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공 장원두는 어린 시절 자신이 경외했던 마사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찾아간다 마사오는 주먹 하나로 지역을 평정했던 건달이었다 하지만 마사오가 죽은후 화려했던 날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그의 자리를 넘보는 사람들의 패권 다툼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본 장원두 그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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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작가의 이야기라면 수도 없이 들었으나 대한민국 최고의 입담가라는 명성에도 이상하게 번번히 기회를 놓치고 지금에서야 그의 작품을 만나보게 되었다. 여러 문학을 접하며 입담가로 소문난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접해왔다. 독서를 취미로 하는 분들이야 잘 알겠지만 입담에도 여러 장르가 있다. 이를테면 공기마저 표현할 듯 정밀하고 섬세하게 표현하면서도 서사적인 느낌으로 글을 다루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쾌속 질주의 느낌으로 스피디하게 진행하며 가장 중요한 맥락들을 빠짐없이 눈에 들게 하는 히가시노 게이고, 천근만근 보다 무겁지만 빠지지 않는 재치와 함께 우아한 우울함을 선서하는 다자이 오사무, 한글자도 빠짐 없이 읽히게 하는 힘, 별 내용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충분히 별스러운 이야기들을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쏟아내는 김영하 등 수많은 작가와 수많은 입담들이 텍스트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최고의 입담가이며 시대의 이야기꾼인 성석제는 어떠한 타입인가. 이번에 읽은 <왕을 찾아서> 를 보자면 그는 말장난의 대가다. 만약 그가 문학을 하지 않았다면 힙합을 했을 것이다. 힙합에 매진했다면 단연코 한국의 2PAC 이나 JAY-Z 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만큼 재치있는 말장난은 내용이고 뭐고 필요없이 성석제표 텍스트에 빠져들게 한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플로우는 쓰나미급으로 한 문장에서도 파도타기를 서너번은 즐길 수 있다. 요컨대 성석제표 파도타기에서 한번 솟아 오르면 63빌딩의 옥상 정도는 간단히 내려다 보일게다. <왕을 찾아서>라는 제목만으로는 도무지 이 책이 끌리지 않았으니 이 책을 구입한 것은 역시나 성석제라는 이름값 덕분일 것이다. 특히 책을 구매하기 전, 책에 대한 간단한 정보 수집을 위하여 요약 줄거리를 보았는데 명성에 비해 소재가 너무 빈약했다. 너무너무 싫어하는 이야기중 단연 1순위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일 만한 소재가 바로 깡패 이야기다. 때문에 구입을 망설이고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읽게 된 <왕을 찾아서>는 단숨에 내 인생작 중 하나가 되어 최고의 문학 대열에 가세했다. 서평을 쓰면서도 주절주절 쓸때 없는 말들만 가득할 수 밖에 없는 지금 나의 입장을 어쩌면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이해해줄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계속해서 헛소리를 몇 자 적어본다. 조금이라도 줄거리를 줄이고 줄여서 서평을 적어야하는데 이 <왕을 찾아서>라는 작품은 도무지 줄거리를 줄일 수가 없다. 이유는 줄거리를 줄였을때 주는 인상이 B급, 또는 삼류 영화의 소재도 못될 만한 시골 깡패, 양아치, 한량 아무튼 세상 쓸모 없는 대상들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것이기에 도저히 내가 원하는 요약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제발 이 글을 읽고 성석제 작가나 <왕을 찾아서>를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에 왕이 있다면 - 물론 대한민국에는 왕이 없다. 오직 대통령만 있을 뿐이다 - 그건 아마 마사오를 두고 하는 말일게다. 마사오는 하늘이고 태양이며 별이고 산이며 바다다. 도시와의 교류가 적은 지역(주인공의 고향, 지방)에서의 마사오는 때론 대통령이며 때론 판사였고 경찰이며 검찰이고 군인이기도 했다. 그는 무엇이든 가능한 사람이다. 고향을 떠난지 몇년, 이름 조차 거론되지 않는 주인공 장원두는 고향친구 재천의 전화를 받고 지역의 왕 마사오의 부고를 전해 듣는다. 장원두는 마사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더운 버스에 몸을 기대어 이제는 잊혀져 가는 고향땅에 발을 들인다.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에 장원두는 옛 친구를 만나고, 옛 사랑을 만나며, 옛 선후배를 만난다. 고향의 어른들을 만나고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모를 까마득한 아가들을 만난다. 그렇게 고향에 대해 추억하며 현재의 지역에 대한 이야기들이 교차적으로 표현된다. 이미 많이도 변해버린 고향이지만 여전히 뿌리 깊은 지역 사회는 겉과 달리 속은 변함이 없다. 그러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장원두는 친구 재천으로 인해 지역의 문제에 휘말리고 만다. 내가 줄였지만 참으로 성석제 작가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무리 잘 줄여 보아도 이것이 한계 인가보다. 하긴 그리 잘 쓰면 내가 이러고 있겠나 작가하지... 많은 이들이 <왕을 찾아서>를 여로 소설로 보고 있지만 내겐 귀로 소설로 읽혔다. 여행이란 의미도 있겠지만 돌아감의 의미로 다가온 소설이다. 30대에서 20대로의 회귀였고, 도시에서 지역으로의 회귀였고, 어른에서 아이로의 회귀였으며 품 밖에서 품 안으로의 회귀였다. 소재는 지역(고향)과 깡패와 옛 친구와, 옛 사랑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는 역사가라 자칭한 장원두가 바라본 자신과 지역(사람을 포함한)의 역사이며 전설이고 과거에서 현재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즉 이건 그저 우리의 삶 그대로를 빗대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느끼는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재밌게 읽혀 좋았고 그만큼이나 남는 것이 많아 좋았다. 90년대 초반의 박종원 감독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떠올랐고 그러면서도 그 보다 훨씬 좋았던 기억이 난다.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는 표현은 아마 이럴때 쓰면 적절할 것 같다. 이제것 제목과 소재 때문에 읽지 않았던 <왕을 찾아서>는 내게 있어 한국 문학에 대한 새로운 매력을 주기에 충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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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빠진다. 이게 이 책을 읽는 동안 느꼈고 덮는 순간까지 느꼈던 나의 소감이다. 그러니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내가 왜 힘이 빠졌는지를 설명하는 일과 같다. 복잡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이 책에는 서로 밀어내려고 충돌하는 두 개의 힘이 있는데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이 힘들은 어느 한 쪽이 우세해졌다가 다른 한 쪽이 우세해지기도 하는 등 시종일관 줄다리기를 하지만 끝내 어느 한 쪽이 이기지 못한다. 실제 줄다리기를 할 때와 마찬가지다. 한 쪽이 우르르 끌려가다가 다시 반대쪽이 우르르 끌려가는 과정은 처음에는 흥미롭지만 그게 계속되면 보는 사람이 지친다. <왕을 찾아서>는 제목 그대로 왕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이고 주인공은 끝내 왕을 찾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왕을 찾는 걸 포기하지도 않는다. 왕을 찾거나 혹은 왕을 찾는 걸 포기했다면 개운했을 것이다. 그러나 찾지도 못하면서 찾는 걸 포기하지도 않으니 그 미련함과 집요함에 힘이 빠지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두 개의 힘은 이렇다. 하나는 환상이고 하나는 현실이다. 마사오가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며 온갖 신화와 전설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가 환상이고 실제로는 지역의 왕은커녕 장례식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일개 불량배에 불과했으며 그를 둘러싼 모든 신화와 전설은 날조되거나 허위 과장되었다는 게 현실이다. 어느 쪽이 사실인가 하면 당연히 현실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 의미가 있는가를 묻게 되면 당연하게 답하기가 곤란해진다. 환상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지만 실제 있었던 일보다 더 의미있는 해석이다. 마사오가 일개 불량배에 불과했다고 해도 주인공에게 왕으로 비췄다면 그건 마사오가 왕일 때만 주인공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의미가 있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환상이 실제보다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환상이 이기도록 해주면 된다. 반대로 환상은 환상일 뿐 언제나 힘이 있는 것은 실재라고 한다면 실재가 이기도록 해주면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 쪽이 이기도록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환상도 실재도 모두 이 주인공이라는 하나의 인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이다. 환상을 대표하는 인물이 있고 실제를 대표하는 인물이 있어서 그 둘이 대결구도를 만들고 마지막에 누군가 이기는 결말이라면 이야기는 명확해진다. 환상을 대표하는 인물이 승리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래. 현실이 뭐가 중요하겠어. 진짜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는 거잖아. 반대로 사실이 승리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사실 알고 있었어. 환상은 환상일 뿐이라는 걸. 우리는 어디까지나 현실을 살아가는 거야. 그런데 <왕을 찾아서>의 주인공은 환상과 현실을 모두 대표하면서도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마사오가 복싱 세계챔피언을 쓰러뜨렸다는 이야기는 진짜 복싱 대결에서 이겼다는 게 아니라 계속 지기만 한 마사오가 화가 나서 돌을 집어 뒤에서 내려친 이야기가 날조된 것이다. 주인공은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심지어 그 사실을 독자에게 안내해주는 것도 주인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마사오가 복싱 세계챔피언을 쓰러뜨렸다는 것은 진심으로 믿고 있다.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마사오의 소문은 사실에 밀려 거짓말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신화로 승격된다. 마사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이러한 신화의 승격 과정을 거친다. 주인공에게 있어 사실이 있었던 일이라면 신화는 있어야 할 일처럼 보인다.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지만 실제 대신 일어나야 했던 일이며 현실에서 일어나는 대신 주인공의 내면에서 만들어진 일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을 정의하자면 이렇다. 신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리얼리스트. 그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무엇이 허위이고 얼마만큼이 과장된 것인지까지 아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다른 사람들이 ‘소문’을 실재로 착각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오히려 주인공만이 진짜 ‘사실’을 알고 있다. ‘역사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사실에 정통한 그가 한편으로 신화를 의심하지 않는 아이러니를 가진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 모든 신화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 속에서 그토록 생생하게 일어나는가. 특히 가장 궁금한 것은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현실과 신화라는 대립적인 해석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데도 그의 내면은 조금도 혼란스럽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아가씨를 불러달라고 하는 등의 자기파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것은 그의 존재가 위태롭다는 걸 알려주는 게 아니라 단순한 추태에 가깝다. 말하자면 그의 내면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힘이 서로 충돌하고 있으면서도 기이할 정도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치자. 가령 우리가 팀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러 갔는데 보고서를 읽던 팀장이 갑자기 고대 그리스에서 미소년이 쟁반을 던지듯 보고서를 가볍게 던져버렸다고 치자. 물론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일어났다고 가정하자. 그게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아마 십중팔구는 심한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보고서는 우리가 혼신의 힘을 기울였거나 아니면 생각나지 않는 아이디어를 쥐어짜고 또 짜서 간신히 만들어낸 것일 가능성이 높다. 즉 보고서는 우리의 최선이다. 그런데 팀장은 그 최선을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이것이 모욕이 아니라 다른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모욕을 당하면 서럽다. 서러우니까 눈물이 날 것 같고 눈물을 참자니 왜 이런 사람 때문에 내가 눈물을 참아야 하는지 화가 나고 화가 나는데 화를 내도 될지 한편으로는 겁도 나고 화가 나는데 겁이 나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어이가 없어진다. 아마 이게 우리가 대부분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서럽고 분해도 서럽고 분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잦아든다. 이건 시간이 한 일이 아니다. 감정은 이성과 완전히 다른 방에 있는 게 아니라 이성과 섞여 있다. 팀장이 보고서를 던졌을 때 우리가 서럽고 분한 마음을 느끼는 것도 그것이 우리를 모욕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성은 아무리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태라고 해도 주눅들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한다. 보고서를 던진 팀장을 보고 이성이 모욕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함으로써 감정을 격앙시켰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그 감정이 몸을 지나치게 해치지 못하도록 다른 방향으로 납득시키거나 이해시키려고 한다. 우선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는 방법이 있다. 세상에는 부모도 죽이고 형제도 죽이는 도저히 제정신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도 넘쳐난다. 하물며 마음에 안 든다고 보고서를 던지는 놈이야 그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적을 리가 없다. 즉 보고서를 던진 건 내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다. 팀장이 원래 ‘화가 나면 보고서를 던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 ‘화가 나면 보고서를 던지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건 본인도 어쩔 수가 없다. 다음으로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는 방법도 있다. 던진 보고서를 다시 살펴보니 지난 번에 팀장이 사용하지 말라고 했던 양식을 썼다거나 오타가 있었다거나 결재란에는 팀장 다음에 사업부장이 와 있어야 하는데 실수로 사업부장 다음에 팀장을 넣었다거나 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보고서의 내용이 부실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잘 알다시피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결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던진 것까지는 심했지만 그래도 잘 만든 보고서는 아니었고 그래서 순간적으로 울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상대 측이나 아니면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움으로써 처음에 받았던 모욕감을 천천히 소거시킨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서러움과 분노가 조금도 식지 않은 채 계속 뇌를 뜨겁게 만든다면 어쩌면 과부하에 걸려 뇌에 장애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나 같은 경우는 화가 정말 많이 났을 때 얼굴 근육의 반이 순간적으로 경직된 경험이 있다. 그때는 화가 났던 것보다 이 경직이 이완되지 않고 그대로 굳어버리면 어쩌나 싶어 덜컥 겁이 나기도 했었다. 아무튼 우리는 여기서 이런 것을 알게 된다. 상대의 탓으로 넘기든 자신의 탓으로 받아들이든 우리는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최초에 받았던 모욕을 흘려보낸다. 그것을 이해라고 해도 좋고 몰이해라고 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이해든 몰이해든 그게 서사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의 머리와 몸이 상하는 걸 막아준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이야기라는 것은 결국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활로이다. 그것은 원래 있었던 의미를 탈각시키고 그곳에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세상을 견딜만한 곳으로 만든다. 만약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면 견딜만한 곳 정도가 아니라 즐길 수 있는 곳으로까지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사례를 인용하자면 팀장이 부드럽게 보고서를 던졌을 때 순간적으로 움직여 그걸 태연하게 캐치하는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 만약 그런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면 아마 웃음이 날 것이다. <왕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이야기, 즉 신화와 현실을 모두 내면에 품고 있으면서도 혼란에 빠지지 않는 이유. 그리고 신화나 현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대신 그 두 개를 모두 선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백일몽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이라도 현실이 무엇인지는 안다. 오히려 백일몽이라는 것 현실의 차가운 자각 이후에야 역설적으로 생생해지는 것이다. 요컨대 이 소설의 주인공은 현실이 무엇인지 잘 안다. 그것은 아주 차갑고 생생하다.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했던 이는 한낱 불량배에 불과했고 왕국이라고 믿었던 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이었다. 주인공은 도시로 진학을 하면서 그 시골을 빠져나왔지만 도시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쟁취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주인공에게는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좋은 일이 없었다. 좋아하는 여자는 친구에게 빼앗겼고 도시에서는 친구의 아랫직원으로 일했다. 사업체를 차리면서 독립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몇 년 가지 못하고 망했고 현재는 수입도 없이 오갈 데가 없는 처지다. 인생에서 특별히 빛났던 순간도 남들에게 인정받았던 순간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져온 것이 바로 주인공의 인생인 것이다. 그런데 또 그런 인생 치고는 딱히 아픈데도 없고 갚을 수 없는 빚도 없고 해서 나름 무탈하게 살고 있다. 말하자면 주인공의 인생은 특별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이 세월만 흘러간 인생인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악플보다 나쁜 게 무플이라고. 확실히 욕을 먹는 인생보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인생이 더 비참한 인생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 전혀 흥미가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인생을 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인생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렇게 재미있게 말한다. 그 이유는 누군가의 인생은 타인에게는 흔한 현실이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신화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신화라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마사오를 왕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국 그 신화야말로 자기 삶을 신화로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이 된 다음에 무엇을 할지 알 수 없으면서도 왕이 되려고 하는 재천이나 여자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세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왕, 즉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지리멸렬한 삶을 납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이 한창 신화를 이야기하다가 다시 현실을 이야기하고 다시 신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다가 어느새 현실을 말하는 이 연쇄작용은 삶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우리가 다시 그 삶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처럼 보인다. 팀장이 보고서를 던졌다면 그 던진 보고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왕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찾지 않을 수도 없다.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왕을 찾아야만 한다. 그 왕은 실제로는 시골의 건달 이야기처럼 별볼일 없는 것일지언정 우리에게는 태양과도 같다. 지고 나면 사방이 차가운 어둠으로 둘러싸인 것을 알게 되지만 적어도 떠 있을 때는 주변의 모든 것을 한낱 그림자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영원히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 말이다. 2024년 11월 4일부터 2024년 11월 18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