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처음 그의 이름을 들었던 것은 초등학생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컴퓨터의 역사와 관련된 책자를 읽었는데, 곱셈과 나눗셈이 가능한 계산기를 만들었다며 라이프니츠의 이름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나는 그를 수학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실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수학은 그가 건드렸던 광범위한 분야의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라이프니츠는 그다지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이는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나누어 서양 철학을 다루었던 고등학교 윤리 시간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에도 소속될 수 없었던 라이프니츠의 이름이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산 것 같다. 1646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 교수 아버지를 두었다는 것 외엔 그다지 돋보이는 점이 없는 듯 하다. 수많은 책을 섭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고전, 교부들 및 스콜라 철학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갖출 수 있었지만, 그는 12살이 되던 해까지 라틴어에 능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타고난 천재 쪽보다는 부단한 노력에 의한 우등생 쪽에 가깝지 않았나 싶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그는 당시 학문의 주류 범주에는 들지 못했던 것 같다. 베를린에 아카데미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하긴 했지만 학회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보인부르크와 쇤보른 등의 도움으로 경제적 어려움 없이 생활하긴 했지만, 파리에서 그는 이방인에 불과했다. 파리 아카데미의 그는 결코 들어갈 수 없었으며, 그의 강한 자존심은 그를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 대해 집착하도록 만들었다. 그랬기에 말년의 그는 조롱의 대상에 불과했다. 의도적으로 여러 학문들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렸던 그는 실로 백과사전적 인물이었으며 마지막 제너럴 리스트였다. 그는 스콜라주의의 개념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의 이진법은 실생활에서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 체 학문적인 영역에만 머물렀다. 어쩌면 이는 당시 후진국이었던 독일에서 성장한 그로서는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였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위대한 학자였음에는 분명하다. 오늘날 다방면에서 사용되고 있는 적분과 미분에 대한 그의 기여는 실로 어마어마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는 보편주의적인 정치관과 종교관을 토대로 학문에 있어서도 그는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학문들 사이에 가교를 건설하는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다. 이런 그의 학문은 당시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독특하고도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불(Georg Boole), 프리게(Gottlob Frege), 러셀 등 후대의 학자들은 그들의 학문이 라이프니츠로 인해 가능했노라고 시인하기도 하였다. 주류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에 대한 그리고 학문에 대한 열정은 나를 설레이게 만든다. 치열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진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았던 그의 삶은 분명 치열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