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면의 밤은 늘 외롭다. 아니, 외로움은 항상 잠을 쫓는다.
모든 것이 변했는데 그걸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거나 알아채지 못한 척 했다면 어쨌든 참을 수 없다. 스스로를 속인 셈이다. 그렇지 않다고 믿은 시간이 둥둥 떠다니며 기억의 분해를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우리는 각자 원하는 대로 이해하며 내 이야기를 하게 된다. 두 사람이 함께 겪은 경험이라도, 두 이야기는 결코 같지 않다."
많은 생각으로 고단했던 옛 전쟁의 상흔이 잊혀지고 평온을 되찾을 때 즈음, 새로운 전쟁터가 열리곤 한다. 그 전쟁 역시 속임수로 무장한 채 들어온다. 그때, 전쟁터에서, 불현듯, 어쩔 수 없이. |
|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하비에르 마리아스 / 문학과지성사 강렬한 도입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철학적 상념들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는 최근에 접한 책들 중에서 가장 도입부가 강렬했다. 주인공 빅토르가 우연히 만난 하룻밤 상대 - 게다가 2살 난 아기가 있는 집에서 - 와 뭘 해보기도 전에 그녀가 죽어버린 얼떨떨한 상황. 그리 가까운 관계도 아닌 그녀와 오늘 하룻밤을 맞이하게 된 일도 예측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품 안에서 어떤 이유도 깨닫지 못한 채 죽은 상황도 예측할 수 없는, 그리고 불가항력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가 죽은 뒤, 그는 무심결에 자신의 흔적을 없애고 아이는 남겨둔 채 빠져나온다. 그는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기억을 조작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녀의 가족을 만나야 한다는 위선적인 생각을 품는다.
갑작스레 찾아온 너무나 허구 같은 '죽음'과 예상 불가능한 인생의 아이러니는 그녀와 큰 연고가 없던 빅토르를 용의자 혹은 방관자로 만들어 버리는데, 그 후에 오는 우연과 같은 상황들 - 가족들을 만나고, 인식하지 못 했던 누군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자신의 전 부인과 닮은 매춘부를 만나는 - 은 삶이 얼마나 미스터리하고 우연한 것들 투성이인지 전하고 있다. 당황스러운 사건 앞에서 작가가 색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주인공에게 부여한 것은 '익명성'이었다. 대필 작가, 혹은 대필 작가의 대필 작가로서 생활하는 빅토르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데 특화된 익명성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작가는 빅토르의 상황을 시시각각으로 표현하고 심리를 대변하면서, 그가 용의자로 들어서게 될 불안 속에 녹여놓는다.
"남을 속이며 살거나 남에게 속고 사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야. (...)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의 자연적인 상태야. (...)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항해서 열심히 투쟁할 필요도 없고 그런 것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도 없어."라는 빅토르의 말은 소설의 전체를 꿰뚫어 스스로를 성찰하고 있다. 삶은 너무나 불확실한 것을, 불확실하며 때로는 허구인 것처럼 느껴지는 모든 것들에 아둥바둥댈 필요는 없음을. 이것은 빅토르가 마침내 자신의 정체와 그날 밤의 상황을 알게 된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서 전해지는데, 그 여자의 남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인간에 국한된 것이 아닌,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본성임을 깨닫게 해준다.
소설은 "내일 전쟁터에서 살아있을 때의 나를 생각하라. 네 무딘 칼을 떨어뜨려라."라는 셰익스피어의 인용문을 반복하면서, 갖가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끌고 가는데, 긴장감 넘치는 도입부와는 달리 속도가 꽤나 느리다. 고전의 향기를 물씬 풍기면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과 대화, 독백 등에 무거운 상념들을 여기저기 끼워 넣는데, 갑자기 들어온 상념이 뜬금없기도 하고 그 경계가 참 분명하게 보여서 읽는데 시간을 꽤 잡아먹게 만든다. 그러나 딱 그 글만 잡고서 보자면, "이 작가, 장난 아니네."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미스터리적 요소가 감돌긴 하지만, 철학적인 요소가 곳곳에 내재돼있는 꽤나 무거운 소설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페이지를 술술 넘기기는 쉽지 않지만, 글맛이 좋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작품을 하나씩 읽어볼 예정이다. (남미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로물로 가예고스 상' 수상작이며, 마르케스도 이 상을 받았었다.)
Copyright ⓒ 2014. by Rinny.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