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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의 일기"가 유대인의 아픔으로 상징되는 세계적 작품이 된 이유가 안네는 죽었으며, 그 죽음을 애도함으로서 각자의 짐을 덜어 내겠다는 사적 이익이 결부해있다는 작가의 시각은 신선하다. 하지만 애도자의 의도를 작가가 섣불리 단정할 것은 못된다. 어떠한 애도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며, 애도로써 개인의 짐이 덜어졌다면 그 또한 의미있는 일이다. 작가의 주장은 유대인으로서 받고있는 일종은 혐오를 고발하고자 하는것 같다. 그것은 꼭 유대인이어서 받는다기보다 역사적 문화적 맥락속에서 먼저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들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척 혐오하고 괴롭히고 있는게 엄연한 사실이다. 유대인들, 그들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고 디아스포라 민족으로서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이다. 그들의 역사가 우리들에게 각인되어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과오는 없어야 함을 일깨운다. '안네'가 살았던 장소에서 근무하는 자가 유대교 모자를 쓰는 행동을 제지받아야 하는 상황에 대한 비판은 유대인을 혐오한다기보다 자본주의의 천박한 속성으로보고 그 천박함을 지적해야 하는것이 정확한 포인트다. 잘못 짚었다. 현재의 살아있는 유대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죽은 유대인들에 대한 숭배를 문제삼는 것은 저자의 착각이다. 물론 유대인의 시각에서는 불만일수 있으나, 죽은자에 대한 애도와 살아남아서 악행을 행하는 자에 대한 불만은 각각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저자의 피해의식이 빚어낸 책이 아닐까하는 우려가 남는다.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유대인이여 제발 전쟁을 멈추시라. "내가 지옥에 가게 될 거라고 알려주면서 걷잡을 수 없이 흐느껴 울던 룸메이트에게 (나는 적어도 지옥에 가면 내가 아는 사람은 많을 거라고 그애를 안심시켜주었다) 같은 기억들을 넣어둔 칸이었다" 는 재미있는 대목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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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유태인 이야기야?"라며 거부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어쩌면 이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유태인 문제는 알면 알수록 깊은 늪에 빠지는 기분이다. 이 복잡다단한 문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가늠이 안 된다. 우리는 종종 '객관적으로', '제3자의 입장에서'라는 표현을 자신이 매우 가치중립적인 의미에서 사용하곤 하는데, 어떤 경우엔 중립적인 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우슈비츠니 홀로코스트에 대해 너무 지겹도록 들어 식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게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을테고, 더군다나 지금처럼 팔레스타인과의 관계가 안 좋은 상태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반대 여론이 그 어느때보다 강할 수밖에 없고, 그게 선이고 대세이기도 하지만, 유태인의 입장에서 쓴 유태인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동의하고 승복할 수밖에 없는 지점들이 있다. 특히 나처럼 소수자로서 미국을 사는 사람들은 더욱 공감할 수밖에 없는 소수자와 지배 문화의 관계 등등은 동의할 수밖에 없고, 곱씹어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데어라 혼은 소설가라는데, 워낙에 사전 조사를 탄탄히 하기도 했거니와 그가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거들에 조금의 빈틈도 없다. 빌드업을 너무 잘 하고 문장도 단단하고 유려해서 글이 가진 파워가 있다. 아마 이 사람은 소설도 상당히 잘 쓸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 소개된 건 이 책이 유일하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걸 업으러 삼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하기와 글쓰기의 모범으로 이 책을 참조해도 좋겠고, 디아스포라로서의 유태인들 개개인의 다양했던 역사가 궁금한 사람이 읽어도 좋을 책이다. 그러나 소수자를 상대로 한 지배문화의 작동방식이 궁금한 사람들 역시 읽어볼 만한 책이다. 사유와 성찰이 넘치면서도, 유려하고 단단한 문장이 이름다운, 그러나 그 주장하는 바가 폐부를 깊이 찌르는 날카로운 책이다. 은폐되지 않은 진실을 말하고 쓰고 읽고 들을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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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안네의 일기>의 저자 안네 프랑크의 집을 박물관으로 만든 '안네 프랑크의 집'이 있다. 이곳에는 매년 1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아오는데, 몇 년 전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 야물커(유대인 남성이 쓰는 모자)를 썼다는 이유로 고용주에게 질책을 들었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박물관의 정치적, 종교적 중립성을 저해한다는 명분이었다." (본문 27-8쪽 요약)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는 정희진 선생님이 추천사를 쓰시고, 정희진 선생님이 진행하는 팟빵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에서 소개하셔서 구입한 책이다. 책의 본문에 나오는 위의 일화를 듣고 책을 안 살 수가 없었다. 다른 장소도 아니고 유대인 박해를 상징하는 장소에서 유대인 직원에게 유대인 정체성을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한편으로는 정치적, 종교적 중립성을 준수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약자, 소수자 차별 및 혐오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시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을 쓴 데어라 혼은 1977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교에서 히브리 문학과 이디시어 문학을 공부했고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대인에 관한 소설을 다섯 편 집필했으며, 이 책은 저자가 집필한 첫 번째 논픽션 도서다. 이 책에는 모태 유대교 신자이자 대학에서 유대교와 유대 언어, 유대 문학, 유대 문화 등을 오랫동안 공부하고 연구한 학자, 전문가로서 저자가 직접 경험하거나 관찰한 반(反)유대주의의 사례들을 소개한다.
사실 나는 유대교에 대해 잘 모르고, 필립 로스나 니콜 크라우스 같은 유대인 작가들의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대인의 삶이나 유대인들의 문화, 역사에 대해 접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을 읽은 것이 유대인, 정확히는 유대인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반(反)유대주의에 대해 가장 자세히, 깊이 있게 배운 최초의 계기다.
저자는 앞서 언급한 '안네 프랑크의 집' 사건 외에도 하얼빈에 남아있는 유대인의 문화유산, 홀로코스트 문학이나 영화의 영웅이 주로 비유대인인 문제, 유대인 서사는 우울하고 불편해서 읽기 싫다는 편견(의 탈을 쓴 혐오), 홀로코스트에 대해 조명하면 할수록 모방 효과에 의해 차별과 혐오가 기승하고 '홀로코스트 정도는 되어야 유대인 혐오. 아니면 유대인 혐오 아님'이라는 식의 백래시 현상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정희진 선생님이 해설에 쓰셨듯이, 이 책은 기독교 중심적인 서양 사회가 어떤 식으로 타 종교를 탄압하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남성 중심적인 인류 역사가 어떤 식으로 여성을 타자화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사람들이 '죽은 유대인'(만)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들은 '죽은 여성'만을 사랑한다. (여기서 '죽은'은 물리적 죽음만이 아니라 정신적 죽음-대상화, 비인간화 등등-을 포함한다).
저자가 열 살 아들과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 오디오북을 듣는 일화도 재미있었다. 저자는 작품의 빌런인 샤일록이 유대인이라는 점과, 샤일록에 대한 묘사가 당대의 (그리고 현재의) 반유대주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살코기 1파운드'가 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아들의 간청으로 25년 만에 이 작품을 다시 (귀로) 읽었고, 읽으면서 작품 전체가 유대인을 향한 '가스라이팅'이라고 느꼈다. 이런 식의 해석도 흥미로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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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어라 혼의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리뷰입니다. 죽은 유대인을 소비하는 세상이 유대인들을 향한 뒤틀린 애착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책입니다... <안네 프랑크의 집> 에서 일하던 직원이 겪은 해프닝... 이라고 하지만 사실 유대인 차별을 서두로 펼치는 이야기는 극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만연한 유대인 차별 속에서, 죽은 유대인들은 추모하고 기억한다는 게 얼마나 역설적일 수 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
| 편집자K (편집자 강윤정님) 유튜브와 정희진 선생님의 팟캐스트 <정희진의 공부>에서 추천을 받아 읽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어서 역사가 된 유대인만을 사랑한다는 말이 새삼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모든 아픔은 여전히 현재에도 있다는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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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라는 제목이 뭔가를 탁 치게 만들었다. 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해 학살당한 유대인과 지금 서양에서 유대인을 바라보는 시선. 그 모순이 이 책의 제목을 통해 드러난다.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만'을 사랑하는 것일뿐이라는 저자의 말들. 나는 동양인이기에 유대인에 대한 역사나 현재 서양에서 유대인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소 좋지 않다는 것 외에는 잘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글을 읽으며, 아주 오래전 캐나다 어학연수를 갔을 때가 떠올랐다. 나의 한글이름이 발음이 어려우니, 다른 이름을 지었으면 좋겠다는 호스트 아주머니의 말에 내가 '쥬'라고 하면 어떨까..라고 했었다. 그 때 아주머니가 하던 말. '나는 편견이 없다. 오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은 유대인을 싫어해. 쥬라는 발음은 그들을 연상시킬 수 있어서, 니가 위험해질 수 있단다'라고 했었다. 그 때 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 이상의 대화가 어려웠(...?)던 관계로 그 이상을 묻지는 못했다. 이 책은 아주 오래전 그 때 나의 질문에 답을 주고 있었다. 안네 프랭크. 누구가 아는 인물. 13살의 소녀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죽었다. 그녀가 나치를 피해 숨어들었던 곳은 관광명소로 유명하다. 해마다 어마어마한 관광객이 찾는 곳으로. 하지만 그곳에 젊은 직원이 유대인이 쓰는 모자(야물커)를 쓰려고 하자, 고용주는 그 모자를 야구모자 속에 보이지 않게 쓰라고 했단다. 박물관의 중립성이 훼손된다는 이유로. 안네프랭크의 집에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숨겨야 한다? 대체 왜? 물론 4달의 심사숙고 끝에 그 박물관의 입장은 철회되었지만, 왜 그것이 4달이나 걸려야 했을까.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유대인이 유대인으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 말한다. 홀로코스트 앞에서 눈물짓는 이들이 실제 유대인 앞에서는 그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바라본다고. 그것은 유럽의 역사 속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 예중 하나로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예로 들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유대인뿐 아니라 우리 사회 속에서도 같은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역사속에서 죽어야했던 수많은 이들에 대한 애도에 눈물지으면서, 생존자들이 벌이는 사투에는 국가이익이니,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손가락질을 말이다. 왜 우리는 이런 모순적 행위를 행하는 것일까. 나와 '타인'을 구분함으로써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본다. 공감이라는 말 뒤에 혐오가 함께 따르는 지금. 내가 공감하는 대상이 그저 누군가 쳐놓은 울타리속만은 아닌지. 죽은자에게 한없이 관대한 것은 그들이 그저 죽었기에 더이상 타자로써도 존재하지 않기에 그저 관대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길. 개인적으로 저자의 글이 그저 내게 '아! 그렇구나'라는 생각만을 하게 하지는 않는다. 살짝 불편함이 느껴졌달까..저자의 글속에서 유대인은 한없는 피해자로만 그려지는 모습이.. 그러했다. 지금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행하는 가해행위는 그저 피해자의 모습으로만 보여지지는 않기에 그러했다. 뭔가 뜨뜨미지근함이 남지만, 그래도 읽어볼만하다. "홀로코스트는 사랑의 부족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일은 전 세계 모든 사회가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기를 거부하고, 그 대신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즉 책임을 대변하는 - 이 세계에 '명령받음'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한 이래 언제나 그것을 대변해온 -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p.2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