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한 시골에서 동거를 시작한 두 남녀가 목욕탕에 깔 타일을 고르는 대화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갈수록 꼬이고 진창에 빠지게 된다. 직접 목욕탕을 만들고, 마음껏 짖을 수 있는 개와, 부부 행세를 하며 지내는 두 남녀가 사는 시골. 집 뒤에는 산이 있고, 전나무 숲이 있으며, 그 숲안에는 빈터도 있다. 어느날 혼자 있게 되는 여자는 집 창문을 통해 숲속의 빈터에서 벌거벗은 채로 자위행위를 하는 늙은 남자를 목격하게 되고, 그때부터 그들의 평화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내 의지가 아님에도 망쳐지는 일들이 있다. 외부의 폭력에 의해서 당신과 나는 서로 할퀴고 물어 뜯고, 험담하고, 운다. 단지 우리의 잘못이 아님에도 그렇게 되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말하려면 불쾌해지는 것들이 있다. 난 단지 가만이 있었는데, 왜 내가 부끄러워지고 미워지는 것일까. 중학교 2학년 때였나. 등교길에 츄리닝을 입고 길 한 가운데서 자위행위를 하는 아저씨를 본 적이 있다.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서 보지는 못했지만, 내 손을 잡고 달리는 친구의 입에서는 욕지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비참했었던 것 같다. 보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은 피할 겨를도 없이 일어났던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소설의 주변을 빙빙 돌고 있다. 읽고, 생각하고 쓴다는 것은 이다지도 어렵다. 아직 길을 찾지 못했음에도 억지로라도 무언가를 활자화시키는 것은 의무감이기도 하고, 나를 다시 훈련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동안, 너무 나태했다. 오늘은 종일 되게 앓았다(아, 이 윤대념이 생각나는 문장). 아마 며칠 갈 것 같다. 하지만 상관없다. 차라리 속시원하게 오래, 깊이 앓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면, 내 마음이 조금 더 명징해져서 내가 글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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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빈터"를 처음 손을 잡으면서는 솔직히 뭔가 담백하고 편안한 느낌을 갈구했었다. 물론 최윤이라는 작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지 못한 탓이겠지만, 결국 그것은 그 얇은 책의 삼분의 일을 지나면서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다가 결국에 가서는 "꽝"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마음 한 구석을 내리치는 느낌을 받고야 말았다. 처음, 주인공과 남자친구는 산속 조그만 마을에서 뚝 떨어진 작고 허름한 집으로 이사를 하고, 그곳에서 참으로 오랫만에 편안하고도 깊은 잠을 자게된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난 후에는 그들이 도망쳐 오고자 했던 그 무엇인가와 다시 맞닥뜨려지고 결국 도망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그들이 이사한 작은 집은 총기 난사로 마을 주민 여럿을 사상킨 전역한 군인의 집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을 악몽으로조차 떠올리기 싫어하며 입에 담기를 꺼려하지만, 시시때때로 그의 환영은 나타나게 되고 그것으로 그들의 꿈같은 일상은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만다. 단순하면서도 읽기 쉬운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서 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기술적으로 숨겨두고 있었다. 군인과 과거. 그러면 떠오르는 것은 우리의 지난 시대를 억압하던 과거 군사정권들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에 작가는 총기를 난사한 군인을 이용한다. 그리고 그 시대와 단절된 듯한 또다른 우리세대로서 주인공과 민구를 등장시킨다. 사실 그들은 그 마을에 아주 예전에 있었던 "사건"과는 무관한 세대이다.
그러나 과연 정말로 무관한가. 그렇지 않았다. 과거 속의 군인은 대낮에 발가 벗은 모습으로 주인공이 그토록 좋아하던 전나무 숲의 한켠 빈 터에 나타나 수음을하며 주인공의 정신을 강간해버린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들의 일상과 꿈은 일그러지고 만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체념하고 살아가기로 한다. 다만 그곳에 사철 푸른 나무를 심자고 기약없이 웅얼거린다. 한때 군부대에서 대포의 사격장으로 쓰이던 그곳에는 전나무가 베어져 있고, 그 뒤로 아무도 그곳에다 나무를 심지 않았다. 우리 역사도 과거 군부통치의 상처의 많은 부분을 치유하지 않은 채로 고스란히 빈터로 남겨둔 곳이 많지 않은가. 그곳에 불쑥불쑥 벌거벗고 나타나 소시민들을 강간하고 모욕하는 일이 허다 하지 않은가. 결국, 그곳에 나무를 심고 그 빈터를 메워나가야하는 것은 새로운 세대의 몫이 되고 있음을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새로운 세대 그 스스로를 위해서. 그의 글은 마치 시를 읽는 듯 했다. 문장이 아니라 책 한권의 이야기 속에, 시를 풀어 넣어 둔 듯, 곳곳에 상징을 배치하고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목욕탕이 가지는 의미와 전나무와 빈터와 낡은 집들, 그리고 환각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최윤이라는 작가가 "저기 소리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의 작가라는 것을 알고 읽은 탓일까. 그러한 작가의 심리적 배경을 떼어내고 읽기는 쉽지가 않았다. 조용히, 일상적인 언어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작가의 능력에 세삼 놀랄 뿐이었다. [인상깊은구절] 우리는 봄이 되기 전에 빈터에 전나무를 심어 버리는 것은 어떤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제일 평범한 걸로 심지 뭐. 전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늘푸른큰키나무다.....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 솔방울 같은 열매가 열리는데, 추위에 잘 견디며 숲을 이루는 나무다.....가을에 심는 전나무가 잘 자랄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우리는 더 이상 목욕탕을 열망하지 않을 것이다. 타일 벽은 지금 있는 그대로 반쯤 붙어 있을 것이다. |
| 제목이 나의 마음을 확 끌어당긴다. '구름 속의 산책'과 같이 어느 호젓한 외곽의 카페를 연상시키는 제목, 소설 속에도 언급되었듯 이 소설은 그런 느낌으로 가볍게 나에게 다가왔다. 솔직히 두껍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쉬엄쉬엄 읽어도 오늘 중으로는 다 읽을 것 같아 펴들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민구와 진희는 둘만의 공간을 찾아 서울의 외곽인 이곳으로 스며든다. 이 둘은 자연스럽게 여보란 호칭을 사용하지만 실은 법적인 부부가 아닌 그냥 동거인이다. 동거를 시작했다는 대목이 있어, 난 성급히 이것이 요즘 뜨고 있는 "옥탑방고양이"처럼 남녀의 동거생활을 이야기하는 소설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섣부른 추측은 추측으로 끝났고 내용이 진행될수록 이야기는 나의 상상력과 궤를 달리했다. 진희가 평소 꿈꾸던 전나무 숲 속의 빈터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늙은 남자. 평범한 남자가 아닌 나체의 수음을 하는 남자.... 혼자 있던 진희는 기절을 할 노릇이었다. 화란이를 키우기에 알맞고 조용하고 전나무 숲이 있어 이 곳 만한 곳이 없다 생각하던 이들에게 어느 날 나타난 이 이상한 늙은 남자는 그야말로 폭탄이었다. 이들의 일상을 깨버리는 폭탄... 이들에게는 작은 목적이 있었다. "목적 있는 삶이란 참, 어쩌면 이다지도 신이 난단 말인가. 목욕탕을 설치하는 것 같은 시시한 목적일수록 더더욱"이라고 생각한 그들에게 이 남자는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너무 심한 비약일지는 모르나, 어느 날 멀쩡히 평범하게 살던 여자가 납치되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 가족과 연락이 끊기고 갇혀서 지내며 자신의 인생이 철저히 망가지는 모습을 보면서 망연자실하고, 드디어 서서히 미쳐 가는 과정처럼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의 방향을 잃으면서, 결코 이 숲 속의 빈터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아름답고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우리의 일상도 그렇다. 멀리 내다보면 임진왜란, 한국전쟁이 그 시대를 살던 개인에게는 이런 테러임에 틀림없었다. 광주항쟁이 그렇고, IMF가 그렇다. 그리고 갑자기 엄습하는 사고와 사건도 우리의 작은 목적을 갉아먹는 좀과 같은 폭탄이다. 짧은 소설이라 가볍게 읽어야지 했던 처음과는 다르게 다 읽고 난 지금의 심정은 좀 두렵다. 나에게도 항상 테러가 도사리고 있을 텐데, 사회의 알 수 없는 이데올로기와 체제가 혹은 교통사고가 혹은 분단의 현실이라는 이 땅의 슬픔이... |
| 아주 오래간만에 소설을 일었다. 비록 그 분량이야 얼마 되지 않는 것이지만, 참으로 오래간만에 허구의 세계에 빠져봤다.나이가 들수록 역시 상상력은 기억력과 함께 감퇴하는 것인지라 어느 정도 읽다보면 행간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글자만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썸뜩 읽던 소설들을 내려놓던 내가 분량이 적으니까라는 위안으로부터 용기를 얻어 읽게 된 이 책은 역시 공포란 우리 생활 주변에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온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느끼게 해준 조금은 섬뜩한 이야기. 최윤의 글솜씨는 단번에 한 권의 책 속에 담긴 짧은 이야기를 후다닥 내 머리 속으로 집어넣어 준다. 시골집을 찾아 자신만의 둥지를 튼 이 젊은 연인들은 그들이 꿈꿔온 목욕탕을 짓는 과정에서 듣게 된 이야기와 뜻하지 않은 깜짝 나체쇼에 대한 공포의 열쇠를 풀면서부터 지금의 이 곳 우리라는 이름으로 연인이 함께 하고 있는 새 보금자리가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과거를 품고 있는 암울한 곳임을..그래서 이 짧은 이야기 속의 공포는 반신반의에서 조금은 다른 기운으로..그리고 모든 정황을 알게 해준 수리공 아저씨의 입으로부터 전해져 공포의 극점에 다다른다. 촌이라서 밤이 길게 느껴지고 그 촌 속의 목욕탕이라 더욱 더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원래 그런 것이었으니, 목욕탕이란 절대적으로 개인의 공간..그래서 공포는 목욕탕에서 올라오는 더운 기운과 물방울처럼 뽀글뽀글 올라온다. 외계의 물체가 침입해 지구를 공격하는 이야기는 액션물이 될 수 있지만, 시골숲 속의 빈터 안에 있는 목욕탕 안에서의 이야기는 너무 쉽게 공포과 되어 집처럼 가까운 기운으로 온 몸을 공포로 휩싸게 한다. 치를 떨 정도는 아니지만 은근히 저며오는 공포가 소설읽기이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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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한 편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단면이다. 인생의 한 단면, 지극히 단편적이고 간단하지만 생활의 익숙한 권태 속에서 잊고 있었던 경이와 낯섦. 그것을 확인하고자 우리는 단편소설을 읽는다. 그래서 우리가 단편소설에서 기대하는 건 인생에 대한 긴 호흡이라기보다는 일순 마주치는 반짝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최 윤이 쓴 <숲 속의="" 빈터="">는 순식간에 읽힌다. 분량도 짧지만 이야기의 서술구조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마력이 있다. 전원생활의 소망을 안고 찾아들어간 산 속의 집. 그 곳은 그야말로 평화와 안식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건너편 숲 속 빈터에 나타난 늙고 추레한 사나이. 나체로 수음을 하는 그의 등장은 이 소설을 곧바로 괴기 추리 소설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간다. 하지만 그에 대한 궁금증은 예기치 않은 계기로 곧 밝혀진다. 몇 년 전 있었던 전직 군인 출신의 총기 난사 사건. 그 사건의 살인자가 마을 사람들의 묵인 속에서 숲 속 빈터라는 제한된 공간을 점유한 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의 평범함을 깨는 그로테스크한 공포가 섬뜩함을 준다는 면에서 보면 이 소설은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다. <숲 속의="" 빈터="">라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제목에 이끌려 소설을 손에 들었던 사람이라면 몇 분 지나지 않아 엄습해 오는 두려움과 비상식적인 상황 설정에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역겨움과 더불어 다음 상황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궁금증이 바로 작가의 계산임을 아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마지막 궁금증이 풀리고도 왠지 모를 찜찜함이 남는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의 이야기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하, 요즘 한창 유행하는 엽기 시리즈와 닮아 있구나.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과 전망이 부재한 이야기 위주의 글은 얼마나 공허한가? 모든 일에 의미가 있어야 하고 모든 글을 심각한 표정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가벼움과 기괴함만이 난무하는 시대에, 또하나의 영합으로 그에 편승할 필요는 굳이 없을 듯하다. 독자의 눈과 귀를 빨아들이는 이야기의 재미는 분명 미덕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아무런 통찰도 전망도 없는 공허함은 그냥 시시한 농담 같은 엽기일 뿐이다. [인상깊은구절] 우리는 결국 아무에게도 우리의 '그 일'에 대해 자세하게 얘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설령 얘기했다고 치자. 우리가 마을을 돌며 수소문할 때, 그때 이상의 도움이나 조언을 받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동네에 있는데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 남자는 빈터에만 내려오고, 빈터는 그 작자의 자리라는 것을. 그렇게 그 사람들은 살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기회가 생겼어도 '그 일'에 대해 마을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기로 우리는 작정을 했다. 그렇지만 마을사람들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마가 시작되는 날 '그 일'에 대해 들은 다음에, 우리의 '그 일'의 남자가 죽었다고 치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숲>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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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의 [숲속의 빈터]는 폭력만이 남은 시대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떠한 삶의 조건들을 방조해야하는 지를 가르쳐 주는 소설이다. 오래전에 마을 사람들이 한 미치광이에 의해서 몰살당한다. 그 살해의 현장은 경제적인 이해로 재해석되었지만, 그가 소유하고 있었을 광기의 징후가 무엇이었는지 왜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는지 소설 속에서는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신문기사와 같은 혹은 후일담에서나 나올 것 같은 안락한 설명만이 전부이고 두 남녀가 소유하게된 공허함이나 공포 무기력은 도시인의 일상 탈출이 빚어낸 그럴 듯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설이 군이라는 투철한 동물적 감수성만이 필요한 사회와 하루하루 근청스럽게 적응해야하는 도시인들의 삶이 똑같으며 억압에 의해 강요된 폭력적 저항이 정당한 문제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라면 이 논자의 시선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글쓰기를 한 것이리라.
아쉬움은 아쉬움이다. 위대한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나버렸고, 상업적인 가치만이 정당한 대우를 받는 시대에 더이상 관념이나 이상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허무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이라는 존재가 유효할 수 있는 것은 물질적인 객관성 너머에 남아 있을 이성적이고 깊이있는 철학적 물음을 곰곰히 생각하는 것이다.이 소설은 그 아쉬움의 중앙에 있다. 빼빽하게 들어서 전나무 숲 속의 그 자리 빈터에 대한 상상력과 그 채워지지 않을 욕망의 그늘에 대한 지적 상상력은 최윤이 이전에 보여주었던 다양한 사회적 인간의 실존적 물음들에서 많이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견고한 소설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지도 않는다. [인상깊은구절] "이제 그 남자 안 나타나네" "적어도 내년 봄까지는 죽어 있을걸. 내년 봄에나 보자구" 몸이 노곤해지는 걸 느끼면서, 우리는 봄이 되기 전에 빈터에 전나무를 심어버리는 것은 어떤가 그런 얘기를 했다. 늦은 가을쯤에 빈터에 나무를 심겠다는데 반대할 사람 있으면 나오라지. 마을 사람들은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곳에는 늘 빈터가 있었으니까. 숲 속의 빈터란 수도 없이 널려 있으니까. 알맞게 따뜻한 욕조의 물 속에서 우리 몸은 오랜만에 이완되었다. 우리는 하품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아- 아. 우리는 전나무 심는 데 열심일 거야. 그렇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