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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읊조릴수록 좋다. 물살처럼 어느새 마음을 철썩인다. 시에서 가져온 표현이라는데 여러 곳에 오래 써 먹을 것 같다.
추석 때 놀러온 조카가 껄끄러움 없이 여성(혐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깜짝 놀랐다. 올해 페미니스트 관련 번역서들이 주목을 받는 현상이 내심 기뻤던 터라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 맞이할 세상은 어떤 곳일지 마음이 들떴다. 소싯적 홀로 페미니스트 서적을 뒤지며 공부한 적이 있었다. 열 가지도 훌쩍 넘는 분파로 나뉘는 페미니즘이 지속적으로 건재할 수 있을지 그때는 의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옆 사람에게 지금 여성이 누리는 자유와 기회는 소수의 과격한 운동과 실천이 이끈 결과이기에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 여자인 이상 어쨌든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 사이 세상은 조금씩 바뀌었고 그 소소한 쌓임이 큰 파도를 일으킬 것 같아 흥분된다.
레베카 솔닛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고 그전까지는 주렁주렁 달리는 문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을 말하는지 내용과 일체화되지 않으면 메시지를 놓치고 마는 에세이에서는 유려하고 수식이 많은 문장이 더욱더 큰 벽으로 느껴졌다. 예전 같으면 자기와 주변인의 삶을 지나치게 까발리고 이 얘기하다 저 얘기로 넘어가는 흩어지는 글이 불편했을 것이다. 사람도 시간의 변화에 따라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 문체가 달라지는 것일까. 분명한 이야기 진행이 아닌데도 종종 언급되는 <프랑켄슈타인>과의 케미 때문인지 무작정 끌렸다. 외국어인 관계로 검은 점으로만 떠도는 부분도 적지 않았는데 답답하지 않았다. 이해되는 부분만 크게 공감하며 읽었다. 원래는 가을 동안 조금씩 나눠 읽을 참이었는데 명절 연휴 덕분에 일독을 마쳤다.
<멀고도 가까운>을 읽으면서 독자로서의 자책감이 따라붙곤 했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한 의도대로 읽었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내 식으로 편하게 읽은 건 아닌지, 찝찝함은 조금 더 확대돼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제대로 읽은 게 얼마나 될까, 그리고 읽은 것을 토대로 적절히 말하고 써왔나, 누군가의 노력을 헌신짝처럼 폄하한 건 아닐까로 부풀려졌다. 부정적인 리뷰를 쓰고 나면 우울해지곤 한다. 계속되는 걱정과 염려는 자기합리화된 내적 목소리로 잠재웠다. ‘괜찮아. 시간을 들여 읽었는데 성에 안 차면 뭐라 할 수 있는 거지.’
다시 책 얘기로 돌아가 요 근래 내 관심사이자 화두인 모녀관계를 소재화한 책을 열심히 읽는 편이다. 방송에서 [착한 내 딸의 반란]을 제작했을 정도로 한국의 딸들은 착한 딸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데 저자는 한 번씩 정말 신랄하게 엄마를 욕한다. 과거의 기억을 호출해 엄마의 실체를 저격한다. 설령 엄마가 그랬다 해도 보통은 침묵하고 대충 내편에서 편집해 넘기는데 저자는 관계의 저면을 파고든다. 엄마가 이해가 안 되고 모순덩어리이고 말도 아닌 경우도 잦았다고 집중 공격한다. 나라면 대놓고 엄마의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을까. 난 못할 것 같고 그래서 대신 모녀관계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 글을 집중적으로 읽는 것일 게다.
<오이디푸스 왕>을 남자들이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이유가 남자들끼리 암암리에 공유하면서도 비밀로 간직하는 부분을 다뤄서일 것이다. 엄마의 삶이 딸에게 미확인 우주비행물체처럼 그림자를 드리우는 경우가 많다. 엄마가 준 성분을 몸에 지니고 있을뿐더러 그 너머 가치관이나 생각, 행동, 취향 등 알게 모르게 지배를 받는다. 사십대가 되어 돌아보니 엄마로부터 정서적 독립을 일찌감치 했어야 옳겠지만 아직도 여전히 지난날 엄마가 했던 말과 행동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희생이 싫었던 나는 엄마와 달리 독신으로 지내리라 마음먹었다. 그때 생각은 결혼하지 않으면 자유로울 줄 알았다. 엄마의 삶이 따로 없는 듯해 엄마가 가엾고 불쌍했다. 무조건 잘해드려 남편이나 다른 가족이 채워주지 못한 부분을 보상해드리고 싶었다.
헉 한숨이 토해질 만큼 같은 환경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동생들이 바라보는 엄마는 달랐다. 그들은 굳이 착한 자식이 되고자 애쓰지 않았다. 문제는 엄마와의 사이가 매우 좋았는데 어느 순간 엄마의 모순과 한계에 노출되면서 혼란스러워 방황했다. 지금도 엄마를 끔찍이 생각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밉고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지금은 엄마와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떨어져 사는 경우가 흔하지만 예전에는 주위시선이 곱지 않았다. 게다가 결혼을 안 하더라도 독립해야 할 시점에 엄마가 크게 아팠다. 그 당시 다른 형제들에게 많이 실망했고 그 계기로 성격도 좀 바뀌었다.
내 안에 분노라는 것이 자리 잡았다. 내가 잘못하거나 나로 인해 빚어진 고통이 아닌 형제로 인한 널뛰기는 어쩔 도리 없이 자멸감과 암울함의 수렁으로 나를 내몰았다. 이 세상에 혼자인 듯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내 뒤로 숨어버리는 엄마가 미웠다. 그렇게 가슴에 박힌 악감정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화병의 독성과 무서움을 몸소 겪었고 예전과 다른 나도 낯설었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에 가족이 태클을 걸며 같이 넘어지자 할 때 나는 나를 지키는 방법을 몰랐다.
그때까지의 삶이 문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충격은 더 컸다. 그만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고 흔들리다 주저앉았다. 문학을 논하고 인본학적 가치를 힘주어 말하는 사람이 가족과 화합하지 못한다는 게 수치스럽고, 이런 내가 남 앞에 설 자격이 있는지도 마음 한구석을 후벼 팠다. 상대의 말을 들을수록 점점 더 멀어지고 닫히는 마음은 이론과 실제, 머리와 가슴,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분열케했다. 결국 마음속 괴로움은 몸의 반란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주인이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니 몸이 말썽을 부려 휴지기를 가질 수 있었다. 한참 일 할 나이에 내 스스로 일을 줄이거나 끊는 일은 차마 있을 수 없다 생각했는데 몸의 이상이 눈치 보는 잡념을 정리했다.
이렇게 장황하게 내 얘기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많이 사랑하고 연민이 일었던 엄마가 늙어갈수록 모든 불행의 원인 같아 미울 때가 가끔 있는데 그런 감정조차 이 책은 포장하지 않고 여실히 드러낸다. 남 앞에 보이기 민망해 꽁꽁 얼어두려던 해묵은 감정을 해빙시켜준다. 뒤틀려 있던 부분들이 펴지며 제자리를 찾는 기분마저 들었다. 침묵과 건너뛰기가 반드시 성숙과 건강한 관계를 뜻하지 않는다. 딸들은 엄마와의 갈등과 모순을 크고 작게 겪으며 성장하고 나이를 먹는다. 저자는 엄마의 집을 처분하며 살구나무를 정리하던 차에 살구들을 자기 침실로 가져와 엄마와의 시간과 추억을 살린다. 처음에는 노골적으로 병든 노모를 향해 솟구치는 불만이 짙지만 서서히 딸은 엄마가 자신에게 준 것을 재기억해 나간다.
살구를 절임으로 가공하는 과정은 엄마와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기록하는 일과 병행한다. 여자라는 이유로 겪어야 할 몸서리치게 희디 흰 얼음의 시간부터 엄마의 병이 심해졌을 때 감행한 여행까지 서로 상관없는 듯한 이야기지만 밤하늘이 무수히 많은 별들을 품듯이 한 공간에서 반짝인다.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엄마를 알아가며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흔적의 파편들을 쓸어 담는다. 독자는 저자의 순회하는 글에서 연결점을 찾지 못해도 적어도 작가는 이야기하기와 재생을 통해 하나의 전체를 보았을 것이다. 그녀가 <멀고도 가까운>에서 들려준 이야기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의 가능성이고 선 잇기일 뿐 다시 출발점에 서면 또다른 길이 펼쳐지면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그 어디에도 하나의 이야기만이 존재할 수는 없다.
가끔 왜 살아야 하는 건지 허무감과 외로움이 치밀 때가 있는데, 삶은 꽃처럼 화려하게 잠시 피었다 이내 저물지만 탄생에서 죽음까지 이어지는 준엄한 오디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꽃에는 굳이 붙이지 않는 오디세이라는 말 웅덩이에 한참 빠져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정해진 운명과 반경 안에서 살다 가는 거품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내고 다음을 열어두는 것, 그게 이야기든 자식인 듯 내일을 향해 발걸음을 떼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눈물겹도록 존엄하다는 걸 공감하게 됐다. 간혹 자식들이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엄마라고 비난하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뱃속에 품고 인간답게 걷고 말할 수 있게 돌봐준 시간과 애씀을 무용화해선 안 될 것이다. 저자가 말했듯이 지금 백지라고 해서 그것이 예전에도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 사라지고 지워진 시간을 살리는 일을 저자는 책에서 해냈다. 알츠하이머 말기에 접어든 여든셋의 엄마의 이전 삶을 부활시킨다.
평소 신념이 돌아가시지 않은 분을 미리 엄하게 그리워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멀고도 가까운 엄마에 대해 온냉탕을 드나들며 한 꺼풀 때를 씻겨낸 시간이었다. 앞으로 함께 할 엄마와의 시간이 변덕을 그만 좀 떨고 믿음직하고 살가운 투게더이길 바라본다. "보름달아, 내 소원은 엄마와 웃으며 천천히 늙는 거란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물 위에 가만히 내버려두었던 배를 앞으로 몰아보는 게 바람이야. 꼭 들어주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