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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를 알게 된 건,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들어 본 건 박인환의 시에서였다. 학창 시절의 일이지만.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을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박인환, <목마와 숙녀> 전문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읽기 전과, 읽고 난 지금 다시 읽어보는 박인환의 시에 대한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등대로>를 읽기 전에는 <목마와 숙녀>에서 풍기는 낭만적 감상주의에 조금은 막연히 이끌렸었다고나 할까. 왜 젊은 시절 한때에는 '가을', '상심한 별',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등의 시어(혹은 시구)만 봐도 낭만적 애상에 젖기도 하지 않던가. 물론 모든 청춘이 이런 애상에 잠기지는 않겠지만, 내 경우에는 그랬다. 그러나, 이 시를 여러 번 읽었음에도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서는 영국의 유명한 여류 소설가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자살했다, 는 정도의 지식으로 만족(?)하고 그 이상은 유념하지 않았었다(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의아하다.). 내가 만일 그때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더 알아볼 마음을 먹었다면 이 책 <등대로>는 지금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읽었을 것이다. 내가 예전에 버지니아 울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은, 버지니아 울프를 몰라도 이 시의 정조를 느끼는 데에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은 어느 정도는 맞지만, 동시에 잘못된 생각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맞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목마와 숙녀>는 한국전쟁을 겪은 시인의 상실감과 감상적 허무주의를 표현한 것으로 보는 데서 그쳐도 큰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버지니아 울프'를 빼놓고는 <목마와 숙녀>의 온당한 이해는 불가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목마와 숙녀>는 (<등대로>를 읽고 난 지금 느낀 것이지만) 한국전쟁으로 상실감과 감상적 허무주의에 빠진 박인환이, 세계 제1차대전을 겪으며 역시 상실감과 비관주의에 빠진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그녀(와 그녀의 소설)에게 바치는 헌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 <목마와 숙녀>의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는 소설 <등대로>로, ' ......등대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는 는 (단순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의 의미를 넘어서) 소설 <등대로>의 내용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는 소설 <등대로>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이 소설에 대한 평가는 극찬 일색이다. 그 중 작품과 관련해서 핵심을 짚은 평가 하나를 인용한다면,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인간 본성과 삶의 진실을 규명한 버지니아 울프 최고의 소설이자 가장 자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들 수 있겠다. 그렇다. 소설 <등대로>는 전통적인 서사 전개 방식이 아닌 '의식의 흐름' 기법을 따르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왜 이 기법으로 소설을 썼는지는 다음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어느 일상적인 날의 평범한 마음을 잠시 고찰해보자. 마음은 무수한 인상을 맏아들인다. 하찮거나 멋진 인상들, 덧없이 사라지거나 날카로운 강철로 새겨진 인상들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무수한 원자들처럼 인상들이 사방에서 밀려든다. 그 인상들이 쏟아지면서, 그것들이 월요일이나 화요일의 삶을 형성하면서, 예전과 다른 곳이 뚜렷이 강조되고, 여기가 아니라 저기가 중요한 순간이 된다. 그러므로 작가가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자신이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을 쓸 수 있다면, 소설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입각해서 작품을 쓸 수 있다면, 플롯도, 희극도, 비극도 없을 것이고 기존의 양식에 따른 사랑 이야기나 대단원도 없을 것이다. - 에세이 <현대소설> (작품 해설 344~345쪽에서 인용) 따라서 소설 <등대로>는 사건의 흐름이 아니라 작품 속 등장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며 읽어야 한다. * <등대로>는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극히 적은 분량으로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2부(시간이 흐르다)의 앞과 뒤에 있는 1부와 3부가 소설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물론 2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3부의 이해를 위해서는 2부의 내용이 반드시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중요하다는 말은 비중이 크다(쓸데없이 분량을 많게 한 것은 아닐 것이므로)는 말로 대체해도 좋겠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소설은 2부를 축으로 해서 (시간이 흐르기) 전과 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것을 인물에 초점을 두고 말한다면, 1부는 '램지 부인'이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이고, 3부는 (시간이 흘러) '램지 부인'이 죽은 지 몇 년 후의 이야기이다. '램지 부인'을 기준으로 이 작품을 읽는다면 1부가 본 이야기이고, 3부는 후일담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램지부인'을 기준으로 삼아 3부를 1부의 후일담으로 보고 말기에는, 3부의 중심 인물인 '릴리 브리스코'가 보여주는 의식의 흐름이 결코 가볍지 않다. 아니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1부는 1부대로, 3부는 3부대로 중심 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 1부는 <램지 가족>의 별장에서 램지 가족(램지, 램지 부인과 8자녀)과 지인들이 휴가를 보내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은 특별한 일은 없다. 굳이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자면, 램지 부인이 6살 난 어린아들 제임스에게 내일 등대를 보러 가자고 말하는데, 램지는 일기가 좋지 않아 내일 등대를 보러 갈 수 없다고 말하며 아이의 기대를 무참하게 짓밟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내(램지 부인)과 남편(램지)의 성향 차이가 드러난다. 이러한 성향의 차이가 자칫 문제를 야기할 법도 하지만, 이타적인 램지 부인이 자제력을 가지고 이기적인 남편을 포용하면서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내면적으로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볼 수는 결코 없다.). 이외에도 램지부인과 지인들이나. 지인들간의 데이트(?) 혹은 대화 장면이 있긴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인과 관계에 따른 (다른) 사건의 전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등장 인물의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의 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소설이 진행된다.
3부는 램지 부인이 죽고(램지 부인 외에도 몇 자녀도 죽고) 나서 몇 년이 흐른 후 이제는 확 줄어든 인원(예전에 왔던 지인도 극히 일부만 옴)이 다시 옛 별장을 찾아서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은 램지가 딸(캠)과 아들(제임스)을 데리고 등대 구경을 간다는 것과 릴리 브리스코가 드디어 그림을 완성한다는 것 정도이다. 그런데 등대 구경 가는 것과 그림을 완성하는 것 사이에 무슨 인과 관계가 있는가. 아무 관계가 없다. 굳이 관계를 찾아보자면 등대 구경을 떠난 램지(와 그 일행)와 죽고 없는 램지 부인을 계속 의식하면서 그 의식의 끈을 놓치지 않고 그 의식을 바탕으로 그림을 완성한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등대 원정에 나선(캠과 제임스는 램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해 억지로 따라나섰다) 램지 일행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는데, 이것도 인물(캠과 제임스. 주로 캠)의 의식 속에서 진행될 뿐 겉으로 표면화되어 어떤 사건을 발생시키지는 않는다. 3부에서는 제3자인 '릴리 브리스코'의 의식을 통해 램지와 램지 부인에 성격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램지와 램지 부인의 성격은 1부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기는 하다. 그러나 3부에서처럼 분명하게, 보다 직접적인 언술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다.
소설 <등대로>가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본다면, '릴리 브리스코'는 버지니아 울프로 볼 수 있다. '캠'에게서도 버지니아 울프로 볼 수 있는 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릴리 브르스코'만큼의 비중은 차지하지 못한다. 릴리 브리스코(버지니아 울프)가 램지(아버지)와 램지 부인(어머니)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한다. 램지에 대해서는 자기중심적이고 권위적이며 허영심이 있고 여자에 대한 편견을 가진 가부장적 존재로 매우 부정적으로 떠올리지만 의식에 의식을 거듭해가는 동안 차츰 램지를 이해(연민)를 하려고 하는 흐름을 보여준다. 램지 부인에 대해서는 미모의 소유자로 이타적이고 포용심이 있으며 봉사 활동을 하기도 하는 존재로 그리지만 그녀에게도 일종의 심리적 허영심이 있었다고 추억한다. 그렇다고 해서 램지 부인을 나쁘게 평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버지니아 울프는 부모에 대한 애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증'으로 치닫지 않고 '이해'로 방향을 잡았다는 것인데, 그것이 그림의 완성이라는 상징적 행위로 그려진 것 같다. * '시간이 흐르다'라는 부제를 가진 2부는 말 그대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흐르는 시간은 참으로 잔인하다. 램지 부인을 죽게 만들었고(램지 부인의 죽음은 갑작스럽다.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똑똑한 아들 '앤드루 램지'가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서 폭사했으며, 예쁜 딸 '프루 램지'가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어 출산 중 사망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램지 가족의 추억이 깃든 별장과 별장의 부속물들이 폐가가 되어 가는 것도 흘러가는 세월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등대로>에서 세월은 음울한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다. 그것은 인물들의 죽음과도 관계 있지만, 세계 제1차 대전의 영향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2부는 비중이 작지만, 시대 상황을 이면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이란 외적 상황과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버지니아 울프의 우울증은 가족으로부터 영향받은 것도 없지는 않아 보이지만 전쟁이라는 시대적, 사회적 폭압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해야 할 것 같다(이 점에서는 앞에서 알아봤던 <목마와 숙녀>의 화자의 우울도 시대적인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 사건 중심의 소설 읽기에 길들여져 있는 독자들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진 소설 <등대로>를 읽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그랬다. 그러나, 작품 속 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 인물의 의식과 동화해보려 노력하는 시간이 한편으로는 의미 있었다.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읽기가 어려워서만은 아니었다. 이 여름, 집콕으로 답답한 와중에 버지니아 울프를 만나게 된 건 한 줄기 시원한 소나기를 만난 것 같은 행운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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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않읽었지만 기대거 되요! 다 읽고 수정하갰숨돠 ㅋㅋ 4/3배송도착 과연 어똔 필력을 선뵐것인가!? 버지니아 울프는 자전적 에세아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 계몽을 힘쑨 분이라고 얼핏 알고있다.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것인가 개봉 박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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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라는 유명한 작가이고 또 상당히 유명한 작품인 만큼 한번쯤 읽어볼 생각은 늘 했었지만... 또 제임스 조이스나 조지프 콘레드 만큼 독서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한 작가이다보니 손이 가지 않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예상만큼은 아니지만 긴 호흡을 가지고 차분하게 읽어야하는것은 사실이었다. 책을 모두 읽고 나서도 내가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해한것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 사람들의 독서 후기나 유튜브등을 참고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후 다시 처음부터 읽어본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한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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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민음사에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 작가의 등대로에 대한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이 들어간 리뷰이므로 참고용으로만 봐주시길 바라며, 약간의 스포일러가 담겨있을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버지니아 울프야 자기만의 방이나 여러 가지로 유명하지만 등대로 역시도 대표 소설로 유명하다. 이 책 역시도 민음사 티비에서 박혜진 한국문학 편집자님께서 추천해주신 영상을 보고 구매하게 되었는데, 아직 잘 모르는 버지니아 울프의 세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탐미할 수 있어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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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산문집을 재미있게 읽은터라 소설작품도 도전했다.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가 언급되며 의식의 흐름기법을 이야기하길래 사실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등대 불빛의 상징성, 탠슬리의 말이 지워지는 후반부는 어쩌면 울프의 자립적인 성향과 자전적인 희망을 나타낸듯하여 무척 통쾌감이 일었다. 비타와의 긴밀한 우정과 우울증을 오래도록 겪었던 울프의 생을 미리 알아서인지 등대로는 내면에만 치우친 묘사보다 외부 사건이 내면에 잠식되어 서서히 수면위로 상승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줍음이 많았다는 울프의 성격은 예술가의 자질을 물려받아 풍부하고 섬세한 통찰력인 담긴 작품으로 탄생하여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 물음이 전부였다. 이 단순한 물음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밀려들곤 했었다. 위대한 계시가 밝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위대한 계시가 찾아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대신에 사소한 일상의 기적이나 등불, 어둠 속에서 뜻밖에 켜진 성냥불이 있을 뿐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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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댈러웨이부인을 읽고 이번에 등대로 를 읽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가이다. 작품이 어렵다는 사람도 있지만 의식의 흐름 이라는 방법으로 글을 썼듯이 읽는 사람도 등장인물의 입장에서 자신의 의식이 그렇게 흐른다는 태도로 글을 읽어나간다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우리들에게 섬광이 번쩍이는듯한 깨달음을 준다는데에 매력이 있다. 쉬면서 넋이 나간듯 막연히 눈길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을때, 영혼의 창공에 끊임없이 떠올랐던 그 해묵은 물음, 긴장하고 있던 마음의 기능이 이완된 이런 순간에 구체화되곤 했던 막연한 물음이 그녀를 굽어보고, 그녀의 머리위에서 머뭇거리면서 어둠을 드리웠다.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 물음이 전부였다. 이 단순한 물음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밀려들곤 했었다. 위대한 계시가 밝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위대한 계시가 찾아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대신에 사소한 일상의 기적이나 등불, 어둠 속에서 뜻밖에 켜진 성냥불이 있을 뿐이었다. 이것이 그 한 가지였다. 이것, 저것, 그리고 다른 것. 그녀와 찰스 스탠리 그리고 부서지는 파도. 그리고 그들을 화해시킨 램지 부인. "삶은 여기에 정지해 있다."라고 말한 램지 부인. 그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든 램지 부인. 이것이 계시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p.2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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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를 좋아하지만 그녀의 글은 늘 읽기 쉽지 않다. 아직 울프의 철학과 신념을 따라가기에 멀은 듯싶다. <등대로>는 울프가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놓은 책이라고 들었다. 부모님과의 트라우마가 심각했던 울프는 이 책을 쓰고 나서야, 더 이상 부모님에게서 속박되지 않고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들이 쓰여 있을지. 울프에게 나의 모습을 투사해보고 그녀의 행적을 따라가보기로 했다. 즐거운 독서가 될 것 같다. 여느 때처럼 읽기 쉽지는 않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