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이야 어린이들 책이 넘쳐나는 것이 오히려 불안한 세상이지만, 어린 시절 어쩌다 책 한권이 생기면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30 여년 전 계림사에서 나온 동화책 <로빈슨 크루소>는 대양과 고독을 동경하던 어린이의 심성과 잘 맞아 떨어졌기에, 과장하지 않고 한 30번은 읽어서 왠만한 대목은 줄줄이 외울 정도였다. 하지만 진짜 소설을 접하지 못하고 이렇게 수십년이 훌쩍 지나 버렸는데, 얼마전 인터넷 서점을 서핑하다가 완역본 <로빈슨 크루소>를 보고 눈이 번쩍 떠졌다. 소설 완역본에다 여태 들어본 적도 없는 2부까지 같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할 것도 없이 일단 주문하고 보았다. 이제 1권을 다 읽었으니, 어릴 때 열광적으로 읽었던 동화책의 내용과 이 성인용 소설을 한번 비교해 보고 싶다.(2권은 읽다 말았다.... 지루해서) 첫째, 로빈슨이 브라질에 정착했다가 다시 항해에 나선 동기에 대하여, 소설에서는 분명히 농장에 필요한 노예를 비공식적인 루트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 명시하였다. 노예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아동들이 혼란을 겪을까봐 그랬는지, 동화에서는 항해동기가 단순한 '무역의 이익'으로 표현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둘째, 동물들에 대한 것인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사람에게 의지할 수 있는 반려동물이란 무척 소중한 존재이다. 동화책에서는 개나 앵무새에 대한 서술에서 깊은 애정이 느껴졌고, 특히 함께 섬에 도착했던 개가 수명을 다하여 죽게 된 안타까운 상황이 대단히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원소설에서는 너무나 사무적 태도로 동물들을 대한 느낌이다. 세째, 섬에 들어왔던 영국 선박의 반란을 제압하고 귀국하는 대목이다. 동화에서는 프라이디의 고향에 들러 그곳에 표류·정착해 있던 스페인 사람들을 함께 태우고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원소설에서는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자신과 프라이디만 영국으로 향하고 있다. 나는 소설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참 이해가 안되었는데, 함께 탈출하고자 사람들을 자신의 섬으로 초빙해 놓고 어떻게 혼자만 구조되는 것일까? 그 사람들을 토대로 섬에 식민지를 구축한다는, 더 말도 안되는 상황이 2권에서 전개되고 있지만, 이런 대목은 번안된 동화보다 오히려 엉성한 구조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읽은 동화 <로빈슨 크루소>는 아마도 일본의 번안본을 중역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번안자가 참 완벽하게 이야기를 소화하고 나서, 그것을 다시 동화로 되살려 냈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적인 줄거리를 취하면서, 아주 재미있고 교훈적인 별개의 동화를 창조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첫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소설도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은 인정하겠으되, 어린 시절에 읽은 동화가 훨씬 맘에 든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여, 때로 지루해지고, 때로 설교집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벌써 300 년이 된 소설이다. 디포우의 이러한 실험 결과 근대 소설이 탄생한 사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가공된 이야기를 통하여 교훈 또는 풍자적인 내용을 전달하려는 계몽주의 시대의 저술 형태에서 탈피하여, 이후 이야기 자체의 가치로만 존재하게 되는 진정한 의미의 소설이 시작된 것이다. 이 책은 지난 1970년대 국가 지원사업으로 추진되었던 자유교양문고(이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이다. 청소년들이 읽을 만한 거리가 없던 시절에 얼마나 큰 혜택인가) 중 하나로 출간되었다가 수십년간 절판되어 있던 것인데, 최근 옷만 살짝 바꿔 입고 다시 등장하였다. 기왕에 재출간의 기회를 잡았으면 조금 시간을 투자하여 제대로 된 책을 만들 일이지, 역자 후기(後記)에서도 실토하였듯이 당시의 문장을 그대로 재수록하였다고 한다. 10~20대의 젊은 세대라면 다분히 고전적인 문체를 발견할 것이다. 유치원 아동에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고학년,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그림책·만화·동화까지 수십 의 <로빈슨 크루소>가 널려 있다. 과연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번안된 동화책을 읽히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한번 생각해 보고 싶다. 기왕에 읽을 거리가 풍부한 마당에 굳이 검증 안된 외국 소설의 번안본까지 읽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소설 <로빈슨 크루소>도 조금 성숙한 고학년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내용인 바, 적당한 시기가 되면 조금 이르다 싶게 원전을 읽히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요즘 유행처럼 다투어 번지고 있는 동화 원전 번역본의 출간은 그런대로 바람직한 발전방향이라고 본다. |
|
지난해 여름 동네 아이들과 논술공부를 하면서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습니다 제대로 읽어보기는 처음인데요. (그대로 말하자면 아이들보다 내 공부를 더 많이 한 셈입니다) 이른바 ‘대영제국’의 식민지 개척시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놓고 보면 당시 영국사람들이 즐겨 읽었을 법 하기는 한데 이게 왜 고전이 되어 아직까지 널리 읽혀야 되는지는 받아들이기 어렵네요. 색다른 소재 탓일까요
어쨌든 글은 외딴 섬에 고립된 영국 사내 미스터 ‘노’의 생활보고서나 근무일지를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흔히 이 책의 교훈으로 말하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혼자 살기 어렵다’는 일반적인 느낌에 가닿기 보다는 ‘인간은 최소한의 생활(문명)도구만 있으면 그럭저럭 혼자도 지낼만 하다‘는 걸 말하는 듯 보입니다. (실제로 그 이는 난파된 배 안에서 상당수의 생활 필수품을 취합니다) 먼저 뼈저린 외로움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외로울 때 가장 쉽게 떠올려지는 것이 가족과 친구일텐데 그냥 ‘아버지 뜻을 거슬러 이렇게 되었지’하는 자책이나 후회 정도이지 그 이들에 대한 회상이나 절절한 그리움은 거의 보이질 않습니다. 다음에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친구 만들기에도 그다지 적극적이질 않네요. 친구먹기로는 배에서 같이 살아나온 개가 가장 그럴싸한데 (그러고보니 개이름도 생각이 안나네요, 안지어준건가) 어느날 뜬금없이 몇 년 전에 개가 죽었다는 정도의 보고를 할 정도면 찬 밥 신세였음에 분명해보입니다.
그러면서 다음에 하는 짓이 기껏해야 앵무새 말가르치기 정도인데 참 메마른 사람이지요. (‘캐스트 어웨이’라는 무인도 배경의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너무 외로워서 같이 떠내려온 배구공-미국 ‘윌슨’사 로고가 선명한-에 얼굴 형상을 그려놓고 벗을 삼지요. 폭풍우 때 저만치 떠내려가는 배구공에 대고 ‘미스터 윌슨’을 외치며 애절해하는 모습이 미국식 상업영화의 오버라 해도 미스터 ‘노’보다는 훨씬 실감있는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미스터 노의 관습적 기질이나 타방에 대한 자세는 잘 알려진 대로 뒤에 만난 ‘프라이데이’라는 뭣같은 이름을 지어준 원주민과의 만남에서도 그대로 드러나지요. 맨 처음 가르쳐준 말이 ‘주인님’이라 그랬나요. 처음부터 앗쌀하게 주종관계임을 못박고 들어가는데요. 그러니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기대하긴 글러먹었다고 봐야지요. (이 책은 뒤에 2편도 만들어졌다는데 본국으로 돌아간 뒤 못내 아쉬워 자신이 28년간 개척한 식민지를 다시 찾아오는 내용이라지요)
신과의 관계도 재미없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 그 중 많은 글품을 파는 데가 종교 또는 기독에 대한 얘기인데요. (지은이가 기독교 쪽 일도 했다지요)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때 그 때 자신의 상황에 맞춰 자신을 합리화하고 힘을 얻는 정도의 처세술 정도로 읽히지 그야말로 신과 나, 일대 일로 마주앉아 치열하고 웅숭깊은 존재의 문제나 인간본성의 문제에 접근해본다거나 또는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나 부정에서 (충분히 그럴만한 환경이지요) 신의 은총이나 위대함을 깨닫는 절정의 환희를 그려봄직 한데 거의 겉핥기 수준에 머무르고 있네요. (하긴 보고서에 그런 말 들어가면 결재 맡기 힘들겠지요)
그럼에도 이 꽉 막힌 사내가 세들어 산 (전혀 동화되지 못한, 아니 합칠 엄두도 못내었다는 의미에서) 이 섬과 자연은 꽤나 매력적인 그림인데요. 그러면서 이 섬에 어울리는 사람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혹 이 섬에 권정생 할아버지가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참 맞아떨어지는 궁합 같지 않나요. 언젠가 북한강에 있는 남이섬을 제 맘대로 제 생각대로 일구고 가꾸어 또 하나의 작은 나라를 만들어낸 이의 기사를 본 적 있습니다. 그러니 할아버지가 미스터 ‘노’ 대신 이 섬에 살았다면 그야말로 꿈같은 낙원을 이루지 않았겠나요.
영화 ‘슈렉’에 나오는 자그마한 통나무집을 짓고 사슴도 여우도 토끼도 뱀도 종달새도 송골매도 거기에 집에서 기르던 개 ‘뺑덕이’까지 죄다 친구 먹으며 집 앞 너른 마당에서 한바탕 숲속의 향연을 벌이지 않았겠나요. 뒤쪽으로 조그만 텃밭도 부치고 약간의 곡식을 수확하여 나무열매와 약초를 찬거리삼아 그야말로 한 모금 샘물과 한 덩이 찬밥에 감사하며 지락(至樂)을 열어가지 않았겠나요. 거기에 하늘을 우러르고 구름과 바람과 냇물과 대화하며 고독을 벗삼아 천지간 사람됨을 온전하게 누리지 않았겠나요. 때로 머얼리 이 곳 샛별같은 어린 아이들에게 편지도 부쳤겠죠. 여전히 이 곳 근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기회가 되는대로 꼭 놀러오라고 초대장도 보냈겠지요. 그리하여 아이들의 웃음과 산들내가 하나로 어우러져 밤하늘 별빛에 감미로운 달빛 찰랑이는 저 아래 바닷가에서 홀랑 벗고 멱이나 감으면서 따뜻한 모닥불에 고구마며 감자며 구워 아이들 입에 넣어주었겠지요.
그렇게 꿈같은 이야기를 그려보며 떠나가신 할아버지 생각에 목이 잠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