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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없고 읽어야 하는 책은 많던 시절, 고득점을 꿈꾸는 입장에서 모든 책을 다 읽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시험에 지문으로 곧잘 등장하는 부분은 암기하고 나머지는 일명 요점정리를 통해 익히는 게 전부였는데, 그렇게 접한 작품들을 마치 상당히 몰입해 읽은 것과도 같은 착각에 빠져 십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무슨 이유에선가 방문한 도서관에서 이인직의 소설집을 택했다. 대표적인 작품인 ‘혈의 누’와 ‘귀의 성’이 담긴 책이었다. 부끄럽게도 초반의 정확히 다섯 문단은 눈을 감고도 암송이 가능할 정도로 명확히 기억이 났지만 이어지는 부분부터는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읽어도 읽은 게 아닌 요상한 독서는 입시 위주의 교육이 부작용이었다. 작품을 해설하는 데 있어서도 이미 짜인 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어느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어떠한 형식을 지닌 신소설이라는 식의 설명을 정답을 고르고자 외우고 또 외웠는데 여전히 유효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었지만 두 작품은 성질이 다소 달랐다. 혈의 누는 전형적인 신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부국강병의 꿈이 현실에서 좌절되자 문인들은 제 작품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애썼다. 혈의 누에서도 그와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조국이 힘이 없어 개개인은 시련을 겪는다. 이를 극복하는 일에는 일본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이 큰 힘을 제공한다. 일본에서 오랜 세월을 거주한 옥련과 미국을 지향하는 구완서는 강대국의 지원에 힘입어 조선의 계몽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학업에 열중한다. 처음에는 삶에의 의지도 없어 자살하려는 모습을 보이던 인물들이 신지식인으로서 정혼을 거부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는 오늘날의 소설과 같은 치밀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난리통에 헤어져야만 했던 옥련의 가족들이 상봉하고 다시 헤어지는 모습에서는 조선의 계몽이라는 대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가족의 모습이 느껴지기도 한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녀의 생존을 확인했으니 그보다 더 기쁠 일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다가온 이별에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흐뭇함을 표하는 모습에서는 비장미마저도 느껴진다. 결말을 놓고 보면 작품은 미완성에 가까워보인다. 두 인물이 사랑의 결실을 맺었는지, 옥련이 한국으로 되돌아가 가족과 다시 상봉했는지 따위는 더 이상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전통적인 가치를 계몽이 억누르는 순간이 작가 이인직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이후 내용에 대해 이제 막 기대감을 품게끔 되는 대목에서 작품은 과감하게 끝을 선언하고야 만다. 귀의 성은 혈의 누에 비하면 조금 더 완성도가 높아 보인다. 구어체이긴 하나 작가가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해버리는 문체에서는 과도기적인 색채가 묻어나지만, 계몽이라는 단 한 가지의 주제를 돋보이게 만들고자 모든 것을 포기하는 무모함은 범하지 않았다. 무조건 해피엔딩이어야만 한다는 식의 사고로부터도 자유로워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우리나라는 미개하다는 사고는 드러난다. 일단 아버지 강동지는 돈을 좇는 경향이 너무도 짙다 못해 제 딸에게 첩의 삶을 선사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자본주의는 분명 아닐 진데도 물질을 추구하는 정신세계는 강동지 외에도 여러 인물에게서 읽힌다. 반면 김승지의 본부인에게서는 죽음을 부를 정도의 질투심만이 그득하다. 그녀의 질투심은 점순이의 물질욕과 만나 살인을 부른다. 작가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법칙을 충실히 활용해 작품을 전개시킨다. 비극의 강도를 강화시키기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그로 인해 소설은 전반적으로 끔찍해진다. 모든 인물을 처단하고야 마는 대목은 국가와 국가가 약육강식의 질서를 충실히 따르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이완용의 충직한 개인비서로서의 역할을 했던 이인직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일까. 최초의 언문일치 문장 등을 구사하며 문학계의 역사를 쓴 점은 크게 마음에 와닿지가 않았다. 혼란기에 오롯이 작품 창작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이 친일의 결과일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작품에서도 왠지 모를 지난날의 무기력함이 느껴지는 듯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