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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식으로 이야기하자고 한다면, 마태복음 강해서 정도가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카톨릭 신부님이 쓰신 책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한부분으로 화가 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신교, 즉 기독교를 비난하는 관점으로 마지막이 마무리되고 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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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성당에 다녔다. 일요일이면 성당에 있는 커다란 미끄럼틀을 타고 성당마당을 뛰어다니고는 했다. 어른들과 미사를 드리고 나서 같이 집에 돌아오는 길은 늘 소풍을 다녀온 느낌이 들었다. 철이 들고부터는 살짝 뛰쳐나가고 싶어서 그랬는지 자꾸 이리저리 색안경을 쓰고 보고 삐딱하게 생각하느라 많이 벗어나 살았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아예 성당을 멀리했다. 아이를 키운답시고 냉담까지 했다. 그러다 아이에게 어느정도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지자 불현듯 나는 다시 성당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성당에 관한 추억과 나의 아이들이 내가 가진 추억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아이들도 알아 가기를 기대하면서 오늘도 성당에 다녀왔다. 그러나, 성당 문을 나서면 이상하게도 나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예전의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방금들은 복음말씀이 뭐였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미사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나갈 것이지만 몇 달전 언니의 죽음, 장례미사는 나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그날 복음말씀은 역시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신부님의 강론은 잊을 수가 없다.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언니와 가족들이 느낄 슬픔에 관한 것이었다. 하느님이 세상에 사람을 보낸데에는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이웃에게 봉사하며 서로 사랑을 나누라고 보냈다는 말씀이었다. 언니의 죽음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거의 실신에 가까운 엄마를 보듬기에 바빴던 내게 인간과 삶, 죽음에 의미가 한순간에 정리가 되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아닌가. 늘 들었지만 잊고 살아왔던 그 말씀
신약성서의 첫 복음인 마태오복음을 해방신학을 공부한 저자의 강한 어조를 담은 <행동하는예수>(2014. 2 매디치미디어)를 펼치고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저자의 약력을 죽 따라가다가 그가 카톨릭대학을 다니가 유학을 떠나 해방신학을 공부했다는 점에 이르러서야 조금 들뜨게 만들던 마지막 단락이 수그러 들게 되었다.
마태오 복음을 성경을 그대로 읽기 평이하게 다시 읽게 하고 이스라엘 역사와 문화를 예로 들어 다시 해석하고 마지막의 저자의 날선 비판이 곁들여진 구성이다. 몇장, 몇절인 간단한 성경구절이 800p로 늘어나 있지만 결코 넘볼 수 없을 것 같은 부담은 가지지 않고 읽을 수 있다. 묵상을 하고 읽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저자는 예수에 집중하라고 외친다. 성경은 사실 어떠한 시각으로 읽느냐가 중요한데 각자가 가진 생각으로 해석하고 강조하다보면 정작 예수를 지나치게 되고 결국은 전혀 다른 의미만 남게 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을 가까이 하여 그 길을 걷는 길이 바로 하느님을 찾아 가는 길이자 쉽지 않은 가르침이 바로 행동하는 예수의 주제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아마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예수님 다음의 단어는 가난한 사람일 수 있다.
p 436
갈등에서 저항으로, 저항에서 해방으로 가는 길을 예수는 걸으셨다. 세상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저항의 길이다. 성서를 배운다는 것은 그런 예수의 길을 배우는 것이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숲안에서는 숲이 안보이는 법. 내가 가진 종교를 떠나 재해석된 복음말씀을 읽는 것도 신앙생활에 가질 수 있는 고정된 관점을 깨는 데 도움이 될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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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학자 김근수 님의 마태복음 해설서이다. 가톨릭 신학자이기에 일반적인 명칭은 개신교인에게는 조금 어색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점 외에도 저자 고유의 표현들에 주의하지 않으면 오독의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해방신학 전문가 답게 마태복음의 해석에 있어서도 그런 관점들이 보인다. 물론 이것은 성서의 관점을 소개하는 것이지 저자의 관점을 성서에 투사하는 것은 아니다. 전체를 주석하고 있는데 오히려 부분 부분에 집중하고 해설을 더 풍부하게 썼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개신교인의 입장에서도 나름의 형평성을 유지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었고 평이하게 그러나 무게감있는 해설이 성서를 읽는데 큰 도움이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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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을 구분하는 방식이 여럿있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게 이판과 사판 그리고 학승과 선승이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게 학승과 선승의 조화로움을 계속하여 느끼게 되었고 오랜만에 글읽기의 즐거움도 맛보게 되었다. 나같은 아마추어가 역사적예수에 관심을 가져 관련분야의 책만 기백권 소장(다 읽지는 못했다 ㅋ) 할 정도로 이 분야는 너무 매혹적이다. 물론 좋은 글이 넘쳐나 지나친 면도 있다. 노자에서 말하는 다언삭궁이랄까.. 독일분들이 쓴책(타이센,보른캄), 영미권의 책(특히 샌더스, 크로산), 일본의 다가와 그리고 우리나라의 안병무선생님과 정양모선생님. 이 분들이 내개 많은걸 주셨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고 이현주목사님 그리고 조성기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다소간의 위안도 받았지만 여전히 내 갈증은 해소되지 못했다. 이제 운좋게 갈증을 완화시켜주는 시원한 약수를 만나고 있다. 저자의 글은 시원한 약수와 같다. 그래 노자도 말했다. 지극한 선은 물과 같다고. 저자는 어느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썼을까. 복음서 저자들의 청중과 많이 다를까? 아니면 같을까? 각설하고. 좋은책은 만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 이 책은 만금이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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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또한 제목에 크게 공감하며 읽게 된 책이다. 제자들을 부르신 후 설교를 통해 가르치시고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셨던 예수님.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생각을 갖는다는 것과 좋은 말을 널리 전하며 산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실천이 없다면 그 가르침은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예수는 가르치면서 행동하고, 행동하면서 가르친다. 행동이 믿음보다 우선이라는 '마태오복음' 저자의 신학에 비추어 본다면 행동하는 예수는 가르치는 예수보다 더 중요하다. 행동이 진짜 가르침인 것이다. 행동은 이론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이론을 상승시킨다 (P. 9~10)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그 가르침의 내용이 실천하기에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어떤 결단과 희생을 요구하는지를 크게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말씀하신 바대로 행하기 위해 앞장 서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주저하는 마음조차 부끄러워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물론 주저함 없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겠지만... ^^) 이 책은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록을 중심으로 저자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예수님의 유래부터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여러 이적들,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생애 자체를 구체적으로 접근하여 적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목사님과 신부님, 스님, 수녀님, 학자와 교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의견과 자료를 모으고 자신이 공부한 해방신학을 바탕으로 이 책을 펴냈다고 한다. 교회에 다니고 있는 나로서는 책을 읽으며 다소 생소하거나 기존에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부분도 있어 고개를 갸웃거릴 때도 있었으나, 예수님의 생애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그 본질적 의미에 있어서는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많아 끝까지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남의 죄를 탓하고 자기 슬픔에 잠길 일이 아니다. 종교를 이기주의에 굴복시키면 가장 종교적인 사람은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만다. 자기 혼자 천국 가면 천국에서 얼마나 외로울까. (P. 84) 내 죄를 회개하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이해하고 감싸안을 줄 아는 사람..... 예수님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셨다. 겸손한 모습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돌보시고 사랑을 베푸셨던 예수님. 그 모습에서 오늘날의 우리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저자는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행동하는 예수'라 했다. 결국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마음 속에 자리한 인간에 대한 확고한 사랑과 연민때문이었을 것인데, 나의 삶을 돌아보니 여전히 나태하고 능동적이지 못하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예수님의 그 원대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내 삶도 돌아보게 되었다. 저자는 몇몇 설교자들이 성경의 배경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른 채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기 위한 한 방편으로 성경을 이용한다고 질타한다. 성경의 메세지를 전하기보다 개인적 소감을 전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개인의 죄악에 치중하여 사회악과 구조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행동의 지침서로 받아들여 삶 가운데 실천해 가는 것. 그것이 신앙인으로서 평생 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이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가? 어차피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기에 실수와 잘못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고, 개선되지 않는 잘못된 습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곁에서 늘 참견하시고 일깨워주시는 예수님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기쁨으로 우리 삶을 누리자. 행동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삶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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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예수를 읽고 내 자신 솔직히 아직 어떤 종교든지 신봉하는 신도가 아니다. 물론 그 동안 많은 경험이나 체험도 해보았지만 아직까지 전담하여 몸과 마음을 맡긴 적은 없다. 그러나 모든 믿음에 대해서는 강력한 지지와 함께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마음을 열고 수용하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경전 내용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매우 생소한 입장이다. 낯설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리 쉽지가 않다. 다만 이런 좋은 책자를 통해서 공부하면서 배우고 느끼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좋은 시간이다. 책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우선 저자 나름대로 연구해 온 결실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길을 택하여 이런 놀라운 저술과 함께 지속적인 연구 의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존경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평신도 신학자로서 한 분야에 대한 꾸준히 공부해 온 결실을 이런 좋은 결과물로 만들어 낸 저자의 대단함은 역시 독실한 믿음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성경 내용으로만 느낄 수 없는 분위기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예수의 행동에 대해서 특히 인간의 구원을 위해 활동하는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막연하게만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도 이렇게 의미를 부여함에 따라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도 참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큰 선물인 것 같다. 이 책을 통해서 느낀 여러 지식을 실제로 느껴볼 수 있도록 앞으로 시간을 좀 더 투자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성경의 내용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마태오복음"에 관한 연구와 해설을 통해서 새로운 많은 부분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었으면 한다. 진정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통해서 사랑이라는 가장 바람직한 모습으로 함께 하기를 기대해본다. 특히도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 여러 면에서 악조건을 갖고 있는 병든 자와 가난한 자, 소외된 자와 과부, 창녀 등 사회적 약자를 찾아 사랑을 베풀면서 함께 해왔던 예수님의 진면모를 모두가 절실하게 느꼈으면 한다. 아울러 현실 생활 속에서 과감하게 실천의 모습을 통해서 내 자신과 이웃이. 국가가, 세계가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에 넘치는 평화로운 모습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겨울 방학을 맞아서 서유럽 여행 중에 바티칸시티와 교황청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세계에서 몰려 든 관광객 때문에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박물관 전시 관람 시에도 뒷사람을 따라 가야만 하는 번잡함이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환함을 직접 보고 느꼈었다. 바로 이런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진실한 믿음을 통해서 전 인류가 함께 가는 평화로운 모습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넘쳐났으면 한다. 좋은 책을 읽는 행복함을 맛볼 수 있어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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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근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그는 오랫동안 예수에 대해서 공부했다. 예수는 행동하신 분이다. 말로만 외치는 현대의 종교적 형태보다는 삶으로 보여주셨다. 예수는 당시 이단아이다. 예수는 시대를 거스르며 살았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다. 오직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가는 것에 관심을 쏟았다. 예수는 종교라는 테두리에 놓여있지 않았다. 예수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저자는 예수의 진정성을 보았다. 예수의 행동을 보게 된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마태오복음"이고 하며, 마태오는 예수 예수를 마르코복음보다 좀 더 풍부하게 확대하였다고 본다. 저자는 마태오복음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해방신학, 민중신학에 관심을 가졌다.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했다. 가난한 사람은 그리스도교의 중심이요 신학의 주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신학의 중심을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 예수의 복음인 "마태오복음"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저자는 마태오복음이 가르치는 예수와 행동하는 예수의 두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한다. 저자는 행동하는 예수를 마태오복음을 통해 본 것이다. 믿음의 가장 중심은 행동이다. 믿기에 행동하는 것이다. 행동은 과정이며 결과이다. 현대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오해한다. 현대 교회들은 복음에 근거한 행동 즉, 예수의 행동을 따르지 않는다. 이벤트화된 교회들은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있다. 예수는 이미지메이킹을 하지 않았다. 오직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은 찾아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만지시고 치료하시고 함께 하셨다. 말보다 행동이다. 예수의 중심은 행동이다. 가르침을 행동으로 보이셨다.
저자는 예수의 삶을 본 것이다. 마태오복음을 통해 예수의 삶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현대는 불균형 사회이다. 빈부귀천이 없는 사회라 하지만 계층간 간격은 좁혀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계층간 간격이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넓어졌다. 가난이 되물림되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숨죽어 살아간다. 어제는 세모녀의 죽음을 보았다. 우리들의 가슴을 치게 만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이정도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마태오복음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민이 아니라 행동이다. 행동이 때로는 저항일 수 있다. 새로운 사회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 진리와 사랑이 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수많은 이들은 하나의 공동체로 살아가는 글로벌 시대에 우리들의 존재적 위치와 가치는 어느정도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을 보았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들을 위해 자신을 버렸다. 병든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과부, 창녀, 사회적 약자를 찾았다. 그들과 함께 했다. 함께 먹고 자면서 아파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종으로써 순종하여 그 길을 걸으신 것이다. 마태오복음을 통해 우리들에게 저자는 다시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행동하는 예수를 통해 행동하기를 원한다. 이 책은 예수를 통해 우리들에게 소망을 보여준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가질 수 없는 소망을 통해 현대를 이겨갈 수 있는 믿음의 힘을 갖게 함도 하나의 목적이다.
저자를 통해 행동하는 예수를 마태오복음을 통해 보게 되었다. 예수의 삶을 왜곡하는 시대적 흐름에 다시금 경종을 주는 책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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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말씀사탕" 뽑기를 했었다. 참 신기하게도 무작위로 뽑는 말씀사탕에 적힌 메시지가 지금의 나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인 것만 같아 성서를 읽고 공부하는 그 시간이 마치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관하시고 만들어주신 특별한 시간이라는 착각을 하곤 했었다. 성서공부 하면서 나누게 되는 신앙고백들이 낯뜨거워 마음속 얘기들을 꺼내는 것조차 부끄럽기 마련인데 그런 믿음 때문인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가슴이 먼저 벅차오르곤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나 끔찍하게 생각하시고 계시구나 하는 생각에 생각도 말도 행동도 조심스러지곤 하는 특별한 경험, 그런 경험 조차도 결국에는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돌보신다는 증거일거라며 세상 모든 것들에 감사하게 되는 단계가 오고야 만다. 그런 경험들을 한 두번 하고 나면 성서말씀이 내 삶에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소중하게 다가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이 책 <행동하는 예수>를 만났다는 것 또한 특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책은 그런 나의 생각들을 오롯이 비웃고 있었다. "성서는 결코 독학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며 성서 배경에 대한 지식 없이 성서 말씀을 자기 사정에 맞추는 태도는 위험하다고 꼬집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를 볼 때 우선 성서의 역사적 배경을 먼저 알고 거기서 얻은 메시지로 자기사정을 비로소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디서나 아무때나 성서를 인용하며 성서말씀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사정은 성서를 보는 새로운 배경이지만, 성서를 해석하는 판단 기준은 아니기 때문이다.(P.83)" 그렇다. 성서를 보고 이해하는 순서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오랜시간 가톨릭 신자라 말하고 다녔으면서도 기본적인 것 조차 알고 있지 않았으니 한참 부끄러웠다. 이렇듯 나에게 <행동하는 예수>는 그냥 마태오 해설서가 아니다.
성경책 만큼이나 두꺼운 책의 분량이 이 해설서가 풀어놓았을 수많은 이야기들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기본적으로는 예수탄생이 갖는 의미에서부터 저항의 땅 예루살렘에서의 활동기를 거쳐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도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았던 성서말씀을 풀어나간다. 중요한 것은 성서는 예수 말씀이 다가 아니라는 것. 말씀 못지 않게 예수 역사가 중요하고 성서는 에수의 단순한 어록집이 아니라 예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말씀의 종교가 아닌 역사의 종교임을 설파한다. 예수 역사를 모르면서 감히 성서를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예수 역사를 친절하고도 사려깊게 설명하면서도 지금의 그리스도교에 적절하게 대응하여 경고하고 비판하며 변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꼬집어 주는 방법으로 성서를 바라보는 자세를 몸소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의 아픈 역사를 잊으면 그리스도교의 아픈 현실도 제대로 보기 어렵다."(P.436)
이렇듯 <행동하는 예수>는 마태오 복음서에 담긴 역사적 배경은 물론 다각도로 논의되어 온 성서학자들의 견해와 세상에 대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여과없이 쏟아낸다. 역사상 가난한 적이 없던 교회, 자선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부자들과 밀착하는 모습, 자선을 내세우는 종교가 자선 기관을 소유하는 부자로 탈바꿈하는 현실, 돈벌려고 예수 이름을 팔아먹는 종교인, 편한대로 자신의 사정에 맞도록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들, 진실을 보지 못하는 종교언론에 대한 비판, 교회의 재산증식 내지는 이미지 관리로 세워지는 병원과 학교들, 서슴없이 헌금얘기를 하는 교회와 성당, 하느님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탓에 제대로 회개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는 그리스도교를, 우상숭배를 꼬집는다. 덧붙여 한국사회의 2대 모순으로 희생하지 않는 정치, 희생 없는 종교를 들며 우리 사회에서 어느덧 특권층으로 자리잡은 종교인과 종교를 이용하는 현실 정치, 종교인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신자에 대해 참된 희생 정신을 보여 주었던 예수를 통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한다.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회개하기 어렵다. 제대로 하느님을 전해들은 사람이 적으니 당연히 회개한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겠다.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할 수 없다. 회개한 사람이 오늘 드문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종교인이 드문 탓이다."(P.64)
"예수가 그렇게 가르치던가. 시골 성당과 교회의 목사나 신부도 흔히 누리는 그 안락함과 호사를 예수, 베드로, 바울이 단 하루라도 맛본 적이 있나."(P.103)
하지만 이 해설서는 결코 물 흐르듯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지는 않다. 복음서에 나온 말씀 그대로를 듣고 아무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은 탓에 그동안 역사적 사실일 거라 여겼던 말씀들이 어쩌면 복음서 저자가 꾸며 넣은 단락일거라는 둥, 원래 예수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다는 둥, 메시지를 받아들여야지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성서 구절 속 논란을 신자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천국과 지옥 운운하기 바빴다니 정말 멀고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여전히 성서가 어렵다. 미사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을텐데 설교자는 당신이 들려주고 싶은 얘기만을 들려줄 텐데, 어떻게 성서를 알아가야 하는지 숙제로 남겨졌다. 작가의 오랜 고뇌와 통찰력으로 4대 복음서가 새로운 해설서로 재탄생 한들 이 세상에 얼만큼의 반향을 일으킬지 그것 또한 미지수다. 그렇게 바뀔 세상이었다면 예수 부활 이후에 변해도 한참 이전에 변했어야 했을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자본주의 논리에 충실하게 교회의 부피는 더욱더 커지고 신자들은 눈멀고 귀멀고 그렇게 예수님이 그렸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를거라는 안타까운 생각마저 드는 건 그리스도교 신자 중 90퍼센트는 가짜 신자일거라는 그 믿음에서다.
궁극적으로 작가는 해설서를 통해 우리 교회를 비판하고, 예수를 모르고 제대로 성서를 보지 못한 채 성서를 인용하는 설교자들을 꼬집고,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채 맹목적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반성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함이 아닐까. 덧붙여 우리가 새겨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가난한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하셨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불의에 맞서 저항했던 예수의 행적들은 그 어떤 다른 가치들과 맞바꿀 수 있는 것들이 아닌 것이다. 늘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했던 예수의 섬세한 마음이 마태오에는 담겨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일상적고 평범한 공간이 예수의 기도 장소였고, 청중인 가난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화려한 수사법과 문학적 기교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먹을 것을 나누는 것을 으뜸가는 일로 여겼다. 그리고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들의 기도가 아니라 유혹에 빠지기 두려워하는 보통사람의 기도가 "예수의 기도"였다. 예수의 행적속에 가난한 사람들은 늘 함께였고 가치 우위에 있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예수가 만나고 상대한 사람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가난한 사람을 모르면 예수를 알 수가 없다. "이제 예수를 알고 보았으니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삶의 명제가 될 것 같다.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우리 삶을, 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 나가는지 우리가 직접 감시의 눈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처음에 <행동하는 예수>라는 책의 제목이 너무 맘에 들었다. 신자로서 늘 예수님 앞에 붙는 수식어에 의문을 갖곤 했었는데, 사실 어떻게 정의해야하는지 잘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의 입으로 어떤 수식어를 함부로 붙일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늘 나에게는 '그냥 예수님'이었지 '어떤 예수님'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 애매한 심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난 신자이긴 했지만 늘 어정쩡하고 예수님과 좀처럼 가까워질 수 없는 소극적인 신자였다. 작가의 말처럼 가짜 신자였다. 그런데 <행동하는 예수>라는 제목만으로 구차한 설명없이 예수님을 정의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제목 자체로 깊이 각인되었던 것 같다. 작가는 예수님과의 긴 여정을 함께 하는 동안에 진짜 예수를 체험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작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겠지.
"성서 해설의 목적은 예수에 대한 정보를 단순히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예수를 아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예수는 참 훌륭한 분이셨구나'와 '나는 예수를 따르겠다'는 문장은 그 의미가 같지 않다. 예수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예수를 따르겠다는 마음을 격려하는 것이 성서 해설의 목적이다. <행동하는 예수>는 그런 목적에 충실하고 싶다."(P.449)
여전히 성서는 내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함께 가야할 책이고, 그 안에서 삶의 중요한 메시지들을 얻으며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을 성서를 통해 찾곤 할 것이다. 그래서 해설서의 도움으로 성서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내가 성서에서 길을 찾고자 할 때 많은 지침이 될 것이다. 내 인생에 있어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이 책을 만난 것은 분명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새길 때마다 가슴벅찼듯이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에 새기고 싶은 글들이 너무 많아 말로 설명할 수 없이 벅찼다. 복음이 전해주듯 성서 말씀이 세상 끝 날까지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작가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지만 함께 걸어보자고, 하는데 함께 걷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루가복음과 요한복음의 해설서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 28,20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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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예수 김근수 지음│메디치미디어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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