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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모든 분들께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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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같이 막막하고 뭔가 정의로움과는 멀어지는 시대에 살아가겠다는 제목이 울림이 되었다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여러 사건을 들여다 보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가 깊이 알지 못하면서 뉴스에서 몇몇 단어로만 이야기되던 쌍용자동차, 강정마을, 밀양의 송전탑 등에 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여느 책처럼 글밥으로 적힌책이 아니라 저자가 야전에서 강의를 통해 말글로 전하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모든 분들께 권합니다" 내용보기

요즘같이 막막하고 뭔가 정의로움과는 멀어지는 시대에 살아가겠다는 제목이 울림이 되었다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여러 사건을 들여다 보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가 깊이 알지 못하면서 뉴스에서 몇몇 단어로만 이야기되던

쌍용자동차, 강정마을, 밀양의 송전탑 등에 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여느 책처럼 글밥으로 적힌책이 아니라 저자가 야전에서 강의를 통해 말글로

전하던 것을 기록한 이야기라서 더욱 와닿는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해야 하는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1. 좋은 글귀, 마음에 드는 가사 인상 깊은 영화 대사 등을 메모해 주세요.
2. 출처를 넣어주세요. ex) 234page, 4번 트랙<사랑해>, <브리짓존스의 다이어리>에서 브리짓의 대사

YES마니아 : 로얄 r****3 2015.08.17.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살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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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인문학자 고병권이 쓴 책입니다. 수식어 '현장 인문학자' 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   허미경기자님의 책소개글을 링크합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22290.html   아래는 제가 읽으며 마음에 드는 문장을 올려 보았습니다.   ※ 『살아가겠다』에서 - 철학자는 ‘법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사는 법을 아는 자’ 이고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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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인문학자 고병권이 쓴 책입니다.

수식어 '현장 인문학자' 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

 

허미경기자님의 책소개글을 링크합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22290.html

 

아래는 제가 읽으며 마음에 드는 문장을 올려 보았습니다.

 

※ 『살아가겠다』에서

- 철학자는 ‘법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사는 법을 아는 자’ 이고 사는 법에 맞지 않을 때 법을 고치라고 용기내서 말하며, 기꺼이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21)

 

- “‘철학을 한다.’는 것은 로고스, 즉 말을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말을 행하고 그 말에 따라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 ‘철학자란 자기 삶으로 철학을 입증하는 자’라는 것. 플라톤은 결국 자신의 말을 입증해야 하는 철학자로서 시라쿠사행 배를 탔던 것이다(25).”

 

-‘앎’이란 오랜 사귐과 공동생활을 통해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서 생겨나 스스로를 길러낼 것” -플라톤(29)

 

- “그를 이루는 어떤 부분이 우리 안에 그렇게 자리함으로써, 다시 말해 우리가 자기 안에 그의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우리는 또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그와 연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연대한다는 것은 그 존재를 우리 안에 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이익인지를 판단하기 이전에, 그것이 우리에게 법으로 허용되었는가를 따지기 이전에 누군가를 우리에게 허락하는 것, 또 누군가 우리 안에 자리를 잡는 것, 그것을 우리는 ‘연대’라고 말할 수 있다(37).”

- “구체적인 정책이나 제도야 정부 담당자들의 몫이겠지만, 사회의 기본 지향이랄까 정신이랄까 하는 것은, 우리의 법과 제도를 넘어선 영역과의 교감과 교섭을 통해서 변경되고 또 창안된다. 완전히 문을 열어두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해도, 우리는 어떻든 조금은 문을 열어두어야 하고, ‘문 밖에서’ 조금은 교섭할 용기를 마련해두어야 한다. 도둑이 들어오는 그 문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손님도 들어오는 것이니 말이다. 문을 걸어두면 도둑도 없지만 손님도 없다(41).”

 

- “철학하는 왕을 철학하는 데모스로 말이다. 철학하는 왕을 나와 당신에게 요구해보는 건 어떤가. 그리고 전제주의적 진리에 반대하는 정치적 사명을 하나로 묶어보는 건 어떤가(철학과 민주주의의 수렴). 그 속에서 진리와 권력의 의미를 함께 전복시켜보는 것이다. 자기 삶을 잘 가꾸고 그 속에서 또한 타인에 대한 돌봄의 깨닫는 것, 다시 말해 삶의 특이성과 연대를 이해하고 또 만들어갈 줄 아는 것. 나는 여기서 철학과 정치를 함께 본다.(45)”

- 이 ‘용기’는 진리가 우리에게 다가서기 위한 또 하나의 조건이기도 하다. 즉, 진리의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를 여는 ‘용기’가 그 자체로 진리가 도래할 조건이기도 하다. ‘감히 알려하고 감히 말하려 하는’ 용기가 없다면 진리는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60)

 

- 자크 랑시에르는 지능이 열등할 때가 아니라 의지가 꺾일 때 바보가 생겨난다고 했다.(79)

 

- “‘탈시설’은 시설 안에 있는 사람을 시설 바깥으로 빼내는 일 이상이 되어야 한다. 시설 바깥에 있는 삶의 양식이 시설 안에 있는 사람의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령 장애인이 지역에서 가족 생활을 편안히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가족과는 다른 다양한 형태의 주거 실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가족이 주거의 기본이라는 정상성 개념을 공격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인권과 정상화 개념이 요구해온 차별받지 않고 고립되지 않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시설에서 벗어나 지역에서 살기 위해 국가의 책임을 촉구하는 운동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요구와 투쟁이 그동안의 차별과 고립에서 벗어난 삶의 대항배치를 꿈꾸는 방향에서 이루어졌으면 한다. 나는 그 대항배치의 이름을 ‘코뮨’이라 부르고 싶다. 그것은 무엇보다 ‘함께-함’의 사유이고, ‘함께-삶’의 실험이다. 나는 우리 삶이 우리들에 의해 ‘함께’ 구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제아무리 호의를 가진 자(가령 이상적 복지국가)라 하더라도 그에게 삶의 관리를 맡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함께 구축하는 데 있어 국가에게 우호적 조건을 요구할 뿐이다. ‘함께-삶’이란 서로 똑같아지는 ‘공동체(共同體)’의 삶 아니라, 서로 다름에도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동체(共動體)’의 삶이다. 서로의 독특함을 희생하지 않은 채로 ‘함께 살아가기’. 뿐만 아니라 ‘함께함’으로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내기. 서로의 삶의 가능성을 극대화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코뮨들을 실험해 보기. 각각의 장애를 넘어서 혹은 장애와 비장애를 넘어서 ‘공-동’의 삶을 실험하고 찾아보기.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다양한 공부 프로그램, 동아리 활동, 코뮨적 생활 워크숍 등)을 구상하고 실행하기. 작은 실험 코뮨들을 여러 개 만들어보기. 분명히 국가와 시설을 상대로 벌이는 탈시설 투쟁이 갖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만 그 투쟁의 다른 한편에는 국가와 자본에 대한 삶의 의존을 줄이는 실험, 더 나아가 삶을 우리 모두가 함께 구축할 수 있는 실험이 더 풍요롭게 진행되어야 한다. 나는 ‘탈시설’ 투쟁이 시설에서 나오는 투쟁임과 동시에 시설 바깥의 삶을 공격하고 변형시키는 투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82~83).”

- “이 사회는 우리에게, 장애인들에게 그것을 부추긴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무능력을 절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에 대해 무능하다는 생각을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아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모를 때, 무엇보다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능력을 모를 때 스스로에 대해 무능하다고 말해버리곤 한다(96).”

 

- “소위 대안이라는 것 자체가 좌우 엘리트들에 의해 구조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현실적 대안’이라는 말의 득세와 함께 그들의 권력이 공고해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에게 지금 ‘현실적 대안이 없음’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 또 대안이 없으면 아예 말을 못하게 하는 것, 혹은 하나의 대안을 다른 대안으로 계속 바꿔치기하며 ‘대안 없음’에 대한 자각을 계속해서 늦추는 것. 바로 이것들이 이 체제의 근간, 이 시대의 비전, 이 시대의 지배 정신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그것을 타파하려는 움직임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가(131~132).”

- 지킴이 활동의 의미: “나는 ‘지킴이’를 2000년대 한국 투쟁이 배출해낸 소중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룬 성취나 그들의 규모 때문이 아니라, 그들 존재가 보여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지킴이들은 주민들과 함께 싸우고 살아가면서 공동으로 의미를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그 ‘의미’를 또한 배우는 사람들이다. 내가 ‘무한정’ 투쟁이라는 시대 규정에서 ‘지킴이’를 새로운 활동가의 유형으로 발견하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지킴이들은 ‘사는 것’과 ‘싸우는 것’의 수렴 속에서 존재하는 활동가들이다.…사건의 현장에 들어가서 일상의 삶을 공유하는 ‘지킴이’의 존재는 ‘싸우는 것’이 ‘살아내는 것’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지킴이의 존재는 연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내 일은 아니지만 내 가슴이 무너지는 체험, 그것은 분명 연대가 시작되는 중요한 순간이다…한편으로 그는 ‘당사자’가 아닐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당사자’였다. 그는 당사자와 외부세력을 가로지르는 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셋째, 지킴이가 주민들과 구축한 삶은 분명 투쟁의 한 형식이었지만, 사실은 투쟁을 통해서 그들이 도달하고 싶은 삶의 형식이기도 했다. 마치 쌍용자동차의 ‘와락’이 투쟁의 형식이지만 또한 육아와 치유, 공동체 체험의 공간이고, 이 투쟁이 끝나도 구축해야 할 중요한 삶의 형식이듯이, 그리고 용산의 카페 레아가 투쟁의 공간이면서 일상적으로 여러 사람들, 심지어 외국에서 온 활동가들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소중한 공간이었듯이, 또 홍대 앞 두리반이 투쟁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인디밴드들의 소중한 공연 공간이었듯이, 그리고 또 두물머리에서 농부들과 지킴이들이 구축한 생태적 농업공동체가 그들이 지향하는 삶의 형식이듯이, 지킴이와 주민들은 투쟁의 공간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삶을 실험하고 구축하면서, 자신들이 지키고 싶은 것,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또한 생산해냈다.(153~155).”

 

- 우리는 또한 정당에 대해서도, 언론에 대해서도, 심지어 모든 정체성들, 그야말로 우리의 의식을 점령해왔던 모든 것들에 대한 수용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유례가 없다고 말했던 것, 예산이 없다고 말했던 것, 제도상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원칙상 안 된다고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떠져 묻기를 시작해야 한다.(167)

YES마니아 : 로얄 k*****n 2015.08.1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