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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노인들은 그곳에 갇혔는가 박용범 독서작가(2022)
왜 노인들은 그곳에 갇혔는가? 노인들은 지금 시대의 강물에 떠밀려 잉여의 존재로 퇴적 공간에 쌓여 있다. 노인이 되고서야 알았다. 자신들이 인간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자원(Human Resource)'으로 분류되어 살아왔음을. 물성적 교환가치가 소멸되는 순간 시장에 찌꺼기처럼 폐기되었음을. 시간이 흘러 자본주의 시장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교환가치가 떨어진 노인이 되게 된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 고갱도 타히티 섬에 머물 당시, 악화된 건강, 생활고, 사랑하는 딸 알렌느의 죽음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삶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 질문을 담은 작품이 바로 죽기 6년 전인 1897년에 그린 「우리는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또 어디로 가는가』다.
지금 우리 노인들은 의미 없는 시간들을 보내기만 할 뿐 아무 일도 못하면서 불만과 불신의 덩어리로만 남아 있다. 이건 재앙이다. 삶은 그 자체가 창조적 재탄생에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창작하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편승해서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철학적 체계의 사고방식을 구축해 나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역사적 부채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마냥 세월을 보내는 유령과 같은 존재에서 일탈해야 한다. 강물이 늘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지만 그것은 어제의 물이 아니고 늘 새로움을 던져주는 오늘의 물이다. 끊임없이 변화무쌍하게 일렁이는 파문을 내부로 감추어 붙잡는 심층수의 내재적 고요함을 읽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강물의 역동성을 따라잡지 못하고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적 상황이 주는 끝없는 무상함이 느껴지는가. 우리는 수없이 다양한 삶에 대한 내용을 해독해 낼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끝없이 열려 있는 질문에 자리를 내주어야만 한다. 종묘공원에 모이는 노인들은 외부 사람들에게 종묘공원에 있는 자신이 같은 장소에 있는 그들과 다른 존재이길 희망하며 자신을 은폐하고자 했다. 즉 종묘공원의 문화에 포함되고자 공통성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끊임없이 그들과 다름을 강조하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려 한다. 공원에 머무는 노인들에게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원하지 않았으나 어느샌가 그들은 슬로위 시티의 시티즌십으로 남겨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종묘와 탑골 공원에 모이는 노인들은 변화의 내용보다 변화의 속도에 충격을 받아 시대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진 '시대가 남기고 간 잉여 인간의 집합'이라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노인들의 시간이 잉여의 시간으로 서서히 흘러가고 있다. 일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잉여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은퇴란 없다. 죽는 그 순간까지 일을 하다가 죽을 것이다. 일을 손에서 놓는 순간이 곧 사망 시점이 된다. 글쓰기 작업은 평생 지속되어야 할 운명의 과업이다.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항상 죽음을 베개 삼아 곁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런 유유로 다오게네스는 탁발을 원했다. 먹는 것은 배고프지 않을 정도, 입는 것은 몸을 가리고 추위와 더위를 피할 정도, 집은 눈비를 피할 수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가난하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 생활을 바랐던 것이다. 종묘 시민공원을 중심으로 노인들이 머무르는 종로 일대의 공간은 가정으로부터의 1차적 추방과 도시의 속도가 주는 소멸이라는 이름의 제2의 추방이 교차하면서 형성된 도피성 장소다. 그곳을 도시의 인위성에 밀리고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들이 강 하구의 삼각주에 쌓여 가는 모래섬처럼 모여드는 퇴적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나날을 보내는 노인들은 어쩌면 이제는 서울 시민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인간이 지닌 자연의 감각을 원형처럼 간직하고 있는 원질(原質)과 같은 대상이 아닐까? 우리가 현대의 갖가지 정신질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일 다시 자연의 감각을 지녀야 할 시기가 도래한다면, 이 퇴적 공간은 영원히 보존해야 할 자산적 가치를 지닌 귀중한 공간이 될 것이다.
《퇴적 공간(오근재 저)》에서 일부분 발췌하여 필사하면서 초서 독서법으로 공부한 내용에 개인적 의견을 덧붙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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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늙고 쇠락해 이제는 더 이상 떼어 내 팔 수 있는 것이 바닥나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인간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사회의 '자원'으로 분류되어 살아왔음을, 물성적 교환가치가 소멸되는 순간 시장에서 찌꺼기처럼 폐기 되었음을, 그래서 '어르신'들은 누구랄 것 없이 고독하고 쓸쓸하다. 과거에 등가적 교환가치를 풍성하게 지녔던 이들은 모든 것이 떠나간 텅빈 뒷자리를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다. 노인들의 구조적 불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 고갱도 타히티 섬에 머물 당시, 악화된 건상, 생활고, 사랑하는 딸 알렌느의 죽음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삶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 질문을 담은 작품이 바로 그가 죽기 6년 전인 1897년에 그린 「우리는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또 어디로 가는가」다.
1900년대 초에 제물포 항만 선거 공사에 중국의 저임금 노동자 쿨리들이 주로 참여했는데, 그때 월미도에 가까운 이 지역에 그들이 모여 생활하기 시작해 오늘날 차이나타운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보나마나 고생깨나 했을 거고 들리는 소문에는 많이 죽었다고도 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이국땅이기는 하지만 항만시설을 남겼고 후손들이 들러 볼 수 있는 차이나타운도 남겼죠. 그러나 지금 우리 노인들은 의미 없는 시간들을 보내기만 할 뿐 아무 일도 못하면서 불만과 불신의 덩어리로만 남아 있어요. 이건 재앙입니다.
김찬식 씨는 이 시대의 노인들이 아무런 역사적 부채감을 지니지 못한 상태로 마냥 세월을 보내는 유령과 같은 존재라는 점에서 고통 속에서 극심한 노동을 강요당했던 쿨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견유학파 디오게네스는 덕(virtue)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버리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찾아와 무엇을 원하는가를 물었던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서 주시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항상 죽음을 베개 삼아 곁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쳤던 인물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탁발을 원했다. 먹는 것은 배고프지 않을 정도, 입는 것은 몸을 가리고 추위와 더위를 피할 정도, 집은 눈비를 피할 수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가난하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 생활을 바랐던 것이다.
종묘시민공원에 모여 있는 노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곳은 장터처럼 매일 노인들로 붐비지만, 어느 날부터 나오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순간 잊힌다. 사라진 누간가의 자리를 아쉬워하고 슬퍼해 줄 자가 없는 매정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화적 존재로 남기 이전에 생물학적인 존재로 남는 일조차 힘겨워 허덕이고 있다. 정년퇴임자 모임의 회원들이나 종묘시민공원의 노인들 모두 이웃의 죽음을 어느 눈금 위에 놓을 것인지 재빨리 계산하면서 자신의 행복과 안녕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리고 사자에 대한 애통함도, 상가의 문상 여부도, 부조금의 액수도 그 척도의 눈금 위에서 전부 이루어진다.
종묘시민공원에는 출근부가 없다. 누가 나오든 말든 아무도 관여하지 않지만 봄철 이후 날이 따스해지면 매일 2, 3000명의 노인들이 이곳을 찾는다. 강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그 물은 어제의 물이 아니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이곳을 점유한 노인들 역시 어제의 그 노인들이 아니다. 이곳의 구성원들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어제의 노인들은 오늘의 노인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그들 또한 새로 유입되는 내일의 노인들에게 자리를 넘겨줄 것이다. 결국 떠나는 이들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는 이유를 안고 멀어진다. 어느 날부터인가 낯익은 얼굴이 사라지고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면 십중팔구 병원에 입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스스로의 의지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으로 옮겨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코 누구와도 동행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믿을까. 더 이상 애곡하는 일이 없고 눈물과 고통이 없는 평강만이 존재하는 영혼의 세계를 믿을까. 아니면 모든 것이 육체의 소멸과 함께할 것이라는 메를로 퐁티와 같은 유물론적인 세계곤을 가지고 임종의 순간을 맞을까. 우리는 기독교적인 내세를 믿든 불교의 환생을 믿든 죽음 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고한 믿음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이곳에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종묘시민공원의 노인의 무리를 보면 그러한 미래를 아는지 모르는지 늘 평화롭고 한가해 보인다. 그러나 매 맞는 순서를 기다리는 학동들처럼, 자연계의 예외 없는 큰 순환의 한 과정에 자신들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인들 어찌 모르랴. 다만 매미의 여름철과 같은 이승의 삶이 끝나면 영구히, 그리고 덧없이 소멸되고 말리라는 두려움을 애써 잊기 위해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순간을 즐길 장소가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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