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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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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어떠한 말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할 수 있을까.. 꾸준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 유명한 책 ‘싯타르타’를 읽었다. 좋아하는 사람,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다가가기에는 늘 긴장된 탓에 뭐든 부자연스럽고 경직되듯 이책을 마주하는 내마음이 이와 같았나보다. 그 어떤 책도 큰 어려움없이 읽고 즐기고 만끽하던 내가 이 책은 어쩜 이리도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기만 하던지...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씹어 빠짐없이 내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마음은 한마디로 욕심이었던것같다. 이야기가 절정에 다다를수록 소름이 끼쳤다. 소름이 끼치는 이유를 몰라 나도 난감할 정도다. 싯다르타의 돌멩이 이론은 쉬운듯 하면서 난해하고 우스운듯 하면서 심오하고 가벼운듯 하면서 모든 만물을 다 품은듯 무겁게 다가왔다. 이 세상 그 모든 가르침들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말로 형용되어 다시 태어나는 순간 참뜻은 사라진다는 싯다르타의 진리도 곰곰히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찌보면 참말이다. 가르침은 아무런 단단함도, 아무런 부드러움도, 아무런 색깔도, 아무런 가장자리도, 아무런 냄새도, 아무런 맛도 갖고 있지 않아. 그 가르침이라는 것은 말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지. 자네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바로 이 가르침이라는 것, 바로 그 무수한 말들이 아닐까 싶어. 그 까닭은 말이지, 해탈과 미덕이라는 것도, 윤회와 열반이라는 것도 순전한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야, 고빈다. 우리가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 다만 열반이라는 단아만이 존재할 뿐이지. 싯다르타의 삶을 통해 나로하여금 깨닫게 된 것들을 말로 표현하지 않겠다. 그저 내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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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바라문의 아들인 싯다르타는 찬란한 미래가 보장된 젊은이였다. 어린 나이에 그는 삼라만상과 하나이자 불멸의 존재인 아트만(참된 자아라는 뜻)이 마음속에 있음을 알아챘다. 아버지는 지식욕에 불타는 싯다르타가 바라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인 고빈다 또한 누구보다 싯다르타를 사랑했다. 그는 싯다르타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고빈다 뿐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 누구나 싯다르타를 따랐다. 그가 하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마을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싯다르타는 그런 삶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고빈다도, 마을 사람들도 자신을 만족시켜 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승들은 경건한 의식으로 신에게 경배를 드렸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음 속 영혼이 느끼는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궁극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아트만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끝없이 싯다르타의 마음속을 맴돌았다. 가장 지혜로운 현인들은 그것이 살이나 뼈 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생각 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몸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 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면 아트만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수없이 질문을 던졌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싯다르타는 마음속에 불만과 불안을 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불만을 터뜨렸으며,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생을 마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빠졌다. 아무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사는 아버지는 늘 죄업을 씻어냈다. 이대로 간다면 싯다르타는 아버지처럼 날마다 죄업을 씻어내며 살아야 할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찾으려고 했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근원적인 영혼을 찾고 싶었다. 생각 끝에 그는 아버지 곁을 떠나 사문이 되기로 결심했다.
1. 바라문의 아들에서 사문으로
사문(沙門)은 머리를 깎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도를 닦는 탁발승을 말한다. 최고의 바라문이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가 사문이 되겠다는 싯다르타의 뜻을 허락할 리 없다. 아버지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아들 또한 침묵으로 굳은 의지를 표현한다. 동이 틀 무렵까지 아버지는 여러 차례 싯다르타에게 무엇을 기다리고 있느냐고 묻는다. 아들은 아버지가 이유를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 죽을 각오로 달려드는 아들을 아버지가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햇살이 내리비치는 아침에 아버지는 결국 뜻을 굽힌다. 고요 속에 잠든 도시를 떠나려고 발걸음을 떼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 고빈다가 나타난다. 싯다르타는 미소로 그를 맞는다. 싯다르타가 선택한 길로 고빈다는 주저 없이 들어선다. 그만큼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믿는다. 그가 가는 길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싯다르타는 입고 있던 옷을 가난한 바라문에게 주고 띠로 치부만을 가린 채 바느질도 하지 않은 베를 몸에 걸쳤다. 사문이 되려면 모든 것을 먼저 버려야 한다. 무엇보다 소유욕을 버려야 한다. 하루에 한 끼니만 먹어야 하고, 익힌 음식은 결코 입에 대지 말아야 한다. 몸이 좋아하는 것과 거리를 둠으로써 사문은 몸을 청결하게 해야 한다. 몸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과 같다. 마음이 청결하려면 몸에서 새록새록 피어나는 욕망을 일체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스무여드레 동안 단식을 하자 싯다르타의 몸은 눈에 띄게 살이 빠졌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몸으로 그는 사방을 떠돌았다. 떠돌면서 그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벌이는 온갖 삶들을 보았다. “모든 것이 속임수투성이였고, 모든 것이 악취를, 모든 것이 지독한 거짓의 악취를 풍겼으며, 모든 것이 그럴싸하게 속여 마치 참뜻과 행복과 아름다움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믿게 하였으며, 모든 것이 부패하여 있었다.”(27쪽) 이토록 부패한 세상과 아예 인연을 끊어야 청결한 몸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세속에 물든 자아가 극복되고 사멸된다면 궁극의 경지인 아트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싯다르타는 생각했다. 그러려면 욕망 덩어리인 몸에 굴복하면 안 되었다. 수직으로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서도 싯다르타는 고통을 감내하며 말없이 서 있었다. 고통이 극에 달해 아무렇지도 않은 순간까지 견디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일이었다. 깨달음은 인간이 생각하는 범주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 범주 바깥으로 기꺼이 나아갈 때 비로소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시작된다. 싯다르타는 이와 함께 호흡을 줄이는 방법 또한 배웠다. 욕망이 강해지면 숨 또한 거칠어진다. 온갖 물욕이나 식욕, 성욕에 빠진 몸을 떠올려 보라. 거칠어진 숨으로는 깨달음의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다. 고요니, 적정(寂靜)이니 하는 세계는 한없이 고요해진 숨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장소인 셈이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 마음으로 싯다르타는 자기 초탈 수련과 침잠 수련을 하였다. 자기를 벗어나 다른 생명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훈련이었다. 그는 왜가리가 되어 하늘을 날아오르고, 물고기를 잡아먹고, 울음을 울었다. 죽은 재칼의 몸으로 들어가서는 하이에나들한테 갈가리 찢기고, 콘돌들에게 뜯겨 껍질이 벗겨지고, 뼈다귀만 남았다가 먼지가 되어 들판으로 흩날려가 버리는 경험을 했다. 그는 살아 있는 몸이면서 동시에 죽은 몸이었다. 한 몸에 삶과 죽음을 간직한 싯다르타는 틈이 날 때마다 다른 생명들 속으로 들어가 다양한 삶과 죽음을 경험했지만 매번 제 몸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 몸이 있는 한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싯다르타는 사문으로서 이제 한계를 느꼈다. 다른 생명에게로 침잠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로부터 도망치는 것일 뿐이다. 세속을 사는 사람들도 술을 마시면 일순간 망아에 빠지는 때도 있지 않은가.
사문 생활에 짙은 회의가 들 무렵 싯다르타는 고타마라고 불리는 성자의 소문을 들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서 세상의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킨 세존, 부처라는 것이었다.”(36쪽) 윤회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킨 부처라고? 싯다르타가 그토록 찾아 헤맨 길이었다. 그는 사문의 최연장자에게 떠날 결심을 알렸다. 그 사문은 힘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었다. 오랜 세월 쌓아올린 고요를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다. 싯다르타는 욕망에 불타는 노인의 시선을 자신의 불타오르는 시선으로 제압했다. 노인은 싯다르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여러 차례 몸을 숙여 싯다르타와 고빈다 두 젊은이에게 축복의 말과 몸짓을 전해주었다. 몇 해 만에 다시 떠나는 길인가? 싯다르타는 사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배움을 바탕 삼아 그는 지금 고타마라는 새로운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난다.
2. 사문에서 수도승으로
고타마는 부처의 길을 가는 자는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처의 길이란 번뇌를 끊는 길이다. 번뇌는 욕망이다. 고타마는 부드럽지만 확고부동한 목소리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四諦)를 가르쳤고 팔정도(八正道)를 가르쳤다. 설법을 들은 순례자들은 교단에서 받아주기를 청했다. 고빈다도 기꺼이 제자가 되었다. 싯다르타는 세존의 가르침이 훌륭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고빈다처럼 세존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다. 다음 날 새벽, 고빈다가 신참 수도승의 행렬에 들어간 사이, 싯다르타는 숲속을 거닐었다. 그곳에서 그는 세존 고타마와 우연히 마주쳤다. 싯다르타는 세존의 훌륭한 가르침에 탄복하면서도 또 다시 순례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인과응보라는 영원한 사슬로 묶여 있는 이 단일성의 세계가 세존이 끌어들인 해탈에 의해 균열이 생겼다고 말했다. 해탈이 있다면 영원하고 단일한 세계 법칙의 전체 구조가 다시금 파괴되는 게 아니냐는 물음이다.
세존은 싯다르타를 “지식욕에 불타는 그대여”라고 부른다. 진리 앞에서 의견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번뇌(지식 또한 번뇌다)로부터 해탈하는 것만이 가르침의 목적이라고 세존은 강조한다. 싯다르타는 세존의 가르침에 다른 의견을 달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세존이 이른 해탈의 길은 가르침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깨달음의 경험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깨달음은 스스로 이르러야 하는 길이다. 싯다르타는 그래서 순례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모든 가르침과 스승을 떠나서 홀로 목표에 도달하든가 아니면 죽든가 하겠지요.”(55쪽)라는 싯다르타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부처의 가르침만으로는 자신의 가장 내면적인 곳까지 뚫고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길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게 될까
고타마 곁에 고빈다를 남겨 두고 싯다르타는 다시 순례를 떠난다. 유랑을 하면서 그는 ‘자아’에 대해 생각한다. 자아로부터 벗어나 아트만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끔찍한 고행을 거듭해 왔다. 완전한 자라고 칭송받는 고타마를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들을 통해 수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는 결국 그들 곁을 떠나 이렇게 떠돌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문득 싯다르타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서 아트만을 추구하는 게 지금까지 그가 행한 모든 일이었다. 궁극적인 것을 찾기 위해 자아를 산산조각 부수어버리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본 세상인 듯 눈앞에 기묘한 세계가 펼쳐졌다. 파랑이 있고, 노랑이 있고, 초록이 있다. 하늘이 있고, 강이 있고, 숲이 있다. 그 가운데 싯다르타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이제 더 이상 마야의 요술도 아니었고, 이제 더 이상 마야의 베일도 아니었으며, 이제 더 이상 무의미하고 우연한 현상계(現象界)의 다양성도 아니었다. 다양성을 무시하고 통일성을 추구하며 깊이 사색하는 바라문에게는 무의미하고 우연한 현상계라는 것은 경멸스러웠다. 파랑은 파랑이고, 강은 강이었으며, 비록 싯다르타의 내면에 있는 파랑과 강물 속에, 하나이자 신적인 것이 숨어 있다 할지라도, 여기에 노랑, 여기에 파랑, 저기에 하늘, 저기에 숲, 그리고 여기에 싯다르타가 있다는 그 사실이야말로 바로 신적인 것의 본성이요 의의였던 것이다. 의의와 본질은 사물들의 배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 속에, 삼라만상 속에 있었던 것이다. (63쪽)
싯다르타는 자아로부터, 현상계로부터 벗어나는 길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현상계는 감각을, 번뇌를, 욕망을 낳는 세계라는 인식을 떨치지 않으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그는 완전히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햇다. 세존이 가르침을 베푸는 기원정사를 떠날 때만 해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어찌 고향에 돌아간단 말인가. 그는 더 이상 옛날의 자신이 아니다. 바라문이 아니며, 사문도 아니며, 승려도 아니다. 이제 그는 아무 데도 의지할 데가 없다. 부처 또한 탄생하는 순간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을 외쳤다던가. 모든 것을 끊어낸 존재만이,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존재만이 유아독존할 수 있는 법이다. 싯다르타라는 새로운 인간은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여는 길을 스스로 열어젖힌 셈이다.
3. 수도승에서 상인으로
새로운 인간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찾아 길을 떠난 싯다르타는 운명처럼 카말라를 만난다. 카말라를 만나기 전 그는 배로 강을 건네준 뱃사공과 하룻밤을 지내게 되는데, 뱃사공은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온다’는 말로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저곳으로 떠나는 싯다르타의 순례 여행을 표현한다. 그러니까 그가 카말라를 만난 곳은 저곳(동시에 이곳)이다. 카말라는 유명한 기생이다. 새로운 인간이 된 싯다르타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기생이라는 게 참 재미있지 않은가? 싯다르타는 카말라에게 친구면서 스승이 되어달라고 말한다. 그는 카말라를 스승 삼아 쾌락의 기술을 알려고 한다. 쾌락을 멀리 해야 할 수도자가 기생에게 사랑과 쾌락을 배우겠다고? 카말라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세련된 신발을 신고, 머리카락에서는 좋은 향내가 나고, 지갑에는 돈이 두둑하다. 그 모든 것들을 손에 쥐려면 일을 해야 한다.
카말라가 싯다르타에게 무슨 일을 할 줄 아느냐고 묻는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이냐는 물음이겠다. 그는 사색과 기다림과 단식을 말한다. 수도를 하는 과정에서는 필요한 것들이지만, 돈을 벌 때는 별다르게 필요 없는 것들이다. 싯다르타는 어린아이처럼 하나하나 배워나간다. 새롭게 태어난 인간이니 배울 게 수두룩하다. 그것이 왜 하필 세속이냐고 묻지는 말라. 새로운 인간 싯다르타는 현상계를 거부하지 않는다. 진리는 현상계 속에 있다고 그는 굳게 믿고 있다. 카말라에게 배울 사랑의 기술이 싯다르타를 세존과 같은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 줄지 어찌 아는가? 카말라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싯다르타의 능력을 높이 산다. 그녀는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인 카마스와미를 소개시켜 주며, 그의 하인이 아니라 그와 동등한 사람이 되라고 싯다르타에게 말한다. 카말라가 베푸는 첫 번째 가르침이다.
카마스와미는 상인답게 싯다르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단도직입으로 묻는다. 싯다르타는 다시 사색과 기다림과 단식을 말한다. 카마스와미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그 또한 카말라처럼 싯다르타의 읽기 능력을 높이 산다. 카마스와미가 꼼꼼하고 정열적으로 사업을 한다면, 싯다르타는 이 사업을 유희로 여겼다. 일을 마치면 싯다르타는 아름다운 옷과 멋진 신발을 입고 신은 채 카말라를 찾았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만나듯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싯다르타에게 그녀는 쾌락의 근본부터 가르쳤다. 쾌락을 주지 않고서는 쾌락을 받을 수 없다는 대원칙 아래 그녀는 몸짓 하나하나, 어루만짐 하나하나, 접촉 하나하나, 눈길 하나하나가 모두 제각기 비밀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기꺼이 그녀의 제자가 되었다.
카마스와미의 사업을 도우면서 싯다르타는 당장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았다. 앞서 얘기한 대로 그에게 사업은 유희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취하기보다 사람들과 더불어 좋은 관계를 맺기를 원했다. 카마스와미는 간혹 자신이 주인이고 싯다르타는 하인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얘기했지만, 싯다르타는 결코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든 이를 차별 없이 대하는 그를 사람들은 신뢰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았다. 사기를 치기 위해 그를 찾는 사람도 있었다. 세속 사람들과 관계를 맺다 보니 깨달음을 향한 꿈은 자연 가슴 깊은 곳으로 밀려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사람들을 만나 열심히 일을 했고, 밤에는 카말라와 더불어 깊은 쾌락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시간이 흘러 카말라는 싯다르타를 최고의 연애 대장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은근히 싯다르타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고백했다.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관능에 눈을 뜬 싯다르타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사문의 삶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에게 어린애 같은 속세 사람들은 아직도 낯선 존재였다. 고타마의 곁을 떠난 후 싯다르타는 장사하는 법, 권력을 휘두르는 법, 여자들과 즐기는 법, 아름다운 옷을 입는 법, 하인들을 부리는 법,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물속에서 목욕하는 법을 배웠다. 한마디로 그는 세속적인 부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세속 사람들과 자기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만용이 깃들기 시작하면서 그는 부자들이 잘 걸리는 영혼의 병에 걸렸다. 돈은 써도 써도 늘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늘 지친 기색이 감돌았다. 깨달음을 향한 열망 또한 스러진 지 오래였다. 그는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도박에 빠졌다.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돈을 잃기도 하고 따기도 했다. 그럴수록 마음속 불안감은 더욱 더 심해졌다.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다시 도박을 하는 악순환 속에서 그는 지치고, 늙고 병들었다.
싯다르타가 고타마 이야기를 점점 잊어가는 사이 카말라는 반대로 고타마를 향한 열망에 불타올랐다. 그녀는 싯다르타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와중에도 언젠가는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할 것이라고 간절하게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카말라의 아름다운 얼굴에도 늙음이 찾아들었다. 그녀는 그 두려움을 물리치고 싶어 부처를 따르려고 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싯다르타는 묘한 꿈을 꾸게 된다. 카말라는 희귀한 새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새가 죽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꿈이었다. 싯다르타는 새를 살펴보다가 골목 밖으로 휙 던졌고, 그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며 꿈에서 깨었다. “마치 그가 이 새와 함께 자기의 내면에 있는 가치 있는 모든 것과 선(善)을 송두리째 내던져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온통 고통으로 뒤범벅이 되었다.”(121쪽)
암담한 마음으로 싯다르타는 정좌(靜坐)를 한 채 죽음으로 도배된 마음과 마주했다. 바라문의 아들로 산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신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그 위로 가만히 맴돌았다. 정든 고향을 떠나 사문 생활을 시작한 때가 떠올랐고, 완성자 고타마를 만난 때도 떠올랐다. 그를 떠난 이후로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다. 돈을 벌었고, 카말라와 더불어 쾌락에 빠졌다. 돈과 쾌락으로 궁극적인 곳에 이르렀던가? 아니다. 그곳에서 더 멀어졌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유희야말로 바로 윤회라고 부르는 것이다.”(124쪽)라는 생각에 싯다르타는 이른다. 윤회를 반복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싯다르타는 비로소 유희가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는 망고나무 아래 앉아 사람들과 맺은 관계를 청산했다. 그리고는 훌쩍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났다.
4. 상인에서 현자(賢者)로
싯다르타가 말없이 떠난 후, 카말라는 금빛 찬란한 새장에 갇힌 새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녀 또한 그렇게 싯다르타를 마음에서 내보냈다. 하지만 뱃속에 이미 자리 잡은 싯다르타의 씨앗만은 내버리지 못했다. 싯다르타와 마지막 밤을 보냈을 때 생긴 씨앗이었다. 카말라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긴 것도 모르고 다시 길을 떠난 싯다르타는 큰 강가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이 강을 건너 이곳(그때는 저곳이었다)에 왔다. 지금은 이곳을 떠나 저곳(그때는 이곳이었다)으로 가려고 한다. 저곳으로 가면 지금 마음을 헤집고 있는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물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침을 뱉었다. 차라리 물속에 빠져 죽는 게 낫다. 두 눈을 감고 죽음을 향해 한 발을 내디디는 순간, 마음 저 깊은 곳에서 경련하듯 한 마디 말이 울려나왔다. ‘옴’이라는 소리였다.
‘옴’ 소리가 온몸으로 퍼지는 바로 그때 싯다르타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절망에 빠진 자기와 마주쳤다. 몸은 지금 ‘옴’ 소리를 내고 있다. 살아 있다는 표시겠다. 마음 깊은 자리에서 밀려나오는 이 몸의 소리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는가? 싯다르타는 옴을 웅얼거리다가 그대로 야자나무 밑동에 풀썩 쓰러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도 없는 잠이었다. 나지막이 울리는 강물 소리를 들으며 그는 눈을 떴다. 경이로운 마음으로 나무들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죽음 속으로 몸을 내던지려는 순간에야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신성(神性)이 반응을 했다. 몸을 곧추 일으키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승려였다. 오래 전에 헤어진 친구인 고빈다가 승려가 되어 맞은편에 앉아 졸고 있다. 기척을 느낀 고빈다가 눈을 뜬다. 그는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한다. 뱀이 자주 나오는 곳에 사람이 누워 있어 지켜줄 겸 일행을 보내고 여기에 남았다고 한다. 싯다르타 입장에서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고빈다는 다시 순례 길을 떠나고, 싯다르타는 강가에 남아 뱃사공을 찾아가기로 한다. 뱃사공을 기점으로 싯다르타의 새로운 인생길이 시작된다. 뱃사공의 이름은 바주데바다. 그는 오랜 세월 뱃사공을 하며 많은 사람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건네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묵묵히 강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강이 들려주는 침묵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듣다보니, 사람들이 하는 말 또한 묵묵히 들어주는 습관도 자연스레 그의 몸에 새겨졌다. 싯다르타는 바주데바를 따라 뱃사공이 되기로 한다. 시간의 흐를수록 싯다르타의 웃음은 바주데바의 웃음을 닮아갔다. “그의 미소는 뱃사공의 미소와 거의 마찬가지로 밝은 발하였고, 거의 마찬가지로 행복으로 밝게 빛났으며, 그 뱃사공의 미소와 꼭 마찬가지로 수천 개의 잔주름으로 빛을 발하고, 꼭 마찬가지로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꼭 마찬가지로 노인다워 보였다.”(159쪽)
어린아이와 노인의 얼굴을 공히 품고 있는 뱃사공은 저녁이 되면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몇 해나 흘렀을까, 부처 고타마를 신봉하는 제자들이 강가로 모여들었다. 세존이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죽어가는 부처를 향해 순례 길을 떠난 여자도 있었다. 카말라였다. 그녀는 오래 전에 기생 생활을 청산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 상태였다.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순례 길을 떠났다가 그만 독사에 물렸다. 도와달라고 외치는 모자의 소리를 듣고 바주데바가 급히 그리로 갔다. 오두막으로 오는 세 사람을 싯다르타는 보았다. 맨 먼저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옛날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었다. 동시에 그는 뱃사공의 팔에 안겨 있는 카말라를 보았다. 고요해진 줄 알았던 그의 마음이 마구 요동을 쳤다.
카말라는 눈을 떴지만 독이 몸속에 퍼져서 살 가망이 없는 상태였다. 그녀는 싯다르타의 눈빛을 보고 예전의 그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눈치 챘다. 고타마 부처에게로 가는 길은 이미 끊겼다. 그녀는 싯다르타를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했다. 카말라가 떠난 자리에 소년 싯다르타가 남았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마음을 싯다르타는 아들에게서 느낀다. 하지만 아들은 이미 세속에 물들어 있다. 게다가 아들은 자신을 보호해주던 엄마까지 잃었다. 싯다르타는 온 마음을 기울여 아들을 보살폈지만, 그럴수록 아들은 엇나가기만 했다. 바주데바는 아들을 도시로 돌려보내라고 싯다르타에게 충고했지만, 그는 아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혈육만큼 사람을 안타깝게 만드는 이들이 어디에 있을까? 자신을 억압하려 드는 아비를 향해 아들은 증오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해댄다. 어떤 경우에도 아들은 아비와 같은 길을 갈 수 없다.
그예 아들이 배를 타고 강 저편에 있는 숲으로 도망을 친다. 싯다르타는 아들에게 별다른 일이 없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쉬지 않고 아들이 간 곳을 향해 달려갔다. 붙잡으려는 게 아니다. 한 번만 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놓을 수 없어서이다. 어느덧 카말라가 살던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싯다르타는 자신이 욕망에 휘둘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깨닫는다. 아들로 해서 생긴 마음속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본 채로 그는 침잠 상태에 빠져들었다. 거리에서 일어나는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 채로 그는 마음속에서 울릴 한 소리를 듣기 위해 여러 시간 동안 귀를 기울였다. 공(空)의 상태가 되어야 들릴 소리였다. ‘옴’ 소리였다. 무감각 상태에 빠진 그를 깨우는 손길이 느껴졌다. 바주데바의 손길이었다. 해맑은 두 눈이 부딪쳤다. 두 사람은 강가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아이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엄청난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싯다르타는 다시 고요한 강가로 돌아온 것이다.
5. 아빠와 현자 사이
아들을 잃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아이와 대동한 부모를 볼 때마다 싯다르타는 부러움을 느꼈다. 이제 그는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사람들을 보았다. 오만을 떨쳐낸 따뜻한 눈으로 그는 세상 사람들을 보았다. 아빠의 눈이었다. 아빠의 눈으로 보자 세속을 사는 사람들의 욕망이 더 이상 어리석은 어린애 같은 짓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그런 욕망에서 생동하는 불멸을 보았다. 싯다르타가 그들보다 유일하게 앞서 있는 것이라면 생명의 단일성을 의식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들로 인한 상처만은 도무지 아물지를 않았다. 참다못한 그는 어느 날 그리움에 사무쳐 강을 건넜다. 배에서 내린 순간 싯다르타는 강물이 웃는 소리를 들었다. 그냥 웃는 게 아니라 비웃음 소리였다. 그는 강물 위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이 아들 때문에 마음 아파한 것처럼, 아버지 또한 그때 그 시절 자신 때문에 마음이 아팠으리라.
윤회다. 똑같은 일의 반복이다. 강은 싯다르타가 벌이는 행동이 얼마나 오래된 습관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오두막으로 돌아온 싯다르타는 바구니를 짜고 있는 바주데바 앞에 앉아 속마음을 하나하나 털어놓기 시작했다. 바주데바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말을 들어주었다. 싯다르타의 마음에 쌓인 고통과 불안이 그를 향하여 서서히 흘러들어갔다. 바주데바의 마음속으로 흘러든 고통과 불안은 은밀한 희망으로 세척되어 싯다르타의 마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바주데바는 바로 그 순간 그의 마음에 신으로 자리 잡았다. 신은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 있음을, 그래서 진심을 고백하면 신은 곧바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걸 싯다르타는 깨달았다. 동시에 그는 자신 또한 바주데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신이 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진실이다.
바주데바는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이야기한다. 강물은 온갖 소리를 내며 흐른다. 강물이 내는 소리를 들으려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 세상에 일어나는 온갖 소리들이 몸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을, 나아가 몸을 텅 비워야 한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어제도 흘렀고, 오늘도 흐르며, 내일도 흐를 것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듯한 모습으로 여여하게 흐르는 이 강물에서 싯다르타는 흐르면서 멈추고, 멈추면서 흐르는 생명의 단일성을 엿본다. 인생이란 물처럼 흐르는 것이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을 수밖에 없다. 수많은 생명이 하나로 어울릴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흐름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썩지 않기 때문이다. 싯다르타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 바주데바는 기다렸다는 듯 환한 빛을 발하면서 숲속으로 길을 떠난다. 깨달음에 이른 현자가 온몸으로 내는 빛이다.
바주데바를 떠난 나루터를 홀로 지키며 사람들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네준 싯다르타는 친구인 고빈다와 마지막으로 해후한다. 싯다르타도 늙었고, 고빈다도 늙었다. 싯다르타가 수많은 곤경을 겪으며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듯, 고빈다 또한 세존의 가르침을 몸속 깊이 받아들여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하지만 고빈다는 뱃사공이 곧 세존이라는 이치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이야기한다. 한편으로 그는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206쪽)라고 말한다. 선이 진리라면 악도 진리다. 신이 진리라면 악마도 진리다. 선을 실천하라는 성자의 말은 모두 거짓이란 말인가? 현실은 마야에 불과하다는 부처의 말 또한 거짓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말이 지닌 한계일 뿐이다. 깨달음을 얻은 자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들을 말로 깨우치는 데서 비롯된 한계 말이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은 가르침을 받는다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깨달음은 스스로 깨쳐야 가능한 일이다. 마음속에 아트마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다. 강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음으로써 깨달음을 얻은 바주데바는 바로 그것을 알았다. 그를 따른 싯다르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바주데바의 깨달음과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처는 부처의 깨달음을 얻었고, 바주데바는 바주데바의 깨달음을 얻었으며, 싯다르타는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부처라는 스승=허상을 잡고 있는 고빈다에게 이 점을 말하려고 하지만,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말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도 고빈다는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답게 싯다르타가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인정한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 싯다르타에게 절을 올린 고빈다는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간다. 싯다르타는 강가에 남는다. 이곳과 저곳은 이렇게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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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아직은 서툰 글솜씨 때문에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 나는 나의 인생 책으로 선정하고 다른 출판사의 싯다르타도 주문을 한 상태다. 곁에 두고,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 한권 더 추가되어 너무 행복하다. 필사하기도 참 좋은책인것같다. 바라문의 아들 싯다르타는 내적 고뇌가 많다. 첫 장은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세상에 대한 삼라만상에 대한 내적 고뇌가 극에 치달아 모든 것을 비우고 사문이 되기 위해 친구 고빈다와 함께 집을 나선다. 3년정도 사문 생활을 해도 내적 충족이 이루어지지 않자 세존, 부처를 찾아 다시 떠난다. 친구 고빈다는 세존 고타마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역시나 고타마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번에는 친구 고빈다를 두고 혼자 떠나게 된다. 싯다르타는 기생 카말라를 통해 세속적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날 새의 꿈을 꾸고는 딘시 번뇌와 고통에 사로잡혀 강을 찾아 떠난다. 뱃사공을 다시 만나고.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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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내가 살고 있는 현재와 별 다를게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고전을 찾게 되고, 고전에서 현재의 삶의 지혜를 배우고 싶게 만든다. 그것이 고전의 매력이다. 뭔가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가 연결되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고전중에 추천할 책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싯다르타를 추천하고 싶다. 읽어 보면 안다. 왜 싯다르타 싯다르타 하는지를...이 도서 추천합니다! 꼭 한번씩 읽어 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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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전공했다. 그것도 영어영문학. 그래서 입시 준비하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홀로 서점과 도서관에 박혀 문학책 탐독하는 것이 삶의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아주 어린시절부터 영어에 재주가 많고, 실력도 좋아 외길 인생 영어영문학 파고들기로 10대부터 30대 초반까지 전 세계 수많은 책들을 읽고 해당 작가들의 개인적인 삶과 인생 파헤치기에도 중독스러울리만큼 집착했건만. 왠걸. 결혼하고 출산하니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할 시간이 택도 없구나. 아이들 케어하기 바빠서, 심지어 아이들 책 읽어줄 시간조차 없는데 내 책은 무슨. 여튼 헤르만 헤세 글은 좋아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좀 지루했다고 평가했었지만 나이 40대가 넘어서자 생각이 바뀐다. 그래서 구입한 책. 줄거리는 적지 않는게 예의겠지. 직접 읽어보라. 나도 3분의 2읽었는데, 내게 시간이 좀 넉넉하게 주어지는 삶이 다시 펼쳐지길 소망해본다. 눈을 떠서 잠들기 까지 책만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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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 가르침과 깨달음에 관심이 있다면, 괜히 이 사람 저 사람이 쓴 잠언집이나 경전해설 같은 걸 보지 말고, 비록 오래 전에 파란 눈의 독일인이 쓴 소설이긴 하지만 이 책을 읽으세요. 세계의 동시성과 단일성... 그러한 세계에서 미추와 선악의 구분은 무용하고 불필요함을... 아니 미추와 선악이 함께 하기 때문에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음을... 누구나 마음 속에 부처가 있음을... 이 책을 통하여 체험하세요. 난 이 책을 읽으며 지혜를 체험했지만, 내가 체험한 그 지혜를 당신에게 전해줄 수는 없으니 그 지혜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으세요. 역시 인간의 성장을 통해 정신을 고양시키는 이야기는 헤르만 헤세가 우주최강인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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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빌려주셔서 빌려서 읽어봤는데 내용이 너무 좋아서 선물용으로 한권 더 구매했어요. 이 돌멩이는 돌멩이다.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장차 언젠가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 .... 같이 고생하는 친구들에게 찍어서 보내줬어요 어렵다는 글 많이 봤는데 어렵지 않게 술술 읽었어요 ! 강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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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에 이어 읽은 책이다. 데미안을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고 이 책을 잡았는데, 데미안보다 훨씬 유익하게 읽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면서도 많은 내용들이 들어있다. 제목에서부터 내용 파악이 어느정도 될 듯싶은데, 한 권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도 참 드물지 싶다. 들인 시간에 비해 많은 깨우침을 줄 수 있는 책이라 지인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그래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검증이 된 유명한 인문고전을 읽으면 시간을 낭비할 일이 없다. 좀 생뚱맞지만, 싯다르타는 겨울에 읽으면 좋겠다. 창밖이 보이는 따뜻한 거실에서 차한잔을 곁들이며 다시 한 번 읽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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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얼핏 느끼기에 마냥 어려울것만 같지만 생각보다 술술 읽혀 편안하게 볼 수 있어 좋았다.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나 지혜로운 스승들 사이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는 자아에 대한 갈망으로 청년 싯다르타는 고행하는 사문이 되고자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런 그를 말리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느끼고 슬픈 마음으로 아들을 떠나보낸다. 친구 고빈다와 함께 사문의 길로 들어선 싯다르타는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나 역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낀다. 그때 고타마라는 현인의 소식을 듣고 그의 이야기를 듣기위해 싯다르타는 친구 고빈다와 그를 찾아가지만, 고빈다가 고타마에게 귀의하는 길을 택하는것과 반대로 이번에도 싯다르타는 정착하지 못한다. 그는 이후 창부 카말라를 만나 그녀에게서 쾌락을, 장사치 카와스와미에게 부와 향락과 사업을, 어린아이같은 사람들로부터 노름, 속세의 즐거움들을 배우지만 모든게 헛됨을 깨닫고, 강가에서 옴의 소리를 들은 후 단잠을 든다. 다시 깨어난 싯다르타는 새로 태어난 느낌을 받고 이전에 자신을 태워주었던 뱃사공 바주데바와 재회한 후 뱃사공으로 살아가며, 강의 소리를 듣는 법, 그리고 바주데바로부터 경청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그의 고뇌는 카말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등장으로 다시 들쑤셔지고, 그가 아버지를 떠났던 과거를 떠올리며 깊은 슬픔을 느낀다. 이 책은 싯다르타의 고뇌와 불안, 자아와 지혜, 진리를 향한 성장소설과도 같다. 그는 많은 이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을 얻고자 하지만 결국 누구도 자신의 지혜를 남에게 '말'로써 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소설에서 이 부분이 매우 인상 깊었다. 결국 남에게 배우는 것이 아닌, 스스로 귀기울여 깨닫는 것, 그것이 진정한 내 것, 나의 자아이자 세상이치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