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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화자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환경을 파괴하는 괴물 내지 지구의 불청객, 골칫덩이 취급한다. 환경 파괴의 온상과 무너져가는 지구의 현주소를 고발하면서도, 그 날카로운 화살은 '아무개'로 가정되는 일반 대중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향한다. 거기에 더해 화자는 유약한 인상을 준다. 시종일관 울렁거리고 통증이 있다며 머리를 부여잡고, 미끄러운 배 위에서는 휘청거린다. "실제적인 것들, 기술적이고 물질적인 것에는 젬병"(123쪽)이라는 자기성찰과, 뱃일을 똑바로 수행하지 못해 친구이자 뱃사람인 '빅터'의 한숨 어린 포기를 부추기는 행태도 그렇다. 화자는 시대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파악하는 '지식인'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는 120쪽 내내 적극적인 실천이나 행동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자기가 인식한 지구 속 문제들을 나열하고, 그 중심에 선 골칫거리 '나'를 고백하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구가 아프다』의 화자는 '인식하는 자'이지 '행동하는 자'가 아니다. 이론에만 빠삭하고 쓸모있는 일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화자에 비하면 빅터와 폴이라는 뱃사람들은 모터의 힘 없이 바람의 힘만으로 배를 움직일 수 있는 능력자들이다. 화자가 깨달음을 얻고 독자들을 향한 선언 격의 마무리를 하게 되는 곳은 그들의 영역인 '배 위'다. 박진감 넘치는 바다와의 협상 끝에 바람에 배를 맡기게 된 그때. 배는 더 세차게 요동치지만, 왜인지 화자의 마음은 더 평온해진다. 화자는 비로소 자연이 나를 그냥 흔들게 두는 것, 내가 몸담은 공간과 나의 관계를 계속 질문하는 것, 소통과 외교를 통해 그 수많은 갈등과 수난을 극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마주한 문제의 해결법임을 이해한다. 이 책은 환경 문제에 관한 한 예민한 감각을 지닌 화자의 여정이다. 그리고 이 여정은 저자만큼 예민한 감각을 지니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 화자가 ‘스스로에게 겨눈’ 위태로운 화살과 그가 겪은 ‘흔들림’을 체험시키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기후 위기를 통감하는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독자들은 전지구적 문제를 맞닥뜨리게 된다. 평생에 한 번도 환경 보호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지구가 아프다』는 인류세 속 우리가 당면한 선택의 기로에서 취해야 할 자세를 선택할 수 있게 돕는 지침서다. 동시에, 저자는 문제는 인식하지만 실제적인 기술이 없는 사회학자로서, 모든 평범한 지구인들에게 '행동'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주제에 대한 강력한 은유와 문학적인 장치로 긴장감을 유지해낸다. 또, 환경 문제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면서도 앞으로의 행동에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는 책이다. 청소년들이 읽어도 참 좋겠다. 다양한 사람들이 비교적 편안하게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가진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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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평은 이음출판사 서포터즈 활동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자신의 책에 새로운 (문학) 장르를 만들어 소개하는 것에는 명확한 의도가 있다. 바로 기존의 장르가 다루지 않은, 혹은 다룰 수 없는 부분을 작가가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장르의 시발점이 되는 책이나 선언문에게는 급진적이면서 실험적인 아이디어가 있다. 이 점이 독자에게 매력적인 부분이다. 브뤼노 라투르의 제자이자 『녹색 계급의 출현』의 저자인 니콜라이 슐츠는, 자신의 소설 『나는 지구가 아프다』을 "문화인류학적 소설(ethnografictive)"라 소개한다. So, to sum up, the book is something like an “auto-ethnografictive” travelogue to an ecologically threatened island, inquiring some of the existential and social transformations of the human being and society, in a time where these are violently re-configurated. 그렇다면 대체 어떤 특징을 가졌기에, 이 책을 문화인류학적 소설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니콜라이 슐츠는 인류세(Anthropocene)가 만들어 낸 새로운 세계를 조명한다. 열대야 때문에 좋은 잠자리를 가진 기억이 나지 않는, 주인공 '나'는 새로운 실존적 위기를 맞이한다. '나 혼자서만 for myself' 사는 게 아닌 건 고사하고 '다른 이를 통해서만 from others' 존재 가능한 것이 우리네 실존이다. - 19p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과 얽힘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가능함을 깨닫는다. (이에 대해서는 라투르의 ANT를 참고하라.) 즉 소설의 표현대로 실존의 문제는 탈중심화되어,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의 생사여부까지 건드는 문제로 전환된다.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는 전지구적 네트워크에서 '나'는 지구의 모든 행위자와 연결되었고 그들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 된다. 이 실존적 문제는 제목과도 연결된다. 먼저 한국어 제목 "나는 지구가 아프다."는 얼핏 보면 비문처럼 보인다. 주어가 병치된 이 문장은, 나와 지구가 엮인 존재이고 지구가 겪는 고통을 야기한 존재이자 같이 고통을 겪는 존재임을 시사한다. 그 후 원서 제목 "땅멀미(Mal de Terre)"는 지구의 아픔이자 실존적 위기를 겪는 '나'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작중 '나'는 땅멀미를 끊임없이 겪는다. 바로 땅멀미를 겪는 순간순간 '나'가 무엇을 보고 생각했는지를 주목하며 독서한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실존 개념과 실존적 위기는 범지구적 네트워크에서 비롯되기에, 저자 니콜라이 슐츠는 이 새로운 개념과 위기를 분석하고 기록하기 위해 문화인류학적(민족지학적) 방법론을 취한다. 주인공 '나'는 폭염과 열대야 속의 파리에서 도피하여, 섬에 도달한다. '나'는 섬에서 다양한 인물과 환경을 마주하며 지구가 어떻게 소비되고 고통받는지 분석한다. 다시 말해 인류학자처럼 현지 조사를 한다. 배경이 되는 포르크롤 섬은 파리에서 도피할 당시에는 낙원으로 보였으나, 이 섬 역시도 여러 갈등에 휘말리며 파괴되는 모습을 그대로 독자에게 노출시킨다. 인류세 시대의 충격적인 현상들.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철학적, 과학적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자전적 수기 형식을 채택했다. 나는 이 책의 서사를 통해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 관찰한 것들, 그 과정에서 느낀 감정과 든 생각을 토대로 철학과 사회학의 영역에서 제기되는 몇 개의 수수께끼들을 풀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분석과 문체, 서사적 접근이 필요하다 - 151p (감사의 말 中)독자들에게 이 내용을 전달하고 더 나아가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딱딱한 학술적 용어가 아닌 일상적인 문체를 저자는 필요로 한다. 당연하겠지만, 어려운 용어가 난무한 책은 독자들이 첫 페이지만 읽고 바로 덮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넓은 의미에서의 이론-픽션(Theory-Fiction)이라고 봐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론-픽션 쪽의 CCRU가 탈영토화를 주장하는 반면에, 라투르는 지구적(가이아적) 재영토화를 주장한다. 이 책에서도 "더불어 살기의 원리를 중심에 놓는 새로운 구체적 성찰이"(p.39)를 추구하고 있다. 즉, 이 책은 새로운 실존의 관계 속에서 더불어 살고자 노력하고 있는 주인공 '나'의 이야기다. 문화인류학적 소설은 이처럼 자전적 이야기 속에 담긴 내용을 독자들이 받아들이고 실천하고자 만든다. 결말부에 주인공 '나'는 문화인류학적 방법론으로 끝끝내 새로운 실천의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독자에게도 참여를 요구하듯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탈로 칼비노)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구절의 내용은 직접 책을 읽어보시길, 이 내용 역시도 흥미롭다.) 책에서 칼비노의 책은 "책을 이해하려면 맨 끝에서부터 읽어야 한다는 것"(p.127) 이러한 실천적 참여에 대해 흥미로운 특징은, 최근 읽은 인류세 관련 책『지구공학 이후』(홀리 진 벅)에서도 비슷한 점을 발견한다. 거꾸로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책, 여러 갈래로 나뉜 하이퍼텍스트 독서. 이러한 독서법은 에스판 올셋이 말한 에르고딕의 특징을 잘 나타나고 있다. 단순히 글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능동적으로 길을 개척하는 독서법은 인류세 시대에 독자로 하여금 직접 실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164쪽의 짧은 중편 소설이었지만,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2025년 지금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코로나-19 내용도 담고 있어, 비록 어려운 내용을 함유하고 있다 해도 쉽게 읽을 듯하다. 게다가 읽으면서 발견하는 이 책만의―'문화인류학적 소설' 장르로서의― 특징은 비록 짧은 내용이더라도 집중해서 독서할 수 있게 만든다. 기후위기 시대에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다양한 답변이 있을 것이지만, 분명히 니콜라이 슐츠의 『나는 지구가 아프다』는 훌륭한 모범답안이 될 것이다. 추신)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면 다음 책도 읽어보세요. 1.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브뤼노 라투르) 2. 『가까스로-있음 - 브뤼노 라투르와 파국의 존재론』(김홍중) 3. 『녹색 계급의 출현』(브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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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아프다는 뜻인지, 내가 아프다는 뜻인지 아리송해지는 제목이다. 이 색다른 표현의 의미는 지구의 아픔을 마치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는 화자의 여정을 따라밟는 과정에서 명확해진다. “‘땅이 아프니‘, 나도 아프구나.“ (116쪽) 주인공은 환경문제에 대한 일상적인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만끽할 수 있는 섬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그는 아름다운 섬을 앞에 두고서는 관광산업이 발달한 섬이 앓는 환경파괴 문제들에 마음을 뺏긴다. 또다시 불편해지고, 자책이 시작된다. 그가 지구 위의 어디에 있든 땅의 아픔에 공명하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로 인해 아름다운 풍경이 훼손된다면 아름답다는 명성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섬의 경제 상황에 도움이 된다고는 하지만 정녕 주민들이 터전을 둘러싼 소란과 변질까지 감수해가면서 반길 만한 개발인가. 섬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러 오는 계층이 섬에서 보내는 나날들은 섬주민들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하고있다. 여태까지는 자본의 흐름을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를 단속하는 것이 이러한 괴리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가장 흔하게 언급되곤 했다. 동시에 사람을 외롭고 배고프게 만드는 신념으로도 알려져왔다. 그래서 저자는 파도의 흐름에 맞춰 키를 조종할 때의 해방감을 보여준다. 자본이든 기술이든, 인간의 자유든 행복이든 자연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조화‘를 제시한다. 그러니 수많은 관광객들에 떠밀려 도착한 곳에서 홀로 괴로움을 느끼는 상황에 너무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땅의 아픔을 아는 화자는 섬주민의 아픔도 알 수 있었고, 자본시장에 필요한 새로운 자유를 정의할 수도 있었다. 통점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감각기일 뿐. 이 따뜻한 사실을 전하는 과학 소설은 본인만의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는 시간을 선물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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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이음의 <나는 지구가 아프다>는 단순히 환경 문제를 고발하는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은 철학, 과학, 인문학을 아우르는 ‘문화인류학적 소설(ethnografictive)’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인류세 속에서 '나'와 '지구'의 관계 회복을 위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집니다. 1️⃣ 나비효과의 철학적 해석 어릴 적 예능 프로그램에서 봤던 '나비효과'처럼, 이 책은 나의 사소한 일상(커피 마시기, 샤워하기, 옷 사기 등)이 모여 '골칫덩이'가 되고, 결국 이 골칫덩이가 지구를 아프게 한다는 냉철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 "나의 일상적 행동이 골칫덩이들을 한데 모이고 이 녀석들 상호작용하며 엮이고설켜있다니. 하루하루 골칫덩이가 자라나는 걸 깨닫는다." (P.12) 2️⃣ 자유의 역설과 거리두기 (p.61)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각자의 자유'에 대한 통찰이었습니다. 나의 자유를 위해 남방구의 누군가(혹은 '할머니의 섬')가 희생되고, 결국 그 희생은 다시 나의 자유를 무력화시키는 이 역설적 구조를 철학적으로 분석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며, 이는 결국 거리두기와 관련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3️⃣ 추천 대상 이 책은 환경 문제에 관심 있지만, 딱딱한 과학서나 인문학 서적이 부담스러웠던 독자들에게 완벽한 대안이 될 것입니다. 인간, 자유, 그리고 환경이라는 본질에 대해 깊이 있는 사유를 원하는 모든 분들께 강력히 추천합니다. '골칫덩이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자각을 통해 '우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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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Mal de Terre, 땅멀미란 뜻이다. 배에서 내린 사람이 땅에 닿은 뒤 느끼는 구역감, 두통 등의 고통을 표현하는 단어다. 옮긴이는 J’ai mal à la tête, 나는 머리가 아파요라는 문장을 떠올렸고, 여기서 맨 끝의 낱말을 '땅, 지구'를 뜻하는 terre로 바꿔 J’ai mal à la terre 즉 '나는 지구가 아프다'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쥬 말 아 라 떼흐. 제목에 걸맞게 화자는 자신의 모든 행위가 지구와 얽혀있음을 느끼고 매 순간 괴로워한다. 자기가 쓴 책이 서점에 진열되는 꿈을 꾸다가도 종이에 검은 잉크로 인쇄된 글자 하나하나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원시림을 황폐화시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고기 대신 택한 아보카도와 퀴노아조차 재배 과정에서 토양을 악화시킨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러다 자신이 지구를 담보로 악마와 거래한 파우스트처럼 컴컴한 방구석에 숨어 은밀하게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양심을 팔아먹고 있는 중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런 주인공을 보고 정말 이상한 놈같다는 얘기를 나누긴 했지만, 지금 우리가 "공유된 파국의 감각" 속에 있음을 이해하면 그리 과장된 표현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 존재의 문제는 더 멀리 뻗어나가 지구 반대편의 어떤 다른 존재와 연결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실존은 훨씬 더 복잡해졌다." 생태학적 재앙에 괴로워하는 이는 나뿐만이 아니다.
할머니 세대가 주인공 나이였을 때 했을 법한, 시간이 흐르면 세대는 자동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앞으로도 '그냥'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없다. 번영과 생존은 적대적인 개념이 되었고, 지구는 가도가도 끝없던 무한의 이미지를 상실했다. 이 책이 '문화인류학적 소설'이라고 소개되는 이유도 이러한 상실의 감각을 현실에 관한, 사회학적인 기술과 함께 제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서 화자가 도착한 섬은 남프랑스의 휴양지 '포르크롤 섬'이다. 길을 헤치고 찾은 조용한 해변가, 자신의 잡념과 망상을 없애줄 곳이라 믿었던 그곳에는 원주민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평생 이 섬에서 살았어도 내 쉼터다, 싶은 곳이 이 넓은 해변에 단 한 평도 없어요. 나는 이 섬에서 태어난 포르크롤래즈, 토박이라오. 그런데도 갈 곳이 마땅치 않으니 원." 하며 다른 곳으로 가달라고 부탁한다. "나의 자유를 위해 희생당하는 할머니의 섬, 할머니의 섬 때문에 굴복당하는 나의 자유, 이 둘이 서서히 서로를 무력화시킨다." 관광객들로 인해 자유를 잃은 할머니의 말에, 화자는 자신이 현대인으로서 욕망하고 누려온 자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원주민 할머니와 자신의 자유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들의 자유는 딱 달라붙어 있다. 화자는 결국 “지구의 거주조건이라는 상황 안에 나의 자유를 놓는 일”을 통해 우리의 자유가 '무한'의 미궁에 빠지지 않게 된다고 말한다. 해방된 인간, 자연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근대적 논리는 버려두고, 새롭게 정립된 자유 개념을 받아들여야 할 때다. 화자는 섬을 떠나는 배 위에서 생각한다. "망망대해에 나와 보니 배가 요동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요동치기 '때문에' 만사가 서로 화답하고 공명하는 듯하다." 침대 위에서 자신이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 끼칠 피해를 상상하며 불안에 떨던 주인공은, 이제 파도 위에서 놀라운 물질과 개체들, 그 골칫덩이들과 더불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짧은 성장소설에서 우린 인류세를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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