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명되지 않는 일상은 난감하다. 밑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한없는 쳇바퀴 속에서, 정해종은 어느 순간 스쳐지나 가듯 포착되는 상념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상념들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삶의 근원으로부터 울려 오는 비밀한 / 목소리' 로 들려 온다. (「적멸보궁에 무엇이 있길래」) 그러나 불미스러운 진창 같은 세상 속에서 '옴마니반메훔'의 眞言을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정해종 시의 많은 부분은 삶의 통념에 기대고 있고, 이러한 시적 태도는 그를 우울증의 수렁에 빠지게 한다. 정해종 시인이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곳의 세계는 '나태와 무능, 무지와 교만'이 '일상을 지배하는 위대한 권력자'로 군림한다. (「K씨의 근황」)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 앞에 시인은 무력하다. 무력감은 패배적인 목소리로 세상의 불미스러움에 대해 직설적으로 토로하게끔 만든다. '한 나라의 역사가 불미스러운 사건들과 / 그 후유증의 연속이었으므로' 시인은 일종의 도피처럼 '역사로부터 먼곳을 배회' 한다. (「내 마음의 쿠데타」) 정해종 시의 패배감은 시적 자아가 불미스러운 삶을 벗어나 '굳이 정당하지 않아도 좋은 / 마음의 전복을 꿈꿀' 때에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내 마음의 쿠데타」) 꿈꾸지만 결국 패배할 것임을 단언하기에 '마음의 쿠데타'는 도전적인 힘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그의 시가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시에 나타난 무력감이나 우울증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정해종시의 우울증의 깊은 심연은 어떤 면에서 삶의 통념과 맞닿아 있다. 정해종 시인이 삶의 통념에 기대어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은 그의 시 곳곳에서 감지할 수 있다. '삶은 누구에게나 완고한 법이라며, / 너도 이제 삼십이니 / 나가서 뿌리내려야 하지 않겠냐고 / 누군가 자꾸 등을 떠민다' '사는 게 다 기적이다' (「암벽에 서다」) '세상엔 당연히 일어날 일 외엔 /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게 當然之事이다' '진부함을, 진부함의 지겨움을, 진부함의 고통을 / 견디는 것, 그것이 출세의 길이다' (「당연한 일」) 등등의 시구를 살펴보면 그의 시선은 삶의 통념을 향해 있다. 삶의 통념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삶에 대한 이해라고 해석할 때, 그것이 과연 시인이 견지해야 할 올바른 자세인지에 대해서는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시인이 세상의 통념을 그저 안타깝게 받아들여서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인정해 버린다면, 시인은 세상의 통념에 발이 묶인 채 질질 끌려 다니다가 정말 진창에 빠져 버리고 말 것이다. 시인은 진창에 발을 딛고 있더라도 그곳에 완전히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진창으로부터의 끝임 없는 일탈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정해종 시에서 보이는 삶의 통념에 기댄 아슬한 곡예가 그 위험함을 넘어서 아름다움을 전해 주는 순간은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삶의 근원으로부터 울려 오는 비밀한 / 목소리'와 만날 때이다. '소주병 꼭지에 눈을 대고 세상을 보는 법'을 터득한 시인은, '마음을 비우고 들여다보면 아귀다툼 그칠 날 없던 / 아현동 뒷골목이 평화스럽게만 보인다' (「푸른 소주병」) 라고 말한다. '삶의 근원으로부터 울려 오는 비밀한 / 목소리' 는 세속적인 삶의 공간을 벗어난 '월정사 전나무 숲' (「적멸보궁에 무엇이 있길래」) 에 이르렀을 때도 들려 오지만, 서울의 어느 가난한 산동네 '이른 새벽의 우물가' (「우물 하나」) 에서도 만날 수 있다. 또한 '의식과 무의식 사이 / 삶과 죽음 사이'의 순간, 삶의 통념에 젖은 시인의 삶을 탐색하듯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는 '늙은 고양이'를 통해서도 전해진다. (「누군가 보고 있다」, 「늙은 고양이와의 대화」) 삶의 통념에 기댄 그의 시적 자세는 '곡예처럼 아슬아슬' (「암벽에 서다」) 하지만, 그가 진창 같은 세상의 불미스러움에 안간힘을 버티며 머물러 있다는 사실과 眞言처럼 찾아 드는 깨달음이 그의 시의 위태함을 받쳐 주는 하나의 버팀목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정해종은 끝내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탓'에 '영원한 환자' (「구제받지 못할 병동」)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시인은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서 그것을 내적으로 인격화하기에 본원적으로 '영원한 환자'이다. 그것은 시인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조화의 감정을 느끼든지, 존재하는 현실과 아직 오지 않았으나 있어야 할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든 지간에 동일한 문제인 것이다. '세계의 자아화'라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