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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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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유성룡은 조선시대의 문관, 학자,호는 서애이며 1566년 문과에 급제, 1590년에 우의정에 이른 후 좌의정 등의 벼슬을 거쳐 영의정까지 이른 인물이다. 그가 쓴 [징비록]은 임진왜란 야사로 16권 7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임진왜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한 책으로 전란 후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해서 저술한 것이다. 위정자의 한 사람으로 7년간의 처참한 전란을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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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유성룡은 조선시대의 문관, 학자,호는 서애이며 1566년 문과에 급제, 1590년에 우의정에 이른 후 좌의정 등의 벼슬을 거쳐 영의정까지 이른 인물이다. 그가 쓴 [징비록]은 임진왜란 야사로 16권 7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임진왜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한 책으로 전란 후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해서 저술한 것이다. 위정자의 한 사람으로 7년간의 처참한 전란을 회고하며 참회와 다시는 이런 참사가 없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기록한 것으로 '징비'란 [시경]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이 책의 체재는 권 1-2는 제목이 없고 권 3-5는 근포집, 권 6-14는 진사록, 권15-16은 군문등록, 난후잡록 등으로 되어있다. 임진왜란 전 외교관계를 비롯하여 전란중 제해권, 국민들의 항쟁 등에 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중요한 사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그중 군문등록 중의 잡록은 일종의 군담소설로 당시의 정세를 능란한 필력으로 기록한 것이다. 1633년에 [서애집]을 낼 때 수록하였고 10년후에 독립된 16권의 [징비록을 간행하였다. 1659년 일본 쿄오토 야마토야에서 중간하였는데 숙종은 [징비록]의 일본 유출을 금하였다는 기록도 전하고 있다. 서애 친필의 필사본 1책은 국보 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k******2 2000.06.27.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이 시대에는 왜 <징비록>과 같은 기록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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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돌아보면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을 꼽으라면 나는 1)신라의 삼국 통일, 2)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3)임진왜란, 4)경술국치(庚戌國恥)의 4가지 사건을 꼽겠다. 앞의 두 가지는 이 서평의 대상과 별 관계가 없기에 제외한다. 그러나 세번째와 네번째 사건은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지만 모두 '일본'과 관련이 있다.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모르지만, 일본과 한국 사이의
"이 시대에는 왜 <징비록>과 같은 기록이 없는가?" 내용보기
한국사를 돌아보면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을 꼽으라면 나는 1)신라의 삼국 통일, 2)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3)임진왜란, 4)경술국치(庚戌國恥)의 4가지 사건을 꼽겠다. 앞의 두 가지는 이 서평의 대상과 별 관계가 없기에 제외한다. 그러나 세번째와 네번째 사건은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지만 모두 '일본'과 관련이 있다.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모르지만, 일본과 한국 사이의 기록을 보면 일본에 대한 호감은 어느 순간에 사려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징비(懲毖)록>은 성격이 좀 다른 기록이다. 다른 사료들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한-일 관계 서적들이 일본의 잔학성과 제국주의적 속성을 비판하고 있는 데, 중점을 두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은 철저하게 자기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책의 서문격인 <자서(自序)> 부분만 보아도 "십여일 동안 세 도읍이 함락되고, 온 나라가 모두 무너졌다"라고 쓰고 있다. 당시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일본)에 대한 비판보다는 스스로의 허약함에 대한 반성이 깊게 엿보인다.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본서의 내용을 가슴을 파헤친다. 왜란 발생 이전에 일본의 사신인 '강광'과 '평의지'가 보인 행적에 대한 서술과 피난길에 오르는 임금의 앞을 가로막고 하소연하는 백성들의 모습은 당시의 우리사회의 문란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본다. 게다가 전쟁의 도중에서도 자기 목숨과 몫을 챙기기에 바쁜 탐관오리들에 대한 서술은 정말 당시에 정승 판서를 지낸 인물이 쓴 책인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솔직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겉으로는 명나라의 구원병에 대해 황은(皇恩) 운운하지만,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의 행패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1차 구원병의 장수인 '조승훈'과 2차 구원병의 장수인 '이여송' 등이 우리나라 관리와 임금에게 보인 행패와 무례함, 그리고 정유재란 당시의 명나라 수군 제독인 '진린'의 행패에 와서는 앞의 겸사(謙辭)가 단순히 헛된 말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주국가로서의 안타까움, 그리고 문란한 내정 등 솔직함이 구절마다 배여나고 있다. 유성룡 선생은 책을 쓴 목적에 대해 '지난 일을 경계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기 위해서' <징비록>을 쓴다고 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식의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논란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때, 박정희 정권이나 다른 현대사의 쟁점이 되었던 사건에 대한 새로운 <징비록>이 없는 것이 왠지 아쉬움을 던져주고 있다.

[인상깊은구절]
이에 재신(宰臣) 노직 등은 묘사(廟祠)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궁인들을 호위하며 성문을 나섰다. 이것을 보자 이속(吏屬)과 불량한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칼을 빼어들고 길을 가로막아 함부로 쳤다. 위판은 길바닥에 떨어지고 모시고 가던 재신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재신들을 막고 욕설을 퍼부었다 "너희들은 평일에는 앉아서 국록(國祿)을 먹다가 이제는 국사를 그르치고 또 백성마저 속이느냐?" 나는 이 때 임금이 계신 곳으로 달려가다가 보니 길 위에 모여 있는 부녀들과 어린 아이들까지도 모두 노기가 등등해서 서로 떠들고 있었다. "성을 버리고 도망하려면 왜 우리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불러들여다가 적의 손에 어육(魚肉)으로 만들게 무어냐?"
4*******i 2001.08.1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