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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0일 저녁 8시 50분경 숭례문 상층 문루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그리고 얼마 후 지붕 위의 기왓장들이 거센 불길에 떠밀려 터진 봇물처럼 밑으로 쏟아졌다. 창건 후 임진왜란을 비롯한 온갖 전란을 견딘 숭례문이 작은 화마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태조 7년, 1398년 음력 2월 8일,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세워진 지 꼭 610년 만의 일이었다. 방화였다. 범인은 사회에 불만을 가진 한 70대 노인으로 밝혀졌다.
☞바로가기 : 'DNA 지도'로 복구한 숭례문, MBN, 2013. 3. 28자 화재가 발생한 때를 기점으로 5년 3개월에 걸친 대역사 끝에 작년 5월 4일 복구를 완료했다. 하지만 완료 5개월여 만에 단청 일부가 벗겨지고 목재 곳곳이 갈라지는 등 부실 정황이 드러나면서 순식간에 복구 작업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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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화재는 국보 1호 숭례문이 불에 타버렸다는 실체적 손실도 있지만 화재현장이 생중계되면서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지만 끝내 화재를 진압하지 못하고 숭례문의 문루가 주저앉는 장면을 온 국민이 지켜보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 분노와 상실감이라는 정신적 상해를 입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세월호라는 거대한 배가 연안에서 침몰하며 어린 생명들이 수장되는데도 아무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 작금의 사태와 너무나 닮은 모습에 옛상처가 도지는 듯한 아픔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큰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 밑에 어떠한 불법과 부조리가 도사리고 있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시한폭탄이 언제 어디서 터질 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시달리며 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숭례문 화재가 발생한 원인, 화재 이후의 전국민적 열기가 차차 식어가는 모습, 숭례문 복원을 두고 실무적 정무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부분 등을 실록으로 남기고 있다. 등장인물들이 실명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문화재청장, 서울시장, 대통령이 누구인지는 뻔한 일이고, 지금 목재사용으로 시비에 휘말린 대목장과 그외 공사담당자들의 행적도 낱낱히 밝히고 있기 때문에 책이 발간된 후 이 책을 불편하게 여길 이들이 그를 숭례문 복구단장에서 해임한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한양도성의 출입구의 하나인 숭례문이 국보1호가 된 것은 일제시대 문화재조사를 하면서 임진왜란당시 일본군대가 한양으로 진입할때 숭례문을 통과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니 우리에게는 치욕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마음아픈 국보이다. 화재로 커다란 손상까지 입었으니 국보1호의 지위에 과연 합당한 문화재인지 논란이 있겠으나 화재와 복원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잊지말아야할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임을 생각할때 숭례문은 오히려 더욱 국보1호에 남아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화재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지만 이것을 계기로 일제시대에 숭례문주위의 성곽을 잘라내서 길을 만들고 숭례문의 홍예로 전차를 통과시키며 훼손했던 숭례문을 조선시대의 모습대로 복원하기 위해서 문화재복원의 실무자가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고민했던 내용은 문외한인 독자들에게도 커다란 공부가 된다. 현판이 갈라졌다, 단청이 떨어지고 있다, 일본에서 수입한 재료로 단청을 했다, 수입목재를 사용했다는 비판을 하기에 앞서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되돌아봐야할 것이다. 전통재료로 전통기법으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한다해도 전통재료와 전통연장이 이미 사라지고 전통기술을 갖고 있는 장인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전동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인력으로 하려해도 손연장마저 이미 일본식으로 대체되어 버린 지금 어디까지 전통의 방법을 지킬 것인지 고민되지 않을 수 없다.
숭례문 복원의 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하며 옛기록을 찾고, 실측자료를 남기고, 전통장인을 찾아다니고 후원하며, 모든 것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겨, 이후 문화재 복원에 참고자료를 남긴 저자의 노고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1960년대 숭례문 복원을 담당했던 임천선생을 알게 된 것도 커다란 소득이다. 그 당시에 1990년대에 제정된 유네스코 기준에 부합하는 규칙을 따라 숭례문을 복원하고 <서울 남대문 수리 보고서>라는 기록을 남긴 선각자가 계셨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근대화의 효율성과 경제성만을 추구해온 우리 나라에서 전통문화를 지키는 비용을 부담할 물질적 정신적 여유는 없었겠지만 지금부터라도 사람과 문화를 가장 소중히 하는 사회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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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가옥과 문화에 대한 기억과 단상
유년시절 초가지붕을 매년 한 번씩 얹는 모습과 기와집을 짓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일꾼이었던 할아버지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이 찾아 오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탈곡한 볏짚을 용도에 맞게 손질하고 (새끼 꼬듯)꼬아서 헌지붕을 말끔히 털어내고 그 위에 새짚으로 지붕을 엮으셨다.어렸던 나는 어른들이 지시하는 것만 지붕 아래에서 심부름을 하는 정도였는데,용마루를 얹을 무렵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사이좋게 양쪽에서 볏짚을 정돈하는 모습을 보았다.새 볏짚으로 지붕이 엮어지면 맨마지막엔 처마끝의 삐죽나온 볏짚을 머리 손질하듯 다듬으셨다.그중에 인상적인 것은 헌볏짚을 드러내면 그속에서 굼뱅이들이 갈 곳을 잃고 땅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나는 무섭고 징그러워 뒤로 몇 발자국을 물러섰는지 모를 정도로 오금이 저렸던 기억도 새롭다.기와집은 초가집을 헐어 내면서 터를 잡으면서 기초작업과 기둥세우기,상량식,기와 올리기 등의 절차가 진행되었는데,고교시절이고 수험기간이라 상량식만 얼핏 보았던 기억이 난다.초가집은 기와집을 짓는 것보다는 짓는 과정이 단순하게 보이지만 볏짚을 따로 구입하지 않고 집에서 농사지은 볏짚을 이용하니 자급자족을 할 수가 있어 좋았고,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척척 맞는 손발이 리듬감을 타면서 반나절도 되지 않아 깨끗하고 말끔한 초가가 탄생되었던 것이다.일 중간 중간 어머니는 샛거리(간식)를 준비를 하셨는데 고구마,김치,막걸리가 전부인 조촐한 파티와 같았다.소박한 시골 생활을 상징하는 단표누항(簞瓢陋巷)의 정감어린 시절이었다.
어른이 되어 자식을 양육하는 입장에 있어도 눈을 감으면 아스라하게 펼쳐지는 정겨운 시골마을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데 대부분 초가 일색인 동네에 몇 가구는 때깔나는 기와집이 아직도 뇌리에는 선연하게 남아 있다.잘 사는 부잣집에만 기와집이 있었던 까닭에 어린마음에 기와집에 대한 동경심은 오래도록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또한 사월 초파일에는 으례 불공(佛供)을 드리러 절을 찾곤 하는데 그 일은 할머니께서 맡으셨다.할머니를 따라 비포장 길을 시오리길을 걷고 또 걸어 깊은 산중의 절에 도착하면 딸랑딸랑 바람에 나부끼는 풍경(風磬)소리,깊은 맛이 융숭한 목탁소리와 정중하고 경외스럽기까지 한 불자들의 백팔번뇌의 모습 그리고 사찰 마당을 휘감은 색색의 연등이 즐비하게 드리워져 있어 마음은 한양없이 기쁘기만 하다.돌계단을 올라 추녀 밑에 찬란하게 그려진 단청 문양은 신비스러운 기분까지 들었다.당시에는 불공을 드리러 갈 때 돈보다는 쌀로 시주를 하고 예불을 드렸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고교시절까지는 지방에서 살았기에 옛한양의 관문격인 남대문 즉 숭례문은 사회과부도에서나 잠깐 눈을 마주쳤을 뿐 특별한 존재로는 인식을 못했다.그것도 한국 보물 제1호이면서 한국문화의 자존격인데 '소가 닭보듯' 했던 게 불찰이라는 생각마저 든다.지난 MB정부 탄생 직전 즉 2008년 2월 10일 화마에 휩싸이면서 우리 곁을 사라져가 버린 숭례문(崇禮門)은 만 5년 여에 걸쳐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화마에 휩싸이고 방화범이 밝혀지면서 온국민은 애지중지하던 자식을 잃은 듯 크나큰 슬픔과 비애로 가득찼었다.숭례문이 불에 휩싸이던 모습을 TV에서 보던 나 역시 문화재가 허술한 관리로 인해 불타는 모습에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다행히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국민들은 좋은 뜻과 마음으로 합심,협력했던 과거가 있었던 만큼 뜻있는 분들의 성금과 (자발적으로)소나무와 같은 재료 기부자가 나왔던 것이다.숭례문이 지붕까지 소실되면서 판액(현판)이 소방관에 의해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었다.
숭례문의 소실되기 전의 시대사 및 복구된 현재의 숭례문 모습
숭례문의 소실과 복구 건립과정 뒷이야기
이성계에 의해 건립된 숭례문은 한양 도서의 관문격으로 수차례 전란의 화를 당하고,복구하고,수리하면서 근 600여 년을 잘 버텨왔지만 사회에 불만이 가득했던 노인의 어리석은 행위에 의해 이제 숭례문은 뒤안길로 사라지고 새로운 '숭례문 복구원칙'에 의해 숭례문은 기초부터 지붕까지 각분야의 장인들의 노고와 공사 감독,감리 등을 거쳐 2013년 5월 준공에 이르렀던 것이다.숭례문복구단장으로 근무하면서 숭례문 복구 현장기록을 자료와 삽화,증언과 탐방 등을 정밀하게 기록하고 있는 최종덕저자는 숭례문이 준공되면서 복구단장에서 해임되고 현재는 문화재정책국장을 맡고 있는 분이다.저자는 숭례문복구단장으로서 공사현장을 살피고 기와도공 등을 만나기도 하고 숭례문 복구 과정상 드러나는 문제점에 대해 기자들에게 해명을 하기도 하는 등 숨가쁜 시간과 나날을 객관적으로 잘 해명해 주고 있다.안타깝게 느끼는 점은 문화재든 건조물이든 늘 '사후약방문'격이라는 것이다.부실공사,관리미흡 등으로 사고현장을 바라볼 때마다 공사관계자,관계 공무원들은 책임 떠넘기기 일쑤이고 몸을 사리는 경향이 너무 짙다.나아가 국가지도자격에 있는 분들의 문화재 관리.보호에 대한 인식이 미흡하다는 것이다.숭례문 관리단쳬를 놓고 갑론을박이 무성했다.해당 관리단체인 중구청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숭례문 관리에서 손을 떼고 결국 문화재청이 복구의 주체가 되었다고 한다.
문화재청장에 의해 발효된 숭례문 복구 기본원칙은 거의 옛모습을 되살리고 전통재료를 사용하자는 것이 대부분이다.숭례문의 성문을 화재 전 모습대로 복구하고,기존부재는 최대한 재상용하고,고증과 발굴을거치고,최고의 장인들이 참여하여 전통기법과 도구 등을 사용하자는 취지이고 원칙이다.하지만 막상 전통기법을 살리려다보니 조선시대 숭례문을 건조할 당시의 자료들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도 않을 뿐더러 공법(工法) 역시 재래식으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다.소나무는 운반하면 되지만 육축에 쓰이는 돌부터 전통재료,전통연장,전통기법을 백퍼센트 실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또한 고급 일꾼인 장인 및 일반 일꾼들의 품삯은 <문화재수리 표준품셈>에 의해 정해졌다.기존부재는 광화문 복구시 사용하고 남은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이었고,전통철문제작과 전통기와 등은 기업 및 은행,관계대학의 협찬을 통해 이루어졌다.숭례문은 한양 도성을 지키는 수문장이었기에 숭례문의 기초,뼈대,몸체에 이르기까지 재료와 기법,연장 등에 대한 용어도 생경한 것들이 많았지만 이번 기회에 전통문화를 새롭게 바라보고 인식하며 우리의 것을 아끼려는 주체적인 시민의식을 갖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숭례문 복구가 끝나고 '잘 했다,못했다' 등의 잡음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최선의 재료와 기법을 살려 숭례문을 복구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제대로 된 관리와 보호로 국가의 문화재가 수난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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