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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 ‘마음’은 사라지고 없다 남회근 저작선 8 『능가경 강의』 편집자 노트
이미 그 마음은 사라지고 없다. 연말연초 끼고 다니던 교정지 뭉치와 파워북의 무게와는 유도 아니게 무겁던, ‘보도자료’를 써야 하는 끔찍한 마음은 사라지고 없다.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아, ‘이건 나만의 의례야’ 하며 이불 빨래, 냉장고 청소, 베란다 유리창 닦기, 묵은 쓰레기 버리기, 커튼 빨기와 정말 하기 싫은! 빨래한 커튼 걸기 등등, 손목이 시릴 만큼 온갖 일을 찾아 하며 궁싯거리던 그 마음도 사라지고 없다. 그러니 지금, 이 편집자 노트를 쓰는, 『능가경 강의』 편집자로서의 마음도 곧 사라지고 말 것임을, 안다. 그리고 『사전론』을 대하는 편집자의 마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왜 관형사가 여기 있지, 수식어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이상한데. 바로 위 문장에선 ‘두 가지’로 쓰고 그다음엔 ‘2가지’로 되어 있네. 뭘로 통일할까, 꼭 통일을 해야 하나, 아니, 통일을 해도 되기는 한 걸까. 일관성은 편집자의 강박일 거야. 아니지. 원칙이 있어야 하잖아. 야, 사전 어휘만 분석해도 사회의 변화 발전상을 읽을 수 있겠는걸. 그런데 갈수록 어렵네.’ 새 원고를 대하여 갖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사라질 것이다. 지금, 이 문단을 쓰고 나서, 어, 이런 걸 ‘일거양득’이라 하나, 하며 어쭙잖은 생각도 잠시 떠올랐다 사라진다. 이 마음이 일어나는 이유도, 안다.
과연 ‘나’를 이루는 건 무엇인가
마음은 이런 건가 보다. 무언가를 보고, 어떤 일을 생각하고, 무슨 행동을 하고, 어떤 마음을 떠올리고, 어떤 상황에 처하는 등,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어떤 대상에 잇달아 두서없이, 정처 없이, 생겨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것을 이어간다. 그러나 생겨났다 사라진 마음이 다 사라지는 건 아니다. 많은 것이 얕거나 깊게 기억으로 저장되어 몸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져 ‘나’를 이룰 것이다. 그렇게 잠들어 있던 마음은 어떤 계기가 생기면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라 바다에 파도가 치듯 연이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내 몸과 마음과 머리가 기억하고 거기에 새겨진 습관대로 행동할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습기’라고 하는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어떤 현상을 대하여 생각하고 행동하고 판단하고 분별하고 선호를 따지며 ‘나’를 만들어 갈 것이다. 몸과 마음에 뭔가 ‘큰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기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여기에 ‘내’ 의지라고 부를 만한 것, ‘내’ 정신이라 말할 만한 게 있기는 한 걸까. 잘 모르겠다.
논리의 양극단을 오가며 치밀하게 ‘마음’을 탐구한 이 대단함이라니!
심신이 크게 바뀌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한평생 마음먹고 노력해도 안 될 수 있다. 하지만 몸과 마음에 새겨진 때를 볼 수 있고 그것을 닦아 가면 조금은 나은 삶을 살 수 있지는 않을까, 싶기는 하다. 문제는 그런 실천과 성과를 대단한 것인 양 착각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능가경 강의』는 마음이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작동하며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논리의 양극단을 오가며 한 치의 틈도 논박한다. 불교 사상이 성숙한 후기의 대승 경전답게 여러 교리가 포함되어 뒤섞여 있고, 논리는 세세하고 치밀해 지금 우리의 불교문화에선 외면받기 쉽다. 그러나 마음의 문제를 궁구하지 않으면 쉽게 잘못된 길을 걸을 수 있다. 견해가 얄팍해질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괴롭기는 하겠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기만 하면. 마음이 잘 보이기만 하고 더 나아가지 않으면. 지금부터 어림잡아 1500년 전에, 인간 의식의 행로를 이렇게 치밀하게 밝힌 것은 실로 대단하다.
얼마 만에 편집자 노트를 쓰는 지 기억도 잘 안 나는 부키 편집실 말년병장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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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경(楞伽經)』은 초기 선종의 소의경전이면서 법상 유식 계열을 대표하는 대승경전이다. 한역본으로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의 송역본『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4권) , 보리유지(菩提流支)의 위역본 『입능가경(入楞伽經)』(10권) , 실차난타(實叉難陀)의 당역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7권)이 있다. 중국 선종 초조 달마가 이조 혜가에게 ‘여래심지요문’으로 전한 것이 바로 『능가경』이다. 달마는 이조에게 법을 전하면서 "내가 중국의 모든 경전을 보았지만 오직 『능가경』 네 권만이 심인으로 삼을 수 있다"고 했다. 남회근 대사(1918~2012)가 풀이한 『능가경 강의』(부키, 2014) 는 『능가경』 판본 세 가지 가운데 송역본을 대본으로 하되, 위역본과 당역본 모두 참조하고 있다.
『능가경』의 종지는 인생의 신심성명(身心性命)과 우주 만상의 근본 체성(體性)을 직접 가리키는 데 있다. 부처님은 상(相)·명(名)·분별(分別)·정지(正智)·여여(如如)의 오법(五法), 변계집성·의타기성·원성실성의 삼자성(三自性),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말나식·아뢰야식의 팔식(八識), 인무아·법무아의 이무아(二無我)로부터 분석하기 시작해 마음과 물질의 실체인 여래장식으로 총괄적인 답을 제시한다. 또한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ㆍ관찰의선(觀察義禪)ㆍ반연여선(攀緣如禪)ㆍ여래선(如來禪)의 네 가지 선(禪)을 제시하고 있다. 『능가경』 은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부처를 이루는 단계로 성지삼상을 언급하는데, 무소유상, 자원처상, 자각성지구경상이다. 성지삼상은 소승에서 대승에 이르는 것으로, 무소유상은 공의 과위를 증득하는 것이고, 일체 제불의 자원처상은 과거 여러 부처님들이 세운 보리대비심에서 나온 자발적 대원력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자가성지구경상은 일체의 법상에 대해 아무런 집착이 없는 것으로, 여환삼매의 몸을 얻어 일체 제불이 수행해 나아갔던 여러 경지로 나가는 것이다. 선종의 삼관설도 능가경이 말하는 성지삼상과 연관이 있다. 삼관설은 초관 파본참, 이관 차중관, 삼관 답뇌관을 말한다. 초관은 반야의 공성에 들어 반야의 지혜를 얻는 것이고, 이관은 반야의 지혜로써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이고, 삼관은 번뇌를 소멸시켜 속세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유나 무 양극단의 상대적 견해에 빠진 외도를 비판한다. 외도의 특징은 경험세계를 벗어난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골몰한다는 데 있다. ▶무상 비판: 토끼에 뿔이 없는 것을 보고 무라고 하는 외도 "일부 외도에서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도의 근본이라고 생각해 이러한 사견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 하네. 그들은 일체의 여러 법이 모두 인에 따라 다하기 때문에 본래 아무런 본체가 없다고 생각하네."(124쪽) ▶유상 비판; 소에 뿔이 있는 것을 보고 유라고 하는 외도 "그들은 지수화풍의 사대가 서로 의지하여 물질이 되며, 물체의 미세한 성질이 모두 물리적 변화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네. 따라서 각종 원소의 차별에서 모두 그 형상과 수량을 유추할 수 있다고 본다네."(125쪽) ▶분별상 비판:허공과 형색이 다르다는 망상을 품은 외도 "그들은 단지 물리적 색상과 허공 그리고 그 가운데 일체 현상과 법칙만을 알고 거기에 집착하나, 분석하고 종합하여 허공을 분별하는 이치를 알지 못하네. 그렇게 해서 색상과 허공을 절대적으로 다른 두 외물계의 것이라 분리해 버리네. 허공을 무라고 보고 색상을 실유로 보아 여기에 근거해 차이를 분별하는 망상을 만들어 낸다네."(127쪽) 책 말미에 당나라 현장법사가 지은 '팔식구규송'과 청말의 법상학 연구자 범고농(1881-1951)이 해설한 '팔식규구송관주해'가 실려 있다. 그리고 남회근 선사가 표로 정리한 '팔식규구송총표'도 소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