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었기에 큰 딸 안티고네와 둘째 딸 이스메네가 장례식을 대신해 오빠의 주검 위에 흙으로 덮어주었다. 이에 숙부 크레온은 두 여인을 국법으로 다스려 사형에 처하겠다고 공표해버린다. 하지만 모든 국민들이 그건 너무나 과한 처사라며 사형을 면하게 해주라고 권하지만, 크레온은 끝끝내 "국법은 지엄한 것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끝내 어두운 동굴에 가두고 바위로 입구를 막아버리는 형벌을 시행하고야 만다. 하지만 그 사이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안티고네를 사랑하고 있었고, 아버지에게 사형을 멈춰달라고 하소연도 해보지만 여의치 않자 안티고네와 함께 죽음을 선택하고야 만다. 하이몬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크레온의 아내도 덩달아서 자살을 해버리니, 그제서야 크레온은 자신의 처사가 너무 과격했고, 용서를 하는 것도 너무 뒤늦었다고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나라가 정한 법'이 우선인지, '자연이 정한 법'이 우선인지 둘의 경중을 따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자연이 정한 법'이란 '혈육의 정'과 같이 자연스럽게 따르는 도덕적 관습을 일컫는 것이다. 물론 국왕이 다스리는 왕국에서 '국법'은 반드시 지켜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왕이 정한 법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이랬다 저랬다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오빠의 주검이 짐승들의 밥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치할 동생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동생이 있다면 국법에는 없더라도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욕해야 마땅한 짓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티고네는 과연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일까? 동생으로서의 마땅한 의무마저 가로 막는 '국법'이 과연 온전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고 국가가 정한 법을 함부로 어기는 짓을 방관만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사사로운 이유로 국법을 어긴다면 애당초 국법을 지킬 까닭도 없을 것이다. 어떤가? 어느 것 하나 쉬운 결정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운명'은 신이 정하는 것이지만 '판단'은 인간이 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인간은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끝없이 묻고 답을 해도 '정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지혜로운 판단'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 지혜로운 판단에는 수많은 '경우'가 달라붙기 마련이다. 예컨대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때로는 "이런 경우일지라도 요로케..." 해야 마땅하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수많은 '질문'을 던져야만 하고 말이다. 그 질문이 많고, 수준 높고, 결정적으로 '남'을 위한 결정을 위한다면, 그 질문 끝에 내린 '판단'은 더욱더 위대해질 것이다. 인류는 이렇게 발전해나갈 것이다. |
|
희곡으로 접했던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이야기'로 읽어보니 새삼 다른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론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라 '희곡읽기'에 큰 불편함은 없는 편인데, 지문과 대사가 주는 감흥보다 소설의 서사구조에서 받는 느낌이 확실히 더 크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독서였다.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진형준의 세계문학시리즈'를 섭렵해볼까 한다. 한편, 어릴 적에 읽었던 고전의 느낌과 20여 년이 지나서 읽은 고전의 맛은 확실히 달랐다. 분명 희곡을 소설로 읽은 맛도 달랐지만 세월이 흘러 삶의 경험이 쌓이고 난 뒤에 읽었기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이야기에 집중해 보련다. 다 알다시피, 오이디푸스는 비극적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 안타까운 인간의 대명사다. 그뿐인가. 심리학자 프로이트에 의해서 어머니를 아버지에게 빼앗겼다는 '원초적 사랑'을 이루지 못해 콤플렉스에 빠져버린 불우한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그렇게 불쌍한 인물일까? 사실 오이디푸스는 저주에 가까운 신탁을 제외하고는 매우 바람직하고 성실한 품성을 지녔으며 삶도 매우 올바르게 살았다. 이토록 품행이 방정한데 운명은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아 두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낳아 행복(?)하게 살게 만든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아니 진실을 아는 자들은 훌륭한 왕인 오이디푸스에게 진실을 알려고 하지 말라고 권할 정도다. 자, 이렇게나 훌륭한 왕인데도 비극적 운명으로 이끄는 진실을 알려주어야만 했을까? 이야기 속에서는 그 진실을 끝까지 추궁한 인물로 오이디푸스 자신임을 분명히 밝힌다. 왜? 그래야 비극이 완성되니까. 그런데도 아쉬움은 남는다. 신탁이라는 것도 그냥 무시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럼 아들이 아버지를 죽일 까닭이 없다. 그런데 왜 신탁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을 버려야만 했을까? 뭐, 알 수는 없다. 점쟁이의 점괘를 듣고 싶어하는 '인간의 호기심'이 그런 결과를 낳은 거라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비극을 들려줄 수 없으니까, 다시 말해,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쿨럭 허튼 소리는 이쯤하고, 이 책이 여타의 책과 달리 좋은 점은 '오이디푸스 3부작'에 해당하는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를 시간 순서대로 수록한 점이다. 대개는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만 수록한 책이 대부분이고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의 연결고리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빼버린 책이 많다. 왜 그럴까? 그 비밀은 바로 소포클레스가 쓴 비극의 순서가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썼기 때문이다. 또한 앞의 두 작품이 주는 서사의 감동과 카타르시스에 비해 마지막 작품이 주는 감동이 덜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소포클레스는 왜 이렇게 1-2-3의 순서가 아니라 3-1-2의 순서로 작품을 쓰게 된 걸까? 그건 소포클레스가 쓴 희곡이 무대에 올리기 위한 '경연용 대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비극을 책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디오니소스 극장'이라는 곳에서 관객의 호응으로 계속 무대에 올릴 것인지 아닌 지를 결정했다고 한단다. 이를 테면, <안티고네>를 2명의 배우가 무대에서 상연을 하면 수많은 관객들이 배우의 몸짓과 대사를 통해 안티고네의 비극적 운명을 직접 보고 탄성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고 나면, 다음날 <안티고네>가 입소문이 나면서 엄청난 반응이 보인다면 다음에 또 다시 상연할 가능성이 높아지는..그런 시스템이었단다. 그러고 보면, 독재자의 명령에 죽음으로 저항하는 <안티고네>가 카타르시스를 최고조로 끌어낼 수 있겠고, 그 다음으로 피할 수 없는 불행을 온몸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비극인 <오이디푸스 왕>,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포클레스의 유명세로 인기리에 상연되었던 '오이디푸스 시리즈'의 완결이자 두 작품의 연결고리인 <콜로노소의 오이디푸스>로 마무리를 장식한 것은 아닌지 상상이 된다. 아쉬운 점은 이 책의 원작의 맛을 살리기 위해 '축역'이라는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원작이 주는 맛은 무엇에 비할 수 없는 '깊은 맛'이겠지만 요즘 현대인이 읽기에는 진부할 정도로 '진도(속도)'가 느리다는 점이다. 그래서 글쓴이는 과감히 원작에 손을 대서 작품과 작품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였고 진도를 쭉쭉 빼면서 '읽는 맛'을 최대한 살렸다. 그래서 원작의 맛을 아는 독자들은 뭔가 빠진 것 같은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은 '읽는 맛'으로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또 원작을 읽어보지 못한 독자분들, 특히 청소년들은 읽기 힘든 원작을 대신하지만 '원작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책일 것이다. |
|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적 삶과 운명을 통해 겸손하라는 메세지를 찾아보았다.
|
|
아직 인간은 운명을 초월하지 못했음. 4차 산업혁명이 좀 더 무르익는다면 인식의 한계나 필멸할 육체마저 벗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이런 sf스러운 미래가 가능해지고 존재의 인과를 과학으로 규명케 된다해도 인간은 아마 자기 존재의 가치와 지향에 대해선 여전히 고뇌하게 될 것임. 어찌보면 이 희곡 속 인간들을 좌절시키고 난파시키는 운명이라는 파도는, 내 존재의 의미를 찾고 지향하는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한 항해에 나선 이들에게만 불어닥치는 파도나 바람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인물은 역시 안티고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