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의 소중함이 무엇인지 새삼 돌아보게 하는 책을 만났다. 잔잔하고 맑은 언어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읽었을 때처럼 감동으로 다가 오는 책 '누비처네'... 목성균이란 저자의 이름도 생소했지만 누비처네란 뜻 역시 무엇인지 몰라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누벼서 만든 처네란 뜻을 가진 말 만큼이나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는 무척이나 서정적이고 마음이 포근해짐을 느끼게 한다.
저자 목성균님은 이미 2004년도에 작고하신 분이다. 십대 시절부터 이미 문학에 대한 깊은 뜻을 가진 분으로 꿈을 위해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대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고 사업적인 부분에서도 잘 풀리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와 공무원이 되어 사셨다. 허나 그의 마음속에는 문학에 대한 꿈이 남아 있기에 늦은 나이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셨다. 저자의 글은 살아서는 알려지지 않다가 죽은 뒤에 입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필가로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저자... 좀 더 빨리 그의 작품이 세상에서 빛을 보았다면 어떠했을까 잠시 생각해 보며 늦게나마 저자의 글은 만나 반갑다.
제목과 같은 누비처네를 다룬 글에서는 타지에서 생활하는 자식을 보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과 무심한 남편을 대신해서 며느리를 생각하는 시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는 이야기다. 지금은 다양하고 좋은 아기 용품들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가정 형편상 아이를 등에 없는 누비처네조차도 쉽게 사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아내가 이불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누비처네를 보고 남편은 누비처네를 샀던 시간을 떠올려 본다. 또 며느리 힘들지 않게 하기 위해 명태코다리를 옷에 묻히지 않기 위해 힘들게 들고 오시고 저자의 아내 역시 시아버지의 옷을 보면서 다음날 다시 입고 가실 수 있게 명태 묻은 흔적을 재빨리 지운다. 며느리에 대한 시아버지의 애정이 시아버지에 대한 며느리에 대한 마음이 느껴진다.
하나씩 풀어놓는 이야기의 끈은 연이어 이어진다. 과거의 시간을 떠올려 보면 나쁜 기억은 조금 상쇄되고 좋은 기억은 더 선명하게 남아 있게 된다고 한다. 목성균님은 어떠했을까? 그의 글을 통해 들어나는 아버지는 그리 살갑지도 애틋한 부자간의 정을 나누어 주는 아버지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같은 남자라서 나이들고 중풍으로 쓰러지셨던 아버지를 보면서 같은 남자로서 아버지를 이해하였을 거란 생각이 든다. 여자지만 내 자신이 중년에 접어들고 보니 저자의 아버지의 모습에서 내 아버지의 모습을 상당히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어머니 역시 시대의 어머니들이 하셨던 것처럼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를 하셨다고 여겨진다. 시계밥 하나에도 큰소리를 치시는 시어머니의 명을 따르면서도 혼잣말로 미처 시계밥이 다 되었다는 것을 몰랐던 자신에 대한 어리석음과 이런 일까지 일일이 잔소리를 하시는 시어머니에 대한 서운함이 묻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자신의 부주의로 어린 자식을 먼저 잃어야 했던 죄송한 마음까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에 장손인 저자를 살뜰히 챙기시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들어내 놓고 아내를 살뜰히 챙기지는 않지만 아내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비롯해 가족, 친척, 직장, 지인, 손자 등에 대한 이야기는 삶이 주는 소박한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9개의 테마로 나누어진 이야기다. 책을 읽는 독자라면 저자의 서정적이고 진솔한 삶의 깊이가 느껴지는 이야기에 매혹될 수밖에 없다. 서울이 고향인 나지만 이야기를 있다 보면 자꾸만 시골 풍경 속 부모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서울에서 자식들 키우시느라 새벽부터 장사를 시작하시던 부모님... 시골에서 사셨더라도 이와 다르지 않는 모습이었겠지만 그래도 시골에서 사셨다면 마음 다치실 일이 덜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살짝 해본다.
저자처럼 나 역시 달달한 일회용 티백 커피를 즐겨 마신다. 헌데 오늘 낮에 엄마가 가져다 주신 구운 고구마와 함께 친구가 준 유명 커피전문점 커피를 마시며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져 볼 생각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목성균, 그는 살아 생전 어떤 사람이었을까? 수필을 읽으며 그를 가늠해 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하지만 글에서 느껴지는 그를 그려보려니 참 구수하면서 친근하고 다정하게 다가온다. 글만으로도 사람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수필이 가진 장점이며 매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수필은 정말 잘 쓰여졌다. 문채뿐 아니라 시골 살림이나 시골 삶에서 느껴지는 글들이 주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를 만나면 한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 낼것만 같은 수필이 내게 큰 울림이 된다. 하지만 이제 그가 이 세상에 존재치 않으니 나는 그저 이 수필집 한권으로 두고 두고 그와의 만남을 기꺼워하련다.'어찌보면 두 남녀가 이루어가는 '우리'라는 단위의 인생은 단순한 연출의 누적에 의해서 결산되는 것인지 모른다. 약간의 용기와 성의만 있으면 가능한 연출을 우리들은 못하든지 안 한다. 구닥다리 세간에 대한 아내의 애착심은 그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연출한 소도구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내의 애착심을 존중해야지, 누비처네를 보면서 생각했다. --- p28수필을 읽어보면 알게 되지만 누비처네가 무슨 말일까 싶었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누빈 아기 포대기다. 누비처네를 한참이나 세월이 흐른후에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는 아내를 보며 무심한 남편을 나무라는 편지와 함께 돈을 부쳐온 아버지의 당부로 얻게 된 누비처네의 출처를 떠올린다. 그로 인해 제 자식을 만나게 되고 또 아이를 업은 아내와의 달빛아래 동행을 하며 행복했던 순간을 추억한다. 그리고 이제는 나이들어 버리지 못하는 아내의 세간살림에 대한 이야기를 장군 멍군 하듯 주고 받는 부부의 이야기가 참 좋게만 여겨진다.누비처네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만큼 구수한 단어들이 참 많이 등장하는 수필이다. 다랑논, 부엌 궁둥이, 사기등잔, 살포 등등. 그리고 그에 얽힌 그의 이야기는 어딘지 쓸쓸하고 애잔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참 정겹다.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고 그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사물들을 되새겨보게 해주는가 하면 그에 딸려오는 각각의 이야기들이 지금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게 만든다. 제 힘으로 감당할수 있으면 앞자리로 나서 브이자 대형을 날아가는 기러기를 빚대어 사회를 비판하기도 하고 장모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는가 하면 할머니와의 소나기를 맞던 기억, 아버지와의 추억등등 참 많은 추억들이 참 짤막한 한편의 수필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나는 수필을 참 좋아한다. 특히나 누군가의 삶이 녹아 있는 이야기를 하는 수필을 좋아한다. 그건 아마도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그만의 이야기가 녹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분명치 않은 사물에 대한 이야기지만 어떤 것인지 어림짐작이 가능케 하는 시골스러운 문채와 옛스러운 문장으로 추억을 떠올리는 이야기가 담긴 이런 수필이 참 좋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도시생활자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삶과 사물에 대한 정취가 가득한 이 수필집은 내게 그리움 가득한 추억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책이 될것만 같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 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마땅히 보고싶은 프로그램이 없거나 자투리 시간이 남았을때 가끔씩 홈쇼핑 채널을 살펴보게 된다. '이런 물건이 있었구나' '아 예쁘다'하는 정도의 감정으로 그저 무심하게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중 갑자기 들려오는 한마디 말에 나는 그대로 채널 돌리기를 멈추고 아예 쇼파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구마말랭이'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면 엄마는 고구마를 한가득 쪄서 잘라 볕좋은곳에 말리곤 하셨다. 지금처럼 주전부리가 흔치않던 시절, 쫄깃거리는 고구마말랭이는 최고의 주전부리였던것 같다. 잊고 있었던 말, 그리고 맛, 그리고 기억 한켠 어딘가에 자리잡은채 떠오르지않던 추억들, 냄새들 목성균님의 수필집 [누비처네]를 읽으면서 나는 잊고있었던 추억들과 재회할수 있었다. 사실 다른 책들에 비해서 수필은 내게 선택을 받는 장르는 아니었었다. 이전에 유안진님의 글이나 김용택님의 글들은 일부러 찾아서 읽는 편이기도 했지만 소설이라는 장르와 다른 수필의 특성상 굳이 찾아서 읽고 싶은 매력을 느낀 책들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책은 희한하게 한장을 넘기면 새로운 추억이 밀려오고 또한장을 넘기면 잊고있던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추억이 떠오르고, 마치 어린시절 소풍날 보물찾기를 하는 경험이었다고 할까..다른점이라면 그시절 보물찾기에서는 선생님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어디에 보물을 숨기나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하나 찾기도 어려웠다면 이책에서는 페이지페이지마다 하나씩 둘씩 수도 없는 추억들이 툭툭 튀어나왔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누비처네? 생소한 말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요즘에는 궁금한것이 있으면 바로바로 인터넷 검색이라는 좋은 수단이 있으니 나또한 그 수단을 이용하여 궁금증을 해결하기로 한다.누비처네를 검색하자 (누벼서 만든 처네)라고 한다. 그네도 아닌 처네는 또 무엇인고 검색하니 어린아이를 업을때 두르는 이불이라는 설명이다.우리가 흔히 알고 있기로는 아마도 포대기인것 같은데 말이 다른것인지 쓰임이 다른것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누벼서 만든 아기포대기라는것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설명인것 같다. 어렸을때 동생을 돌볼때는 가끔 매던 포대기지만 사실 우리아이들을 키우면서도 포대기의 도움은 거의 받지않았던것 같다. 어린데다가 물어볼곳도 마땅치않았던 철없는 엄마는 아이를 업는것을 참 두려워했었다. 아이를 뒤로 업으면 아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수없어 불안한 마음이 큰 탓에 포대기보다는 앞으로 업는 띠를 더 애용했었다.내가 아이를 키울때도 포대기를 이용하는 엄마들은 거의없었는데 요즘에는 더욱더 포대기는 찾아보기 어려워진것같다. 이전에는 몰랐다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말이 주는 신비로움에 빠져들게 된다.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해도 참으로 예쁜말들이 추억과 함께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나는 70년대생이다. 그런데 나와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닌 친구들보다는 한 7~10년정도 앞서 학교를 다닌 사람들과 대화가 통한다. 왜냐하면 내가 다닌 학교는 아주 시골에 있는 학교였기때문에 나무에 있는 송충이를 잡았던 기억도,학교에 내기 위해 솔방울을 주우러 다녔던 기억도 내시대의 친구들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들이 많다. 저자는 산림공무원으로 근무했었다고 하는데 그시절 산림공무원만큼이나 무서운 사람이 내게도 존재했었다. 바로 산주인아저씨? 겨울이면 땔감을 준비하는것은 어느집 아이들이나 다 해야하는 당연한 일이었다. 장작이나 나뭇단이야 집안의 가장이 준비를 하겠지만 솔가지나 마른 낙엽들로 불쏘시개를 장만하는것은 머리제법 큰 아이들이면 당연히 해야하는일로 받아들였었다. 그시절에도 지금과는 다르지만 괴담비슷한 것들이 떠돌았었는데 솔가지를 주워모으다가 산주인에게 걸리면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벌금까지 물어야한다는 소문이 돌았던터라 산주인은 아마도 망태할아버지와 비슷할정도의 무서움을 가진 존재였던것 같다. 그랬다. 저자가 산림공무원이라는 말에 그 시절 솔가지 긁어모으려 다니던 생각도 나고 지금은 없어진 친정집의 아궁이도 생각나는 폼이 참 추억여행 한번 제대로 한다는 생각이 든다.
곳곳에서 추억을 만난다. 사람사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을 굳이 빌리지않더라도 대단한 사람은 또 얼마나 대단하게 사는지는 몰라도 우리같은 소시민들의 삶이야 거기서 거기인 탓이다. 덜덜거리는 오래된 선풍기와 관련된 일화를 읽으면서는 결혼과 함께 장만해서 이제는 다 고물이 되었지만 해마다 여름이면 한자리 차지하고 제몫을 하는 우리집 선풍기도 떠오르고 아버지와 관련된 일화를 보면서는 어느새 일흔을 넘기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오른다. 지금이야 휴대폰만 들여다봐도 한달이고 일년이고 달력을 볼 수 있지만 그시절 방안에 걸어둔 달력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만을 알려주는것이 아니었다. 한달이 지났다고 달력한장을 쭈욱 찢어버리지 못하고 곱게 넘겨 다시 걸었던 달력은 제해가 지나면 다른 쓰임으로 쓰이곤 했었다. 묵은 달력의 쓰임은 바로 교과서포장. 아버지는 자식들의 교과서를 꺼내 묵은 달력들로 곱게 겉장들을 싸주셨다. 무엇하나 풍요롭지않던 시절, 교과서도 가끔은 물려받아 쓸 때가 있었는데 그렇게 곱게 포장된 교과서는 도시락반찬으로 싸가지고 다니던 김치국물이 흐르기전까지는 곱게 간직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달력으로 교과서를 싸주시던것과 함께 하시던 일이 한가지 더 있었는데 연필들을 나란히 깎아주시는 일이었다. 연필깎이에 넣고 돌리면 쉽사리 잘 깎아진다는것은 알지만 그때에는 연필깎이도 우리형편에는 사치품에 가까운 품목이었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그렇게 깎아주시던 연필이 더 좋았던것 같다.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이들이 어렸을때는 나도 한두번씩은 연필을 깎아주기는 했지만 어쩌다 한번씩일뿐, 꾸준하게는 지속하지 못했던것 같다. 삐뚤삐뚤 깎아놓은 모양이 예쁘지않기도 했고, 아버지는 나란히 깎아놓은 연필들을 필통에 가지런히 꽂아주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목성균님의 수필전집 [누비처네]는 추억으로 가는 여행안내서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한장을 넘길때마다 하나의 이야기를 만날때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시간속의 나와 만나는 기분이 든다.친정의 시골집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의 시간을 지내왔고 그래서 지금의 모습이 익숙할뿐 예전의 모습을 굳이 찾아보려 애쓴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책을 만나고서는 자꾸 이전의 모습들을 되새겨보려고 애를 쓴다.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있던 부엌, 아버지가 옮겨심던 목단, 종기종기 우물가에 모여있던 여러개의 항아리들, 창호문을 열고 뒤란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나... 추억으로 떠나고 싶다면 그리고 사람이 주는 향기를 맡고 싶다면 주저없이 읽으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을 만났다.
|
|
공감각은 어떤 감각 혹은 인지에 다른 종류의 감각을 연결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부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만이 가진 고유 능력이다. 가령 숫자에서 고유 색깔을 느낀다던가 음악에서 어떤 그림이나 도형을 연결시킨다거나 지리나 역사를 년도 따위에 선명한 자신만의 풍경을 연관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공감각을 가진 사람들은 풍부한 감성 암기력 등의 비범한 두뇌 활동을 갖게 되고, 특히 예술가인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공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참으로 부러웠던 나는 누비처네를 읽으며 어떤 빛바랜 사진 같은 이미지가 푸르스림한 흑백에 가낀웃 청록빛같은 색상으로 히미하게 떠올랐는데 이것이 실제로 능력자들이 가진 공감각과는 다르겠지만, 이제껏 다른 글에서는 볼 수 없는 색상을 가진 것만은 확실했다.
목성균의 글들은 사후에서야 조금씩 알려졌다. 이 책을 받고,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살아서 널리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의 삶이 고흐의 마지막처럼 쓸쓸하고 외로웠으리라 여겨져 괜한 감상에 젖었었다. 그러나 목성균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살아서 인정받지 못한 천재적 예술가들의 비참한 말로와는 달리 정겨운 추억과 따스한 가슴으로 마음 가득 그리움 마저도 애잔한 풍요로 품은 행복했던 작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비처네에 실린 글들은 세월이 지워버린, 지금은 존재하지 않을 아련한 옛 것들, 옛 산골에서의 일상, 옛 물건, 옛 어른들, 옛 풍속, 옛 친고와 옛 시절, 옛 사건과 하루 하루 지나왔던 소박했던 지난날들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들이 주를 이룬다.
그가 쓰는 글은 가끔은 국어 사전을 찾아봐야 하리만큼 생소하지만 때때로 어렴풋 어릴때 할머니가 썼던 것 같은 정겨운 우리 고유의 옛말과 어휘를 담고 있다. 그래서 마치 그리움은 빛바랜 어린 시절의 회색빛 사진들처럼 우리에게 그대로 언어를 타고 전해져 온다. 살강, 살포, 다랑논배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겹고 말캉거리는 순수한 우리말들을 우리는 얼마나 홀대하고 외면하고 떠나 보냈나. 그가 흘러가고 사라진 풍속과 시간을 회상하는 방식은 그가 사라져 가고 있는 언어를 회상하는 방식 같다.
글모음 속에는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 아련하고 따뜻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디며 얼음물을 깨어 황태를 씻던 촌 아낙네들이 들러 황태 한 꾸러미씩을 주고 가던 강원도 영동 지방의 어느 겨울 그의 아내가 그 고되고 정직한 노동으로 눈덮힌 추운 하루를 보내는 아낙들을 위해 눈내리는 진부령 산맥 한 자락 작은 불빛 아래 밤새 털목도리를 짜는 풍경은 어떤 흑백 뮤직비디오처럼 아름답고 처연하기까지 하다.
때때로, 시처럼 포근한 언어. 여울물 소리를 베고 선잠을 자는 시골 풍경이 한 장의 선명한 풍경화처럼, 자근자근 노래하는 음악처럼 그렇게 내게로 전해져 옴을 느낀다.
그가 산문 속에 풀어 놓는 그의 젊은 시절, 서슬퍼런 군부 정권의 말단 공무원으로 밥을 벌어먹고 살던 그 어두운 시절 정서적으로 힘겨운 일들을 해내었어야 했던 회상 속에서도 선배, 동료 등 인간을 향한 따스한 시선은 한 편의 동화처럼 애잔하다. 그는 눈발이 소복히 쌓인 정월 초하루 이브날, 가족과 어린아이를 보기 위해 도망자의 긴장을 늦추고 들렀을 도벌꾼을 체포하러 눈덮힌 산길을 올라 그를 잡았지만, 느슨해진 경계를 틈타 도망가는 도벌꾼을 그 자리에서 놓치고 만다. 아이는 소리 내 울고, 아내는 소리 죽여 울고. 우는 아내와 아이를 뒤로 하고 도망가야 했던 도벌꾼을 대신해서 아가에게 건네는 동료선배의 한 마디. 아가야 아빠 까까 사러 갔다. 이일로 그들은 직무 유기로 위기에 처하지만 다행히 시말서 한 장 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늦가을 산정 육백마지기라는 고원에서 방화선 보수작업을 하는 열흘동안 묵은 늙은 심마니들의 통나무집에서 알게된 어린 소년과의 인연을 회상하는 <약속>이란 글은 30년간 지키지 못한 약속을 가슴에 묻어둔 사연이다. 눈보라치는 겨울 산정에서 친구도 없이 겨울을 나야 할 소년의 참담한 고적이 태산같이 그의 앞길을 가로 막자 내년 봄에 산불을 감시하러 다시 와야 하기 때문에 내년 봄에 꼭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으나 충북 도청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 글을 쓰는 시점에서 30년 전 이야기였다.
작가가 적고 있는 그리움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식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절에 대한 기억이고, 현재를 과거와 구분짓는 방법이다.
그의 글은 시대의 아픔을 함께 기억한다. 6.25가 나던 피난 행렬을 따라가던 중 만난 사나운 강에서 가까와지던 포성 소리를 뒤로 하고 열세살 작가 목성균을 등에 업고 물살을 헤치던 기억이 그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아버지 등 뒤에 박힌 점을 본다. 그리고 떠내려 죽는 사람들을 목격하며 아슬아슬 초인적인 힘으로 위기를 넘기고 강을 건넌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본다.
이 책은 두고 두고 어릴적 아껴 숨겨놓은 초콜릿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 먹듯 한편 한편 작가의 시대를 떠올리며, 그 흑백사진같은 풍경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머리 속에 그리며 한편 한편 읽으면 더 좋을 책이다.
|
|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되는거야. -1904년 1월, 카프카, <변신> 중에서 이 말이 떠오르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니 알겠다. 지금껏 건성건성 책을 읽고 있었다는 듯이 정신이 번쩍 들고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잠에서 깨우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책 『누비처네』를 읽는내내 마음이 요동친다. 오랜만에 진정으로 책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은 목성균의 수필 모음집이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다. 세대 차이를 느끼게 되는 글도 많았고 낯선 느낌도 든다. 사실 '누비처네'라는 단어도 생소했는데, 표지 그림처럼 누벼서 만든 처네가 '누비처네'다. 처네는 어린아이를 업을 때 두르는 누비로 된 이불이라는 것을 검색을 통해 알게 된다. 일종의 포대기인 것이다. 어렸을 때에는 포대기로 아이를 키우는 것을 보며 컸지만, 요즘에는 다른 모습으로 변천했다. 세대가 지나갈수록 그 모습을 보기 점점 힘들어지니 세대간의 단절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옛시대와 지금을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낯선 시대의 이야기이지만 그의 글은 충분히 이해가 갈만큼 친절하다.
목성균 수필의 장점은 눈앞에 펼쳐져있는 듯이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맛깔나게 글의 맛을 제대로 살렸다. 글을 읽으며 파르르 전율이 느껴지기도 하고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감정이 메마른 나에게조차 감정에 북받치게 하는 능력이 있으니 대단한 능력자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작가라는 점이다. 그의 글을 너무도 늦게 알아버린 듯한 느낌이다. 57세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했음에도 돌아가실 때까지 이렇게 두꺼운 책으로 묶어낼 걸작들이 있는 것을 보면 진정한 수필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수필의 모음집이기 때문에 곁에 두고 천천히 읽어나가기를 권한다. 전체적으로는 두껍지만 수필의 특성상 짧은 이야기 하나씩으로 마무리 되기 때문에 큰 부담은 없다. 어떤 작품을 읽어도 상관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겠다고, 그것도 빨리 읽어버리겠다고 생각하면 이 책이 전해주는 감수성을 놓쳐버리게 될 것이다. 한 꼭지 읽고 잠시 접어두고, 한 꼭지 읽고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고, 여유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소리내어 읽으면 더욱 좋다. 낯선 단어들을 많이 만나게 되어 살짝 당황하게 되지만, 이내 우리 말의 풍요로운 세계를 맛보는 데에 더없이 만족하게 될 것이다. 머릿속에는 그림을 그리며 글을 읽어나가게 된다. 같은 땅에 살았지만 다른 삶을 살았던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오랜만에 곁에 두고, 두고두고 음미하고 싶은 책을 만났다. 잘근잘근 소화하고 싶은 글이고, 마음에 들어와서 영향을 주는 글이다. 수필은 이래야된다고 생각한다. 감동을 주고 전해지는 메시지가 있으면서 마음을 후벼파기도 하고 훈훈하게 적셔주는 그런 것 말이다. 수필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추천하고 싶다. 수필을 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할 책이다. |
|
'과거는 새롭다' 유행은 돌고 돌지만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가 없는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 인생을 얼마 살지는 않아지만 한참 이십대 초를 보내고 있는 딸들을 바라보면 내 이십대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다시 되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살까? 내가 살아왔던 방식대로 살까?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하며 새로운 내 인생을 선택할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그렇다고 지난 시간들이 모두가 다 후회되는 그런 시간은 아니었다고 본다.과거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밑바탕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으니 실패든 성공이든 과거에 고마워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선택이란 자신이 하지 않은 부분은 누구나 후회하게 마련이다.
'누비처네' 두껍게 누비고 끈을 달아 아이들을 업을 수 있게 만든 포대기다. 누비처네라고 하니까 무얼까 하고 고개를 갸웃뚱 하게 만드는데 첫아리를 낳고 친정엄마가 전화를 하셔서 하신 말씀 중에 '애기 포대기는 사지 마라.엄마가 사줄테니까..' 그렇게 하여 엄마는 시골양반이면서도 남들 눈에 아쉽지 않게 일명 메이커라고 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쌈짓돈을 꺼내어 겨울용과 여름용 포대기를 사주셨다.아이를 가지고 아프기 시작한 허리 때문에 애들을 업어서 키우지는 않고 그저 옷장에 잘 보관하게 된 포대기,가끔 친정에 갈 때 가져가면 엄마가 대신 아이를 업고 동네를 한바퀴 돌곤 하셨다. 딸만 둘을 낳았는데 친정엄마는 아들을 낳으라는 뜻으로 포대기를 파란색으로 사주셨다. 딸아이에게 파란색이라 한마디 아쉬운 소리를 했더니 여름용은 핑크색으로 구매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이십여년이 지났지만 친정엄마가 사주신 포대기는 아직도 새것처럼 옷장에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아마도 딸들에게 물려주지 않을까.
저자의 글은 처음 접해본다.저자의 이름도 처음이다.내겐 생소한데 두꺼운 수필집에 먼저 괜히 무게감이 전해 왔는데 한 편 한 편 읽다보니 진작에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느다. 발간사에서 '아직도 목성균을 모르는 사람에게 가장 간단하게 그를 소개한다면 수필계의 기형도라 할 것이다. 기형도가 죽을 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었지만 사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후배 시인들이 거의 없다고 평가되듯이, 수필계에서는 목성균이 그러하거나 그리 될 것이다.사실 외면받기야 목성균이 더했다.' 수필을 읽기 전에 작가의 약력을 읽다보니 정말 너무 늦게 너무 괜찮은 작가를 만났는데 그의 글을 더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수필계의 기형도'인 목성균이라는 작가는 정말 우리가 잃어버린 감성을 그의 글에 시적 언어로 모두 담고 있듯 한 편 한 편이 정성스럽게 누빈 하나의 작품처럼 모두가 깊은 울림을 주기도 공감가는 글들이 너무 많다.
그의 글을 읽고 싶으면 어느 페이지나 펴서 읽으면 그를 만날 수 있고 우리가 잊고 있던 '과거'와 조우하게 된다. 해설에서 이야기 했듯이 '과거는 새롭다' 라는 말이 글을 읽다보면 공감이 간다. 그는 평범한 일상이나 자신의 과거 이야기들을 통해 삶을 관조하듯 깊은 시적 언어로 짧은 글들을 토해낸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무척 순종적이고 아버지를 크게 생각했던 그,하지만 그도 아버지를 닮아가고 아버지처럼 나이 들어 가면서 아버지라는 산을 넘지는 못한듯 하면서도 자신 속에 있는 갇혀 있는 아버지를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런가하면 '누비처네' 에서처럼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에게 편지와 소액환을 보내어 명절에 내려오는 길에 첫 아이를 낳은 아내에게 누비처네를 선물하게 하는 자상함,이것이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가부장적인 가정에서 겉으로는 표현을 하지 않아도 뚝배기에 담긴 장맛처럼 진하고 은근함이 베어 있는 부정을 생각해 한다. 그 속에서 부부의 정은 더욱 깊어가고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저으이 행복이 그대로 전이되는 듯 하다.
그의 아버지는 부정情을 밖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은근하게 그리곤 한번을 표현해도 올곳게 행하신 분인듯 하다. 아들이 등잔의 심지만 키우고 있자 맑고 밝은 불빛을 위해 등잔의 심지를 갈아 주셨던 아버지,그게 아버지 방식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인생의 끄트머리에서는 아들의 수발이 해야했던,쓸모 없는 등잔처럼 쇠잔해지셨다. 세월 앞에 허망한 것이 없겠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지난 시간들의 편린을 하나 하나 이어 맞추어 조각보를 완성하듯 나도 덩달아 꺼내어 보며 미소짓게 만든다. 우리집에서 등잔을 멀리하게 되었던 것은 초등학교를 들어 가기 전인듯 하다. 등잔불 밑에서 언니 오빠들을 따라 공부를 한답시고 옆에 앉아 책을 보다가 등잔불에 눈썹도 태우고 머리도 태우고 가끔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추억을 안겨 주던 등잔이 집집마다 편하게 컸다 켤 수 있는 전기가 들어오면서 친정엄마는 등잔을 모두 리어카 장수에게 팔고 말았다. 그 때에는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오래된 물건들을 리어카를 가지고 사러 다니시는 분들이 있었다. 그런 분들에게 빨래비누 몇 장에 팔아 넘긴 것들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기도 했지만 엄마에게는 그것이 어쩌면 가난이라는 이름으로 없애고 싶은 물건이기도 했을 것이다.아니 가난보다 고난이라고 해야하나. 가끔 식구들과 둘러 앉아 그시대 그런 물건들을 헐값에 팔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말하곤 한다.지난 것에는 다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다.
기쁜 일들 기분 좋은 일들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 삶과 죽음등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진솔한 이야기들이 과감없이 그리고 시적 언어로 아름답게 그려지기도 했지만 무언가 짧은 글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깊은 여운이 짧다고 지나치기 보다는 한번 멈추어 서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여운을 남겨 주어 책의 두께가 주는 무게감이 아니라 글이 주는 무게감이 한참을 머물렀던 것 같다. 어릴적 우리집에도 '수탉'이 있었다. 시골에서는 닭은 닭장에 키우기 보다는 낮에는 그냥 풀어 놓고 놔먹인다.아버지는 닭을 애지중지 키우셨고 그 닭들은 아침이면 아버지의 정성에 보답하듯 따뜻한 달걀을 퐁퐁 안겨 주어서 아침이면 막내딸 밥상에 꼭 챙겨 주시곤 했다.그런데 그런 닭이 나도 물론 좋았지만 수탉이란 놈은 정말 무서웠다. 위풍당당하게 멋지게 생겨서 털의 아름다운 빛깔에 취해서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곤 했는데 이 녀석이 나만 보면 멀리서부터 뒤뚱뒤뚱 하다가 날지도 못하는 녀석이 날아 오듯 내게 달려와 날 쪼곤 했다. 그래서 늘 경계를 하던 녀석,그렇게 수탉과 내 전쟁은 날마다 이어졌고 그런 딸의 모습이 마음 아프셨는지 아버지는 어느 날 아쉬움을 뒤로 하며 그녀석을 밥상에 올리고 말았다. 저자의 <수탉>을 읽으며 내 어린시절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유독 우리집에 오는 수탉마다 나를 경계했는데 왜 그랬는지.
달포 후에 뒷집 새댁은 딸을 낳았다. 물론 순산이었는데 아들과 딸의 차이가 돼지불알의 주체와 객체의 차이가 아닌가 싶은 생각에 아쉬움이 남았다. -돼지불알 중에서
그런가하면 <돼지불알>에서는 혼자서 낄낄 웃으며 읽었다. 어린시절 시골에서는 마을 잔치가 있으면 돼지를 잡는 마당이 정해져 있고 그 곳에서는 잔칫날에 돼지를 잡았다.돼지오줌보는 동네 아이들이 차지하고 놀이기구가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나도 어린시절에는 돼지잡는 것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더욱 가깝게 느껴졌던 이야기,그런데 지엄한 시아버지의 돼지불알을 훔쳐다 아래 윗집 며느리들이 포식하듯 맛난 시간을 즐긴 것이다. 맛나기 보다는 둘 다 임산부였으니 단백질 공급원으로 돼지불알을 훔치게 되었던 것인데 시아버지의 물음에 능청스럽게 대답했지만 아들을 순산해서 안겨 드렸던,그럼에도 주체는 아들을 본인의 아내는 딸을 낳음의 서운함일까 객체로 표현된 것이 글의 표현일까.그 이야기를 읽다보니 내가 첫아이를 가지고 시집살이를 하던 시절이 생각났다.할머니까지 정정하게 계신 층층시하,출가를 하지 않은 도련님들까지 있어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과 임신으로 모든 것이 낯선 내게 옆지기는 그리 살갑게 대하거나 임산부를 위하여 먹거리를 잘 챙겨주지도 않았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한번은 길가에서 파는 개구리참외가 너무 맛나 보여 사가지고 왔지만 식구수 대로 산것이 아니라 내가 먹을 양인 두어개만 사서 식구들과 나누어 먹기엔 부족하여 집 곁에 받쳐 있는 자전거에 매달아 놓고 윗층에 방이 있어 잠자러 가기 전에 가져 가리라 했던 참외가 자전거가 쓰러지며 식구들이 모두 알게 되었고 그런 맘을 이해해 주기 보다는 자신들을 챙기지 않았다는 설움에 시집살이를 더 고되게 했던 기억이 났다. 그 이야기는 옆지기와 가끔 꺼내서 단물을 빼먹곤 하는데 참외 이야기를 하면 미안한가보다. 분가해서 살았다면 잘 챙겨 주었을터인데 층층시하에서 시집살이를 고되게 하며 살게 하고 첫 아이에게 부족하게 해 주었다는 생각,글을 읽으며 되새김질 해 본 과거가 가슴 시리지만 그런 시절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소년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살까.만나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경위를 꼭 설명해 주고 싶다. 인생이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면서 요령껏 당면을 피해 가는 것이라는 비뚤어진 생각으로 어느 길을 가고 있지나 않을까? -약속 중에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하나 하나 뜯어 놓고 보면 결코 행복한 이야기가 아닌듯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삶이고 인생이라고 말해주는 듯 하다. 뼛속까지 글쟁이였지만 삶은 그를 문학이 아니라 좀더 진흙탕에 빠져들게 만들었지만 산림직 국가공무원을 하며 자연과 더 가깝게 느끼고 자연을 좀더 깊게 성찰을 하며 문학의 깊이가 더 다져질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육백마지기 고원의 통나무집에서 만난 늙은 심마니와 소년의 이야기가 담긴 <약속>은 알퐁스 도데의 <별> 보다 더 깊은 울림이나 아름다움을 주는 이야기같다.삶에서 그냥 지나쳐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부여하듯 그는 아름다운 시적 언어와 탄탄한 구성력으로 깊이 있는 글을 탄생시켜 목성균이라는 커다란 나무에 무성하게 나붓끼는 잎을 만들어 내었다. 이제라도 그를 알았다는 것이 천만 다행이다. 내 삶이 각박하다고 느낄 때 혹은 독서를 하다가 혹은 글을 쓰다가 무언가 회의가 느껴질 때 '목성균의 수필집'을 꺼내어 읽어보면 진흙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글이 주는 힘이 참 크다는 것을 이 수필집에서 느껴본다.언제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시 몇 번이고 꺼내어 읽어 보고 싶은 책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
소중한 것들은 사라진 후에야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알게 된다. 언제나 내 손에 닿을 것 같은 사물,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들, 언젠가는 모두 다 소멸되고 사라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건 불변의 진리지만 때로 부정하고 싶은 순간과 마주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생이 주는 선물일지도 모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사라지는 것들은 제외하고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는 사물과 사람도 종내엔 그리움이란 틀 속에 갇히고 만다.
목성균의 수필집 『누비처네』를 읽으면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비가 오면 요란한 빗소리를 들려주던 양철 지붕과 흙집을 부수기 전까지 불을 지피던 아궁이, 작은 마당 입구를 지키던 두 그루의 나무를 꺼내온다. 지나온 삶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는 엄마의 부자연스러운 미소가 함께 한다. 한때는 매초롬한 얼굴을 지녔을 엄마.
글이란 이렇게 놀랍다. 형식에 구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쓴 글이라는 수필이라서 그렇까. 모든 수필이 다 감동적인 것은 아닐 터. 목성균의 시선으로 바라본 평범한 일상 속에 우리네 삶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나는 글을 통해 내 어린 시절 속 나를 불러올 수 있었다. 「고개」란 글에서 목성균이 그랬듯 누군가를 기다리던 고개가 우리 동네에도 있었다. 읍내로 통하는 길,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기 위해 그 고개에 서 있던 사람들, 장에 나갔던 엄마를 기다리며 한 곳을 응시하던 아이들.
목성균의 글에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을 지닌 물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고백하자면 제목으로 쓰인 ‘누비처네’도 무슨 뜻인지 바로 알지 못했다. 한때 누구에게나 소중했을 물건이다. 표지의 그림처럼 아이를 업는 누비로 된 이불이다. 손자가 태어나자 객지에 나간 아들에게 아기의 누비처네 사 올 값을 보낸 아버지의 마음이 애틋하다. 어디 누비처네뿐인가. 전깃불에 반해 버렸던 등잔에선 심지를 가는 방법을 알려주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또한 「기둥시계」란 글은 내게 할머니를 추억하게 만든다. 태엽을 감아 생명을 이어가던 촌스러운 괘종시계로 이어진다. 추억을 선물하며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아주 아름다운 문장에 반하고 만다. 꾸미지 않은 글이 갖는 힘은 정말 위대한 것이다.
‘우리 기둥시계 바늘이 시간을 돌리는 일은 꼭 소가 연자매를 돌리는 일과 같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되새김질을 하면서 꾸준히 연자매의 멍에를 지고 확을 도는 소의 끝없는 노역과, 고삐를 잡고 그 노역 뒤를 따라 도는 방아 찧는 사람의 시간에 초연함 같아서 경외스러웠다. 내 선대 어른들, 아버지 · 할머니 · 증조부 등등 저 청산의 일각의 무덤 아래 드신 생전의 삶들처럼.’ <기둥시계, 149쪽>
우리는 삶이 끝날 때까지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빈손으로 태어나 쥐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게 삶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좀 더 좋은 것을 바라고, 좀 더 높은 자리를 원한다. 맑고 순수했던 어린아이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나이가 들수록 넓은 아량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데 참 어렵다.
‘나는 하찮은 내 자리에서 꽃을 피우려 하지 않고 꽃을 피운 남의 자리만 선망한다. 사회 구성 밀도만 차지한 응집력 없는 사람에게 꽃이 필 자리가 아닌 자리에서 화사하게 핀 꽃이 시사하는 바가 가혹하다.’ <꽃이 핀 자리, 550쪽>
먹고 사는 일이 참 쉽지 않은 세상이다. 비싸고 좋은 음식을 먹으려 하는 게 아닌데 그렇다. 내 몸 하나 누울 자리가 없어 비탄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는 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은 아닐까. 그러니 목성균의 글처럼 포근한 손을 내미는 소중한 사물과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지난 주말, 드라마 <참 좋은 시절>이 시작했다. 좋아하는 드라마 작가 중 한 사람인 이경희 작가의 작품이다. 동석(이서진 분)에게 가난하고 힘이 없던 어머니와 밖으로 떠돌던 아버지를 두었던 그 시절은 참 좋은 시절이 아닌 너무 지긋지긋해서 벗어나고 싶은 시절이었다. 시청자 입장에서도 15년 만에 집에 간 사연이 완벽히 이해될 정도였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았다. <힐링캠프>에서 배우 김희애는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상처와 배신으로 아팠다고. 그녀는 지금이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 것이다. 그 시절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그 시절 그녀의 드라마를 보고 웃고 울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내 동생은 드라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드라마라면 모두 챙겨 봤다. 남들이 모두 <모래시계>에 빠져 있던 그 시간, 우린 동생 덕에 <까레이스키>를 봤다. 내용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 나쁜 놈이었던 애꾸눈 한석규가 김희애를 쫓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나는 절대 악역을 연기하는 한석규가 궁금하곤 했다.
근거를 댈 수 없는 이상한 편견이 하나 있다. 처음 알게 된 한국작가는 당연히 생존한 작가라고 믿는 것이 그것이다. 목성균 역시 그랬다. 그런데 그는 10년 전에 이미 타계한 작가였다. 다시 수필집이 나온 건 그의 글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일까. 누군가가 그의 글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길 바라기 때문일까. 아마도 후자일 듯싶다. 포대기에 아기를 업은 엄마의 그림을 보고도 ‘누비처네’의 뜻을 떠올리지 못했다. 누비처네는 누빈 포대기를 뜻하며 작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다. 누비처네는 작가 아버지의 작가에 대한 부정(父情)과 작가 아버지가 작가에게 알려주는 부정(夫情)이 담긴 귀한 물건이다. 두 가지 ‘부정’은 소설집의 바탕이기도 하다. 목성균의 『누비처네』는 작가의 그 시절, 참 좋은 시절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수필집이다. 그는 ‘붓 가는 대로’ 현재에서 과거를 추억하거나 일상에서의 소소한 만남을 기록했다. 여자로 태어난 한을 가슴에 품고 거칠게 살았던 어머니의 생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윽한 아버지의 심지’가 담긴 이야기였고, 농사짓고 다독거리며 살아가던 그 시절 순박했던 우리 부모의 이야기였다. 또한 수필집은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사물들에 관한 기록이기도 했다. 그는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속담에서 ‘불공평한 밥상의 사회상’을 보았다. 수필들은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소멸을 향해 가는 삶에 대한 아쉬움, 그럼에도 삶을 낭비하지 않고 잘 살아왔다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삶은 도덕과 욕망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다. 작두에 올라탄 무당의 균형 잡기만큼이나 어렵다. 욕망에 충실한 표현들은 여성적 시각에선 거슬렸다. 「돼지불알」에서 돼지불알 먹고 아들을 순산한 원규 댁과 딸을 순산한 뒷집 새댁의 이야기를 쓰면서 아들과 딸 차이가 주체와 객체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고 썼다. 곽재구 시인의 시를 인용한 글에서는 같은 장소에 갔지만 시인과 같은 우수를 느끼지 못했다면서 주체와 객체 차이일까, 궁금해했다. 수필의 몇 문장들이 거슬린 건 내가 주체보단 객체 쪽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 즈음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공감 버튼을 더 많이 눌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시대, 같은 장소를 산 사람들이 비슷한 감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소설이라면 ‘허구’ 혹은 ‘상상’이라는 전제가 있기에 문장이 거슬리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작가에게 수필은 사실의 기록이 아닌 상상의 문학이기도 했지만. 미세먼지는 ‘비상’이지만 날씨는 봄날처럼 따뜻했다. 춥고 눈 많았던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미래의 어느 날, 올겨울도 참 좋은 시절로 기억될까? 그랬으면 좋겠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글의 위로를 받다 연암 박지원의 글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 ‘호곡장론’ 이옥의 ‘남자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 나도향의 ‘그믐달’ 등은 찾아서 즐겨 읽는 글이다. 이 글들을 통해 글이 담아야할 그 무엇에 대해 하나씩 알아간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매우 흥미로운 글을 쓰는 이를 만났다. 저자도 저자의 글도 늦은 만남이다. 이미 이 세상과 이별한 사람이라 만날 수 없지만 그의 삶의 본성이 담긴 글이 있어 늦은 만남을 할 수 있었다. "죽어서 살아 돌아온 수필가" 라는 이 표현이 담고 있는 것은 뒤늦게 주목 받았다는 이야기 일 것이니 무엇이 어떤지는 접해봐야 알 것이다. 목성균은 “1995년 57세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 시적 언어 구사력과 탄탄한 구성력으로 작고 하찮은 것, 평범한 것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생명력 있는 수작들을 빚어내어 2003년 『명태에 관한 추억』을 출간하는 등 의욕적으로 작품을 쏟아내다 이듬해 세상을 떠난 수필가”라고 한다. ‘누비처네’는 그가 남긴 수필을 모아 엮은 책이다. 천상 이야기꾼이다. 짧은 글 속에 하고자 하는 의미를 잘도 풀어내고 있다. 할아버지가 사랑방에서 손자를 앉혀놓고 조근조근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과 같이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 일상에서 만나는 지극히 사소한 대상에 주목하고 그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 의미를 갖게 되는 계기를 잡아내 삶의 희노애락을 다독이고 있다. 애써서 웅변하지 않지만 글이 가지는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기억 속 가물거리던 추억이 현실로 되살려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게 하지만 그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때 내 손을 꼭 잡던 자기 얼굴을 달빛에 보니 깎아 놓은 밤 같았어.” (누비처네) “심지는 깨끗한 창호지로 하는 거여. 그래야 맑은 불빛을 얻을 수 있지. 심지 굵기는 꼭지에 낙낙하게 들어가야 해. 굵으면 꼭지에 꼭 끼어서 기름을 잘 못 빨아올리고, 가늘면 흘러내리느니. 그리고 꼭지 끝에 불똥을 자주 털어 줘야 불빛이 맑은 거여.” (등잔) “곶의 안쪽이 만灣이고, 포구는 만 안에 있다. 곶이 만을 감싸고 포구는 남편 잘 만난 아낙네처럼 얌전하게 만의 품에 푹 안겨 비 맞고 몸부림치는 곶 끝의 으르렁거림에도 불구하고 혼곤하게 잠들어 있다.” (장마전선을 넘어) 글의 흐름을 따라가다 만나는 문장 하나가 하루 종일 마음에 남아 다시금 글 속으로 이끌어간다. 문장을 건너가는 호흡이 길어졌다 짧아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놓치지 싫은 감정이 이입되어 자꾸만 문장 사이에서 멈춘다. 상황을 묘사하는 탁월한 문장에 절로 감탄사를 자아내다 속으로 ‘그렇지’, ‘아...맞다’ 와 같이 맞장구를 친다. 시대가 변했다지만 사람 살아가는 일은 겉모습의 달라짐에 있지 않다. 서로 의지하고 아껴주며 울고 웃으며 더불어 사는 세상의 근본 바탕엔 무엇이 깃들어 있어야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다. 그의 글은 따스한 온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다독이게 한다. |
|
막연히 글을 쓰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 생각했다. 각 글에 맞는 원칙이라며 세운 구호는 -‘시는 거짓됨없이, 소설은 치밀하게, 수필은 깊은 마음을 담아’다. 수필이라면 내 시선이 담기고, 그 시선에서는 분명 깊은 마음이 자연스레 묻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접한 목성균의 수필집 『누비처네』는 지은이의 깊은 마음을 넘어선, ‘깊은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처음엔 바쁜 시간을 쪼갤 자신이 없어 침대 맡에서 읽었다. ‘누비처네’의 뜻이 뭘까, 생각하다 스르륵 잠이 들면 꿈 속에선 자연스레 평안한 그림들이 그려지곤 했다. 감각을 곤두서게 하는 세련되고 산뜻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읽고 읽을수록 진한 맛이 우러나서 자꾸 더 읽게 되는 수필이었다. 오늘은 몇몇 편을 소리 내어 읽었다. <누비처네>를 읽는데 드문드문 목이 잠기더니 결국 혼자 울어버렸다. 회사 일이 위태하여 첫째가 태어나도 얼굴 한번 비추지 못하는 아비가 있고, 그 아비에게 몰래 소액환을 부쳐 면을 세워주는 아비의 아비가 있다. 푸른 달빛을 흠뻑 받으며 걸어가는 길에 새 누비처네가 있고 누비처네에 쌓여 키득거리는 간난 아이가 있고 아이를 업은 어미가 있으며 단란한 그 행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아비가 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과거 언젠가, 꼭 내 할아버지가 그러셨을 것 같고 아빠와 엄마가 그런 길을 한번쯤은 걸어보셨을 것 같았다. 아니 이 따뜻하고 정겨운 ‘누비처네 행렬’을 보며 어쩌면 지금부터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인을 두고 백의민족이라 하였던가. 하얀 한복 차림의 사람들을 아무리 떠올려보려해도 형광물질이 가득 들어가 눈이 부시게 하얀 양복 특유의 색감은 아닌 것 같다. 목 선생은 내가 쉽게 찾아내지 못한 ‘우리네’의 흰빛을 억새꽃 속에서 찾아준다. 정성과 인내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옷자락은 여인들의 마음이 보이고 그윽하게 빛이 나는 억새 마냥 따뜻하게 하얗다. 억새꽃의 흰빛은 냉담(冷淡)의 빛이 아니다. 내색은 않지만 견뎌 낸 자신을 고마워하는 조선 여인들의 마음이 깃들인, 메밀 짚을 태워서 내린 잿물에 바래고 또 바랜 무명 피륙 같은 흰빛이다. 가을 햇빛이 쏟아지는 강변 자갈밭에 길게 펼쳐 널은 흰 무명필을 본 사람은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에 무명필이 널리기까지의 길쌈 공정과 앞으로 홍두깨 다듬이질을 거쳐 옷이 기워지기까지 남은 침선 공정(針線工程)이 얼마나 여인네들의 노고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를. 순전히 남정네들의 자긍심을 남루하게 둘 수 없는 여인의 마음, 억새꽃 빛깔에서는 그런 마음씨가 느껴진다. (p.52-억새의 이미지) 기억 속에 마음 떨리게 한 소녀가 있다. 순임, 그녀에게 쇠똥을 줍게 한 문경 양반이 밉다. 들꽃같은 아이에게 쇠똥이라니. 저도 모르게 정이 뚝 떨어졌다. 쇠똥을 줍던 순임의 몸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그게 늘 궁금했다. 순임에 대한 내 유년의 애틋한 마음을 상실한 것은 쇠똥 때문이었다. (p.188-꽃 냄새) 그러던 어느 날 열여덟 혹은 열아홉 아이 둘이 좁은 논둑길에서 스친다. 순임에게선 들깻잎 냄새와 여자의 냄새가 났다. 꽃 냄새 같은 은은한 방향(芳香). 이제 순임에게 따라붙던 쇠똥의 기억은 사라질 수 있을까. 저자는 뒤늦게 알게 된 사실 하나를 읊조리며 순임을 기억한다. 쇠똥이 미량일 때는 꽃 냄새 같은 향기가 나더라며. 논둑길에서의 그 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젊은 날, 골목 어귀에 도착하면 가슴에 안기는 안도감에 나는 턱없이 행복했다. 팔소매에 토시를 끼고 하루 종일 공문서를 작성하다 늦은 밤에 돌아오는 가난한 도청 서기의 처지에 개선장군처럼 마음이 격앙되어서 구멍가게에 들러 라면땅이라든지 새우깡 한 봉지를 사 들었다. 반드시 우리 애들을 주겠다는 마음도 아니다. 빈손이 부끄러워 서 든 전리품 대용이다. 뉘 집 애라도 만나면 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밤이 늦어서 골목 안에는 애들이 없었다. 집에 들어와서 곤히 잠든 내 새끼 머리맡에 놓곤 했다. (p.443-동구) 마을 어귀에 들어서는 아버지의 마음은 그랬던 거구나. 누구이건 만나는 아이에게 모든 것을 떨쳐낸 기분 좋은 가뿐함을 나누고 싶었던 거구나. 내 아버지도 그랬던 걸까. 자꾸 마음이 두둑하게 불러온다. 긴 여행에서 돌아와 익숙한 거리-동구에 다다르면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던 이상한 기분도 실은 ‘마을 어귀’ 특유의 포근함 덕분이었구나. 산등성이 들판을 보면서 이젠 나도 소년을 떠올리고, 미처 지키지 못한 약속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어린 소년이 자꾸 ‘나’를 기다렸듯이. 봄에 산나물을 뜯으로 육백마지기에 올라가면 소년이 멀리서 호각을 불면서 산토끼처럼 달려와서 “나는 산감 아저씬 줄 알았잖아”하고 시무룩해서 내가 일러준 대로 산불조심을 당부하더라는 것이다.(p.133-약속) 황사가 ‘바람꽃’으로 보이는 그 어린 소년에게 왜 그는 돌아가지 못하였나. 책을 읽다가 잘못 제본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연암서가’쪽으로 메일을 따로 보냈다. 바람꽃이 부는 들판을 쏘다니는 소년인양 이제나 저제나 답 메일을 기다렸는데. 마침 연락이 왔다. 인쇄가 되면서 아예 긴 부분이 잘못되었노라며 수정된 본문을 첨부해주었다. 하마터면 전혀 다른 내용으로 글을 읽을 뻔 하였는데, 돌아온 메일의 글을 붙여 읽어나가니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들어왔다. 오래 달인 곰국처럼 뿌우연 진국이 우러나왔다. ‘그래, 이것이 목성균 선생님의 수필답지!’ 목 선생의 수필을 알게 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그 맛을 알아본다. 수필에게서 날카롭고 참신한 맛만 느낀다면 한 사람의 작품을 오래 읽지는 못할 것이다. 참신함이 머릿 속의 쨍-하고 깨울 수는 있어도 여러번 만나다보면 지치게 될지 모르니까. 한 편 두 편 읽어나갈수록 쓴 사람의 일상이, 인생이 우러나와야지, 그 깊이가 한없이 깊어지는 걸 느껴야지 오래두고 곱씹을 수 있지 않을까. 목성균 선생님의 수필집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이다. 언제고 펼쳐 깊은 향기와 맛을 음미할 수 있을 테니까. 구질구질하게 낡은 ‘누비처네’에서도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행복한 달빛을 떠올리는 사람이...나, 될 수 있을까? p.s. 연암서가의 답 메일을 받으면서 생각했다. 오래도록 기다린 끝에 마침내 만나야 할 ‘아저씨’를 만났다면 ‘소년’이 이 기분이었을까.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