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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버릇이랄까? 가끔 독서를 하다가 유난히 읽히지 않는 책을 만날 경우, 특히 그 책이 외서일 경우 ‘번역이 별로인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반대로 책이 잘 읽힐 경우에는 ‘작가가 글을 정말 잘 쓰네’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내가 가진 생각을 들여다보면, 잘 읽히면 작가가 뛰어난 것이고, 잘 읽히지 않으면 번역의 문제인 것이다. 번역가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억울할 일이고, 작가의 입장에서 봤을 때 책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다면 번역가를 향해 눈 흘길 일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번역가에게는 이래저래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번역의 사전적 의미는 뭘까? [명사]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의 글로 옮김’ 사전적 의미만 보자면 창작이라는 말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전문 분야의 경우에는 창작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번역이 매우 중요할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장르가 문학일 경우, 문학적 감수성으로 쓰여진 글을 어떻게 글자만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우리말로 된 글들, 심지어는 말조차도 가끔은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시키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다. 그렇기에 이런 경우 번역은 창작의 또 다른 갈래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능력적인 면에서 원서와 비교해보고 이런 부분이 번역이 어색하다거나 하는 평가를 할 수는 없다. 우선은 독자의 입장에서 번역된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안도만이 클 뿐이다. P59 문학 번역가는 두 갈래로 나뉘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는 원작자의 의도를 중시해야 한다는 오리지널리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문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액티비스트다. 전자는 아주 미세하고 사소한 원문상의 차이까지 존중하여 번역어로 최대한 정확하게 되살리려 힘쓴다. 후자는 자의적 정확성보다는 조옮김한 음악과 같은 새 작품의 매력에 관심을 기울인다. 훌륭한 번역가라면 양쪽을 모두 겸비해야 한다. 번역은 언어와 언어 간 의미의 이동이 아니라 두 언어가 주고받는 문답이라고 페비어는 썼다. 저자가 전문번역가이다 보니 자신이 왜 전문번역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또 번역가가 갖는 입지가 어떤지, 시 번역의 고충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특히 노벨문학상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 격하게 동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노벨문학상 결정이 영어권 심사위원들에 의해 이뤄지다보니 영어로 번역되어야만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전혀 틀린 말로 들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제는 우리 나라도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에서 나온 생각일 것이다. 가끔 원작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진정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그 속에 숨은 뜻이 무엇인지,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확인해보고 싶은 욕심에서 말이다. 그래서 언어가 되는 사람들은 일부러라도 원서를 읽는 것일테고 말이다. 시종일관 겸손한 느낌이 드는 글들이 나에게는 편하게 읽혔다. 페이지 수에 비해서 읽는데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겸손한 말투로 자기 주장을 펴는 저자로 인해 저자가 얘기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손을 번쩍 들고 ‘동의합니다’라는 말을 던져줘야 할 것 같았달까? 저자가 던져주는 번역을 옹호하는 말들이 ‘파이팅 하시라’고 응원하게 만드는 흔치 않은 책이었다. P8 번역은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외국어 문학 작품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전통적인 역할을 담당할 뿐 아니라,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편하게 하고 유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중대한 능력을 지닌 구체적인 저작의 존재를 뜻합니다. 번역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것을 새로이 알고, 그것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고, 그것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도록 돕습니다. P20 번역가의 경험에서 독특한 점은, 번역가는 원문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 원작자의 음성을 듣는 청자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번역문, 즉 제2의 원문을 들려주는 화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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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김영하 작가가 ‘위대한 개츠비’ 번역 책을 내놓으면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원문에 없는 문장들을 사이사이에 추가했기 때문이다. 나는 김영하 작가의 새로운 시도(?)에 박수를 보냈지만 독자들이나 번역 전문가들은 편치 않았던 것 같다. 원저에 가필한 것을 두고 원저를 변형했다는 의견이 다수 있었고 피츠제럴드와 김영하의 공저로 봐야 한다는 웃긴 얘기도 나왔다.
책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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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내 서평쓰기중 주의사항은 개인적인 내용을 뺀다는 것이었는데, 딱 이번만) 한때 금융경제전문번역을 했었다. 그만두게 된 이유중 하나는, 바로 이 책의 작가 이디스 그로스먼이 빡친 (흠, 또한 이런 속된 표현도 쓰지않는것도 주의사항중 하나였지만, 이 책을 읽다가 느낀건 정말 '이 작가가 번역가를 둘러싼 현재이슈에 참 빡쳐있다...화나있다보다 빡쳐있다가 훨 적절한 느낌이 들었다), 번역가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있었다. 여기서 읽은 문학번역은 금융경제번역과는 좀, 아니 매우 다르다. 문학번역은 제2의 창작이며 솔직히 뛰어난 번역서가 그닥 많지않아 만만한 불만의 대상이 되곤하지만, 꽤 뛰어난 지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절대 동감, 금융경제번역은 바로 그 정도와 인과관계 등에 있어 절대 읽는 이가 오해하지않도록 정확해야한다는 것에 있다. 숫자나 정도, 인과관계로 인해 돈이 오가는거 생각하면 매우 중요하고 금융공학까지 나오면, 가끔 별별걸 다 공부하며 해야하지만, 가끔 보고서 일부가 경제지에 나와 뿌듯하게도 했지만, 그 책임감에 비해 결과물을 대하는 입장들은, 이는 오로지 하나의 참고일 뿐이며 콜럼부스가 어떻게 계란을 세웠건 일단 세운 계란은 쉬워보인다는 입장인지라, 영어에서 한글로, 한글에서 영어로 몇시간 고군분투하면 머리 자체가 돌아가지않음에도....).
그와 함께, 번역문을 무시하는 리뷰어에 대한 불만도 토로했는데, 글쎄 솔직히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엔 영문학을 일문학으로 소개한 것을 또 재탕하고, 매번 소개된 작품을 다시 소개하며 새로운 작품 소개에 그닥 전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느껴지지않는터라 (관심작가 작품이 출판되면 알람이 오게 했는데 영문학 경우 클래식의 경우 거의 새로 번역된게 없다) 또 한번은 한 작가의 작품을 놓고 여러 번역물을 보다 황당하기도 했고, 기억할 만한 번역자가 한손에 꼽히는지라 (스페인어 한 분, 법의학 추리물 한 분은 믿고 본다) 번역서를 읽는 것보다 제작하는 환경이 더 황페하다고 느꼈고, 최근에 피츠제랄드의 개츠비 번역 이슈가 매우 반가웠다.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급하게 번역되어 원성을 듣던 환경에서, 이젠 차분히 과연 어떠한 번역을 해야하는가 하는 단계로 넘어간듯 보여서.
이뿐만 아니라, 그녀는 또한, 비영어권문학 번역에 소극적인 출판계와 독자 등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했는데, 난 읽다가 의외로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비영어권 사람으로 '난 행복한 처지였구나'하고. 그들은 영어로 쓰여진 책을 읽는데도 자족하지만, 난 비영어권인지라 더욱 더 많이 중국, 일본 등의 책을 접할 수가 있어서.
개인적으로 공감과 찔림을 오가며 읽은 이 책은, 번역서를 대하는 자세와 시력을 교정해주는 듯하다. 아직 문학번역을 하기 위한 자질에서 문학과 문화보단 언어를 중시여기는, 이들이 꼭 읽어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p.s : 1) 제목은, 잘 외우지 못하는 내가 참 인상적이여서 지금도 기억하는, Mary Wolstonecraft의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에서 따왔다. 그냥 이 책을 대하니 이 제목이 떠올랐다.
2) 나처럼 오해하실 수 있는 분들을 위해: 81페이지 밑에서 7째줄. 선생님을 쓰신 책의 번역가로서..가 아니라 선생님이 쓰신...가 맞지않을까 하고 질문했는데, '그 문장이 비문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저자 선생님이 틀리게 쓴 문장으로 편집자분도 처음에 교정을 보았었는데, 저자 선생님이 비문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하셨다고. 그럼에도 오해의 소지가 있어 편집자가 뒤에 영어 문장도 함께 넣었다고' 합니다.
그러게, 질문 전에 한번 더 생각할껄. 왜 영문까지 넣었는지 ㅡ.ㅡ;;;; |
당대 최고의 남미 문학 번역가 중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디스 그로스먼 번역가의 삶과 매혹이 담긴 강의노트 《번역 예찬》. 문학평론가이자 학자인 저자 이디스 그로스먼은 부업으로 단편소설을 번역하다가 90년부터 전업 번역가로 활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번역 예찬》에서는 강연에 기초하여 번역은 왜 중요하냐는 질문을 토대로 번역의 매력과 문학 읽기의 즐거움, 번역의 가치, 번역가의 과제를 논하고 소설 외 시 번역 방법론을 다루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번역이란 행위는 제2의 작품으로서의 번역으로 다루고 있어 사뭇 강한 어조로 번역의 가치를 주장하고 한편으로 번역가를 깎아내리는 출판계 실태를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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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번역, 읽기 쉬운 번역, 충실한 번역이란 무엇일까? 이디스 그로스먼이 말하는 번역가는 그저 문학의 시녀, 시종 역할이 아닌, '작가'라고 말한다. 그래서 분별없는 직역주의 번역을 꼬집는다. 문학 번역의 목적은 번역서의 독자가 정서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원서의 독자가 맛본 심미적인 경험에 상응하는 원문의 맛을 보길 바라는 것이다. 기본적인 문자적 의미 외에 함축하고 있는 의미나 암시를 알아보는 능력을 갈고닦아야 하는데 이런 과정은 원작자가 창작에 쓰는 언어에 대한 노력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번역가는 원문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 원작자의 음성을 듣는 청자의 역할 뿐 아니라 번역문을 들려주는 화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 독서가라면 느끼겠지만 간접 경험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깊은 것은 문학 작품을 통해 접하게 되는 종류의 경험이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언어. 번역물이 없다는 가정을 해 본다면 아찔하다. 번역 덕에 얻을 수 있는 언어 간의 생산적인 교환은 강력한 파급력이 있어 뛰어난 소설가여도 번역 없이는 한계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번역은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한다. 문학이 중요한 것과 같은 이유와 측면에서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 문학이 있는 곳에 번역이 있습니다. 문학과 번역은 허리가 붙은 샴쌍둥이와 같아 절대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 - p44
좋은 번역이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번역의 이상향으로 충실성을 든다. 그러나 충실성을 직역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번역가는 문맥을 번역하는 사람이오, 번역가는 그 책에 대한 비평적 독서가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번역이라 함은 출판계의 일용직 노동이 아닌 두 담화 영역을, 두 경험 영역을, 두 독자 그룹을 잇는 살아있는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
『 번역가의 충실함은 어휘의 짝짓기가 아니라 문맥에서 드러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원저자의 어조와 의도와 담화 수준이 암시하고 반향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좋은 번역이 좋은 이유는 문맥상의 의미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 - p83
스페인 걸작문학을 영어로 가장 훌륭하게 옮긴 책 중 하나로 평가받는 <돈키호테> 번역의 경험담에서는 번역가로서 경험한 번역 과정에서 생기는 다양한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원작과 40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 숱한 번역서, 해설서, 학술서 등이 있는 상황에서 필연적인 어휘상의 어려움과 모호한 구절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주석의 필요성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현암사에서 2013년부터 출간 중인 100년 전의 작품인 나쓰메 소세키 시리즈가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했다. 그 시리즈를 읽으면서 번역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던 경험을 했던 나로서는 고전을 현대의 번역으로 매치시키는 작업의 중요성에 이디스 그로스먼의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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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읽지 못하는 중요한 언어가 얼마나 많고, 번역되지 않았더라면 전혀 알지 못할 소중한 문학 작품은 또 얼마나 많은지. 번역 작품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은 우리나라보다 영미 쪽이 더 심한가 보다. 저자는 자국어의 울타리에 갇힌 영미 출판계를 비판한다. 다른 언어권 문학의 번역을 육성하고 장려해야 할 이유를 많이 다루고 있는데 사상교류의 기초적 작용의 역할, 즉 독자인 우리가 번역을 통해 받는 혜택이 무엇인지를 통해 그 이유를 말한다. 노벨 문학상 심사 대상이 되려면 영어로 번역되는 것이 중요한데 정작 영미권 출판사는 번역을 꺼리는 현상으로 인해 번역 문학을 육성할 윤리적, 문화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다양한 세계와 문화를 위한 포용의 번역이 필요하다.
번역가의 문학적 감수성과 원문을 최대한 깊이 들여다보는 능력이 특히 강조되는 시 번역에 관한 이야기는 시를 즐겨 읽지 않는 나에겐 조금 어렵게 다가오긴 했다. 시를 번역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반드시 어떻게 번역해야 한다는 번역 시의 영향력과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으니 시 번역에 특히 관심 있는 독자라면 흥미롭게 읽힐듯하다.
강의를 기반으로 한 책이어서 책 분량 자체는 많지 않지만, 번역의 중요성, 번역가가 지녀야 할 자질과 과제, 번역가의 위상에 관한 알짜배기 글만 담겨있어 쉽게 책장을 넘길만한 책은 아니었다. 부록으로 이 책의 번역가 공진호님과 도서비평가 로쟈 이현우님이 번역과 번역가에 대한 화두를 국내 현실을 살펴 이야기 나눈 인터뷰가 실려있는데, 문학 번역가로 살아가면서 느낀 고민을 경험담 속에 풀어내는 공진호님과 인문서 번역의 어려움과 번역과 관련한 국내 출판계 현실을 이야기하는 이현우님의 이야기는 영미 출판계 현실에서 이야기한 《번역 예찬》에서 느꼈던 약간의 아쉬움을 보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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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가치는 물론이고 번역자와 편집자의 자질 등 번역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번역 예찬》을 통해 번역서의 비율이 높은 국내 출판 현실에서 번역의 중요성을 제대로 고민해 볼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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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책으론 주로 에세이를 읽다보니 자연스레 소설은 외국소설 위주로 접하게 된다. 헌데 외국소설을 막힘없이 거침없이 술술 재밌게 잘 읽게 되다니 좀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다른 언어로 쓰여진 것인데...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누군가의 결코 쉽지 않은 노력과 강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까닭이다.
번역... 사전을 찾아보면 뜻은 다음과 같다.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의 글로 옮김' -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하나의 언어가 있고 그 언어를 전혀 다른 언어로 옮기다니... 내가 잘 알고 있다 생각하는 한글도 때론 전혀 모르는 얼굴을 보여 당혹스러운데 잘 알기는 커녕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언어를 내가 잘 아는 한글로 옮기다니...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하지 않을까?
그치만 저자가 아닌 번역자에게 관심을 두는 경우는 드물다. 재밌게 읽고난 후 거의 대부분 저자의 다른 작품 중 또 볼 만한 게 뭐가 있을까하며 으레 '저자'와 '저자의 작품'만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같은 저자에 같은 번역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제서야 아주 조금 '번역자'에 대해 인지하게 된다. 그게 반복되면 조금 반가워지기도 한다. 물론 번역이 마음에 들었을 때의 이야기지만.
어쨌든 번역이란 건 시리즈의 경우, 한 번역자가 꾸준히 맡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중간에 사정이 생겼는지 잠깐 바뀌기도 하는데 바로 그때, 번역자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번역자가 바뀐 줄 모를 만큼 비슷하게 번역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확연히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건 대개 앞서 번역한 것보다 마음에 들지 않을 때다.
그리고 책에도 취향이란 게 있듯 번역에도 취향은 존재하는 것 같다. 원저가 어떤지 알지 못할 경우, 같은 책이라도 가장 처음 접한 번역서를 기준으로 우리말이 확립되는 것 같달까? 물론 처음으로 접한 번역이 영 엉터리가 아닐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지만.
이렇듯 번역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할 수도 있고 먹고 사는 문제는 기본이고 정성들여 작업을 해도 괜스레 억울할 만한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그런 번역에 대해 입을 연 사람이 있다.
유명한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을 번역하기도 했고 번역자로서 다수의 번역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디스 그로스먼... 그녀는 번역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번역에 대해 조목조목 말한다. 처음에는 조금 비판적인 시선으로 읽어나갔는데 읽다보니 점점 빠져들고 어느새 그녀에게 동조하고 있는 게 아닌가!
무엇보다 가장 처음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를 창조한 작가도 그 자신의 내면의 경험이나 상상을 번역하지 않을 수가 없다니(p89) 뭔가 지금까지 미처 생각지 못한 생각이라 꽤 신선하게 다가왔다.
다만, 시 번역에 관한 이야기와 여러 알지 못하는 작가들-뒤에 작가사전이 첨부되어 있지만 등장하는 페이지 아래에 각각 실려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각각 실기엔 양이 많을지라도-이 많이 등장해 조금 집중도가 떨어지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번역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이런저런 면들을 알게 해 준 고마운 번역서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물 흐르듯 매끄러운 번역'이란 그 작품이 나와는 다른 나라의 언어로 쓰여진 것이란 걸 잠시 잊게 해주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책 역시 그랬었다. 잠시 잊었으니까... 앞으로도 이런 번역서가 많이 나와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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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2007년 어느 날 예일 대학교 휘트니인문학센터 주최로 열리는 연례 강연회의 초청을 받았다. 이 강연회의 주제는 "X는 왜 중요한가"라는 것이었는데, 저자는 '번역'을 선택했다.
우리 학계에서도 '번역'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로스먼이 적을 두고 있는 미국 사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내 생각에 그로스먼은 노어노문학과 학생들이라고 해도 러시아어로 톨스토이 문학을 굳이 읽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문학 연구에서 앞으로 크게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은 그 실종된 비평 어휘를 구성하고 체계화"하는 것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견해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 노어노문학과 학생들이 영어로 번역된 톨스토이 작품을 읽는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물론 러시아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춰야 하겠지만…. 학생들이 열정적으로 파고 들어야 하는 것은 톨스토이 작품이 미국 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미국인들이 어떻게 톨스토이를 읽어야 하는지 독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학을 업(業)으로 삼고자 하는 전문가의 길로 들어설 때, 러시아어로 된 원전을 읽으면 그만이다. 그 수많은 러시아 작가의 작품을 한 개인이 평생 어떻게 통달할 수 있을까? 가령 18세기 영국 소설을 대표하는 새뮤얼 리처드슨의《클러리사 할로》 (원제 Clarissa Harlowe)를 보자. 이 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김성균 교수는 대학 시절부터 원작을 끼고 살았고, 우리말로 제대로 옮기기 위해 반세기를 함께 했다고 한다. 김 교수의 노고가 없었다면 우리는 과연 누가《클러리사 할로》를 읽어볼 엄두를 내겠는가? 저자는 다른 언어문화권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은 그 문학적 생각, 통찰, 직관을 상호 교류할 수 있도록 활성화하고 촉진하는 기초적 작용이라고 주장한다. 무척 공감이 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학창 시절 읽었던 많은 고전 작품들은 원전을 텍스트로 하기보다 일어나 영어본을 활용한 중역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대한 그로스먼의 견해는 무엇일까? 그는 다리 역할을 하는 언어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가령 최근까지만 해도 중국어 번역가들은 원작보다는 영역본을 텍스트로 삼아 중역(重譯)해 왔다는 것이다. 스페인어 번역가들이 러시아 작품을 번역할 때는 프랑스어본을 참고로 해 왔단다. 현재 우리는 수많은 번역가들의 수고에 힘입어 원작을 텍스트로 완역한 고전을 제법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여간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언어 사이를 오가며 의미를 전달하고, 동시에 두 언어의 효과와 리듬과 예술성을 들으려고 하며, 그 가운데 두 언어 사이에서 소용돌이치고 비등(沸騰)하는 기호와 의미의 혼돈 속으로 뛰어드는 경험은 환각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 80쪽 (원문) "En un lugar de la Mancha, de cuyo nombre no quiero acordarme……"
(영문) "Somewhere in La Mancha, in a place whose name I do not care to remember……" (국문) "라 만차 어느 마을, 그 이름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곳에……"
나는 그로스먼이 한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으로 "번역가도 작가다"라는 것을 꼽고 싶다. 이는 원작자의 의도와 원어의 풍미를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우리말로 적절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번역은 제2의 창작이요, 번역가는 문화 전도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로스먼의 강연과 서술은 번역을 업으로 하는 분이나 일반 독자에게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 줄 것으로 믿는다. 한편 부록으로 이 책의 옮긴이 공진호와 로쟈 이현우에 대한 작은 인터뷰가 실려 있다. 두 사람은 주로 문학 번역가로서 살아가면서 느낀 경험담, '인문서 번역의 어려움' 그리고 번역과 관련된 국내 출판계의 어려운 현실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부분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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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문학을 통해 다른 사회, 다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탐구하는 능력을 키워줍니다. 낯선 것을 익숙한 것으로 바꾸어 그것을 음미할 수 있게 해줍니다.
번역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영미권에서는 번역이 3%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가 훨씬 문학적으로 풍성한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며 만족스러웠다. 저자는 이러한 이유를 다방면으로 분석하면서 영미 문학이 제일이고 영어중심주의 국가의 자존심이 우주에서 제일이라는 이상한 자국중심의 사고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세계 공용어로 사용중인 영어권 나라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번역이 그렇게 미비한 데에는 출판에 활력이 없어서라고 생각된다.
반면 이렇게 좋은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그만큼 문학을 사랑하고 읽는 독자층이 두껍다는 반증이라 생각된다. 책 구매율이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꾸준히 독서를 즐기고 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깨달음을 얻는 독서층이 두꺼운 만큼 이러저러한 다양성을 추구하는 책들이 한국에서는 자주 있다고 보여진다. 저자는 무척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저술가이며 번역 가이다. 책 곳곳에 밑줄을 그으며 본 구절이 많았고 그간 몰랐던 번역이나 영국이나 미국뿐만 아닌 번역에 있어서의 어려움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독자 입장에서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문학 번역가는 두 갈래로 나뉘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는 원작자의 의도를 중시해야 한다 는 오리지널리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문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액티비스 트다. 전자는 아주 미세하고 사소한 원문상의 차이까지 존중하여 번역어로 최대한 정확 하게 되살리려 힘쓴다. 후자는 자의적 字意的 정확성보다는 조옮김한 음악과 같은 새 작품의 매력에 관심을 기울인다. 훌륭한 번역가라면 양쪽을 모두 겸비해야 한다. 번역은 언어와 언어 간의 이동이 아니라 두 언어가 주고받는 문답이라고 페비어는 썼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로 보여지는 이디스 그로스먼의 말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번역가 는 작가다>라는 말이었다. 원작자의 이름만 크게 보이고 번역자의 이름을 작게 표기하거나 아예 빼 버리는 행태에 대해서도 분개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저자가 번역에 갖는 자긍심과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번역이 중요한 이유는 아무리 유능하고 천재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 세계 언어를 10개 이상 습득해 마스터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 의견에는 나도 동의 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사투리, 방언이 많은 나라의 문학작품을 번역할 때는 번역자의 역량이 참으로 중요할 것이다. 저자는 타국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이러한 부분들도 놓치지 않고 책에서 지적하고 있다. "문학이 있는 곳에 번역이 있다."는 저자의 말이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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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그동안 이런 저런 번역에 대해 제기했던 불만을 반성하게 끔 하는 책이다. 우리는 그동안 번역의 가치를 많이 평가절하해 왔다. 알파벳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비영미권 언어를 번역한 책들에 대해서도 매끄럽고 유려하게 번역되었다느니, 거칠게 번역되었다느니 하는 판에 박힌 표현으로 번역자의 노고를 폄하하여왔다. 이 책의 저자 이디스 그로스먼은 전문 번역가이며, 번역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확고한 철학을 가졌다. 그리고 이 책을 빌어 번역 작업을 예찬한다. 이디스 그로스 먼에게 번역은 창작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번역으로 인해 다른 여러 나라와의 풍부한 문화들이 서로 조우하는 확장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200페이지 남짓으로 짧고, 그 중 반 정도는 시 번역 작업의 실례를 들고 있기 때문에 실제 저자의 통찰력을 읽을 수 있는 내용은 100페이지 남짓하다. 그가 단호하게 주장하는 사항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자국문화의 틀에 갇힌 채 타 언어의 영미 번역을 기피하는 영미의 출판, 평론계에 대한 비판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영미권 번역서를 많이 접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영미국의 출판업계가 영어 이외의 타언어에 대한 문화적 무시, 기피 현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별로 알 길이 없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출간 되는 번역서의 50%는 영어원서 번역본이고 영어로 번역되는 것은 6% 뿐이라고 한다. 놀라운 사실이다. 아무리 국제적 표준 언어로서 영어가 전세계적으로 자리 잡고 있고, 미국의 군사 경제력이 세계최강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영어는 다른 모든 언어와 융합하고 교류해야 풍성한 언어적 발전이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번역 및 번역가에 대한 평론가들의 관심 역시 출판사들 못지 않게 소극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영미 문화의 배타성은 비단 번역기피 현상으로 그치지 않는다. 미국민의 대다수가 지도에서 아시아의 굵직한 나라들을 찾지 못하고, 80 퍼센트가 여권을 아예 갖고 있지 않으며 태평양과 우방으로 둘러싸인 편협함의 섬에서, 자국의 거대 소비를 충족시켜주는 각국의 역사 문화와 사회에 무지한 채 오해와 해소되지 않은 갈등, 그리고 전쟁이 자라기 비옥한 땅을 가꾸고 있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미국이라고 해서 출판 시장이 그리 대단히 큰 거 같지는 않다. 필립 로스는 미국에서 책을 사는 사람을 4000 명으로 추정했다고 한다. 책을 한권 내서 그 사람들과 도서관에 팔고 나면 기본적으로 그게 다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번역 작업 자체가 갖는 문화 전달과 창작으로서의 가치를 일깨운다. 우선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와 관계함으로써 서로 영향을 주고 새롭고 풍성한 표현 수단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세번째로, 번역가로서의 직업적 자부심을 가진 저자는 미국에서 번역가들이 익숙한 풍경의 일부인듯 종종 무시되어 오고 출판업계 및 평론가들은 번역의 가치를 깎아 내리고 번역가들 역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경향이 출판업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비영미권 원서의 저조한 영어 번역과 기피현상으로 나타난다.
네번째로, 비번역가로서 가장 공감을 얻은 주장으로, 영혼없는 일대일 단어 변환식의 직역에 대한 통탄과 비판, 그리고 프로페셔널 번역가로서 좋은 번역에 대한 그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그는 단어란 개별적으로 분리될 경우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단어는 문백 전체에 필요한 부분이 될 때, 의미를 띤다고 말한다. 단어라는 것이 구절에서 개별적으로 떼어 놓으면 구절이 주는 의미를 충실하게 전달할 수 없으며 따라서 번역가는 의미를 재현하기 위해 유추를 사용하여 문맥을 번역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가 인용한 존 드라이든의 서신 번역본은 이러한 저자의 생각을 잘 대변해 준다.
저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훌륭한 글의 합은 그것을 이루는 부분 혹은 개별적인 낱말의 합보다 크다. 그리고 번역문은 원작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는 저자의 의견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가끔 좋은 번역서를 읽으면 우리가 가진 한국적인 고유 정서를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외국의 문화와 정서를 매우 현실감있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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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원어에 충실한 번역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어에 충실한 번역입니다.~~~출발어에 충실한 번역은 좀 딱딱하더라도 출발어의 독특한 구조와 표현을 살려주는 태도이고 도착어에 충실한 번역은 도착어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문장을 만들려는 태도이다. - 이희재, 번역의 탄생중에서 이렇게 번역에 있어서 도저히 합의가 되지 않는 부분이 의역이냐 직역이냐를 둘러싼 논쟁이다. 종종 중역에 대한 논쟁도 있지만 정서상 중역을 좋아하지는 않는 분위기이다. 의역이 좋을까 직역이 좋을까에 대한 답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은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전찾기와 배경 공부를 게을리하여 의역, 직역은 커녕 오역하는 경우는 둘째치고라도 좋은 번역은 직역이 많아도 잘 읽혀지고 의역이 강해도 원문이 느껴진다. 이윤기 선생이 말한 것처럼 "번역 과정에서 일어나는 언어의 변화는 '단순한 물리적 변화'여서는 안되고 '화학적 변화'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어의 문장이 우리문장으로 화학적으로 녹아 내려야 좋은 번역이다. 번역에 대한 논쟁과 다툼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있는줄 알았더니 우리가 그동안 번역의 주 대상이었던 영어권에서도 이런 논쟁이 있었다. 비영어권 문학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우리와 같은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스페인어 문학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느 "이디스 그로스먼"이라는 사람이 쓴 번역예찬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을 번역한 "공진호", 이 분은 다른책 번역보다 더 신경이 쓰였겠다. 그로스먼은 번역을 또 다른 창작으로 생각하면 이 책에서 "번역이 왜 중요한가"라는 화두를 가지고 번역의 중요성과 어려움을 설명한다. 번역가의 경험에서 독특한 점은, 번역가는 원문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 원작자의 음성을 듣는 청자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번역문, 즉 제2의 원문을 들려주는 화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글자와 문장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기분으로 번역을 하게 되면 직역이니 의역이니라는 싸움은 중요한것이 아니다. 듣는 사람이 원문을 가장 잘 이해하기 쉽게 들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단순한 한 글자의 해석이 아니라 또 다른 창작이 되는 것이다. 그로스먼은 번역을 제2의 창작으로까지 올리고 있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저자가 스페인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번역가라서 그가 예시로 든 번역의 맛을 책에서 제대로 느낄수가 없다는 것이다.(물론 나처럼 스페인어 문맹과 영어 버벅이에게는) 하지만 이 책의 번역가 공진호씨와 로자 이현우씨가 우리나라 번역에 대헤서 나눈 대담이 그 아쉬움을 덮어 주고 있다. *1 나는 그동안 문학작품 보다는 자연과학,인문과학책을 통해 번역물을 많이 접했다. 책을 읽고 번역이 마음에 안들면 이러쿵 저러쿵 불평을 하고 별점을 깍기도 했다. 번역의 어려움을 이해하면 미안하기도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았다. 마음에 안드는 번역은 더 강하게 비판해야겠다. *2 제대로 된 문학 작품번역이 2년 정도 걸린다는데 도대체 해리포터 같은 작품은 얼마나 빨리 번역되서 시장에 나오는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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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기원에 대해 호기심이 잔뜩 일어난 적이 있었다.수메르,이집트,히타이트,중국의 갑골문자 등을 문자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이들 문자가 대부분 모양과 형상을 본뜬 상형문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그런데 대학시절 외국어를 배우면서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기도 하고 우리말을 외국어로 옮기기도 하는 시행착오를 거쳤다.흥미롭고 궁금증이 일어나는 점은 처음에 누가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겼을까 이다.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 고유명사,지명,인명 등과 같이 고정불변의 단어들은 그렇다치고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는 단어들은 어떻게 뜻과 용례를 찾아냈을까 등에 대한 궁금증이다.아마 주로 조선시대 중국 및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사람들이 깨알과 같이 해당 단어와 한국어를 대조해 나가는 작업을 거쳤을 것이다.또한 2차 세계대전 후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인해 적성국가였던 러시아와 같은 나라의 문학은 1차 번역작품을 토대로 우리말로 옮겨졌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아울러 최초로 외국어를 접하면서 수고스럽게도 우리말로 잘 정리하면서 외국어와 우리말을 비교,대조해 나가려 했던 분들이 새삼스레 문화의 외교관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렇게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은 옮기는 사람의 지극 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한다.단순하게 직역을 하는 수준을 떠나 해당 언어가 쓰여졌던 시대의 역사,사회,문화,작가의 생각과 감정의 틀을 이잡듯이 세세하게 해체하고 조립해 나가야만 비로소 번역물을 읽는 독자들에게 감흥과 공감을 일으킬 것이다.그래서 외국어로 된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려면 해당 국가에 몇 년 이상 살아봐야 될 것이다.학문적인 깊이도 있어야 할 것이고 해당 국가의 역사,문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에 걸친 해박한 지식을 겸비해야 번역이 번역답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한다.또한 언어라는 것이 시대와 사회의 반영물이다.예를 들면 19세기에 쓰여진 작품이라면 19세기 해당국가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작가의 감수성과 이성,논리까지 머리 속에 있어야 할 것이다.좋은 번역물은 번역을 한 번역가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시대를 빛내 줄 명작이 될 수도 있으니 번역가는 번역을 위한 것이 아닌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좋은 번역이란 과연 무엇일까.
번역이란 창문을 열어 비치을 들이는 일이요,껍질을 깨 알맹이를 먹이는 일이며,휘장을 거두어 지성소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일이요,우물의 덮개를 거두어 물을 깉게 해주는 일이로다. -P61
번역이란 다양한 세계와 문화로의 포용을 위한 여행이라고 한다.모두에서도 얘기했듯 좋은 번역을 낳기 위해서는 기존 좋은 번역물을 원문과 대조해 보는 작업과정도 중요하고,해당 작품을 쓴 작가를 만나 작품배경과 비하인드 스토리,작가의 인생역정 등에 대해 대화와 소통을 해 보는 것도 무척 소중한 기회일 것이다.이미 해당 작가가 작고하여 세상에 없다고 한다면 작가에 대해 기록해 놓은 자료집이나 기록물 등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작가와의 마음의 교류를 해야 하고,해당 작가를 잘 알고 있는 분들을 찾아 해당 작가에 대한 예비지식을 배양해야 하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추리,스릴러,로맨스 등의 장르소설의 번역물을 자주 접하고 있다.번역가의 풍부한 상상력과 경험의 발로가 저절로 느껴지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덜 채워지고 부정교한 번역물도 심심치 않게 발견하고 있다.원작자의 의도를 중시하여 미세하고 사소한 원문상의 차이까지 존중하는 등 번역어로 최대한 정확하게 되살리려 힘쓰는가 하면,번역가에 따라서는 조옮김한 음악과 같은 새 작품의 매력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문학을 번역하는 번역가는 오리지널리스트함과 액티비스트함을 두루 겸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즉 번역은 언어와 언어 간 의미의 이동이 아니라 두 언어가 주고받는 문답이라는 것이다.
국내 모유명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작품을 구상하고 글을 전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막장에서 사용하는 연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외국어를 우리말답게 번역하기 위해서는 동의어 사전,백과사전,어원까지 미칠 정도로 뒤져야 하는게 기본 자세이며 도구로서 필수품인 것이다.해당 작품의 언어의 정서적 효과,언어를 둘러싼 사회 분위기,언어에 영향을 주는 사회 환경과 풍조,언어가 불러일으키는 느낌 등에 대한 비평적 시기견을 연마하고 확장해 나가려는 적극적이고 액티비스트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이디스 그로스먼 번역가는 미국인으로서 주로 남미 작품에 대해 번역을 많이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또한 자국의 언어인 영어가 정치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타국의 작품이 영어로 옮겨진 번역물이 많지 않다고 꼬집기도 한다.
조지 오웰은 『1984』에서 뉴스피크(newspeak)의 창조와 이것으로 의도되는 결과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빈곤한 언어와 축소된 의사소통에 처해지는 자들이 사고 과정에서 의식적인 왜곡을 하게 되는 암울한 미래를 제시했는데,이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순수한 종말론적 허구가 아니라 만신창이가 된 역사를 가진 이 세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압제적 경향을 반영한 것입니다.이 예속적 경향을 무시하면 위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게 언제 어느 곳에 나타나든 그것에 저항해야 합니다. -P65
문학과 번역이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 아닌 허리가 붙은 샴쌍둥이와 같다고 하는 이디스 그로스먼저자의 말처럼 문학 작품을 재창조한다는 의미에서 번역가의 수고스러움과 온축된 번역경험이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그럴려면 우리말에 대한 해박한 언어지식을 잘 갖추고 두루 잘 적용해 나가는 지식과 능력을 겸비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번역물은 이제 단순하게 타국어를 자국어로 옮기는 과정이 아니다.보다 독자들에게 생생한 의미 부여와 공감도를 이루어 나가야 하는 작가의 과정이라고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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