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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지금과 같은 문명을 일구고 살 수 있는 원동력을 어디서 오는가? 많은 것을 지목할 수 있겠지만, 나는 가장 확정적인 것은 ‘지식의 전달’이라고 생각한다. 선대에 익힌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면서 지식이 누적되었고, 바로 그것이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문명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여기서의 지식이란 아주 초보적인 석기를 만드는 기술과 같은 것에서부터 현대의 양자역학이니 분자생물학이니 하는 복잡한 지식까지도 포함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류의 지식이 어떤 추상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한 시기가 있었다. 바로 고대 그리스, 로마 시기다. 철학이 등장했고, 기술이 도시를 꾸미기 시작했던 시기다. 철학이나 기술서뿐만 아니라 희곡과 시집 등 예술서도 많이 쓰여졌다. 그러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고대의 사상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실제로 많은 저술들이 사라졌고, 일부만이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다. 어떤 것은 있었다는 기록만이 전해지고, 어떤 것은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이얼릿 몰러는 고대의 사상이 중세에 어떤 경로로 지나갔는지 추적하고 있다. 그가 방대한 이 주제를 다룬 방식은 몇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몇 가지의 저술을 선택했고, 그 경로에서 중심이 되는 몇 도시를 골랐다. 그렇게 서기 500년에서 1500년까지 1000년 동안의 지식이 어떻게 전달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 과정은 찬란한 역사였을 수도 있고, 혹은 아주 희미한 빛을 잡아 명맥을 이어간 역사였을 수도 있다.
그가 선택한 저자와 책은 바로, 수학의 유클리드의 《원론》 천문학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의학의 갈레노스의 많은 저작들이다.
이것들은 어떤 책들일까
”(성경을 제외하고 인류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라고도 하며, 처음 쓰여진지 2300년이 지나서도 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던) 유클리드의 《원론》은 기원전 3세기 초에 존재했던 수학 지식을 종합하고 체계화한 저술이다. 따라서 유클리드는 수학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분기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전으로는 적어도 2000년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전통의 마지막이자 그 이후로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세대의 시작점인 것이다.“ ”오늘날 프톨레마이오스는 천체의 움직임을 묘사한 《수학의 집대성》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아랍어로 번역되었을 때 ‘가장 위대한’ 집대성이라는 의미에서 ‘알 마지스티(Al-Majisti)’라는 제목이 붙었고, 이것이 다시 라틴어화하면서 ‘알마게스트(Almagest)’가 되었다.“ ”‘갈레노스 문서(Gelenic corpus)’라고 불리는 그의 현전 저술을 다 합하면 무려 300만 단어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한 역사학자는 ‘피로할 정도로 광범위하고 방대한’ 저술이라고 표현했다. 놀랍게도 갈레노스의 저술은 현전하는 고대 그리스 문헌의 절반이나 차지하지만, 이것은 그가 썼을 것으로 추산되는 총 1000만 단어 분량의 저술 중 일부에 불과하다.“ 베살리우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아니 의심하면 의심을 받았던 갈레노스였다.
딱 의도가 드러나는데, 바로 ‘과학’과 관련한 책들이다. 근대 과학이 형성되기 전 과학적 사고가 어떻게 살아남아 과학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일곱 개의 도시를 여행한다. 알렉산드리아, 바그다드, 코르도바, 톨레도, 살레르노, 팔레르모, 그리고 베네치아.
도시의 이름만 보아도 어떻게 고대 과학 지식이 1500년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한 도서관이 세워진 알렉산드리아가 있었고, 거기를 통해(거기만이 아니었지만) 이슬람 제국의 전성기에 수도가 된 바그다드로 그리스어로 된 서적들이 몰린다. 그곳에서 아랍어로 번역된 책은 고대의 지식이 보전되었다. 그리고 그 지식은 다시 이슬람 국가가 세워진 (현재) 스페인의 코르도바로 이어진다. 온건한 종교정책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모여든 코르도바가 지식이 중심이 되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다 기독교도들의 반격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하나둘 이슬람 세력이 축출되면서 등장한 지식의 수도는 톨레도가 된다. 톨레도에서는 아랍어로 쓰인 저술들이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번역의 물결은 의학의 살레르노로 이어지고, 팔레르모로 이어진다. 이 과정은 모두 필사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쿠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나오면서 즉시 그 힘을 이용하기 시작하여 인쇄된 책들이 나오고 유통되고 퍼지게 된다. 그때 중심이 된 도시가 바로 베네치아였다.
이 도시들은 어떻게 지식 전달의 경유지이면서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 저자는 그곳들이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고(그런 시기에 학문이 융성했다), 자금이 충분했으며, 서적이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 조성되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학문에 관심을 가진 뛰어난 인재들이 계속 유입될 수 있는, 타민족과 타 종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 도시들은 서로 교류하고 있었고, 어떤 형태로든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악착같이 전달된 세 저자의 책들은 묘한 운명을 맞게 된다. 위대한 책, 부정되어서는 안되는 지식으로 일컬어지던 프톨레마이오스와 갈레노스의 책은 같은 해에 나온 책들로 부정의 운명을 맞게 된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와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가 바로 그것이다(그에 비해 유클리드의 《원론》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온 이후에도 전면적으로 부정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프톨레마이오스와 갈레노스의 책을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나?
전혀 그렇지 않다. 바로 그런 부정할 수 있는 지식이 있었기에 새로운 지식이 탄생할 수 있었다. 비록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천동설’에 바탕을 둔 잘못된 것이었지만, 오랫동안 천체 현상을 해석하고 날짜를 계산하고, 나아가 개인과 국가의 운명을 예견하는 데 훌륭한 지침서가 되었다. 갈레노스의 책들 역시 인체의 구조를 잘못 알고 있었던 점이 있었지만(주로 돼지 등의 해부를 통해서만 알아냈던 지식이다), 그래도 그의 지식은 수많은 사람을 살려내기도 했다. 비록 고대의 지식이 오랫동안 절대화된 부분에 있어서는 긍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지식들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는 토대가 있었기에 새로운 지식이 탄생하였고, 과학혁명을 거쳐 현대 문명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이다. 인류는 지식의 끈을 붙잡고 이어나갈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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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질문은 이렇다. 고대의 지식은 어떻게 중세를 거쳐 근대로 이어질 수 있었나?
여기서 고대의 지식의 대표로 삼은 것은 유클리드의 《원론》,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그리고 갈레노스의 많은 저술이다. 이것들은 각각 수학, 천문학, 의학을 대표한다. 플라톤이니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 저서들도 충분히 빛나는 고대의 성취라고 할 수 있지만 저자는 자신의 관심 분야인 ‘과학의 지식’에 한정했고, 따라서 보다 명확하게 지식이 전달되는 경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 갈레노스의 지식은 500년 경 ‘거대한 사라짐’을 경험한다. 그리고 1000년 동안 명맥을 유지하다 15세기 후반 르네상스와 인쇄술을 통해 수정되고, 전파된다. 저자는 이 1000년을 추적하기 위해 7개의 도시를 골랐다.
저자가 고른 도시는, 알렉산드리아, 바그다드, 코르도바, 톨레도, 살레르노, 팔레르모, 베네치아다. 지식은 당연히 책으로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이 도시들은 이 책들을 어떻게 보존하고 전파시켰는지에 관한 증거가 된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 갈레노스의 지식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저술되어 널리 퍼졌었다. 그 지식은 중세의 시작과 함께 유럽에서는 희미한 자취만을 남겼지만, 대신 이슬람 세계(바그다드)에서 수집되어 아랍어로 번역되고 보존되었다. 또한 이를 토대로 독자적인 과학 지식을 발달시켰다.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은 후기 우마미야 왕조의 수도였던 스페인 지역의 코르도바에서 모방되었다. 그리고 이 지식의 전통과 유산은 이슬람 세력이 축소되고 퇴출된 이후에도 스페인의 다른 지역들에 영향을 미쳐 톨레도가 번역 활동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아랍어로 쓰인 책들은 톨레도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전달될 수 있었다.
그 다음 도시는 살레르노다. 살레르노는 중세 시대 의학의 중심지였다. 북아프리카로부터 아랍어로 쓰인 의학 문헌이 모여들었고, 갈레르노의 저서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살레르노의 의학 지식은 시칠리아섬의 팔레르모로 옮겨간다. 여기서는 노르만 왕조와 프리드리히 황제의 보호 아래 갈레르노뿐만 아니라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의 책들이 번역되고 보존되었다. 특히 아랍어가 아니라 소수로 남아 있는 그리스어 원본을 토대로 번역 작업이 이루어져 보다 정확성이 높아졌다.
이러한 지식들은 모두 베네치아로 모여든다. 사실 여기서 베네치아는 어떤 상징과도 같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 이후로 지식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중심이 된 곳이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 말고도 유럽 각지에서 이런 흐름이 생겼다. 이렇게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지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가능해졌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원래의 내용이 그대로 남았지만(지금까지도), 프톨레마이오스와 갈레노스의 지식은 코페르니쿠스와 베살리우스에서 전복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복’되었기에 그 지식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 지식이 보존되었기에 그것을 토대로 공부하고, 그것이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고대의 지식을 온존시켜온 도시들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지식은 그것 자체로 옳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토대로 생각할 수 있고, 확인할 수 있고, 수정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유클리드, 갈레노스, 프톨레마이오스 저술의 새로운 인쇄본은 그들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 안에 있는 오류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세기에 과학자들이 고전 이론의 부정확한 점ㅇ르 수정하고 자연 세계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토대로 잘못된 부분을 새 이론으로 대체하면서, 17세기 과학혁명기의 놀라운 발견들이 나올 수 있는 길을 닦였다.” (352쪽)
저자는 “정치적 안정, 자금과 서적의 지속적인 공급, 학문에 관심 있는 뛰어난 인재들의 유입,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타민족과 타 종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 이 도시들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어쩌면 찬란하다고 할 수 있는 역사에서 조금 서글픔을 느끼기도 한다. 지식의 보존과 전파의 역사에서 지식 자체로 가능한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위대한 지식의 보존과 전파, 발전은 도시의 지배자의 역할이 정말 중요했다. 그런 점에서 지식은 허약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지만, 지식의 파괴는 한 순간에 일어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도 멀지 않은 시기에 벌어졌던 지식 파괴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지식이 사라지면 세상이 희미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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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우리들이 고대의 유명한 저술들을 읽을 수 있을까? 르네상스 시기 고대의 저술들이 재평가받았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재평가받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평가할 대상이 남아있었다는 말이 된다. 기독교는 이교적이라는 이유로 고대의 철학, 과학, 문학을 파괴했다. 그렇다면 인쇄술이 나오기 전 그 저술들을 누가 필사하여 옮겨왔을까? 바로 이슬람 사람들이다. 이 책은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 갈레노스의 저술이 어떻게 우리에게 오게 되었는지를 도시 하나하나씩 추적한다. 이 도시들은 정치적으로 안정적이었고, 자금과 서적이 지속적으로 공급됐으며, 학문에 관심있는 뛰어난 인재들이 유입됐다. 무엇보다 타민족과 타 종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 있었고 이를 통해 협업이 가능해졌다. 도시 하나하나를 들르면서 익숙치 않은 도시들을 방문하고, 유클리드나 브라마굽타 같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유명한 저작들을 알게 되어서 재밌었다. 총균쇠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도시, 나라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필수적인것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