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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된 종이로 혼자 보는 소설이 아닌, 저자가 직접 읽어주는 이야기는 어떤 느낌일까요 김연수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작가가 제주도의 어느 서점에서 독서모임의 회원들에게 읽어준 짧은 작품을 모은 소설집입니다.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는 작가,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초창기독서는 속으로만 읽는 조용한 독서가 아니라 낭독이었다죠? 그러고 보면 낭독회에 참석하신 분들은 ‘원조’ 독서모임을 경험한 셈입니다.
이 책에는 20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낭독회에서 읽어주려고 쓴 작품이라 단편이라 부르기에도 짧은 엽편소설이 많고, 문장도 편안하게 잘 읽힙니다. 저도 처음엔 평소에 하던 대로 작가의 집필의도, 주제, 줄거리를 파악하느라고 밑줄 긋기 바빴는데, 읽다보니 이 책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더라고요.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모인, 휴식이 필요한 분들께 들려드리는 이야기. 작가의 말대로 이 작품은 수험서처럼 정신을 쫑긋 차리고 읽지 않아도 괜찮은 그런 소설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밤은 두 번째 밤도, 세 번째 밤도 아니고 수없이 많은 밤 다음의 밤이라는 뜻이군요. 이렇게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인류라면 이 밤을 마지막 밤으로 만드는 게 가장 현명하겠군요.” (p.12~13)
첫 작품 <두번째 밤>에는 전쟁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고통으로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어느 노인이 말합니다. 지금과 같은 전쟁이 예전에도 있었다고,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지만 결국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고요. 악은 반복되었고, 우리는 결국 세번째, 네번째 밤을 맞이했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캄캄한 밤이 이어지고 있지요. 악은 악이 아닌 선으로만 막을 수 있다는데 그런 날이 오긴 올까요
“나무는 저마다 다른 나무인데 하나의 이름으로만 부르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은행나무니 향나무니 하는 이름 말고 그 나무만의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여기 모였습니다.” (p.25~26)
<나 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는 없어서>에는 재개발로 철거되는 아파트 주변의 나무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재개발, 용적률, 건폐율. 다들 건물에만 관심을 둘 때, 영문도 모르고 베어질 나무와의 추억을 떠올리고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 나무이야기도 감동이지만, 저라면 이런 따뜻한 이웃과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놀이공원에는 저런 것들만 있는 게 아니잖아. 25개의 보어덤과 23개의 디스어포인트먼트와 16개의 다크니스 같은 것들도 있다고 봐야지. 보어덤은 놀이기루를 타기 위해 기다려야하는 지루한 시간들을, 디스어포인트먼트는 기대한 만큼 재미가 없는 쇼를 끝까지 봐야 할 때의 실망감을, 그리고 다크니스는 인파에 밀려 옴짝달짝하지 못할 때의 캄캄한 마음을 뜻하지. 그것이 놀이공원의 숨겨진 진실이라고 할 수 있어.” (p.40)
<젊은 연인들을 위한 놀이공원 가이드>입니다. 제목처럼 연인이 놀이공원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보냅니다. 놀이공원 안에는 수많은 볼거리, 체험거리가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니죠. 재미있는 순간을 즐기기 위한 기다림, 기다렸음에도 기대에 못 미치는 실망감, 그리고 움직이는 것도 불편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피곤에 지쳐 투덕거리는 연인들의 대화를 들으며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는 자유이용권의 의미를 생각해 봤습니다. 자유이용권에는 모든 놀이기구를 탈 수 있다는 표면적인 의미 외에, ‘놀이공원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는 각자의 몫’이라는 뜻도 담긴 게 아닐까 하고요. 그래도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기다리는 시간도, 실망스러운 순간도, 수많은 인파도, 견딜만해지고 세월이 흐르면 모두 추억으로 남겠지요.
“그 풍경을 바라보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군요. 달은 천 년 전의 달과 똑같은데. 사람은 한번 헤어지고 나면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렇게 걸어가는 발걸음에 따라 서로 겹쳐졌다 멀어지는 무덤들을 바라보며 어스름 속을 걷는데, 시원한 저녁 바람에 기분이 좋아져 하하하 호호호 서로 농담하고 웃는 관광객들 중에 제가 우는 걸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좋았다는 거예요.” (p.130)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의 주인공 서지희씨는 수학여행 버스사고로 아이를 잃은 엄마예요. 사고 이후 그녀는 아이가 수학여행을 안 갔다면, 버스기사가 과속하지 않았다면, 사고 난 버스 말고 다른 버스를 탔더라면... 하는 생각으로 끝없이 괴로워하다 결국 ‘너는 죽었는데 왜 나는 살아 있는가?’하는 죄책감에 빠져 지냅니다. 그러다 아이의 마지막 발자취를 따라 경주에 내려오고, 밤 산책길에 또다시 눈물을 흘리죠. 자식을 잃은 엄마에게 무엇이 위로가 되겠습니까만, 그래도 이번엔 마음이 편했나봅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기감정대로 할 수 있었으니까요. 마음껏 슬퍼할 수 있다고 좋아하는 아이엄마. 저도 서지희씨를 따라 걸으며 같이 울고 싶었습니다.
밤하늘 관찰이 끝나고 난 뒤, 학생들은 어둠 속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시진이가 찍힌, 그러니까 나도 본 바로 그 사진이다. 연구원은 플래시도 켜지 않고, 작은 빛에도 예민한 사진기가 아니라 핸드폰으로, 어둠 속에 묻힌 학생들을 찍는다. (p.239)
이 책의 여러 작품 중 하나만 추천하라면 <거기 까만 부분에>를 꼽겠습니다. 여기서도 슬픈 엄마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월호 사고로 시진이를 잃은 엄마는 아들의 흔적을 찾아 사진을 모으고, 그러던 중 까만 사진 한 장을 받게 됩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사진을요. 알고 보니 그건 아이가 천문대 수련회에 가서 밤에 플래시 없이 찍은 사진이었어요. 그냥 보면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알고 있죠. 어둠속에 시진이가 있다는 것을. ‘없다’와 ‘보이지 않는다’의 차이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 <거기 까만 부분에>입니다.
이 책의 짧은 이야기들 속에는 등장하는 인물마다 각자의 슬픔이 있습니다. 첫 작품 <두번째 밤>처럼 악의 고리를 끊지 못해서 불행이 반복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두번째 밤, 세번째 밤이 반복된다는 건, 두번째 낮, 세번째 낮도 있었다는 이야기잖아요. 탐욕에 눈먼 어리석음이 되풀이되듯 선량한 지혜도 끊임없이 되살아났지요.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분명 있었습니다. 어둠 속의 시진이처럼 말이죠.
여름이라 더 읽고 싶었던 책, 《너무나 많은 여름이》. 오랜만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소설을 만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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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뺀 소설이었다. 짧고 단순하고, 금방 읽을 수 있는 소설. 소리를 내어 읽어줄 수 있는 소설. 이 많은 소설을 낭독회에서 듣는다고 생각해보니,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즐겁지 않겠나. 더군다나 작가의 목소리로 듣는 소설은 미세한 입자처럼 우리의 마음을 파고들 것이다.
제주의 한 섬, 가파도에서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낭독회를 해야 했던 작가는 찾아온 사람들에게 하루에 한두 편씩 소설을 읽어주었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인문서를 읽는 분들은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하루하루를 사는 이들을 바라보고 그 뒤부터 작가는 생각이 바뀌었다. 산문보다 소설을 더 많이 쓰게 되었고, 막 지은 짧은 소설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더 많은 낭독회를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소설이 필요하다. 짧지만 강렬한 소설, 스치고 지날 것처럼 여겨져도 뒤돌아서도 머릿속을 부유하는 소설 말이다.
산문 보다는 소설이 더 좋은 나는 작가의 짧은 소설이 좋았다. 밤마다 호텔의 책상에 앉아 즐거운 마음을 글 쓰는 작가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좋은 기운을 받아야, 좋은 소설이 나오는 법. 욕심을 부리거나 트렌디한 것만을 찾다가는 도태되고 만다.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소설은 많다. 하지만 정작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그냥 심심풀이 책일 뿐이다. 소설의 내용이 마치 내 이야기인 것처럼 공감하고, 새로운 걸 얻는 시간.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 아닐까.
「고작 한 뼘의 삶」에서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가의 재능에 감동한다. 소설가의 재능을 그 사람의 능력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가의 재능이란 꿈꾸는 것이 전부다.’ 라고 말한다.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선물. 꿈을 꾸지 않으면 작품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소설은 작가의 꿈이 실현되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눈덩이를 굴리는 일과 비슷했다. 사랑할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미워할수록 더 미워하게 된다. 매 순간 관계가 호의와 악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지금도 양양행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 언니와 손을 맞잡았을 때, 미래가 달라졌다고 믿고 있다 했다. (166페이지, 「관계성의 물」 중에서)
작가는 세상을 보여준다. 작가의 상상이든, 현실의 다른 모습이든 작가의 세상에서 우리는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한다. 잊고 있었던 사건도 작가의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보고, 벌써 잊어버린 우리를 꾸짖는다. 잊힌다는 것. 이것처럼 마음 아픈 일도 없을 텐데, 각자의 삶에 바빠 잊고 사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 보내준 쪽지 한 장, 그 마음 한 자락에 눈물을 흘리고 함께 찍은 사진이 없어 안타까워 옷자락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소설의 한 형태,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므로’ 너무나 많은 여름이, 너무나 많은 골목길과 너무나 많은 산책과 너무나 많은 저녁에 우리를 찾아오리라. 우리는 사랑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으리라. 내 나이 때의 엄마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내 나이 때의 열무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281페이지, 「너무나 많은 여름이」 중에서)
여름은 항상 나에게 삶의 희열을 주었다. 뜨거운 여름의 한낮, 장맛비의 시원함처럼 계절은 우리를 살아 있게 했다. 기후 위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의 우기처럼 한 달 정도 내리는 비는 우리를 우울하게 했으며 햇볕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수많은 여름날의 소설이 이토록 아름다워 그만 눈물이 날 듯했다. 삶은 단순하면서도 어느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내일을 꿈꾼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 꿈이 우리의 미래라는 것을 말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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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김연수 책을 읽었다. 사실 작년에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사 놓고, 젼혀 손도 안 대고 있었다. 뭐랄까, 찜한 느낌이니 넌 언제든 읽어도 돼,는 아니고, 보험 든 느낌이랄까. 정말 읽고 싶은 게 없을 때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가정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정말 읽고 싶은 게 없'을 때가 없으니. 어쩌면 영원히 읽지 못하게 되는 소설일지도 모른다. 그렇듯 마음의 안정을 위해 쟁여놓는 물건이나 책이 있다. 사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그런 물건들의 용도는 그냥 '존재' 아닐까. 환경론자들이 들으면 큰일날 소리이지만, 뭐 하찮은 나로서는 그런 목적으로 물건을 사기도 하는 듯하다. 그런데 얼마 전 가입한 독서 모임에서 김연수 책을 읽는단다. 옳다꾸나. 잘 되었다고 싶어서 내가 '쟁인' 그 소설이길 바랐다. 사실, 제목 마저도 가물가물해져 있어서, 독서모임 책이 뭔지 알고 나서도 혹시 내가 사놓은 그 책인가 아닌가 긴가민가했다. 그런데 늘 그렇듯, 그렇게나 운 좋게 아다리가 맞을 리가 없다. 그때까지는 '운이 안 좋은 쪽'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대상이 되는 책은 <너무나 많은 여름이>이었다. 유시민님의 책과 함께 주문하여 읽기 시작했다. 표지가 너무 할랑할랑한 느낌이랄까. 냉큼 펼치게 되는 느낌의 표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썩 좋아하지 않는 짧은 길이의 소설들이었다. 손바닥 소설로 분류되기에는 좀 긴 듯하지만, 단편 소설이라 할 수 없는 길이의 소설이 대부분이고 두 작품 정도가 단편 정도의 분량이다. 다 읽고 나서 이렇게 느낌을 남기려고 앉았다는 것은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게 매우 '운이 좋은 쪽'이었다는 거다. 나이가 들면서 더 눈물이 많아진 탓도 있지만, 마지막 작품을 읽으면서는 꽤 울기도 했다. 다른 작품들 중에서도 중간중간에 목이 메이는 부분이 있었지만, 마지막 작품은 그냥 슬펐다. 엄마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특히 그랬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를 알아보는 엄마에게 몇 번이고 사랑한다고, 나의 엄마여서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었다.> 단순한 문장들인데, 담백함이 주는 무게가 있다. 어린시절 엄마와의 에피소드를 읽다보니 마치 아는 사람의 죽음을 보는 듯했고, 또, '엄마'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만국 공통의 감정이 있어 엄마의 죽음을 논하는 순간 나는 벌써 감정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의 죽음으로 소설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소설 속 주인공인 소설가는 자신이 읽은 수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책 또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죽음을 앞두고 암에 걸려 삶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철학자 미야노가 이소노라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는 내용이다. 짧은 인용과 함께 작가는 아래와 같은 코멘트를 단다. <이들이 말하는 좋은 여름, 최고의 여름은 미야노가 죽고 난 뒤의 여름이다. 누군가 죽고 난 뒤의 여름, 그렇게 되뇌고 나니 머리를 쇠망치로 두들겨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죽어가는 사람은 늘 있을 테니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여름은 모두 누군가의 죽고 난 뒤의 여름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분명 좋은 여름, 최고의 여름이 있었다. 좋은 여름은 누군가 죽고 난 뒤의 여름, 누군가 죽고 난 뒤의 여름은 최고의 여름......나의 마음에 따라 이름은 그때그때 달라지지만, 여름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 마지막 작품인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작품 말고도 다양한 작품이 감동을 주었다. 소재는 매우 다양하고 소설 속 배경도 홍콩, 프랑스, 일본 등 다양하다. 하지만 그냥 알 것 같다. 작가가 이번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라고, 주변의 작은 것들이나 흔하지만 소중한 관계들에게 관심 가지라고. 관심 갖는 순간, 애정으로 바라보는 순간, 그것들은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무한하고 영원한 우주에서 의미 있는 대상이 된다고. 유한한 인간이 무한해질 수 있는 것은, 순간순간 사랑하는 거라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김연수 작가는 이 책에 실린 작품 대부분을 코로나19로인한 펜데믹 기간에 쓴것같다(정확하진 않다..작품에 직접적으로 언급이 되기도하여 추측해본다). 벌써 엔데믹 선언한 지 2년여 지났지만 그때가 오롯이 생각난다. 특히 2020년은 적응 전이라 더욱 그 모든것들이 끔찍하게 여겨졌던것도. 관계맺기가 자유롭지 않을때 우린 그때부터 '관계'란걸 고민하기 시작하는것같다. 그땐 황당한 질병이 모든 관계를 가로막을 수 있음에 놀라고 절망했고 또 한편 편안해하고, 뭐 그랬던것같다. 나에게 집중할수있는 시간일수록 '관계'를 생각해봤고, 입으로 웃는 상대방의 표정이 그리웠다. 김연수 작가는 죽음 앞에서야 자신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수있으니 마치 두번째 삶을 사는양 살아야 오롯이 자기 삶의 의미를 알며 살 수 있다 했다. 엔데믹 후 관계는 급하게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갔지만 난, 또는 우리는 기억한다. 그때의 편안함, 또는 그때의 절망감을. 급하게 탄력적이었던 이유는 있을 거다. 인간이란 죽으나사나 미우나고우나 관계 안에 있을때 안심이란걸. 팬데믹을 겪으니 당연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 덕분에 나에게 소실점이 될 뻔한 김연수 작가가 다시 무한히 감사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사둔 나를 칭찬하기로 했다. 마치 두번째 산 것처럼 사랑하고, 사랑하며, 사랑할 거다. 그게 전부인듯. |
![]() 내가 가진 많은 책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을 구매하게 된 건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마침 여름의 문턱에 접어들었고, 물결이 일렁이는 듯한 표지가 눈길을 끌었고 마지막으로 표지와 깔맞춤의 문진이 너무나 탐이 났다(앞서 말했듯 나의 도서 구매가 대부분 이러하다).
그런데 막상 책을 손에 넣은 2023년 여름은 어찌어찌 게으름을 피우다가 지나버리고, 이어진 가을, 겨울은 왠지 계절이 맞지 않으니 다음에, 라는 핑계로 미뤄두었다가 그렇게 두 번째 여름, 2024년이 되어서야 책을 펼쳐들었다.
이 책, 올해는 읽어서 다행이다. 이름은 많이 들었으나 글로는 처음 만나는 ‘김연수’라는 작가의 글이, 단편의 짧은 글들 안에서 만나는 문장 하나하나가 내 마음에 깊게 박혔다(이렇게 좋아하는 작가가 한 명 더 늘어났다).
지금의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로는 몇 십번 아니 몇 백번은 "지금을 온전히 아끼고 누리자" 말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바쁜 것부터 하고 나서’라는 꼬릿말을 이어가는 나를 돌아보게 만들어준 이야기들을 만났고,
나는 매일 너에게서 뭔가를 배웠어. 네 앞에서는 좋아하는 것들만 생각하기. 태풍이든 장마든 뭔가 몰아칠 때는 그때야말로 한없이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기. 지금 이 순간, 기다릴 만한 것을 기다리기. 아무리 작고 사소하더라도 변화에 민감하기. 비가 그친 뒤 바람의 미세한 변화나 ‘오늘은 산책을 나가도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들을 흘려보내지 말고 알아차리기. 좋아하는 것들 앞에서는 온몸으로 기뻐하기. pp.17-18 (나 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는 없어서)
"청둥오리는 보는 일도, 아내와 밥을 먹는 일도, 또 둘이서 잠드는 일도 모두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됐다고." p.65 (보일러)
돌이켜보면 그때가 우리에겐 눈물겹도록 좋은 시절이었다. p.88 (우리들의 섀도잉)
나는 지금 나를, 내 주변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나의 시선과 마음이 향하는 곳을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래, 우리의 위치가 모든 걸 결정해. 우리가 감각하는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크거나 절대적으로 작은 것이 없어. 멀고 가까운 것만 있는 거야. 그러니 어떤 대상의 크기는 우리가 어디에 있냐느에 달려 있어. 그 위치가 우리의 의지를 뜻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우리 위치에 따라 얼마든지 작게 만들어버릴 수 있어. 그러다가 아주 멀어지면 어떻게 되지?" p.137 (풍화에 대하여)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눈덩이를 굴리는 일과 비슷했다. 사랑할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미워할수록 더 미워하게 된다. 매 순간 관계가 호의와 악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p.166 (관계성의 물)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읽으며 (솔직히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의 계절적 배경이 ‘여름’이어서 책 제목을 이리 정한걸까, 생각하기도 했다) 소심함과 용기 없음으로 항상 주저하는 스스로에게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풍덩’ 뛰어들라고 응원을 보냈다.
사랑이란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결심이다. 그게 우리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이다. 사랑하기로 결심하면 그 다음의 일들은 저절로 일어난다. 사랑을 통해 나의 세계는 저절로 확장되고 펼쳐진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길. 기뻐하는 것을 더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을 더 사랑하길. 그러기로 결심하고 또 결심하길. 그리하여 더욱더 먼 미래까지 나아가길. p.266
올 여름, 이 책을 읽어서 다행이다(이 여름이 지났다면 2025년 더운 바람이 불어올 때에나 이 책을 읽었을테니). 나의 너무나 많은 여름 중 특별한 여름을 만들어 주었으니, 그로 인해 2024년 더운 시간을 잠시라도 일렁이는 물결 속에서 지날 수 있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나에게 적용하기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그리고 미루지 말고 시도해 보기 (적용기한 : 지속)
*기억에 남는 문장 “그렇더라도 다 좋을 리가 없잖아. 세상에는 해봤자 별로인 일들도 너무 많아.” :맞아. 막상 해보니까 별로인 일들은 너무나 많아. 하지만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그럼에도 해봐야 한다는 것이겠지.“ p.41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야. 과거는 다 잊어버리자..(중략)..이제까지는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앞으로는 미래가 지금의 나를 만들 수 있도록 말이야.“ p.57 그것이 우리의 원래 얼굴이었습니다. 밤의 어둠 속에서 혼자 있을 때, 우리는 누구의 흉내도 내지 않아도 좋았던 것이죠. 아침이 되면 우리는 멀쩡한 얼굴을 가면처럼 쓰고 함께 밥을 먹은 뒤 각자의 일터로 출근했습니다. p.108
벨 에포크를 살아가는 사람은 그 시절이 벨 에포크인지 어떤지 알지 못한다. 한 번의 인생이란 살아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은 뒤에야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잘 살고 싶다면 이미 살아본 인생인 양 살아가면 된다. p.214
장편소설은 시작할 때보다 끝낼 때가 훨씬 더 어렵다. 이야기를 끝내는 것은 젠가의 맨 아래쪽 막대기를 빼내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무너뜨리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야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원하는 결말을 쓰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허물어질 게 분명하다. 그렇게 나는 어떤 말도 대답이 될 수 없는 곳에 이르게 되고, 이윽고 묵묵해진다. 나의 지혜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곳에 이르렀기에 나는 다소곳해진다. 그럴 때 나는 걷는다. p.252
‘살아간다’는 건 우연을 내 인생의 이야기 속으로 녹여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자면 우연이란 ‘나’가 있기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행운과 불운이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게 인간의 우연한 삶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삶에서 일어나는 온갖 우연한 일들을 내 인생으로 끌어들여 녹여낼 수 있느냐, 그러지 못하고 안이하게 외부의 스토리에 내 인생을 내어주고 마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p.262 |
김연수 작가는 작품 낭독회에서 고된 노동에서 돌아와 자신의 작품 낭독을 듣는 사람들의 고단함을 위로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바쁜 하루를 보낸 참석자들을 위해 작가는 이야기들이 한 권의 책으로 나온 게 바로 『너무나 많은 여름이』 였다.
내가 김연수 작가의 단편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읽으며 내내 생각했던 질문이 있다.
이 책의 연유를 들으며 나는 궁금했다.
과연 사람을 살리고 위로하는 이야기란 무엇일까?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작가이기에 나의 기대감은 더 커갔다. 누구나 상실을 겪는다. 그 상실이 뜻하지 않는 이별일 경우 그 상실은 더 깊어진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 에도 상실로 슬퍼하는 이들이 나온다. 세월호 유족들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와 먼 타국에서 자녀를 떠나보낸 소설 <나와 같은 빛을 보니> 의 두 작품은 비자녀를 잃은 이들의 슬픔이 그려진다.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에서는 유가족이 운영하는 경주의 <팔복서점>을 찾아간다. 자식을 잃은 공간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나요 라는 질문 앞에 그 분은 자신이 슬픔의 현장에 터를 잡은 이야기를 이야기한다. 수많은 관광객 무리에 묻혀 마음껏 울 수 있고 무작정 걸을 수 있어서라고 답한다.
무작정 걸을 수 있어 견딜 힘을 얻었다는 <팔복서점>의 주인은 주인공에게 말을 건넨다.
"그럼 우리도 이제 걸어볼까요?"
자신이 마냥 걸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냈듯이 슬픔에 젖어있는 또 다른 이들에게 함께 견뎌보자고 손을 내민다.
타인이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소설. 이 짧은 소설집은 계속해서 손을 내민다.
<나와 같은 빛을 보니>에서는 일본어를 모른다며 무작정 저녁 초대를 하고 일본에서 온 편지를 읽어달라고 한다. 무심코 읽은 편지는 일본의 외손주로부터 온 편지. 외손주는 구글로 번역한 듯한 서툰 한국어로 엄마의 장례를 전하고 있었다. 차마 자식의 장례 소식을 읽기 힘들어서 타인에게 읽어달라 요청하며 울지만 할머니는 편지 낭독이 끝난 후 말한다.
"우리 저녁 먹자."
상실 뒤에도 소설들 속의 인물들은 함께 걷자, 함께 저녁 먹자며 삶을 이야기한다.
<풍화에 대하여>에서는 오랜 세월 후 재회한 지훈과 정현진이 나온다. 교수와 학생으로 만났으나 구설수에 휘말려 헤어진 그들. 몇십년이 지나 연락이 닿은 지훈은 재회를 앞두고 고민한다. 한때 애틋했던 그들이 언제부터 잊혀졌을까 생각한다.
지훈은 생각한다. 언제부터 우리의 관계는 희미해지기 시작했는가? 왜 우리는 쉽게 잊혀졌는가?
그건 바로 멀어진 순간부터라고 말한다. 멀어지던 바로 그 순간부터 풍화는 시작되었다.
사라졌어도 잊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아도 기억해주고 바라봐 주는 것. 그것이 남겨진 우리가 할 수 있는 책임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여름이』 에는 재개발로 사라져버릴 나무들을 지켜달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희망이 없어 포기하는 무명화가들에게 희망을 주길 바라며 거액을 주고 무명화가들의 작품을 사는 거부인 찬 선생이 나오고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불안에 떠는 어린 여학생에게 손을 잡아주는 언니가 나온다. 이들은 모두 약한 자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손을 내밀며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다. 누군가를 살리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나는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향해 힌트를 얻는다.
결국 우리를 살리는 건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타인을 향한 이유 없는 다정함. 타인을 향한 이유 없는 선의. 타인을 향한 이유 없는 따뜻함.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읽는 내내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그리고 나에게도 또 다른 바람이 불어오길 바라며 남을 향해 미소를 짓게 하는 힘을 내게 한다.
사회가 각박해지고 각자도생이라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따뜻해질 수 있음을 말해주는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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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는 일은 아주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던 일을 계속하는 일, 하던 대로 지속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노력과 끈기 그런 걸로는 설명하기엔 부족한 무언가가 있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든 건 김연수의 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 을 읽으면서 김연수의 소설을 계속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이 소설들을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당연함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좋아한다고 해서 한 작가의 모든 책을 다 읽는 건 아니다. 좋아한다는 건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기대가 있다는 건 실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망에도 무릅쓰고 계속 좋아하는 일, 계속 읽는 일, 그건 용기를 넘어 확신 같은 거라고 할까.
누군가 내가 읽은 김연수 소설의 분위기가 내내 같은 게 아니겠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비슷하고 같다는 이유라면 나는 이미 그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작가와 함께 독자도 나이를 먹고 살아가다 보니 소설을 통해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점점 인생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거창하거나 대단한 게 아닌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들, 이 순간의 아름다움과 평범하고 흔한 일상의 다정함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이 글은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대한 리뷰라고 할 수 없다. 처음 김연수라는 작가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읽은 첫 번째 소설 이후 그의 소설과 산문을 읽는 동안 좋은 리뷰를 쓰고 싶었다. 잘 쓴 리뷰 말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대해서는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가장 최근에 만난 김연수의 단편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을 읽으면서 두 번째 바람을 맞이하는 게 인생이라고, 아니 얼마나 많은 N 번째 바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상실과 슬픔, 절망과 죽음 속에서 우리는 다음을 향해 나가고 있다고.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수록된 20편의 짧은 소설은 저마다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전한다. 그 좋음에 대해 애써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과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에 대한 상냥하고 친절한 이야기라고만 하겠다.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와 기쁨, 결국엔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려는 노력, 부재로 존재하는 사랑에 대해, 타인을 향한 이유 없는 다정함이 우리가 몰랐던 가능성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 편으로는 우리가 맞이하게 될 다음에 대한 이야기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코로나 다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김연수 작가가 어머니와 작별하지 않았더라면 딸인 열무와 작별하는 미래는 지금 쓰이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뉴욕제과의 막내아들이 기억하는 어머니, 일본어를 쓰던 어머니의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더 나중에 쓰였을지도 모른다.
낭독회를 위해 쓰인 소설이라는 점도 특별하다. 공포로 가득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피신한 가족에게 이미 전쟁을 경험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흔한 지혜로 울림을 전하는 「두 번째 밤」으로 시작해 어머니의 임종과 엄마와의 추억과 일상을 천천히 들려주는 자전적 에세이 같은 표제작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마지막으로 배치한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전쟁이 없는 세상을 원하지만 여전히 전쟁이 계속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과거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까. 그런 과거가 바랐게 미래가 정녕 이런 모습은 아닐 텐데. 그렇다면 김연수의 말대로 우리는 미래의 나가 지금의 나를 만들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슬픔과 미련에 매달리는 대신 미래의 긍정을 향해서 말이다.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과 함께.
우리는 저절로 아름답다. 뭔가 쓰려고 펜을 들었다가 그대로 멈추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 채, 다만 우리 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바라볼 때, 지금 이 순간은 완벽하다. 이게 우리에게 단 하나뿐인 세계라는 게 믿어지는가? 이것은 완벽한, 단 하나의 세계다. 이런 세계 속에서는 우리 역시 저절로 아름다워진다. 생각의 쓸모는 점점 줄어들고, 심장의 박동은 낱낱이 느껴지고, 오직 모를 뿐인데도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 「너무나 많은 여름이」, 255~256쪽)
‘그러므로’, 너무나 많은 여름이, 너무나 많은 골목길과 너무나 맣은 산책과 너무나 많은 저녁이 우리를 찾아오리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으리라. ( 「너무나 많은 여름이」, 281쪽)
너무나 많은 비가 내리는 여름에 만난 김연수의 글이 지친 나를 달랜다. 습하고 불쾌한 감정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위로한다. 이 여름을 견디고 나면 조금만 버티면 젖은 바람이 아닌 마른 바람이 도착할 거라고. 그 당연한 걸 잊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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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신간 소식이라니 너무 반가운 소식이다. 단편소설집, 그것도 <너무도 많은 여름이>이라는 제목과 표지까지. 기대가 마구 커진다. 지난 가을에 나온 단편집과는 어떤 느낌일까 싶기도 하고. 그 단편집이 너무 좋았기에 이 단편집도 좋을 거라느 걸 알지만. 혹시나 하는 어떤 이상하 마음. 여름에 만나는 김연수의 소설, 그 아름다운 시간을 생각하니 설렘 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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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너무나나 많은 여름이 / 김연수 요약하면, 어쩌다보니 읽게된 한국 작가의 여름 소설이라는 뜻인데 이번 일주일동안 생각하는 여름을 보내게 해 주었다. 책 뒤의 플레이리스트를 따라 들으며 읽었는데, 노래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기도 전에 끝난 단편도 있는 걸 생각하면 단편의 길이와 담긴 의미의 깊이는 꼭 비례하지만은 않나보다. 20개의 여름 조각은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그리고, 때로는 평행 우주같은 세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책에서 작가는 직접 글의 키워드를 말하진 않는다. 그냥 우리에게 저마다 다른 여름을 보여준다. 우리는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 가다 눈을 뜨게 된다.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거다. 유퀴즈에 나온 김영하 작가 편에서 독서는 ‘자기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란 얘기가 나왔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크게 공감하진 못했었는데, 책에 실린 [나 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는 없어서]를 읽고 비로소 이해했다. 내가 강아지 이야기에 유독 약한게 바로 그런거겠지. 가슴 깊이 묻어둔 내 감정을 매번 다시 돌아봐야하는 일이라서. 그래도 ’내가 이런 감정이였구나‘를 진심으로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걸 이번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문장수집 “네가 나의 새 아파트로 오던 날, 나는 결심했어. 필사적으로 산책하겠노라고.” “관계라는 건 실로 양쪽을 연결한 종이컵 전화기 같은 것이어서, 한쪽이 놓아버리면 다른 쪽이 아무리 실을 당겨도 그전과 같은 팽팽함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딱지처럼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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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기일이 있는 유월엔 심적으로 힘들어진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서 체력이 부치기 시작하기도 하거니와, 마음도 너무 힘들어져서, 엄마의 기일이 있는 유월 말쯤에 몸도 마음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유월이 시작되면서부터 준비를 하는 편이다. 이런 저런 좋아하는 것들로 나를 무장시키는 편인데, 해마다 빠뜨리지 않는 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연수 작가의 책을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두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정말로 마음이 무너졌을 때를 대비하는 것인데, 지진을 대비해 재해용 키트를 준비하고, 다칠 때는 대비해 구급약을 대비해두는 것처럼, 그렇게 책 한 권을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진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이 든다. 사실 이 책은 작년 이맘때 구입한 건데 이제야 왔다. 언제 올지 기약없는 책을 막막하게 기다리다, 작년 생일쯤 받고 싶은 선물이 있으면 말하라는 지인에게 부탁해 똑같은 책을 한 권 더 갖게 되었다. 작년 여름에 코비드 백신을 맞은 이후 심장과 폐가 안 좋아져서 여름, 가을, 겨울 동안 전문의들을 만나고 온갖 검사를 했었는데, 작년 겨울엔 이 책을 병원에 가져가서 의사를 만나기 전과 검사를 준비하기 전에 틈틈이 읽었다.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 책의 권말엔 플레이리스트와 더불어 낭독회를 열었던 서점들과 도서관의 목록이 있다. 올초에 읽었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책에도 그의 장례식에서 들려준 곡들의 플레이리스트가 있었거니와 무라카미 하루키 등의 책에서도 플레이리스트가 종종 삽입되기도 하지만, 이렇듯 '낭독회'를 염두에 두고 그 장소에서 함께 할 사람들을 위해 정성스레 쓴 글들과 음악을 함께 할 수 있는 건 꽤나 근사한 선물이다. 2021년부터 2023년까지 팬데믹 기간 동안 열렸던 낭독회였기에 그 의미가 더 남달랐을 수도 있겠지만, 낭독회에서 읽는 것을 목적으로 쓰여진 '다정한 글'들과, 그 글들의 배경음악일 수도, 그 글에 영감을 준 음악일 수도 있는, 동명의 음악들이 함께 한다. 따라서 문자만 있는 여느 책들보다 이 책은 좀더 역동적이다. 그래서 '한여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모든 것들이 생명력을 갖고, 활력을 띄고 있다. 음악과 더불어 누군가에게 읽힐 때 글들은 또다른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순간 순간 부활할 글들의 생명력이 눈부시다. ![]() 그리고 또 하나, 책 속의 글들만큼이나 다정한 작가의 엽서. 지난 책에 이어 이번 책에도 작가의 엽서가 들어 있다. 가을의 안부를 묻던 작가는 이번엔 여름의 안부를 묻는다. 나처럼 아픈 사람은 미래를 도모할 수가 없다.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어렵기는 하다. 일주일쯤 앞을 계획하고 준비할 수는 있지만, 석달 뒤, 반년 뒤, 일년 뒤를 예상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먼 미래까지 술술 나아가길' 바라는 작가의 다정한 격려에,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본다. 낙관적인 마음으로. 달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묵묵히 걸어왔듯이 지금 여기에서 시작해 더 먼 미래까지 '술술'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 작가의 다정함이 적어도 나의 세상은 구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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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에 짧은 동영상이 등장하며 시간의 길이가 이렇게 짧아야 사람들이 본다는 생각에 앞으로 책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단편소설 분량을 한 번도 끊지않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런 생각의 답을 김연수 작가의 글에서 찾았다. 문해력이 낮아진 사회를 말할 때, 책보다 스마트폰이 가까운 시대에 소설의 형식과 공감각의 접근법에 대해.
혹시, 서점에서 이 책을 구입하려고 앞에 잠깐 보려고 하거나 공공장소에서 첫장을 읽으려 한다면 첫부분은 집에서 읽으라고 하고 싶다. 준비하지 않은 상황에서 두 남자의 마음을 보아야 하는 것은 독자 스스로 당황할 수 있으므로.
여름 날을 하나의 날씨로 말할 수 없듯, 사람이 사는 세상을 하나의 감정과 마음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작가는 말하는 듯 하다.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도 한 번은 알고 지나가야 하는 다른 이의 삶이 있고 끝내 돌아보아야 할 사람이 바로 그 책장 어딘가에 있으므로. 그리고,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혼자서 읽어낼 수 없는 사연의 넓이와 깊이를 작가가 함께 해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 안고 있는 이야기에 당신의 여름이 내내 건강하시길. 그리고 당신의 삶이 누군가에게 결국에는 이해될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