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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목사 출신으로 성서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한 신학자이자 성서학자인 저자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죽음에 담긴 비밀을 마치 미스터리 소설처럼 긴박하고 숨막히면서 긴장감 넘치고 찾아가고 있는 책이다. 이스라엘 최대의 축제이자 기념일인 파스카 주간을 지내시기 위해 제자들과 이스라엘에서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신 예수님께서 전통에 따라 포도주 잔을 ‘네 번’을 드시지 않았음을 깨닫고, 단순한 실수인 것인지 예수님께서 의도를 가지고 또한 무엇인가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함인 것인지 연구해 과는 과정을 찾아나가고 있다. 아울러, 저자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과정도 흥미로운데, 성찬례나 성체 성사를 마치 미신이나 우상 보듯 하는 칼뱅주의에 경도돼 있는 목사 출신으로 주일 예배에서 목사가 말한 설교 과정에서의 궁금증을 계속 추적하며 연구하는 과정에서 결국에는 성체를 모시고자 하는 열망과 성체성사와 성찬례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깨닫고 마음의 이끌림으로 개종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형에 처해지시며 인간으로서의 생을 다하는 순간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라고 말씀하신다. 이 책은 무엇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인가 의미를 추적해 가며,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죽음까지의 과정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많은 군중들에게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으며,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셨는지 살펴보고 있다. 나 또한 악을 끊어버리겠다고, 영원한 삶을 믿으며, 성인들의 통공과 죄의 용서를 믿으며 신앙 생활을 시작한지 이제 만 4년이 다 돼간다. 하지만, 그 가운데 코로나 상황도 있고 해서, 실제 깊이있게 신앙생활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아직도 미사가 가지는 의미, 미사가 행해지는 가운데 순서들이 던져주는 의미, 그리고 미사에 참례하는 예법, 기도하는 방법 등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특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방향과 방법이 맞는지, 내가 그저 기복신앙처럼 무언가를 바라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시다는’ 하느님을 진정 느끼고 있는지, 느끼려고 노력하는지, 그리고 성체를 모실 때 어떠한 마음이고 평소 생활과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아직도 걸음마를 막 뗀 아이처럼 두렵고 낯설고 미지의 상태에서 혼란만 더 커지는 것 같다. 최근 들어서는 미사 순간에도 분심이 자꾸 생겨나고, 평소에는 신앙인 이전의 삶과 조금도 달라짐이 없으면서 (식사 기도는 물론이거니와 식사 전후 성호경도 아예 긋지 않고 있는) 일주일에 한번, 최근에는 일주일에 두 번 그저 성당에 머무는 그 시간만 신앙인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나름으로는 매일 미사도 읽고, 매일 복음도 읽고, 강론도 듣고, 성경도 틈틈이 읽고, 또한 성서 모임도 시작하면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외적으로 비춰지는 모습에만 신경쓰고 진정 내 안에서의 변화를 이끌려고 하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어제 부주임 신부님께서도 미사 중에 “우리 신앙을 맹목네 번째 잔의 비밀 ? 스콧 한, 이형규 옮김 (8.17) 개신교 목사 출신으로 성서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한 신학자이자 성서학자인 저자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죽음에 담긴 비밀을 마치 미스터리 소설처럼 긴박하고 숨막히면서 긴장감 넘치고 찾아가고 있는 책이다. 이스라엘 최대의 축제이자 기념일인 파스카 주간을 지내시기 위해 제자들과 이스라엘에서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신 예수님께서 전통에 따라 포도주 잔을 ‘네 번’을 드시지 않았음을 깨닫고, 단순한 실수인 것인지 예수님께서 의도를 가지고 또한 무엇인가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함인 것인지 연구해 과는 과정을 찾아나가고 있다. 아울러, 저자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과정도 흥미로운데, 성찬례나 성체 성사를 마치 미신이나 우상 보듯 하는 칼뱅주의에 경도돼 있는 목사 출신으로 주일 예배에서 목사가 말한 설교 과정에서의 궁금증을 계속 추적하며 연구하는 과정에서 결국에는 성체를 모시고자 하는 열망과 성체성사와 성찬례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깨닫고 마음의 이끌림으로 개종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형에 처해지시며 인간으로서의 생을 다하는 순간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라고 말씀하신다. 이 책은 무엇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인가 의미를 추적해 가며,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죽음까지의 과정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많은 군중들에게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으며,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셨는지 살펴보고 있다. 나 또한 악을 끊어버리겠다고, 영원한 삶을 믿으며, 성인들의 통공과 죄의 용서를 믿으며 신앙 생활을 시작한지 이제 만 4년이 다 돼간다. 하지만, 그 가운데 코로나 상황도 있고 해서, 실제 깊이있게 신앙생활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아직도 미사가 가지는 의미, 미사가 행해지는 가운데 순서들이 던져주는 의미, 그리고 미사에 참례하는 예법, 기도하는 방법 등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특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방향과 방법이 맞는지, 내가 그저 기복신앙처럼 무언가를 바라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시다는’ 하느님을 진정 느끼고 있는지, 느끼려고 노력하는지, 그리고 성체를 모실 때 어떠한 마음이고 평소 생활과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아직도 걸음마를 막 뗀 아이처럼 두렵고 낯설고 미지의 상태에서 혼란만 더 커지는 것 같다. 최근 들어서는 미사 순간에도 분심이 자꾸 생겨나고, 평소에는 신앙인 이전의 삶과 조금도 달라짐이 없으면서 (식사 기도는 물론이거니와 식사 전후 성호경도 아예 긋지 않고 있는) 일주일에 한번, 최근에는 일주일에 두 번 그저 성당에 머무는 그 시간만 신앙인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나름으로는 매일 미사도 읽고, 매일 복음도 읽고, 강론도 듣고, 성경도 틈틈이 읽고, 또한 성서 모임도 시작하면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외적으로 비춰지는 모습에만 신경쓰고 진정 내 안에서의 변화를 이끌려고 하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최근 부주임 신부님께서도 미사 강론 중에 “우리 신앙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보다는 자꾸 회의하고 의심하는 것이 더 건전하고, 신앙이 단단해질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나의 경우는 신앙을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함인 것인지, 그저 딴 생각인지 갈피잡기도 힘들다. 그만큼 내 마음 안이 평화롭지 못하고, 불안하고, 요동치고 있기 때문인 것이고 완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완전한 믿음을 보일 수 있는지 누군가가 ‘이렇게 이렇게 해’라고 알려줬으면 하는 바람도 솔직히 많이 든다. 책을 읽으며 의미있게 눈여겨 봤던 부분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면서, 신앙의 깊이를 더해 보고 완전한 믿음의 길로 향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그리스도교를 ‘단 한 번 모든 이를 위하여’ 유일하게 희생 제사를 지닌 종교라고 말하며, 이 희생 제사는 이미 완전히 바쳐졌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쳐진 희생 제사의 종지부라고 여겨졌다. 사실 희생 제사에는 암묵적 위험이 들어 있다. 모든 계약은 축복과 저주를 동반한다. 이행했을 때는 축복이 주어지며, 이행하지 못했을 때는 저주가 내려진다. 하느님께서 구원하신 그들이 구원받기에 합당해서, 곧 그들이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자비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주가 담긴 잔을 가리키며 “내 피로 맺는 새 계약”(루카 22,20)이라고 선언하신 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5)라고 덧붙이신다. 예수님께서는 ‘계약’과 ‘갱신’이라는 새로운 예식을 세우셨으며, 이 장면이 바로 파스카 만찬이었다. 마지막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를 맺으신다. 그분께서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우리를 위하여 사람의 아들로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새 계약을 제정하심으로써,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려고 모인 이들이 친교를 이루는 교회를 설립하였다. 예수님의 희생 제사를 묘사할 때 ‘단 한 번’이라는 구절은 ‘완전히 끝남’이 아니라, ‘단 한 번’이 시작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예수님이야말로 천국의 성소로 들어가시는 최종적인 대사제이심을 가리킨다. 그분의 제물은 영원하기에 반복해서 바칠 수 없다. 그분께서는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다.’ 예수님께서는 반복해서 바칠 수 없는 희생 제사를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늘 바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완전한 희생 제물로 바치고 계신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에 의해 사형당한 불행한 희생자가 아니었다. 그분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당신 친히 내어놓으신 것이었다(요한 10,17-18 참조). 누가 당신께 손을 대기 이전에 파스카를 경축하시고 파스카 만찬을 주님의 만찬으로 바꾸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하나됨’이 삼위일체의 ‘하나됨’처럼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삼위일체의 ‘하나됨’이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곧 닮거나 비슷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같아질 것이라고 밝히신다. 최후의 만찬으로 인해 성금요일에 일어난 십자가 처형이 희생 제사로 변화했으며, 부활로 말미암아 희생 제사는 성사로 변모했다. 사실 성찬례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목숨을 내어놓으면서 갈바리아 산에서 바치신 희생 제사와 똑 같은 희생 제사다. 바로 이 희생 제사를 통해 예수님의 거룩한 인성을 만들고 흠숭한다. 성찬례가 바로 미사의 거룩한 희생 제사다. 만약 성찬례가 단순히 만찬이라면, 갈바리아 산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저 사형 집행에 불과하다. 성찬례가 ‘기억’ 혹은 ‘기념’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파스카이기 때문이다. 파스카 신비가 그리스도 구원 업적의 정점이듯이,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예배(미사)의 핵심이자 정점이다. 예수님의 파스카는 그리스도교 오순절에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로 성취되면 완성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보호자가 당신의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말씀하신다(요한 14,16.26; 16,7 참조).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우리는 각자의 생명을 내놓는다. 최후의 만찬이 던지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4-35) 이 역설을 두고 그리스도인들은 파스카 신비라고 밝힌다.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생명보다 더 큰 것이 있음을 알려 주신다. 당신께서 사셨던 것처럼 우리가 살고, 당신께서 죽은 모습대로 우리가 죽는다면, 우리와 나누고자 하신 하느님의 생명(천국)을 얻어 누릴 수 있다. 천국은 세례와 함께 우리 안에서 시작되고, 성찬례의 잔을 받아 모실 때마다 우리 안에서 성장해 나간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히 당신과 함께 살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당신의 자비 안에서 지금 우리가 그 삶을 받아들이게 하신다. 축복의 잔을 내어주시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이 덕행의 삶, 곧 올바른 질서 안에서 두려워하고 갈망하며, 모든 일에서 당신의 뜻을 따라 살도록 만찬의 상징들을 제정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뒤엎으셨다. 생명을 주는 기회로 삼으셨다. 그분께서는 자유롭고 온전하게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선물과 기도, 희생 제사로 바꾸어 놓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알려 주셨다. 예수님의 모욕과 죽음의 시간은 패배가 아니라 죄와 죽음에 대한 생명과 사랑의 승리였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언제 네 번째 잔을 드셨을까? 바로 당신 죽음의 때, 곧 당신 희생 제사가 완결된 순간에 드셨다. 우리는 언제 이 잔을 마실까? 우리 죽음의 때, 곧 삶으로 드러내는 우리의 증언이 완수되는 죽음의 순간일 것이다. 오직 죽음에 이르러서야 우리의 파스카가 이루어진다. 바로 그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참으로 “다 이루어졌다.” 하고 말할 수 있으리라. 가톨릭교회는 미사의 중요성을 늘 강조합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24항) 성찬례는 예수님의 파스카 완결이 하느님 계약이 가져다 주는 선물이며, 지금 이 순간을 포함한 모든 시대의 사람을 어루만지는 선물임을 깨닫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