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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would prefer not to.” 그런데 처음엔 매우 성실하게 엄청난 양의 일을 하던 바틀비는 처음에는 사소한 심부름을 거부하더니 나중에는 본업무인 필사까지도 거부하게 되고, 심지어 해고 통보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의 모든 요구에 바틀비는 “ I would prefer not to.”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결국 ‘나’가 그를 피해 사무실을 옮겨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서 꼼짝 않던 바틀비는 빌딩주인에 의해 경찰에 고발돼 부랑자로 구치소에 수감된다. 하지만 바틀비는 구치소에서도 식사를 ‘안 하는 편을 택하고’ 굶어 죽어간다. 바틀비는 자신의 업무부터 사회 질서, 식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당연시하는 일들을 거부하면서 ‘안 하는 편’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가 무언가를 ‘안 하는 편을 선택’할 때마다 ‘나’를 포함하여 그것을 당연시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방식에 위협을 느끼고 의문을 갖게 된다. 허먼 멜빌의『필경사 바틀비』의 부제는 ‘월가의 이야기’(A Story of Wall-Street)이다. 바틀비가 일하는 작품의 배경인 월가는 그 자체로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며, 따라서 바틀비가 거부한 것들은 근대의 합리성,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과 노동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즉, 바틀비의 “ I would prefer not to.”는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인 셈이다. “안 해” 그런데 박솔뫼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바틀비와 유사하다. 이 소설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손정수는 “과격하게 해체적이거나 파괴적이지는 않으면서도 오히려 무정부주의적인 반항보다도 더 불온한 방식으로 문법적 규범을 이탈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박솔뫼 소설의 문체”야말로 박솔뫼 소설의 시선과 구도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박솔뫼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 즉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로 전락한 20대들이 보여주는 삶의 양태들은 바틀비의 소극적 저항보다 좀더 선언적이기까지 하다. 바틀비의 “ I would prefer not to.”의 뉘앙스는 매우 조심스럽다.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안 할까 싶어요”정도의 뉘앙스인데 비해 박솔뫼의 “안 해”는 매우 확고하고 단정적이다. 삶의 불행을 관통하는 박솔뫼의 인물들은 무언가 끊임없이 행동하기를 바라는 외부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인 ‘저항’ 행위인 것이다. 즉, 박솔뫼의 인물들은 매우 바틀비적이거나 이를 능가하는데,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안 해」이다. 「안 해」는 「그때 내가 뭐라고 했냐면」과 마찬가지로 ‘구름새 노래방’이라는 공간과 ‘검은 옷 남자’라는 노래방 사장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검은 옷 남자’는 노래방에 온 손님들을 감금한 후 폭력을 행사하면서 열심히 노래부를 것을 강요한다. 이유도 모른 채 붙잡힌 이들에게 검은 옷 남자는 말한다. “생각과 노래는 같은 방법으로 자라나지. 생각을 하고 또 하면 그 역시 열심히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고 그 이후에는 모두 도달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붙잡힌 여주는 “나는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이 싫다! 제일 싫다!”라면서 남자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거부한다. 무언가를 잘하게 되는 데 필요한 건 열심히가 아니라고 그게 남들이 보기엔 열심히로 보여도 당사자에겐 아니라니까 열심히가 아냐 무작정이 아니란 말이야 좀더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 있는 항목이 당사자와 함께 달려 나가는 거에 가깝다니까. 뭐 양보해서 열심히가 중요하다고 쳐도 정말로 열심히의 세계가 있겠어? 있다 해도 그게 튼튼해? 검은 옷 당신의 말처럼 열심히의 세계로 만들어진 노래가 자기의 몸을 부수고 세상에 던져질 만큼 튼튼해? 게다가 열심히로 만들어진 노래라니 조금도 듣고 싶지 않잖아. 안 그래? 정말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나도 생각이라는 것을 했는데 아니라고 생각해. (p.59) 사건이 전개되고 있는 장소인 ‘구름새 노래방’은 부조리극이 벌어지고 있는 무대와 같다. 이곳에서 뜻하지 않았던 상황에 던져지게 된 여주는 노래를 부르는 행위를 거부(“열심히 부르라”는 요구와 “안 해”의 거부)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매우 바틀비적이다. 남자는 열심히에 대해 말하지? 하지만 잘못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있다면 아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하지 않지? 하는 비뚤어진 교정 의식과 아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안 되지? 하는 피곤한 자학 이 둘뿐이었다. (p.58)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럼에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그걸 강요하고 어린애들을 붙잡아 요즘 젊은 것들은 열심히를 모른다고 훈계하겠지? (중략) 아 지겹다. 어떻게 해도 남자는 그대로일 것이다. (p.67) 그러고 보면 아무것도 한 게 없지. 남자는 살아 있고 앞으로도 잘 살 것이며 노래방은 불에 타지도 부서지지도 않았고 나는 피곤하기만 하다. 그런데 피곤하기만 한 것은 자꾸만 잠을 자게 하니까 뭐 좋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으음 앞으로 뭐든 열심히 안 해야지. 아 잠만 열심히 자야지 열심히 안 해 아무것도. 지금까지 열심히 한 적도 없지만 앞으로도 안 한다. 안 해 절대 안 해. (pp.69-70) 위에서 인용한 세 부분에서도 볼 수 있듯 박솔뫼의 ‘안 해’는 ‘아무 것도 아닌 것(notjing)’을 선택한 것으로, ‘자발적 예속에 대한 거부’이다. “저는 열심히 하지 않고 할 생각도 없고 왜냐면 열심히의 세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p.65) 여주의 발언은 바틀비의 수동적 저항을 능가하는 부분으로, 이러한 선언은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하면서, 흔히 ‘근대적 합리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반성하게 만든다. 사실 나는 박솔뫼의 작품들이 어려웠다. 난이도가 높다는 의미가 아니라 김사과의 소설을 처음 접할 때처럼 매우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거리감이 있었다는 의미인데, 「안 해」를 거듭 두 번을 읽고서야 비로소 박솔뫼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깐 박솔뫼의 인물들은 바틀비의 후예들인 셈인데, 그들이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일견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들이 20대의 대표적 행동양식이라는 점에서 ‘열심히’의 기성세대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젊은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 내지는 열쇠처럼 여겨졌다. 어차피 열심히 해도 되지 않을 뿐이라면 비뚤어진 교정 의식과 피곤한 자학 사이에서 익사하느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심히의 세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박솔뫼의 이 바틀비적 선언이「안 해」인 셈이다. 박솔뫼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박솔뫼,「코드프레스에 관한 몇 가지 생각들」,『인문예술잡지 F』 제7호, 2012.10)에서 “몇 년 전부터 자주 하는 생각은 많은 언어는 점령되어 있다는 것이다. 점령된 언어를 계속해서 쓰면서 하고자 하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게 잘 안 되는 쪽이고 그보다는 안 쓰는 쪽을 택한 것에 가깝다.”라고 말했는데, 이 역시 매우 바틀비적이다. 이렇듯 바틀비적인 작가인 박솔뫼가 그의 작품들 속에서 창조해낸 인물들 역시 바틀비적인데, 그들을 통해 작가가 인상적으로 보여준 것은 현재를 사는 20대들이다. 기성세대들이 보기에 일견 나약하고, 게으르고, 소비적으로만 보이는 20대를 대표해서 박솔뫼는 항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하지 않고 할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말하는 열심히의 세계는 애초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로소 박솔뫼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가 좋아졌다. 그리고 줄곧 부정적이고 난해하게 느껴졌던 20대들도 이해하게 된 기분이다. 요는, 그러니깐 그들의 실체는 바틀비였던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notjing)’을 선택함으로써 자발적 예속을 거부한 그들의 결말이 궁금해진다. 참여의 거부는 어떤 결말로 귀결될 것인가? 박솔뫼의 이후 작품들이 궁금해지는 이유이자, 20대였던 박솔뫼와 그의 세대가 30대로 진입하는 시점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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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얼 부르지」는 5.18에 대한 미체험 세대의 솔직한 역사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이채를 띤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모임과 교토의 바에서 ‘나’는 우연히 ‘5월 광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는다. 샌프란시스코와 교토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광주는 ‘명확’하게 인지되는 듯 보였지만,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는 ‘60년대 남미의 이야기’처럼 ‘아일랜드의 피의 일요일’을 노래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당사자는 아니며 또한 명확한 세계의 시민도 아니”고 “내 앞에는 장막이 있고 나는 장막을 걷을 수 없다.” 따라서 “나의 시선은 김남주가 이야기한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에는 가닿지 않”는다. 이와 같은 태도는 “역사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체념적으로 수긍”한다기보다 “다른 방식으로 역사성의 존재를 분명하게 자각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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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작가총서34 #다시읽게될줄알았어 #그럼무얼부르지 #민음사 #박솔뫼 그럼 무얼 부르지 - 박솔뫼
박솔뫼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굉장히 뭐랄까...... 내게는 낯선 세계의 만남이었다. 독특한 문체가 말소리와 글소리의 경계를 온점없이 자연스럽게 넘나드는데 처음엔 어떤 호흡으로 맞추어야 하는지 잘 몰라서 불편했는데 그게 점점 그 문체로 빠져드니까 작가의 소리가 들리는거다. 박솔뫼 작가의 발표된 소설들을 좀 더 읽어봐야만 <그럼 무얼 부르지>의 내면에 좀더 밀착해 그들의 말소리와 글소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혼잣말을 했는데도 지친다. 입이 말라. - 안 해 53쪽
<그럼 무얼 부르지> 안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 문장이다. 무얼 부른다는게 남을 위할 때도 남을 해할 때도 있지만, 나를 위할 때도 나를 해할 때도 있는거다. 그런데 그 부름이 그냥 중얼중얼 옹알이 일수도 있겠고, 샤우팅일수도 있겠고, 노래일 수도 있겠다 싶어 정말 지칠것 같다. 작가의 손에서 만들어진 캐릭터들의 다양한 서사는 그렇게 다들 혼잣말을 지껄인다. 그런데 그게 잘 들어봐야 알 수 있는데 열심히 뭔가를 끊임없이 하긴 하는데 특별하지 않고 깃털처럼 가벼워서 그냥 구멍이고 통과하고 벽이 사라지는 그런 것들이다. 너무 관념적인 느낌인가...... 표지에 그려진 그림을 보니 이나현 사진 작가의 Noise라는 작품으로 '미래 작가상'을 수상한 2018 작품이라는 거다. 소설의 제목은 <그럼 무얼 부르지>고 커버 사진은 <Noise, 잡음>이다. 무얼 불러도 그게 그거고 감흥이 별로고, 그럼 무얼 부르지......다시 골라 불러도 결국 잡음인거다. 두꺼운 유리 벽을 미끄러져 뚫고 들어가 이쪽 공간과 저쪽 공간에 걸쳐 굳어진 물은 모양이 없는 것과 있는 것의 만남 같은 것. 첫 소설 시작인 <차가운 혀>에서는 오렌지와 사과와 나의 삼각관계가 나오는데 각각의 꼭짓점이 선으로 만나 면을 세우고 공간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계속 한다. 그 삼각틀 안에서 모양없이 이유없이 살다가 밖으로 걸쳐져 빠져 나오는 계기가 있는데 사장의 런던 여행기가 새로운 노래처럼 불려지고 있었기 대문일까.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여전히 걸쳐진 현재와 미래의 끼인 틈일뿐, 무얼 열성적으로 부르는 것은 아니며, 목표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것은 낯설었는데 내가 멀리 간 것일 수도 있지만 소설들도 나름대로 발이 달려서 어디로 간 것 같다. 거기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초판 작가의 말 251쪽
이 소설의 초판이 2014년에 출간되었을 때 작가의 말이다. 이 내공은 무엇일까. 스스로 낯선 거리를 실험하듯 성큼성큼 뛰어나가 보고 느낀 날것의 감정 그대로 발을 달아 우리에게 가도록 풀어놓다니 말이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나를 구분 짓는 시간들을 떠올렸고 그런 시간들은 동시에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겹쳐진다는 생각도 했다. - 개정판 작가의 말 249쪽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구분짓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다가올 미래 앞에서 공감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겠지. 무언가를 잘하게 되는데 필요한 건 열심히가 아니라고 그게 남들이 보기엔 열심히로 보여도 당사자에겐 아니라니까 열심히가 아냐 무작정이 아니란 말이야 좀 더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 있는 항목이 당사자와 함께 달려 나가는 거에 가깝다니까. 뭐 양보해서 열심히가 중요하다고 쳐도 정말로 열심히의 세계가 있겠어? 있다 해도 그게 튼튼해? 검은 옷 당신의 말처럼 열심히의 세계로 만들어진 노래가 자기의 몸을 부수고 세상에 던져질 만큼 튼튼해? 게다가 열심히로 만들어진 노래라니 조금도 듣고 싶지 않잖아. 안 그래? 정말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나도 생각이라는 것을 했는데 아니라고 생각해. - 안 해 53쪽
내가 부수고 깨뜨려야 할 세계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까. 부른들 튼튼할까...... 튼튼하게 부를 열심은 있는걸까. 마구마구 드는 생각은 결국 이 모든게 혼잣말이라는거. 여전히 나는 가볍고 바람이 통과하고 흔들거리고 텅 비어 있고, 질문들은 빈 공간을 빠져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가고 싶은 사람도 돌아가고 싶어지는 때도 없다. 언제나 그랬지만 다시 어딘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게 어떻지는 않았다. 사라지는 것을 계속 지켜볼 수 있을 뿐이었다. - 해만 93쪽
어쩜 이리도 돌이키고 싶지 않은 삶에 대한 불성실한 기억을 아름답게 예찬할 수 있을까......지나온 시간과 공간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고 붙잡고 싶지 않아 보이는 유리벽을 통과하는 물처럼 잡음을 듣는 나. 별표와 별표 바깥의 작은 사각형과 사각형이 놓인 선과 그 선이 가리키는 길을 떠올려 보았다. 생선을 굽는 냄새와 연기 어딜 가도 이어질 것 같던 연기 그 연기가 피어나는 식당과 그 식당 안의 오래된 탁자와 의자들 무심한 주인과 그 남자의 몽타주와 원그리스도교정 달력과 그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드는 생선 굽는 냄새와 연기. - 해만의 지도 173쪽
<해만>과 <해만의 지도>가 연결되어 있는 작품인데 해만이라는 작은 장소에서 주인공 '나'가 겪는 일말의 사건들은 나에겐 외줄타는 모습처럼 느껴졌다. 특히 점과 선이 만나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사각형의 갇힌 장벽을 치고 길을 냈지만 단단하게 굳어보이던 해만도 결국 생선 굽는 냄새와 연기에 경계를 무너뜨리고마는 사라져 가는 것에 불과하다. 애쓰는 일은 없다. 내겐 박솔뫼 작가의 <그럼 무얼 부르지>는 하나의 실험이었다. 다시 읽으면 지금과 또 다른 느낌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작가의 의도가 어땠는지는 몰라도 내가 끌려가는 소설에 대한 나의 정서와 서사는 사뭇 내 안에 숨어 있던 무성의와 안열심 태도에 관한 죄책감을 당당하게 돌아보게 해 주었다. 지칠 필요없는 혼잣말이 되라고. 다독이는 혼잣말이 되라고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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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뫼 작가의 책은 역시나 처음 읽어본다. 일단 책표지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표지의 디자인도 보는 독자로서 그럼 무얼 부르지의 표지는 정말 좋은 것 같다 (사실 표지 때문에 샀다! 추천도 받았지만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샀다!) 작가에 대한 이력을 봤는데 상을 아주 많이 받은 작가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말 진심으로 부럽다. 책을 읽고 나도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소설! 정말 매력적인 소설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펜을 들고 글을 써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