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2)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83%
  • 리뷰 총점8 17%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10.0
  • 40대 10.0
  • 50대 10.0
리뷰 총점 종이책
[23-37] 정신분석이론으로 본 유토피아
"[23-37] 정신분석이론으로 본 유토피아" 내용보기
오랜만에 보는 무의식의 저널 <엄브라 Umbr(a)> 시리즈다. 처음 이 ‘유토피아’라는 부제를 보면서 ‘어?’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토피아’라고 하면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의 <유토피아>(1516)가 자동적으로 떠오른 탓인지 정신분석과는 거리가 먼, 어쩌면 정반대의 카테고리에 속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번역자가 서문에서 “정신분석이론은 유토피아를
"[23-37] 정신분석이론으로 본 유토피아" 내용보기

오랜만에 보는 무의식의 저널 <엄브라 Umbr(a)> 시리즈다. 처음 이 ‘유토피아’라는 부제를 보면서 ‘어?’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토피아’라고 하면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의 <유토피아>(1516)가 자동적으로 떠오른 탓인지 정신분석과는 거리가 먼, 어쩌면 정반대의 카테고리에 속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번역자가 서문에서 “정신분석이론은 유토피아를 향한 인간의 지지 않는 열망에서 우리가 속한 이 불가피한 상징계를 뚫고 나갈 해방의 실마리를 찾는다 [p. 10]”고 한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는가 보다.

어쨌든 대표 저자로 보이는,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1949~ )과 가라타니 고진[柄谷 行人, 1941~]을 비롯한 9명의 학자가 정신분석과 유토피아를 어떻게 엮어 논의하는지 살펴보았다.

 

 

라이언 앤소니 해치는 [투셰와 유토피아]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나 자크 라깡(Jacques Lacan, 1901~1981)의 얘기를 통해 정신분석학과 유토피아의 관계를 얘기한다.

대표적인 정신분석학자 가운데 하나인 라캉은 “행복을 다소 서글픈 방식으로 정의하지 않고서는, 말하자면 행복이 남들과 같아지는 것이며 나만의 자율적 자아는 녹아 사라지는 것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행복을 안다고 할 수 없다 [p. 12]”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 다른 의미의 행복에 대한 정의(定義)다.

유토피아’도 마찬가지다.

 

모어가 구상한, 유토피아라고 부른 국가의 통제되고 조화로운 질서를 경험할 수 있는 위치는 세 가지 정도 있다. 주권자(왕이나 저자)의 위치, 관광객의 위치 그리고 독자의 위치이다. 이 국가의 성공은 궁극적으로 유토피아의 시민으로부터 주체의 자격을 제거하는데 달려있기 때문에 유토피아의 시민, 즉 유토피아에 존재하는 주체는 이곳을 디스토피아로 경험할 것이다. 좌절에 빠진 그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누굴 위해서 내가 이렇게도 잔혹하게 ‘즐거워’하도록 만들어진 것인지 묻는다. 국가가 쾌락을 동등하게 지속적으로 배분해서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입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해당 국가의 시민은 비천함의 한계점에서 이 쾌락을 경험하게 된다. [p. 19]

 

즉, 유토피아라는 이상향의 실현을 위해서는 개별 구성원[개인 주체]의 자아가 제거되거나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유토피아는 균열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토피아의 개별 구성원 그 자체가 균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완벽한 사회라도 사소하나마 균열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건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유토피아는 상상 속 ‘완벽한 이상사회’이다. 실제 현실은 고사하고 상상에서조차 이상사회는 절대적으로 완벽하지 않다면 ‘유토피아 기획’이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정신분석이론에 따르면 이 불가능성의 기원은 다름 아닌 개인 주체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정신분석적 주체를 의미하는데, 앨리스와 링컨처럼 징후를 포착하고 따라가면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 주체이다.

주체의 질문은 가공의 완벽한 사회 내 아무리 미세한 균열이라도 놓치지 않는다. 아니, 질문을 던지는 주체 그 자체가 균열이다. 질문의 물음표가 위치하는 공간은 유토피아의 틈을 겨냥하기 때문에 완벽을 내세우는 공동체에는 이런 주체를 위한 자리가 없다. 그러니, 유토피아에 등장한 주체에게 완벽한 행복의 공간이 디스토피아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따름이다. [p. 9]

 

 

슬라보예 지젝은 [유토피아적 응시의 모호성]에서 ‘전부 아닌’의 공간이 바람직한 유토피아의 공간이며 ‘환상을 넘어서는 환상’이라고 얘기한다. 여러 작품을 통해 이야기 하지만, 나는 저자가 G.K.체스터톤(G.K.Chesterton, 1874~1936)의 ‘뒤로 사유하기’ 개념을 통해 유토피아의 공간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운명적 결정이 내려지기 전, 현재 우리에게 정상적으로 보이는 상태를 만들어낸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의 시간에 위치시켜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최상의 방식, 즉 이런 결정의 열린 순간을 명백하게 보이게 만드는 방법은 이 지점에서 어떻게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향해갈 수 있는지 상상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이 존재론적 열림에 토대를 둔다. [p. 39]

 

저자의 주장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이 ‘뒤로 사유하기’를 통해 유토피아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줄리엣 플라우어 맥캐넬은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에 관하여]에서

 

이후’에 대한 무관심은 현재가 그 자체의 반복 이외의 다른 것으로 구성될 미래가 필요 없는, 이미 완벽한 현재라고 믿고 싶은 소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p. 56]

 

고 말했다. 이미 완벽한 사회이기에 변화가 필요 없다는 것은, 현재의 반복만 존재하고 실질적인 미래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고, 이는 ‘역사의 종언(終焉)’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다른 사회와 격리된, 갈라파고스화가 필요하다. 외부의 개입에 의해 완벽성이 깨어지고 변화가 시작되지 않아야 하니까.

하지만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현실은 이와 다른, 개방된 사회다. 따라서 변화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더 나은 사회, 그러니까 대안적 미래를 꿈꾸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대안적 미래’를 추구할 상상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진정 우리에겐 예지자가 필요하다. 바로 우리를 위한 유토피아를 ‘어디에도 없고 어디든 있는 것’이나, ‘결코 그리고 영원히’도 아닌, 간단히 여기 아닌 다른 곳으로 꿈꿀 수 있는 예지자이다.

~ 중략 ~

유토피아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강요하는 (향유의) 희생으로부터,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잉여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를 풀어보려는 시도의 중요한 형식이었다면, 이 과잉을 처리하는 여러 가지 제안들을 넘어서는 뭔가를 제공해야만 한다. 누구도 완벽한 해결책 따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pp. 67~68]

 

단지 저자는 프로이트가 제안한 세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인, ‘예술’을 재해석함으로써 그 해결책을 제안하고 있다. 즉, 소비주의에 따른 예술 대신 “우리의 영구적인 문화적 불행을 새로운 주이상스의 경험으로 바꾸는” [pp. 70~71], 대안적 예술로 잉여 향유의 문제를 다루자고 주장하는 셈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혁명과 반복]에서

 

역사의 반복이 있다고 믿는다. 또 그것을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믿는다. 반복되는 것은 확실히 사건이 아니라 그 반복적 구조이다. [p. 77]

 

라고 말하면서 국가와 자본의 이항대립(二項對立)에서 역사가 반복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국가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운동도 마찬가지임을 얘기한다.

 

 

라캉은

 

진실하고 진정한 대상 ? 우리가 다루어야 할 대상 ? 은 전혀 이해될 수 없고 전달될 수 없으며 교환될 수 없다. 이 불가능의 지평에서 환상이 순회한다. 그렇지만 이 조건 속에서 우리는 자체적으로 교환 가능한 대상을 만들어야 한다. [p. 105]

 

고 말했다. 이는 마치 정신병자가 자신의 망상을 사회에 적용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다니엘 버저론은  [유토피아와 정신병: 초월로의 탐험]에서

 

정신병자는 중요한 문제에 맞닥뜨린다. 자신의 윤리적 모색은 인간성을 마주하는 책임감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그 목적, 즉 새로운 사회적 연결망을 창조함으로써 언어의 결함을 보수하려고 애쓰는 일은 초월적이라고 묘사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대상이 언어 밖에 있다면,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다. 그 때문에 자신의 망상을 사회에 적절히 적용할 방법을 찾지 못한 정신병자는 ‘유토피아적’이라고 불릴 수 없다. [pp. 113~114]

 

고 말한다. 이는 정신병자가 자신의 망상(=유토피아)를 사회에 적용하기 위해 현실(=디스토피아)에서 고통 받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덧붙여 클로드 마조릭(Claude Mazauric, 1931~ )은 유토피아의 세 가지 기능을

 

더 나은따라서 다른사회의 꿈을 키움으로써 유토피아는 현실 사회를 자발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소급적 희망을 유지시켜 준다. 이 도달 불가능한 세상의 이상적 조직을 묘사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적 제도와 사회적 불평등에 관하여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도록 유도한다. 우리를 둘러싼 관습적인 수용과 그런 태도에 반해서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 실제적인 논쟁을 이끌어내며, 어떤 경우든 삶의 고난을 거부하도록 만든다. [pp. 106~107]

 

라고 말한 것도 흥미롭다.

 

 

에티엔느 발리바르(Etienne Balibar, 1942~ )은 [정의와 평등: 정치적 딜레마? 파스칼, 플라톤, 마르크스]에서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플라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아이리스 마리온 영(Iris Marion Young, 1949~2006)을 참조, 정의와 법, 정의와 주체성, 정의와 갈등의 관계에 대해 얘기한다. 이 가운데, 힘과 정의의 초월적 종합으로서 법(法)이 권력의 편에서 시작할 때만 유일하게 효과적이라는 파스칼의 제안은 현실적이면서 흥미로웠다.

 

 

애드리언 존스턴은 [미래로부터 오다: 프로이트, 라캉, 마르쿠제, 과거의 끈을 끊다]에서 유토피아와 관련된 프로이트, 라캉,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의 주장을 열거하고 나서

 

유토피아는 꿈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꿈의 종말에서 시작된다. [p. 215]

 

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욕구와의 단절을 통해, 낡은 욕구가 역사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는 순환적 메커니즘에서 벗어나야 유토피아가 가능하다는 얘기로 보인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리비도적 메커니즘을 통해서 미래는 변함없이 과거의 어려움을 보상하고 해소하는 환상으로 감소되어 오류를 범할 위험을 지적한다. 만일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마르쿠제와 달리, 유토피아적 정치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욕구가 아니다. 그보다는 욕구와의 완전한 단절이 필요하다. 이런 단절이 없이는 정치적 미래성은 앞선 역사의 갈등과 궁지가 끊임없이 재상연되는 애달픈 무대가 된다. [p. 211]

 

 

조지프 젠킨스 는 [상속법 개혁과 신학적 선택]에서 미국 노예제의 피해자에 대한 배상 요구와 관련해서 상속의 얘기를 꺼내 든다.

배상 판결을 부과함으로써 법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다고 한다.” [p. 220] 그렇다면, 노예제의 피해자, 정확히는 그 상속인을 위해 어떤 배상 판결을 해야 과거의 잘못[=노예제]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만일 배상 결정이 언제나 곧 폐기될 궁극적 수사의 영향력을 받는다면, 법은 자체의 오류가능성을 고려하고 최단시간 동안 이 결정을 행사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는가?

이는 사물들에 대한 권리가 영구적으로 유효해야 한다는 생각을 매장시킨다는 뜻이다.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 역시 결정을 수반한다. 누군가의 권리를 빼앗는 민법이나 형법의 이면이 바로 이것이다. 앞의 배상 문제를 생각해보자. 노예제의 배상 요구에서 어떻게 희생을 계산해야 완벽하게 노예제의 희생자들과 그들의 후손이 주장하는 바를 해결할 수 있는가? 하지만 만일 타인의 악행을 통해 얻게 된 재산권이 개념적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축소된다면 이런 주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평정심이 사라지겠는가? [p. 224]

 

 

펠릭스 엔슬린은 [죽음 없는 부활? 루터와 바디우의 사도 바울 해석에서 부정성과 진실에 관한 소론]에서 사도 바울로부터 갈라져 나온 두 가지 철학적 사유에 대해 얘기한다.

첫째는 ‘정치적 신학’이라 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의 개념화, 인간적 진리와 정치에 담긴 초월적 양상을 추인하며,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 )의 사도 바울 해석이 여기에 속한다. 그는 사도 바울의 입장은 반변증적이며, 죽음은 어떤 식이든 부정성의 내재적 힘의 불가피한 행사가 결코 아니라는 주장한다.

둘째는 존재론적-실존적 독해로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와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서부터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에 이르는 전통에 연결된다. 루터는 사도 바울의 의도를 ‘말씀 이전’, ‘말씀을 대할 때’, ‘말씀 안에서’라는 세 가지 양상 혹은 단계로 파악한다고 한다.

 

 

무의식의 저널 <엄브라 Umbr(a)> 시리즈는 여전히 쉽게 다가오지 않고 어렵다. 그리고 저자들의 텍스트를 오독(誤讀)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걱정과 불안감을 떨치기 힘들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이 시리즈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옥의 티

 

p. 62

쿠메르루즈가 여러 식민주의를 거친 캄보디아를 ~

크메르루즈가 여러 식민주의를 거친 캄보디아를 ~ (한 줄 위에도 ‘크메르루즈의 캄푸치아에 이르기까지’로 되어 있다)

 

 

* 이 리뷰는 도서출판 인간사랑으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w******f 2023.08.26. 신고 공감 22 댓글 10
리뷰 총점 종이책
정신분석학으로 접근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단상들!
"정신분석학으로 접근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단상들!" 내용보기
흔히 유토피아(Utopia)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를 일컬으며, 흔히 이상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라는 소설 제목에서 유래했으며, 그리스어에서 ‘없다’라는 ‘우’와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가 합쳐진 단어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의미한다. 최근에는 이와 대립되는 단어로 부정적인 부분이 극
"정신분석학으로 접근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단상들!" 내용보기

흔히 유토피아(Utopia)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를 일컬으며흔히 이상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라는 소설 제목에서 유래했으며그리스어에서 없다라는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가 합쳐진 단어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의미한다최근에는 이와 대립되는 단어로 부정적인 부분이 극단적으로 확대되어 초래될지도 모르는 사회를 뜻하는 디스토피아(dystopia)’라는 단어가 파생되기도 했다. ‘유토피아가 지금의 부정적인 상황과 대비되는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실제 그러한 사회가 도래한다 한들 과연 인간이 상상한 것처럼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상상으로 그려낸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에 다름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한 이 책의 내용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그럼에도 평소에 관심이 있던 주제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역자의 서문에 걱정 마달링이라는 영화를 소개하면서영화적 상상으로 그려낸 중산층 가정의 유토피아가 관객들에게 무척 낯익으면서도 기묘하게 낯선 느낌을 주는 이유를 서술하고 있다그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아마도 영화의 배경은 누군가 경험한 부정적인 현실을 기반으로 그와 반대되는 가정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라고 짐작된다이분법적 관점에서 부정적인 현상을 정반대로 바꾸면 긍정적 상황에 나타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이해된다동양에서는 도연명의 도화원(桃花源)’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한 어부가 복사꽃잎이 흐르는 강을 거슬러 우연히 방문했던 이상향을 다시 발견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아마도 다시 발견할 수 없었다는 설정은 단지 누군가의 상상으로 그려낸 세계이기에그것이 현실에서 재현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부정적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딱히 부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상황은 얼마든지 존재한다따라서 현실의 부정으로서 기획된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재현된다고 하더라도여전히 상상과는 다른 또 다른 부정적 현상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자만 그러한 상황을 상상하는 이에게만 이상향으로 다가오고다른 사람에게는 오히려 최악의 현실인 디스토피아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예컨대 1930년대 독일의 나치즘이 당시 히틀러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한 기획이었으나그로 인해 파생된 학살과 전쟁은 인류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따라서 누군가에게 유토피아로 그려진 세상이 다른 이에게는 디스토피아가 될 수도 있음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경비원을 두고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도심의 대형 평수의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유토피아로 인식하겠지만그곳에 쉽게 출입할 수 없는 외부인들에게는 그저 위화감을 조성하는 장소로 인식될 것이라고 하겠다

  

이 책에는 모두 9명의 저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에 관한 생각들을 풀어내고 잇다고 할 것이다예컨대 프로이트에게는 현실을 반영하는 대상으로서 을 해석하는 것으로 발현되고문학 작품 혹은 영화에서는 이상적인 세계로서 형상화되기도 한다플리톤의 이데아나 마르크스의 공산사회’ 역시 실재하지 않는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관념이기에 그것이 철학적으로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현실에서 재현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이해된다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종교’ 역시 힘겨운 현실에서 정신적 위안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관념으로서의 유토피아에 해당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그리하여 정신분석이론은 유토피아를 향한 인간의 지치지 않는 열망에서 우리가 속한 이 불가피한 상징계를 뚫고 나갈 해방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역자의 서문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차니)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바탕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개인 독서 카페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YES마니아 : 골드 i*****n 2023.09.02. 신고 공감 18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유토파아 우리는 어떻게 찾고 있는가?/ 인간사랑
"유토파아 우리는 어떻게 찾고 있는가?/ 인간사랑" 내용보기
유토피아가 어딘가 미지의 시간과 장소에 오롯이 존재하는 완벽한 행복의 장소라는 생각은 자본의 값싼 대중적 이미지일 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완벽한 사회의 가능성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여기 이곳과 다른 지점, 다른 시간성을 향한 열망은 여전히 남아있다. 자본의 명령에 따른 쾌락원칙에 붙들리지 않고 그 너머를 향해 달려 나가는 주체들이 있기에 유토피
"유토파아 우리는 어떻게 찾고 있는가?/ 인간사랑" 내용보기

유토피아가 어딘가 미지의 시간과 장소에 오롯이 존재하는 완벽한 행복의 장소라는 생각은 자본의 값싼 대중적 이미지일 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완벽한 사회의 가능성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여기 이곳과 다른 지점, 다른 시간성을 향한 열망은 여전히 남아있다. 자본의 명령에 따른 쾌락원칙에 붙들리지 않고 그 너머를 향해 달려 나가는 주체들이 있기에 유토피아는 아직도 유효한 기표다.

 

유토피아는 인간의 영원한 이상향일는지 모른다. 시대에 따라, 공간에 따라 그 모습은 많이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인간들에게는 조금 더 나은 세계를 향한 꿈이 있다. 그 꿈의 종착역이 유토피아라 해도 될 것이라 여겨진다. 이 유토피아는 사람들에 따라 가변적이나 제약이 많은 사회일수록 그 과정은 단순하리라 여겨진다. 제약이 별로 없는 사회, 자유가 가득한 세상일수록 복잡하고 성취하려고 하는 일들이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인간들은 늘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왔다. 그것이 개인일 수도 있고 작은 단체일 수도 있으며 하나의 국가일 수도 있다. 단위가 작을수록 유토피아에 가까운 생각과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마음속에서 많은 분량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집단이 되고 하나의 큰 조직이 되어갈 때 구성원들의 생각들이 모두 같지 않기에 유토피아를 향한 조정과 성취가 쉽지 않다. 아니 집단의 우두머리가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통제해 나가면서 그 속에서 구성원들이 작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되어갈 때 오히려 구속 속의 자유를 맛볼 수 있고 유토피아에 가까운 개념을 지닌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 자유민주, 개인이 우선시되는 사회에서는 오히려 개인은 모르나 단체로 나아갈 때 이 이상향에 대한 추구는 요원한 일이라고 봐도 되리라 생각한다.

 

유토피아는 지난한 일이다. 유토피아는 행복에 닿아 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잘 통용되는 것이 인간들의 삶이다. 행복을 쫒고자 욕심을 부릴 때, 그것은 오히려 멀어져 간다. 행복은 자신을 많이 내려놓은 속에서 경우의 수를 쉽게 만난다. 자신을 내려놓지 않고는 정말 어려운 것이 행복이 아닐까 한다. 행복이 근원에 깔려있다고 생각되는 유토피아, 그러기에 유토피아는 어려운 공간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꺾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 지라도 자신의 생각에 따라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은 타당하고 그것을 주장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고집일 가능성이 높다. 고집이 가득한 곳에 이해와 조화가 있을 수가 없다. 유토피아의 가장 근본에 해당하는 내용이 조화와 이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유토피아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또한 유토피아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시대에 따라서 개념이 많이 달라지는 유토피아, 가장 현대적인 방향에서 추구하고 바라보는 이야기들을 이 책에서는 싣고 있다. 그들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유토피아에 대한 현대적인 개념과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은 9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토피아를 다각도에서 살펴보고 있는 글들이다. 라이언 앤소니 해치의 얘기를 통해 정신분석학과 유토피아의 관계를 얘기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유토피아란 말이 언급되는 것이 심히 반대급부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유토피아 세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말한다. 슬라보에 지젝은 사유 불가능의 세계 출현이 오히려 바람직한 세상을 열리도록 한다는 얘기를 한다. 그러면서 이 전부 아닌 공간이 유토피아적 공간이라고 본다. 그것은 환상 너머 환상하기로 볼 수 있으며 그것이 가장 첨단의 유토피아적 세계로 보고 있다. 이런 얘기들을 많은 작품을 통해 이끌어내고 있다. 가령 데이비드 그로스만의 소설 그녀의 몸은 안다에서 기본적인 환상구조를 끄집어낸다. 그러면서 새로운 공간을 응시하는 모호성을 통해 유토피아를 이끌어내고 있다. 많은 저서들이 그의 얘기하는 방법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책의 설명의 구조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줄리엣 플라우어 맥캐넬에 의해 어디에서나 있는 역사적 종말로서의 유토피아를 보여주고 있다. 유토피아가 역설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듯해 난해한 면이 있다. 종말의 조건으로 등장하는 풍요에서 유토피아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방임을 통해 행복의 문을 찾고 있다. 짧은 언어로 정리될 수 있는 성격도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을 통해서는 역사는 반복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고 그를 통해 자본과 혁명에서의 반복을 말한다. 이 반복의 틈바구니에서 유토피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음도 확인하고 있다. 다니엘 버저론을 통해서는 정신병자의 내밀한 경험을 근거로 해서 사회문화의 기능적 결함을 교정할 수 있다고 보고 있고 인간성을 개선하려는 목적을 갖고 자신의 비판을 확장시킨다고 본다. 그 속에서 새로운 인간성이 출현하고 자유로운 상황이 만들어짐을 말하고 있다. 즉 결함 없는 상징 질서에 지배받는 인간성이 창조됨을 말한다.

 

에티엔느 발리바르를 통해 파스칼, 플라톤, 마르크스를 데려와 정의와 평등을 얘기한다. 이 두 개념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으로 통일된다. 이것은 경찰서 앞에 서면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과 같은 이치로 보인다. 가장 자유로운 것이 완전한 보호를 받을 때가 아닌가 여겨진다. 정의, 평등의 개념은 그런 의미에서 행복한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보여 진다. 애드리언 존스턴은 미래로부터 행복의 세계를 찾고 있다. 환상의 미래라는 말이 모든 것을 잘 반증하는 내용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기대감이라는 말을 통해 나타난다.

 

종교적 벗어남도 하나의 유토피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하나의 존재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다른 모든 것들을 놓게 한다. 그 안에서 자유와 정의를 구현하게 한다. 그러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유토피아가 형성된다. 신앙이 그런 면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도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과 이해가 되는 것 사이에 종교적 속성이 있다. 행복이라는 것이 개인의 마음이 지배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토피아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개인과 세계의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그것은 분석을 통해 조금씩 우리들에게 가까워진다.

 

유토피아를 꿈과 관련해 얘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그것을 분석한다. 그리고 꿈의 종말에서 그것이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행복은 그렇게 쉽사리 우리들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인간의 본질적인 요소들 때문이다. 그렇다고 쉽사리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행복이고 그 행복의 공간이 유토피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유토피아에 관해 최신의 다양한 학술적인 얘기들을 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용어들이 현학적인 요소가 많다. 무척 어렵게 느껴진 내용들이다. 지난 시간들 속에서 행복을 찾았던 철학자들의 다양한 얘기들이 소재가 되고 있다. 철학은 쌓아가는 것이기에 다양한 학자들의 생각을 변증법적으로 구하고 있다.

 

저자는 오직 유토피아의 창에서만 사유의 자유가 행사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그 자체가 유토피아의 공간이 아닐까 한다. 유토피아는 멀리 있는 곳이 아니다. 동양에서는 이상향, 무릉도원 등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공간, 유토피아를 열망한 역사 속의 인물들이 많이도 찾고 만들고자 했던 곳이다. 세계적으론 이념이 그런 세계를 만들고자 했고 소집단에서는 그 우두머리가 그런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흔적들도 보인다. 모든 뜻있는 사람들도 이 세상 떠날 때까지 찾고자 하고 찾아가고 있는 세상일 게다. 그들을 이 책을 통해 조금이라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감사한 읽기가 된 책이다. 저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저서를 찾아 읽어보는 기회도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j****3 2023.08.20. 신고 공감 15 댓글 4
리뷰 총점 종이책
유토피아
"유토피아" 내용보기
유토피아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외 지음/강수영 인간사랑/2023.8.10. sanbaram   ‘유토피아는 이상적인 국가’이디.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존재 할 수 없는 국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두가 바라는 이상 국가는 하나의 형태로 정의되거나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한다면 아마도 사람 수 만큼의 국가가 존재해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
"유토피아" 내용보기

유토피아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외 지음/강수영

인간사랑/2023.8.10.

sanbaram

 

유토피아는 이상적인 국가이디.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존재 할 수 없는 국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두가 바라는 이상 국가는 하나의 형태로 정의되거나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한다면 아마도 사람 수 만큼의 국가가 존재해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세계는 가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유토피아의 공동저자인 슬라보예 지젝, 에티엔느 발리바르, 가라타니 고진, 줄리엣 플라우어 맥캐넬, 다니엘 버저론, 에드리언 존스턴, 조지프 젠킨스, 펠릭스 엔슬린, 라이언 앤소니 해치 등은 정신분석, 심리학, 종교, 철학, 문학, 영화 등을 전공했거나 관심을 갖고 있는 9명의 저자가 각자의 입장에서 유토피아에 대해 고찰한다. 유토피아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태생적 결함을 가지고 있음을 각자의 글에서 주장하고 있다.

 

유토피아가 어딘가 미지의 시간과 장소에 오롯이 존재하는 완벽한 행복의 장소라는 생각은 자본의 값싼 대중적 이미지일 뿐이다.(p.11)”라고 유토피아의 역자 서문에서 말한다. 우리에게 제공된 현대의 유토피아 서사들은 대부분은 숨겨진 디스토피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완벽한 사회의 가능성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여기 이곳과는 다른 지점, 다른 시간성을 향한 열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모어의 유토피아 사회는 각 부서가 동등한 역할을 수행하는 의회공화주의이며 제퍼슨주의식 원형적 농업 사회주의로 구성되어 있다.(p.16)”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법, 도덕, 관습은 모어의 글에서 약속된 무미건조하고 지속적인 황홀경을 주진 않았다. 그렇기에 모어는 새로운 섬, 유토피아가 여러 개의 시민국가로 구성된 국가라고 한다.

 

데이비드 그로스만의 첫 소설 그녀의 몸은 안다는 루이스 부뉴엘의 이 영화를 통해서 질투를 다룬 방식대로 문학에서 다룬 것으로, 질투의 기본적 환상구조를 탁월한 기술로 보여준다.(p.25)” 질투를 느낄 때 주체는 자신은 제외된 유토피아를 창조하고 상상한다. 이런 개념적 구성은 정치적 질투라고 부를 만한 것에도 적용된다. 유대인이 누리는 과잉향유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환상으로부터 게이와 레즈비언의 낯선 성행위에 대한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의 환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런 종류의 질투에 해당된다. 이 논리는 최근 알렌 와이스만의 인간 없는 세상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인간이 갑자기 지구에서 사라진 후의 상황을 담았다.

 

이슬람의 시각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충분히 합리적이지 못한 것은 사랑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이다. 사랑에 집중하면 신은 너무도 인간적이고, 예수의 형상으로 치우치게 된다.(p.44)” 예수는 창조에 개입했던, 간섭하고 투쟁적인 배우로서, 열정과 수난을 통해 창조주이자 우주의 지배자의 논리를 초과했다. 이와 달리 이슬람의 신은 진정한 이성의 신이다. 그는 전적으로 초월적이다. 경박한 비합리성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서 관장하므로 편파적인 열정으로 땅위의 사건에 개입할 필요가 없는 최고의 창조자라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슬라보예 지젝은 말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 마가렛 애트리우드의 하녀의 이야기>, 리들리 스콧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마이클 베이의 영화 아일랜드등은 모두 완벽한 듯 보이는 문화 속 흠결을 찾으려고 한다.(p.58)” 오웰의 소설에서는 일상 언어가 타락해서 권력에 봉사하게 됨으로써, 상상을 초월하는 전체주의를 낳았다. 애트리우드의 소설에서 인간의 선행 욕망이 인간의 무질서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성적 구성을 합리화하고 규제하려 든다. 그 결과 여성에게 특수한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아내, 엄마, 정부의 역할이 더 이상 중첩될 수 없도록 이론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낸다. <블래이드 러너에서는 부유한 백인들을 인종적 타자와 가난한 이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분리시키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 구성을 조직하는 수직적 구조였다. 바닥 현장에서 타자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물어뜯는다. 또한 아일랜드는 오늘날 부의 숭배에 관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보여준다.

 

나 자신 유토피아주의에 저항하지만,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모어의 유토피아에 이르는, 유명한 철학적, 문학적 유토피아들은 실제로 완전히 뒤집어서, 아이러니하게 읽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p.61)”쥴리엣클라우어 멕캐넬은 말한다. 오직 이 유토피아적 저작들은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면서 불가피하게 발화를 둘러싼 상황을 문제시하도록 만든다. 쿠메르루즈가 여러 식민주의를 거친 캄보디아를 좀 더 진실하고 순수하며 원형에 가까운 진정한 캄푸치아로 바꾸려고 꿈꾸었을 때, 많은 것들이 금지되었다. 가령 시력이 약하거나 이상적이지 않은 체형의 사람들이 예술가들과 함께 처형되었다.(p.62)” 이처럼 허구적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삭제와 제거는 공동체의 명징한 고립무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일지 모르지만, 실제 유토피아를 만들 때 필요한 폭력적인 단절은 누군가에겐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대안적 미래를 추구할 상상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진정 우리에겐 예지가 필요하다. 바로 우리를 위한 유토피아를 어디에도 없고 어디든 있는 것이나, ‘결코 그리고 영원히도 아닌 간단히 여기 아닌 다른 곳으로 꿈꿀 수 있는 예지자이다. 전후 세기 중반에 일어난 유토피아적 전환은 이제 대단원에 이르렀다. 이 유토피아는 전반적으로 새디즘적인 교외지역이라는 밋밋하고 텅 빈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전혀 유토피아라고도 할 수 없는 곳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민족의 요구를 거부한 국가는 국내 노동자를 포기하는 대신 경제, 군사적으로 해외로 진출한 자본을 지원했다. 이런 과정은 신자유주의 단계에서도 일어난다.(p.93)” 세계화는 1960년대에 시작 되었다. 선진국들은 이윤의 하락으로 인해 지속적인 불황을 겪게 된다. 영구소비재가 시장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은 소비재생산에서 헤게모니를 상실했다. 일본과 독일이 눈에 뛸 만큼 발전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미국 자본은 세계 자유 시장에서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하지만 이 지구적 규모의 경쟁은 미국의 군사헤게모니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자본주의의 현 단계는 신자유주의보다는 신제국주의적 이라고 가라타니 고진은 말한다.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인간의 사유는 지적으로 인식 가능한 세상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세상을 이데아가 지배한다고 말한다.(p.106)” 이데아는 정신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정신적 재현물과 연결되어 있다. 정신적 재현으로부터 현존 체계와 근본적 균열을 만드는 관념적 이데아가 정식화 된다. 플라톤의 천재성을 존경했던 모어는 플라톤에게 영감을 받아 정확히 이 일을 해냈다. 일종의 유토피아적 접근법을 통해 그는 순수한 정신적 재현에서 도출된 완전히 새로운 인간적 이상을 목표로 삼는, 이상적 평등사회를 기획하고 발전시킨다. 순수한 정신적 재현이 인간의 미래에 미치는 인상적인 효과는 이제 입증될 수 있다.

 

게임이론의 출간은 진정한 유토피아를 개념화하려는 작업의 긍정적 산물이었다. 내쉬의 게임이론은 인간성을 재난에 빠트릴만한 경쟁의 혈투를 없앰으로써 지구상에 균형을 재구축할 수 있는 효과적인 이론이다.(p.133)” 동시에 언어의 결함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기표를 통과하는 데 성공해서 전달 가능한 행위로 귀결되었다. 과업의 다른 한쪽은 정신분열증의 발현기로 드러나는데, 말하자면 노벨상 메달의 망상적 뒷면이라고 할 수 있다. 내쉬는 세상의 문제들을 변별하기 위해서 수 점술학과 우주적 계시에 의존한다. 그의 사유는 상식과는 동떨어진, 짐짓 비일관적인 행위와 행위시연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과학계 동료들과 주변사람들의 이해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 자신에게만은 명백히 논리적이며 완벽하게 합리적이었다.

 

정신병자는 흠결 없는 인간성을 꿈꾼다. 바로 목소리가 부과하는 정신적 대상에 기초한 인간성이다. 목소리가 자신에게 저장해 놓은 앎으로 무장하고,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는 윤리적 입장을 취하면서 깊은 고독 속에서 그는 자신이 사명으로 받드는 유토피아의 건설을 실현시키는데 영혼과 몸을 헌신한다.(p.139)” 그는 목소리의 최고 권위와 그 목소리가 명령하는 주이상스(고통과 쾌락)에 복종한다. 초자아를 통해서 모든 아버지의 이름들은 쓸모없어진다. 주인의 긴급한 요구와 종교 또는 과학적 지식들도 마찬가지다. 모어의 이상사회는 새로운 현실의 제약을 제안했다. 다다이즘은 초현실주의가 예술적 창조에서의 혁명적 전희를 시도했을 때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폭넓은 범위의, 가차 없고 타협하지 않는 문제제기를 통해서 주목할 만한 정치적 반향들을 갖게 되었다고 다니엘 버저론은 말한다.

 

플라톤과 모어를 함께 다루면서 라캉은 어떤 종류의 지성적인 자유도 현존하지 않으며, 유토피아의 장소 없는 ()공간에서만 존재할 뿐이라고 선포한다.(p.199)” 모든 유토피아적 비전은 예외 없이 불가능한 일관된 통일성을 욕망함으로써 지속되는 잘못 인식되고 파행적인 꿈으로 환원되는가? 만일 유토피아가 상징계와 실재계에 어디에서도 자리가 없는 관념화된 비장소라면 상상계의 허구적 현상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이 될 수 있는가? 정신분석적 메타심리학이 리비도 경제, 미래성, 유토피아주의, 탈존재론적 실천 철학과 관련되어 주장하는 듯 보인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쾌락원칙의 경향에 연결된 제반 사항들과 연결을 끊는 윤리와 정치에는 진정 미래가, 진짜 미래가 있다. 이에 덧붙여 만일 이 새로운 비-장소를 상징하기 위한 공간이 깨끗이 치워놓고 열려 있다면, 무시무시한 폭력이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오랜 소망과 몽상에 가해져야 한다.

 

(인간사랑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k******4 2023.08.30. 신고 공감 13 댓글 4
리뷰 총점 종이책
유토피아
"유토피아" 내용보기
유토피아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외 지음/강수영인간사랑/2023.8.10. ‘유토피아는 이상적인 국가’이디.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존재 할 수 없는 국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두가 바라는 이상 국가는 하나의 형태로 정의되거나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한다면 아마도 사람 수 만큼의 국가가 존재해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세계는 가
"유토피아" 내용보기

유토피아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외 지음/강수영

인간사랑/2023.8.10.


‘유토피아는 이상적인 국가’이디.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존재 할 수 없는 국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두가 바라는 이상 국가는 하나의 형태로 정의되거나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한다면 아마도 사람 수 만큼의 국가가 존재해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세계는 가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유토피아>의 공동저자인 슬라보예 지젝, 에티엔느 발리바르, 가라타니 고진, 줄리엣 플라우어 맥캐넬, 다니엘 버저론, 에드리언 존스턴, 조지프 젠킨스, 펠릭스 엔슬린, 라이언 앤소니 해치 등은 정신분석, 심리학, 종교, 철학, 문학, 영화 등을 전공했거나 관심을 갖고 있는 9명의 저자가 각자의 입장에서 유토피아에 대해 고찰한다. 유토피아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태생적 결함을 가지고 있음을 각자의 글에서 주장하고 있다.


“유토피아가 어딘가 미지의 시간과 장소에 오롯이 존재하는 완벽한 행복의 장소라는 생각은 자본의 값싼 대중적 이미지일 뿐이다.(p.11)”라고 <유토피아>의 역자 서문에서 말한다. 우리에게 제공된 현대의 유토피아 서사들은 대부분은 숨겨진 디스토피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완벽한 사회의 가능성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여기 이곳과는 다른 지점, 다른 시간성을 향한 열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모어의 유토피아 사회는 각 부서가 동등한 역할을 수행하는 의회공화주의이며 제퍼슨주의식 원형적 농업 사회주의로 구성되어 있다.(p.16)”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법, 도덕, 관습은 모어의 글에서 약속된 무미건조하고 지속적인 황홀경을 주진 않았다. 그렇기에 모어는 새로운 섬, 유토피아가 여러 개의 시민국가로 구성된 국가라고 한다.


“데이비드 그로스만의 첫 소설 <그녀의 몸은 안다>는 루이스 부뉴엘의 <엘>이 영화를 통해서 질투를 다룬 방식대로 문학에서 다룬 것으로, 질투의 기본적 환상구조를 탁월한 기술로 보여준다.(p.25)” 질투를 느낄 때 주체는 자신은 제외된 유토피아를 창조하고 상상한다. 이런 개념적 구성은 정치적 질투라고 부를 만한 것에도 적용된다. 유대인이 누리는 과잉향유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환상으로부터 게이와 레즈비언의 낯선 성행위에 대한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의 환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런 종류의 질투에 해당된다. 이 논리는 최근 알렌 와이스만의 <인간 없는 세상>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인간이 갑자기 지구에서 사라진 후의 상황을 담았다.


“이슬람의 시각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충분히 ‘합리적’이지 못한 것은 사랑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이다. 사랑에 집중하면 신은 너무도 인간적이고, 예수의 형상으로 치우치게 된다.(p.44)” 예수는 창조에 개입했던, 간섭하고 투쟁적인 배우로서, 열정과 수난을 통해 창조주이자 우주의 지배자의 논리를 초과했다. 이와 달리 이슬람의 신은 진정한 이성의 신이다. 그는 전적으로 초월적이다. 경박한 비합리성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서 관장하므로 편파적인 열정으로 땅위의 사건에 개입할 필요가 없는 최고의 창조자라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슬라보예 지젝은 말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 마가렛 애트리우드의 <하녀의 이야기>, 리들리 스콧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마이클 베이의 영화 <아일랜드> 등은 모두 완벽한 듯 보이는 문화 속 흠결을 찾으려고 한다.(p.58)” 오웰의 소설에서는 일상 언어가 타락해서 권력에 봉사하게 됨으로써, 상상을 초월하는 전체주의를 낳았다. 애트리우드의 소설에서 인간의 선행 욕망이 인간의 무질서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성적 구성을 합리화하고 규제하려 든다. 그 결과 여성에게 특수한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아내, 엄마, 정부의 역할이 더 이상 중첩될 수 없도록 이론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낸다. <블래이드 러너>에서는 부유한 백인들을 인종적 타자와 가난한 이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분리시키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 구성을 조직하는 수직적 구조였다. 바닥 현장에서 ‘타자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물어뜯는다. 또한 <아일랜드>는 오늘날 부의 숭배에 관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보여준다.


“나 자신 유토피아주의에 저항하지만,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모어의 <유토피아>에 이르는, 유명한 철학적, 문학적 유토피아들은 실제로 완전히 뒤집어서, 아이러니하게 읽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p.61)”고 쥴리엣클라우어 멕캐넬은 말한다. 오직 이 유토피아적 저작들은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면서 불가피하게 발화를 둘러싼 상황을 문제시하도록 만든다. “쿠메르루즈가 여러 식민주의를 거친 캄보디아를 좀 더 진실하고 순수하며 원형에 가까운 진정한 캄푸치아로 바꾸려고 꿈꾸었을 때, 많은 것들이 금지되었다. 가령 시력이 약하거나 이상적이지 않은 체형의 사람들이 예술가들과 함께 처형되었다.(p.62)” 이처럼 허구적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삭제와 제거는 공동체의 명징한 고립무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일지 모르지만, 실제 유토피아를 만들 때 필요한 폭력적인 단절은 누군가에겐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대안적 미래’를 추구할 상상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진정 우리에겐 예지가 필요하다. 바로 우리를 위한 유토피아를 ‘어디에도 없고 어디든 있는 것’이나, ‘결코 그리고 영원히’도 아닌 간단히 여기 아닌 다른 곳으로 꿈꿀 수 있는 예지자이다. 전후 세기 중반에 일어난 유토피아적 전환은 이제 대단원에 이르렀다. 이 유토피아는 전반적으로 새디즘적인 교외지역이라는 밋밋하고 텅 빈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전혀 유토피아라고도 할 수 없는 곳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민족의 요구를 거부한 국가는 국내 노동자를 포기하는 대신 경제, 군사적으로 해외로 진출한 자본을 지원했다. 이런 과정은 신자유주의 단계에서도 일어난다.(p.93)” 세계화는 1960년대에 시작 되었다. 선진국들은 이윤의 하락으로 인해 지속적인 불황을 겪게 된다. 영구소비재가 시장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은 소비재생산에서 헤게모니를 상실했다. 일본과 독일이 눈에 뛸 만큼 발전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미국 자본은 세계 자유 시장에서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하지만 이 지구적 규모의 경쟁은 미국의 군사헤게모니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자본주의의 현 단계는 신자유주의보다는 신제국주의적 이라고 가라타니 고진은 말한다.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인간의 사유는 지적으로 인식 가능한 세상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세상을 이데아가 지배한다고 말한다.(p.106)” 이데아는 정신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정신적 재현물과 연결되어 있다. 정신적 재현으로부터 현존 체계와 근본적 균열을 만드는 관념적 이데아가 정식화 된다. 플라톤의 천재성을 존경했던 모어는 플라톤에게 영감을 받아 정확히 이 일을 해냈다. 일종의 유토피아적 접근법을 통해 그는 순수한 정신적 재현에서 도출된 완전히 새로운 인간적 이상을 목표로 삼는, 이상적 평등사회를 기획하고 발전시킨다. 순수한 정신적 재현이 인간의 미래에 미치는 인상적인 효과는 이제 입증될 수 있다.


“게임이론의 출간은 진정한 유토피아를 개념화하려는 작업의 긍정적 산물이었다. 내쉬의 게임이론은 인간성을 재난에 빠트릴만한 경쟁의 혈투를 없앰으로써 지구상에 균형을 재구축할 수 있는 효과적인 이론이다.(p.133)” 동시에 언어의 결함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기표를 통과하는 데 성공해서 전달 가능한 행위로 귀결되었다. 과업의 다른 한쪽은 정신분열증의 발현기로 드러나는데, 말하자면 노벨상 메달의 망상적 뒷면이라고 할 수 있다. 내쉬는 세상의 문제들을 변별하기 위해서 수 점술학과 우주적 계시에 의존한다. 그의 사유는 상식과는 동떨어진, 짐짓 비일관적인 행위와 행위시연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과학계 동료들과 주변사람들의 이해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 자신에게만은 명백히 논리적이며 완벽하게 합리적이었다.


“정신병자는 흠결 없는 인간성을 꿈꾼다. 바로 목소리가 부과하는 정신적 대상에 기초한 인간성이다. 목소리가 자신에게 저장해 놓은 앎으로 무장하고,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는 윤리적 입장을 취하면서 깊은 고독 속에서 그는 자신이 사명으로 받드는 유토피아의 건설을 실현시키는데 영혼과 몸을 헌신한다.(p.139)” 그는 목소리의 최고 권위와 그 목소리가 명령하는 주이상스(고통과 쾌락)에 복종한다. 초자아를 통해서 모든 아버지의 이름들은 쓸모없어진다. 주인의 긴급한 요구와 종교 또는 과학적 지식들도 마찬가지다. 모어의 이상사회는 새로운 현실의 제약을 제안했다. 다다이즘은 초현실주의가 예술적 창조에서의 혁명적 전희를 시도했을 때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폭넓은 범위의, 가차 없고 타협하지 않는 문제제기를 통해서 주목할 만한 정치적 반향들을 갖게 되었다고 다니엘 버저론은 말한다.


“플라톤과 모어를 함께 다루면서 라캉은 어떤 종류의 지성적인 자유도 현존하지 않으며, 유토피아의 장소 없는 (비)공간에서만 존재할 뿐이라고 선포한다.(p.199)” 모든 유토피아적 비전은 예외 없이 불가능한 일관된 통일성을 욕망함으로써 지속되는 잘못 인식되고 파행적인 꿈으로 환원되는가? 만일 유토피아가 상징계와 실재계에 어디에서도 자리가 없는 관념화된 비장소라면 상상계의 허구적 현상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이 될 수 있는가? 정신분석적 메타심리학이 리비도 경제, 미래성, 유토피아주의, 탈존재론적 실천 철학과 관련되어 주장하는 듯 보인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쾌락원칙의 경향에 연결된 제반 사항들과 연결을 끊는 윤리와 정치에는 진정 미래가, 진짜 미래가 있다. 이에 덧붙여 만일 이 새로운 비-장소를 상징하기 위한 공간이 깨끗이 치워놓고 열려 있다면, 무시무시한 폭력이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오랜 소망과 몽상에 가해져야 한다.

k******4 2024.11.04. 신고 공감 7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Think 2. 불청객,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게서 의도치 않은 기발함을 엿보다
"Think 2. 불청객,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게서 의도치 않은 기발함을 엿보다" 내용보기
'무의식의 저널 Umbr(a)' 시리즈는 우리에게 익숙한 저자의 '낯선 글모음집'의 성격을 띤 책이다. 이름만 들어도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등등 세계 명문대학의 교수들이 집필진(?)으로 활약하기에 이 시리즈는 읽어봄직한 책이기도 하다. 거기에 'umbra'라는 단어가 지닌 뜻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보통은 '천문학'에서 일식이나 월식 때 지구, 또는 달의
"Think 2. 불청객,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게서 의도치 않은 기발함을 엿보다" 내용보기

  '무의식의 저널 Umbr(a)' 시리즈는 우리에게 익숙한 저자의 '낯선 글모음집'의 성격을 띤 책이다. 이름만 들어도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등등 세계 명문대학의 교수들이 집필진(?)으로 활약하기에 이 시리즈는 읽어봄직한 책이기도 하다. 거기에 'umbra'라는 단어가 지닌 뜻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보통은 '천문학'에서 일식이나 월식 때 지구, 또는 달의 '본그림자'를 뜻할 때 쓰는 단어이지만, 고대 로마에서는 '동반자'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함께 한다'는 뜻의 환영받는 뜻이 아니라 '초대객이 데리고 온 손님'이란 뜻으로, 한마디로 '불청객'이란 뜻이다.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다른 손님에게 묻어서, 또는 묻혀서 딸려왔으니 얼마나 불편하겠냔 말이다. 그래서 난 이 시리즈의 본래 의도가 바로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라고 짐작한다.

 

  딴에는 '무의식'이 그렇다. 정신분석학에서도 '무의식'은 의식세계의 저편에 있어서 우리의 '의도'에 관여받지도 않고 받을 수도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저변에 깊숙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마치 초대한 적은 없지만 불현듯 찾아와 어느새 함께 자리하고 있는 '불청객'처럼 말이다. 이 책, '무의식의 저널'이 바로 딱 그렇다. 우리의 깊은 관심 '밖'에 있는 책임에 분명하지만 우연히라도 '읽는 순간', 손에서 책을 땔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갖고 있는 책으로 소개하면 딱 맞을 것 같다. 이 책 <유토피아>도 그랬으니, 다른 'Umbr(a)'도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김에 '무의식의 저널' 시리즈를 탐독해보려 한다. 시간이 좀 걸려도 해보려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가 쓴 책일 것이다. 우리가 상상하기에 가장 완벽히 이상적인 곳을 모어는 '유토피아'라고 표현했다. 허나 '유토피아'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을 지녔다고 한다.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가장 완벽한 곳인데도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런 곳'이 유토피아라니 말이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유토피아'의 반대말인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상상하는 가장 암울한 곳인데도 현실속 어디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토피아의 진정한 뜻은 '없는 곳'이 확실하다. 그 반대말인 디스토피아가 확실히 '있는 곳'이니 말이다. 아니 너무 흔해서 굳이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눈앞에 펼쳐지는 까닭에 더욱 짜증날 따름이다.

 

  이렇게 짜증이 나는 '디스토피아' 말고 우리가 찾고 싶어하는 '유토피아'는 어디에 있을지 정신분석학적으로 나름 분석한 책이 바로 이 책의 골자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바라는 '유토피아'를 보여줄 생각은 저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세상에 없음직한 '유토피아'가 왜 확실히 '없는지'만을 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유명 대학의 교수님들이 짜고서 그런 글들만 써낸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까닭인 즉슨, 학문적 관점에서 '유토피아'에 관한 내용을 써내려가다보니 꽤나 '형이상학적인 내용'의 글잔치를 펼쳐놓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각각의 저자들은 이 책에서 '유토피아'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이 세상에 '없는 곳'을 지향하는 '무엇'에 대한 주제를 담론으로 삼아, 그 '무엇'이 이 세상에 없을 수밖에 없는 까닭을 진솔하게 나열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딴에는 당연한 소리를 뭘 그렇게 어렵게 꺼내서 어렵게 마무리하시나 싶지만, 원체 교수님들이 하는 말발이 원래 그런 식이니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상식적인 선'에서 유토피아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 '역자 서문'에도 영화 <아일랜드>의 예를 들어 이 책 '유토피아'를 소개하고 있으니 말이다. 굳이 라캉, 파스칼, 프로이트와 마르크스가 언급된 '유토피아'에 심취하고 싶다면 이 책을 탐독하시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난, 나만의 '유토피아'를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꼭 존재했으면 더 바랄나위가 없는 그런 '유토피아' 말이다.

 

  내게 그런 유토피아의 이름은 바로 '대한민국'이다. 현실속의 대한민국은 많이 해묵어서 낡아빠진 이데올로기를 애써 끄집어내서 나라를 통째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미국의 노예'로 만들고도 자신이 한 짓을 자랑삼아 떠벌리는 반푼이 30% 국민과 함께 '동반자(umbra)'로 품고 살아가야 하는 후진국 지향국가지만, 내가 꿈꾸는 대한민국은 선진국을 훨씬 넘어서서 이 세상 모든 국가들이 부러워 마지않는 '선도국가'이다. 우리는 잠시나마 그런 대한민국을 경험해봤었다. 다들 알지 않은가.

 

  그런데 그랬던 나라가 불과 1~2년 만에 경제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고, 정치는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외교는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는지 '국익'을 외치면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그런데도 잘했다고 스스로 성적을 매겨버리는 요상한 일들이 날이면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국외순방을 나갈 때마다 온국민들이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소원을 빌지경이다. 나갔다하면 사고를 치고 돌아와서는 천연덕스럽게 '또 다른 사고'를 저질러 덮어버리려고만 하니 정말 답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또 사고를 쳤다. 이웃나라에서 '오염수'를 대놓고 바다에 방류하겠다는데 반대는커녕 '잘 버리는지, 과학적 감시'만 하겠단다. 핵폐기물을 그냥 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니 '잘 처리해서' 버리는지, '허용기준치'를 넘어서면 방류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버려달라, 요청'하는 말만 하겠다면서도 어찌나 당당한지 말이 안 나올 정도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일본이 일방적으로 바다에 '오염수'를 버려서 오염을 시켜서 발생한 '일본어민들의 피해보상'을 비롯해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비용처리'를 한국정부가 대신 부담하겠다고 선언해버렸다. 아니, 바다오염의 '가해자'는 일본인데, 그 피해당사국인 '한국정부'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단 말인가? 이게 '호구짓'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거기다 대한민국 총리라는 작자가 '오염수'를 '오염 처리수'라고 명칭을 바꿔 '괴담(?)'에 맞서 대한민국 어업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앞장서겠다고 한다. 이건 또 뭔 짓거리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팩트는 간단하다. '방사능에 피폭되면 뒈진다'는 것이 가장 과학적인 진실이다. 알프슨지 히말라얀지 현대과학기술 수준으로는 아무리 '핵오염수'를 걸러도 '방사능물질'을 모두 다 거를 순 없다는 것도 '과학적 팩트'다. 이걸 아무리 희석한다고 해도 '방사능 수치'가 내려갈 뿐, '방사능 물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적은 양이라해도 '방사능 물질'은 방사능을 뿜어내며 이 방사능에 '피폭'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는 일본에 투하된 '원폭피해자들의 데이타'가 거의 전부다. 그렇게 피폭된 생존자들의 2세, 3세, 그리고 4세들까지 '방사능피폭'에 따른 원인모를 희귀질환에 시달리는 것을 일본정부는 생생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도 기시다 일본정권은 전세계가 공분할 '오염수방류 만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향후 30년간 오염수를 버린 다음, 완벽히 '핵폐기'를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온다는 가정이 따라야 하겠지만, 그 다음에 오염수 수도꼭지를 잠글지는 미지수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하루에 500톤 이상을 방류하고, 30년 동안 방류하면 오염된 바다는 어찌 될 것이냔 말이다. 바다에 '검은 잉크 500톤'을 뿌려댄다고 상상해보잔 말이다. 아무리 '희석'을 한들, '검은 잉크'는 30년 이상 계속 버려지고 바다생태계 모두에 '검은 잉크'가 축적되고, 해양지층에 퇴적되고, 더 나아가 갯벌을 비롯해서 육지생태계까지 '검은 잉크'는 침범해서 결국 온지구가 '검은 잉크'로 얼룩지고 말 것이라는 '디스토피아'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시다 정권'의 유토피아를 짐작할 수 있다. 당장에 처리비용을 감당할 수 없으니 가장 값싼 방법으로 '핵오염수의 부담'을 걷어내고, 넓고 넓은 바다에 아주 적은 양으로 희석시켜서 버릴 뿐이니 바다생태계가 견뎌줄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일본수산물'을 날것 그대로 먹어도 안전...아니 별탈은 일어나지 않겠...그래도 행여 안심이 되지 않으니, "기시다는 쬐끔 불안하니까. 노르웨이산 연어스테이크를 먹어줄꺼예요. 서민들은 안심하고 후쿠시마 앞바다 생선 많이 먹어서 삼중수소 박멸할 때까지 흡입해주세요. 그래야 기시다 베이비들은 미래에도 안심하고 스시 먹을 수 있을테니까. 다이죠~부"라고 가장 완벽한 '유토피아'를 상상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 윤석열정부의 '유토피아'는 궁금하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얘들이 상상한 '유토피아'는 상상불가다. 당췌 '국익'이라는 것이 없는 '핵오염수 방류사건'으로 대한민국이 얻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자신들의 빵빵한 호주머니 정도일까? 고작 그딴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면 정말 실망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는 알든 모르든 '무조건' 반복(?)된다면서 '120년 주기설'을 내세웠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120년 전을 살펴보니, '친일개화세력'이 나라를 팔아먹기 일보직전이었다. 윤석열정권이 2022년에 집권했으니 120년 전은 1902년이었다. 곧 러일전쟁이 벌어질 참이었고,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걍 내주고, 나라를 통째로 일제에 넘겨버린 주역들이 한창 활개를 치던 시절이었단 말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딱 그 꼴인듯 싶어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일어난 일도 아니고 일어나서도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우리고 꿈꾸는 '유토피아'가 불확실 할수록 우리가 상상조차 하기 싫은 '디스토피아'가 닥쳐올 것은 거의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또 다시 '일제의 식민지', '미국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최선도 우리는 익히 경험했다. 이명박 정권때도 물대포를 맞아가며 '촛불'을 들었다. 박근혜 정권때도 엄동설한에 어묵국물로 추위를 달래며 '촛불'을 들었다. 윤석열 정권이라고 다를 건 없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위해 촛불을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시들하다. 촛불의 주역들이 촛불을 들 생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시들하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걸까?

 

  이명박 때의 촛불들은 '광우병'으로부터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나라를 꿈꿨다. 박근혜 때의 촛불들은 '세월호 사건'으로부터 진실이 은폐되고 거짓을 선동하는 부정한 세력을 내몰고 깨끗한 국정을 꿈꿨다. 그런데 윤석열 때로 접어들자, 국민들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나라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진실은커녕 온갖 거짓선동만 퍼나르며 '과학'이라고 우기는 거짓선동꾼들만 가득한 나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참에 바른소리, 옳은소리, 뼈아픈소리를 외치던 지사들마저 두문동으로 숨어들고 말았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냔 말이다.

 

  총선 때를 기다려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방식은 가장 소극적인 방식으로 큰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지금도 '여소야대의 정국'인데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할 때다. 한동훈 장관은 '사형집행' 운운하며 칼부림을 참지(?) 않을 것이라 겁박하는 형국이다. 이럴 때 무엇을 기다리냔 말이다.

 

  우리는 3·1만세혁명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4·19혁명으로 부정선거를 용납치 않았으며, 5·18혁명으로 부당한 정권을 하나 뿐인 생명을 내놓고 부정해봤고, 6월혁명으로 그 정권을 작살냈었다. 그 이후에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서 우리는 또 하나의 '유토피아'를 꿈꿨었다. 당신은 그때 꿈꿨던 우리의 유토피아를 잊었단 말인가? 그건 아니 된다. 비록 우리가 꿈꿨던 '유토피아'가 실제로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을지언정 '유토피아'를 꿈꾸길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꿈꾸길 포기하냔 말이다. 어쩌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120여 년전 나라를 팔아먹어도 좋다는 '매국노들의 후예'가 지금 본색을 드러내고 저들의 세상이 온것마냥 나대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이들을 소통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경일에 '일장기'를 내걸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저들을 싹쓸이할 기회가 '바로 지금'이란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이 땅의 매국노들을 싹 쓸어버린 '뒤'의 대한민국을 말이다. 또다시 흐지부지 끝날 '그날 이후'를 미리 걱정할 필요따윈 없다. 그래서 난 즐겁다. 날이면 날마다 '망국의 앞잡이들'이 목을 길게 늘이고 나불대고 있는 지금이 말이다. 얼마나 좋으냔 말이다.

 

  이렇듯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비-존재의 대상'으로 삼아 무궁한 고찰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 <유토피아>가 얘기하고 있는 골자로 생각한다. 각각의 저자들이 나름의 '전문분야'에서 나름의 '유토피아의 개념'을 풀어냈지만 말이다. 정신분석학에 걸맞게 '유토피아'와 '정신병'에 유사한 점을 분석한 저자도 있었다. 따라서 과거의 '광기어린 인물'들이 종종 '천재성'을 발휘하여 모든 인류에게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고도 말한다. 꽤나 신선한 풀이가 아닐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도 광기어린 천재들(장승업 등)이 뛰어난 업적을 남긴 예가 있어 솔깃한 내용이었다. 허나 나는 한 술 더 떠서 '한 사람의 정신병자'가 나라를 거덜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무의식의 저널'은 무한한 상상의 재미를 선사하는 책이라 마음에 흡족했다. 다음 책도 무진 기대가 된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23.08.31. 신고 공감 6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Utopia 유토피아
"Utopia 유토피아" 내용보기
이번 엄브라의 Utopia(이하 유토피아)호에서는 원대한 의미인 유토피아의 전통적인 관점을 읽어낼 수 있는 #플라톤의 #완벽한 지도자 또는 철인이 지배하는 #완벽한국가의 의미로부터 비슷하면서도 다른 관점으로 #디스토피아한 #토마스모어의 어디에도 없는 #이상향적 유토피아에대한 접점, 그리고 그 외 다양한 저작물에서 언급된 상그리아적 유토피아의 세계관까지 다뤄지고 있다. 또
"Utopia 유토피아" 내용보기

이번 엄브라의 Utopia(이하 유토피아)호에서는 원대한 의미인 유토피아의 전통적인 관점을 읽어낼 수 있는 #플라톤의 #완벽한 지도자 또는 철인이 지배하는 #완벽한국가의 의미로부터 비슷하면서도 다른 관점으로 #디스토피아한 #토마스모어의 어디에도 없는 #이상향적 유토피아에대한 접점, 그리고 그 외 다양한 저작물에서 언급된 상그리아적 유토피아의 세계관까지 다뤄지고 있다. 또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서 바라본 잠재의식에 내제된 이상향의 유토피아도 이러한 이상향을 생각하게 한다. 흥미로운것은 본문에서 언급하고있는 인류의 안락한 부를 향한 자본주의가 인류가 바라는 유토피아라면 영화의 한장면에서 소모품으로 창조된 #인간클론 #엘리스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길은 인생의 이타적인 정반대의 선택이였다.


즉, 엘리스는 쉬운길, 편하고 안주하는 소극적인 삶을 박차고 암울하지만 꿈과 희망의 자율적인 선택이 주어지는 나의 길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택이 과연 인류가, 인간이 원하는 마지막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가? 엘리스는 결론적으로 자유라는 힘든 삶을 선택했다. 우리가 이른아침 5시 알람에 삶은 달걀+우유한잔으로 일을 하는 이유란 원하는 미래의 안락한 여유로움인가, 아니면 완성될 수 없는 정신적 자유로움의 이상인가 상각해 볼일일이다.


저자는 이러한 유토피아를 #프로이드의정신분석으로 #의식을재구성함으로서 생명이 다할때까지 명확한것과 희미한것 어느것이라도 끊임없이 #꿈과희망을 찾아 헤메는 #인류의 종착지는 #무엇이고 #어디인지를 고민해본다. 이런 측면에서 반유토피아적방식으로 접근하며 언급한 #인간의지성은본능과비교해무력하다 라고 했다. 이 말은 이 후, 치열한 담론에 부딪치며 미래적 최상의 희망은 지성이며 과학적 정신과 이성이 인간의 정신적 삶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는 것이라고 스스로 전환하기는 했다. 


시대는 늘 변화하며 사고와 사건을통해 그 시대만의 문화적 특성이 투영된 트렌드를 만들어 낸다. 단적이지만 21세기를 통과하며 펜데믹화한 코로나19를 경험하고 돌파했듯이 지구촌의 역사를 점검해보면 고비고비마다 그런 크고작은 위기들을 통해 진보하고 진화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 주의해야하는 것은 인류를 구성하는 소수인 한사람 한사람 인간은 그러한 터닝포인트인 사건사고에 이름도없이 당하는 피해자가 되지않도록 주의해야하고, 다수인 사회 혹은 국가는 이러한 트렌드를통해 한단계 인류를, 국가와 사회를 이끄는 발전의 기회를 법을 고치든 제도를 통해서든 만들어내는 토양이 돼야 한다는 점이다. 모어의 유토피아라는 의미를 통해 국가, 종교와문화, 정치라는 각각의 관점을 통해 이상적인 국가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통찰하게 만들었다. 또한 어디에도 존재하지않는 이상향 아름다운 세계란 무엇인지, 인류의 문화적인 성숙을 이끌어 냈다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본문은 1부터 9장까지 #다양한분야의 #전문성을가진 철학자, 사상가, 작가, 교수인  #JacquesLacan  #SlavojZizek  #JulietFlowerMacCannell  #KojinKaratani  #danielbeojeolon  #EtienneBalibar  #AdrianJohnston  #JosephJenkins  #FelixEnslin의  시선을통해 유토피아에대한 지향점들을 소환해 의식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즉 우리 삶의 과거와 현재로 유입된 유토피아를 투영시켜 변증법적 반성으로 외연을 확장시키며 미래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듯하다. 인류는 오늘날까지 미래지향적인 지성과 이성,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단순한 상상력에 멈춰있지 않고 점점 엔트로피(Entropy)화하는 인류의 세상과 삶을 개선하고 변화하기 위한 생산적인 도구로 존재해 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은 삶속에서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는 과정에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관통하며 dystopia & anti-utopia(이하 디스토피아 혹은 반유토피아)적 사고를 경험한다. 


사족이지만 본문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었지만 Life utopia라고 새롭게 만들어 매칭시켜본다면 플라톤의 유토피아도, 토마스모어의 유토피아도 아닌 안견이 몽유도원도에서 그린 풍경이나 티벳의 쿤룬산맥(Kunlun Mountains) 동서쪽 끝자락에 위치했다는 제임스힐턴 소설 '잃어버린지평선'의 가상의 지명 #ShangriLa(샹그릴라)를 생각해봤다. 혹자들은  흥미롭게도 이구동성 빛바랜 시선으로 티벳을 방문하면 100% 실망할것이라는 정도를 이미 우리는 알고 있는바다. 그렇다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재형라이프를 의미하는 #소확행 小確幸 #휘게 hygge #HyggeLife #휘게라이프 #라곰 #lagom #오캄 #aucalme #시수 Sisu #킨포크 Kinfolk #LagomLife #라곰라이프 #워라밸 #WLB #WorkandLifeBalance 등과 샹그릴라는 같은 세계인지 아니면 다른세계인지를 생각해봤다.


이러힌 단어들은 인류적 삶의 방식을 해석하며 이해하고 지향해 나아갈 바를 실용적 혹은 관념론적으로 추구하는 지점을 정의하는 다양한 현실단어라는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단어들 혹은 관련한 세계를 이상향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을것인가를 생각해밨다. 그리고 각 나라들이 지향하는 아름답고 좋은 의미들인  행복, 만족, 여유, 기쁨, 행복한 시간들을 의미한 단어들 끝자락에 유토피아를 연결시켜본다. 물론 저자도 유토파아적 관점을 미래와 결부시켜 생각할 필요를 막고 있기는 하다. 저자의 언급처럼 유토피아적 사유의 메커니즘은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 세상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앞으로 나아가기위한 디스토피아적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Utopia #유토피아
#엄브라
#yes24서평지원으로작성했습니다
#요즘갑자기생각정리가안되는군요

c**********y 2023.11.05. 신고 공감 3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유토피아』, 정신분석 키워드로 사유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다양한 시선
"『유토피아』, 정신분석 키워드로 사유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다양한 시선" 내용보기
<이 리뷰는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등 저, 강수영 옮김, 인간사랑 출판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라는 인류의 오래된 희망과 이상의 관념의 정신분석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전문적인 학술저널이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라는 키워드에 관심이 많아서 처음 서평단에 신청할 때는 지적 호기
"『유토피아』, 정신분석 키워드로 사유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다양한 시선" 내용보기

<이 리뷰는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등 저, 강수영 옮김, 인간사랑 출판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라는 인류의 오래된 희망과 이상의 관념의 정신분석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전문적인 학술저널이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라는 키워드에 관심이 많아서 처음 서평단에 신청할 때는 지적 호기심으로 기대감이 컸다. 그도 그럴 것이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과 가라타니 고진의 이름이 대표적으로 올라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름만으로도 주제가 철학적으로 굉장히 심오하게 다루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었고, 어떤 담론이 벌어질지 궁금했다. 하지만 막상 받아본 책은 생각 이상이었다. 

  책은 정신분석문화센터에서 발행하는 <엄브레>라는 전문적인 저널이었다. 생소한 저널이었는데 정신분석을 키워드로 해외 유수의 학자들의 심도있는 글들을 주제별로 모아 번역하고 편집하여 발행하는 도서였다. 정신분석은 평소에도 이해하기 어려워서 뭔가 장벽을 느끼는 분야였는데 그 키워드만으로도 읽기 전부터 약간 걱정이 되는 한편 처음 접하는 저널의 구성이 궁금하여 호기심이 생겼다. 주제에 대한 호기심과 서평의 의무감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어려운 글들이었다.

  슬라보예 지젝과 가라타니 고진은 약간 미끼같은 이름이었다. 아마 가장 유명한 철학자들이기 때문에 관심을 유치하기 위해 대표적으로 올린 이름이 아닐까 싶다. 총 9 저자의 9편의 글이 실려있었고, 분량도 상당하여 260페이지 정도가 되었다. 주제는 정신분석의 관점과 연결하여 유토피아라는 서양의 오래된 이상적 사고에 관해 사유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정신분석 키워드인가 싶은 내용들도 있을만큼 다양했다.

  캘리포니아폴리테크닉대학 영문과 교수인 라이언 앤소니 해치는 2008년 <엄브라 유토피아>를 편집했던 인물로 정신분석과 유토피아의 상관관계를 짚어나가는 첫 번째 글로 이 저널의 큰 틀을 알려주는 포문을 연다.

p.13(라이언 앤소니 해치)

정신분석은 개인의 행복이나 사회로의 귀환, 복귀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위한 창조적 행위의 지평을 열어주기 위해 고유성의 진리를 절합"(13)하는 것이라는 설명은 유토피아가 꼭 아무 흠결 없는 매끄러운 이상이 아니며 다양하게 표출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어 두 번째 글인 슬라보예 지젝의 "유토피아적 응시의 모호성"에서는 라캉의 이론을 빌린 유토피아적 시선에 대해 말한다. 지젝이 말하기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환상은 '우리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26).

p.26(슬라보예 지젝)

거세되기 이전의 아무런 흠결이 없는 상태인 자신, 우리, 인간이 없는 세계가 가장 완전한 순수의 환상이다. 이는 환상이기 때문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로인해 인간은 "현재 우리에게 정상적으로 보이는 상태를 만들어낸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의 시간에 위치시켜야 한다"(39). 그렇게 인간의 관념으로 정상 규범을 만들어내기 이전의 상태를 생각하면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고, "인간의 자유는 이 존재론적 열림에 토대를" 두게 된다(39)

p.50(슬라보예 지젝)

지젝의 이러한 논의는 인간이 정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범주에 대한 재고찰과 인간 존재만이 아니라 자연 및 비인간 존재들을 포용하는 열린 존재로서의 삶, 즉 포스트휴먼적 사고방식과 연결된다.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주의 연구자인만큼 자본주의와 국가의 역사적 발전 단계와 국가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으로서의 혁명이 주기적으로 반복됨을 논의한다. 제국주의, 자본주의, 세계주의, 평화 등의 시기가 이름과 관념에 변화를 가지고 조금씩 변화할 뿐 근본적으로는 반복되는 역사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혁명과 반복은 사회주의가 꿈꾸는 유토피아적 사회로의 끊임없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글은 캐나다 퀘백의 정신분석가인 다니엘 버저론의 "유토피아와 정신병: 초월로의 탐험"이다. 정신병전문의이기도 한 저자는 정신병을 유토피아적 이념을 향한 정신병자의 투쟁으로 보고, "순수하게 정신적인 창조물을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105)을 유토피아 개념에 정신분석이론이 가지고 있는 역할로 생각한다. 유토피아에 대한 개념은 현실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불평등에 관한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긍정성을 언급하면서, 유토피아적 사유를 통해 "인간은 내면에서 공통된 이해관계를 식별해내어 더 나은 인간성을 향한 도정에 사용한다"(108)고 말한다. 그러면서 위대한 예술가, 작가, 수학자 등이 유토피아의 초월적 관념을 생산하는 업적을 남기는 창작자들이라고 설명한다.

p.108(다니엘 버저론)

이러한 설명과 함께 정신병자를 유토피아적 이상을 지향하고 실현화하려는 창작자의 개념에 포함시킨다. "정신병자는 인간과 사회 사이의 모순을 주장"하며 사회의 결함을 제거하기 위한 "인간주의적 십자군 행군을 감행"하는 책임을 감당하며, "어떤 타협도 거부하려는 나르시즘적 투쟁을 벌이는 동안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이다(112). 그 소외감의 결과가 정신병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순수한 정신적 창조물이 사회에 수용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천재적 예술가, 작가, 수학자 등의 위인이 되느냐 정신병자로 남느냐로 갈리게 된다. 버저론은 살바도르 달리나 수학자 존 내쉬 등의 일화를 언급하면서 이들이 정신적 문제를 지적받았음에도 그들의 뛰어난 창조물이 사회에 수용됨으로써 위대한 위인으로 남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이 저널의 첫 글인 해치의 글에서 정신분석은 개인의 행복이나 사회로의 회귀가 아닌 "주체를 위한 창조적 행위의 지평"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말과 함께 버저론이 시작에서 순수한 정신적 창조물을 사회에 수용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정신분석의 역할이라는 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내가 그동안 정신분석을 유독 어렵게 생각했던 이유는 가지각색인 인간의 복잡한 심리와 정신구조를 논리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선입견과 이 학문의 복잡한 용어들 때문이었는데, 이들의 글을 읽고 나니 정신분석을 조금 더 실재적으로, 실천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정신병과 정신병자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은 이들을 사회에서 분리하여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이들의 정신적 창조물을 사회적으로 수용하여 인류의 문화를 보다 풍요롭게 하는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정의와 평등, 유토피아의 종말에 대한 사유, 상속법과 신학적 선택, 죽음과 부활의 사도바울 해석에 대한 논쟁에 관한 글들이 다양하게 실려있다. 정치적, 경제적, 법적, 종교적, 철학적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유토피아를 사유하는 이 저널은 저자들이 모두 뛰어난 학술적 전문가이기 때문에 내용이 어렵기도 하다. 내가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 번 읽어서 파악되는 글들이 아니라 읽고 사유하고, 다시 읽으며 계속 곱씹어야 하는 글들이다. 어렵지만 한 편 한 편 읽어나갈 때마다 새로운 지식의 지평이 열리는 것 같아서 즐겁기도 했다. 생소한 저널이었는데 이 저널의 다른 시리즈로 나온 것들도 많아서 차후 천천히 더 살펴보고 싶다. 정신분석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단연 눈길이 갈만한 책이고, 유토피아에 대한 다양한 사유가 궁금하다면 찬찬히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끝으로 이 어렵고 많은 글들을 기획하고 번역하고 편집한 강수영 번역가님에게 유익한 글들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싶다.
 

YES마니아 : 로얄 s******k 2023.09.24.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유토피아 (무의식의 저널)
"유토피아 (무의식의 저널)" 내용보기
라파엘은 말했다. “당신은 그런 나라를 직접 보지 못해 그런 나라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고, 상상한다 해도 틀린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그 나라에 가서 5년 이상 살았습니다. 그리고 저 새로운 세계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결심하지 않았다면, 그 나라를 결코 떠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유토피아 (무의식의 저널)" 내용보기

 

라파엘은 말했다.

“당신은 그런 나라를 직접 보지 못해 그런 나라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고, 상상한다 해도 틀린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그 나라에 가서 5년 이상 살았습니다. 그리고 저 새로운 세계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결심하지 않았다면, 그 나라를 결코 떠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나와 함께 유토피아로 가서 그곳의 문물제도와 관습을 직접 보았더라면, 그 나라처럼 모든 제도가 올바르게 잘 정비되어 훌륭하게 다스려지는 나라를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토머스 무어는 [유토피아]에서 라파엘의 입을 빌려 유토피아를 그린다. 주목할 것은 [유토피아]를 다녀온 사람은 라파엘 뿐이라는 것이다. 오직 라파엘만이 유토피아의 진실과 현실을 알고 있다.

 

유토피아!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금과 보석 보기를 돌같이 하고 하루에 6시간 밖에 일하지 않으며 풍부한 상품이 보장되는 곳. 부정도 없고 부패도 없으며 귀천도 없고 자신의 꿈을 펼치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는 곳. 그런 곳이 있으면 누군들 가고 싶지 않을 수 있을까.

문제는 오직 라파엘만이 ‘유토피아’의 본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본 적도 없고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유토피아’는 토머스 무어에 의해 인간의 낙원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라파엘의 설명은 그 때 당시 사회에서는 충분한 청사진을 제시했는지 모르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다소 빈약하다. 낙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굴러가는지, 사람들의 욕망은 어떻게 처리되고 거세되는지, 법률을 개정하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는 무엇인지 등등 세부사항을 창조하는 일은 모두 현대인의 몫 되어버렸다.

 

그 숙제를 풀어내고자 시도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플라톤의 국가론, 토머스 무어의 유토피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의 자본론, 라캉의 세미나를 드나들며 그 속에서 유토피아를 창조하거나 파괴하려는 시도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인간을 둘러보며 없어진 유토피아를 그리워하거나 앞으로 올 유토피아를 기대하는 것은 각 독자의 선택으로 남겨진다.

 

 

낙관주의자는 세상이 멋진 이유는 모두 설명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p.49

 

 

현대 사회의 과학은 유토피아야말로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올 미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기계주의적 낙관주의자들의 주장에 불과하다. 인간에 관한 것은 그 누구도 완벽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유토피아’라는 물체를 건설하지 못하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유토피아적 응시의 모호성>에서 라캉의 ‘전부 아닌’ 논리를 설명하며 난센스를 타파하려 한다.

 

모두 설명가능하지 않으며 단순한 총체적 합이 아닌 유토피아가 우리에게 이토록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줄리엣 플라우어 맥케넬은 <어디에도 없는>에서 그 이유를 파헤친다. 그 중 하나는 무시간성이다. 일단 유토피아가 도래하면 과거의 일은 책임에서 벗어난다. 유토피아라는 낙원이 이루어져 미래 세대에게 전달되므로 모든 책임이 경감되는 것이다. 무시간성이라는 말은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연결된다. 무의식은 시간을 참조하지 않으며 시간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유토피아=무의식이라 할 수 있다면 유토피아=디스토피아라는 공식도 설명된다. 보호받는 줄 알고 지정된 장소에서 머무르다가 마침내 꿈에서 깬 영화 <아일랜드>의 주인공처럼 ‘유토피아=디스토피아’로 연결되는 사슬에 나도 모르게 깜빡 놀라고 말았다.

 

알고 보면 디스토피아라 생각했던 현대 사회가 사실은 유토피아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니엘 버저론의 <유토피아와 정신병 : 초월로의 탐험>에서 찾을 수 있었다. 현실 세계에서 ‘정신병자’는 환상의 세계(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디스토피아에서 고통받고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정신병자에게는 현실 세계에 적응하며 사는 사람이야말로 유토피아를 누리는 사람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우리가 없는 낙원 ‘유토피아’를 찾아 헤매듯이 ‘정신병자’는 자신의 환상이 이루어질 ‘유토피아’를 찾아 나선다. 1994년 경제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존 내쉬는 어떻게 자신의 유토피아를 찾아나섰는가? 게임이론을 만든 존 내쉬는 30년 동안 심각한 정신분열증에 시달려 왔다. 천재이면서 정신분열증 환자로 살아온 삶을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은 수학적 관념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생겨난다. 따라서 나는 이 두 관념을 똑같이 진지하게 생각한다.

 

 

내쉬는 두 가지 삶에게 각각 충분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내쉬의 균형’ 이론을 개발하여 사회적 관계에서 승자도 패자도 없지만 모두가 무언갈 얻어갈 수 있는 방식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 부분은 토머스 무어의 [유토피아]와 연결된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문화적 혹은 정서적인 간섭이 없고 누군가의 쾌락이나 만족을 위해 타인을 복종시키지 않으며, 만족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된다. 내쉬의 접근법은 모어의 것에 필적한다. 그의 작업이 집단적 목표를 향해 있고, 집단적 선, 즉 언어를 복구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p.131

 

 

다른 점이 있다면 모어는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 그쳤지만 내쉬는 그것을 현실화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정신병자’로 취급될 수 있는 사람의 유토피아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언어, 사회, 관습, 전통에 얽매여 새로운 유토피아를 만날 엄두가 안나는 일반인을 이끌어 유토피아를 현실화하는데 그들의 역할이 중요할 수 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다보면 결국 노예, 사유 재산의 부분에 다다른다. [유토피아]의 사람들은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 어렵고 힘든 일은 노예나 용병을 부린다. 이것이 과연 유토피아적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힘든 일은 외면하고 다른 사람을 시킨다면 그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금 현실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부자들은 돈으로 공간을 사고, 시간을 사고, 청결함을 산다. 가난한 사람들은 좁아진 공간에서 부자들의 쓰레기를 청소하며 시간을 보낸다.

 

 

욕망도 요즘은 돈이 있어야 언어로 구성될 수 있다. ‘사유재산의 노래가 언어 하나하나를 굴절시킨다. 가난한 사람은 억압상황에서 무엇을 하는가?’ 라는 구절은 지금 현대 사회의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현대 사회와 유토피아의 경제체제와 법률에 관한 질문이 있는 사람은 이 책에 수록된 <정의와 평등>, <혁명과 반복>을 통해 답을 얻을 수 있다.

 

유토피아는 환상 너머의 환상인걸까? 아니면 내쉬처럼 현실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것일까?

무시간성, 무제한성 그리고 무의미성이라는 유토피아의 의미를 곱씹어보면서 환상의 나라, 유토피아를 그려볼 수 있는 책이었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f*****j 2023.08.21.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유토피아
"유토피아" 내용보기
동경, 닿고 싶은 곳, 거기서 살고 싶다는 욕망. 유토피아를 떠오르면 생각나는 말들이다. 무엇 하나 부족한 점이 없고 가장 좋은 것들로만 채워져 있을 것 같은 완벽한 곳.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우리 모두는 거기에 영영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정신분석과 문화연구센터 무의식의 저널 Umbr(a) -엄브라-에서 유토피아를 다뤘다. “엄브라 이번 호 『유토피아』가 던지는 질문은
"유토피아" 내용보기

동경, 닿고 싶은 곳, 거기서 살고 싶다는 욕망. 유토피아를 떠오르면 생각나는 말들이다. 무엇 하나 부족한 점이 없고 가장 좋은 것들로만 채워져 있을 것 같은 완벽한 곳.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우리 모두는 거기에 영영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정신분석과 문화연구센터 무의식의 저널 Umbr(a) -엄브라-에서 유토피아를 다뤘다.

“엄브라 이번 호 『유토피아』가 던지는 질문은 진정 유토피아가 존재하는지 여부, 혹은 유토피아의 표면을 찢어 드러내는 디스토피아의 속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이론은 유토피아를 향한 인간의 지치지 않는 열망에서 우리가 속한 이 불가피한 상징계를 뚫고 나갈 해방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와 같은 책 소개를 읽고 가볍게 책을 읽으려고 했다. 유토피아가 존재하기 어려운 다양한 이유들과 정신분석이론이 유토피아를 다루는 방식들이 어떤 게 있을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역자 서문을 읽고 본문으로 넘어가면서 이 기대는 무너졌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전혀 아니었다. 치열하게 사유하면서 읽어야 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정신분석이론과 철학적 흐름, 철학자의 논리를 세세하게는 아니더라도 대략적으로 알아야 책 한 페이지를 넘길 수 있다. 내가 읽었던 책 중 가장 어려운 책이다.

 

투셰와 유토피아 - 라이언 엔소니 해치

p22, 주체는 ‘현실’이 아니라 실재와의 환원 불가능한 조우의 관계에 위치한다. 진정한 행위는 프로이트와 라캉 모두에게 윤리의 단일 장소로서, 대타자의 장에 나타나는 균열이다. 따라서 이 행위를 통해 유토피아의 뭔가가 존재에 돌출한다.

 

유토피아적 응시의 모호성 - 슬라보예 지젝

51p, 19세기에 누가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물리학 같은 것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이 ‘전부 아닌’의 공간은 바람직한 유토피아의 공간이며 환상 너머 환상하기이다.

성경에서 가장 이상하다고 느낀 욥. 체스터톤이 설명하는 욥기가 재밌었다.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에 관하여

60p, 오늘날 유토피아의 사례가 가능할까? 어디에도 없는데도 삶의 풍요로움과 만족에 겨워있는 상태를 거스르면서, 가령 내가 모든 곳의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것에 반해 여전히 드러나게 될 유토피아적 충동을 말할 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정말로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면 왜 안 되는 것인지 알려준다.

혁명과 반복 - 가라타니 고진

77p, 놀랍게도 하나의 구조가 반복되면 사건 역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반복되는 것은 오직 구조다.

세계는 달라지고 살았던 사람들도 달라지는 데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까? 새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어딘가 익숙하다. 발전하고 있는 것 같지만 동시에 후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는 시지프스의 형별과 비슷할까?

 

유토피아와 정신병: 초월로의 탐험 - 다니엘 버저론

130p, 내쉬의 지식은 오로지 그 만의 내적인 세계에서 비롯한, 관념과 정신적 형상뿐 아니라, 심지어 우주적 계시들에서 온 것이다. 다른 한편, 사회적 연결망에 대응하는 담론뿐 아니라 자체의 구성적 결함을 이유로 언어의 전반적 본성에 대해 도전했다는 점에서 일체의 귀속감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정신병과 유토피아를 동시에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정의와 평등: 정치적 딜레마? 파스칼, 플라톤 마르크스 - 에티엔느 발리바르

세 가지 논의를 제시한다.

  1. 파스칼과 힘으로서의 정의와 정의로서의 힘의 이율배반
  2. 플라톤과 전체의 심리적 이미지로서 주체성 구성
  3. 마르크스와 영, 그리고 정의와 불의, 갈등의 절합

 

미래로부터 오다: 프로이트, 라캉, 마르쿠제, 과거의 끈을 끊다

193p,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교차로에 위치한 욕망의 환상적 만족에 국한되어 있는 미래는 진짜 미래가 아니다.

 

상속법 개혁과 신학적 선택 - 조지프 젠킨스

224p, 내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단선적 서사로 읽을 때 발생한 재난 같은 결과에 대해 동의한다면, 왜 단선적 사유재산의 상속도 재난적일 수도 있다고 동의할 수 없는가?

법적 배상판결의 미결정성에 대해 다룬다.

 

죽음 없는 부활? 루터와 바디우의 사도바울 해석에서 부정성과 진실에 관한 소론

기본보다 좀 더 심화된 지식을 갖추어야 이 부분을 읽을 수 있다. 사도 바울과 루터, 바디우를 처음 접했다면 이 부분은 읽기 어렵다.

 

오랜만에 머리를 엄청 쓰면서 읽은 책이다. 나오는 모든 내용이 흥미로웠고 한 부분도 놓치고 지나갈 수 없었다. 내가 더 공부해야하는 철학자들이 많았다. 정신분석학 학문이 이렇게 분화되었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앞으로도 두고 두고 읽으면서 더 공부해야 하는 책이다.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s*******4 2023.08.20.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