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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식인들에게 한시(漢詩)는 매우 익숙한 문학 갈래였으며, 그것을 창작하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교양 활동의 하나로 여겨졌다. 그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중요한 인생의 목표였던 바, 개인의 영달과 집안의 영광을 위해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에 매진해야만 했다. 과거의 종목 가운데 하나가 출제자가 제시한 주제에 따라 한시를 짓는 것이었기에, 한시를 창작하는 능력 또한 출세를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시를 창작함으로써 개인의 생각과 정서를 표출하고, 나아가 지식인 사회에서 자신이 지은 작품을 다른 사람과 주고받으면서 교유를 하기도 했다.
‘조선 지식인 문화의 정수 한시 이야기’라는 부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저자가 선정한 한시 작품들을 해설하면서 해당 작품에 대한 자세한 풀이와 함께 저자와 창작 배경은 물론 그와 관련된 사연들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한글이 창제되어 반포(1446)되기 이전에는 당연하게 우리의 말을 그대로 기록할 수단이 없었다. 그래서 한문에 익숙한 이들은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우리말을 기록하는 수단으로 향찰이라는 표기 방식을 개발했고, 그러한 방식으로 전해지는 고전시가가 바로 향가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기에, 향찰로 표기된 향가 작품을 풀어내는 어석(語釋)은 연구자에 따라 다르게 표기되기도 한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조선시대 지식인들에게 한시는 매우 익숙한 갈래였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여전히 관직 진출의 수단으로 과거제도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당시의 문학 작품 가운데 한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나마 시조와 가사와 같은 고전시가를 창작했던 문인들 역시 그보다 훨씬 많은 한시 작품을 남기고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이해된다. 이 책에서는 먼저 ‘양반부터 중인까지 그들은 왜 한시를 짓는가’라는 항목을 통해,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자존심과 창작하는 능력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탁월한 작품을 남긴 이들은 시를 짓도록 만드는 ‘시 귀신(詩魔)’의 힘을 빌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며, 과거 준비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여성과 중인들도 한시를 지어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드러내기도 했음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면모를 통해 한시 창작이 과거에 필요한 역량이기도 햇지만, 개인의 문학적 능력을 표출하는 도구로서의 역할도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한시를 지으면서 다른 사람이 창작한 작품을 자신의 작품인 양 발표하는 이른바 ‘표절’이 행해지기도 했었다. 또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작품을 짓게 하는 이른바 ‘대필’도 적지 않게 존재했는데, 이러한 행위의 이면에는 좋은 작품에 대한 욕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대필작가부터 표절시비까지, 명문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항목을 통해서, 저자는 당시 지식인들의 좋은 작품을 탐하는 면모를 소개하고 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책이 귀하던 시절, 자신의 독서 경험을 한시로 표현하기도 했었다. 아울러 남에게 빌려준 책을 돌려받기 위해 편지를 통해 부탁하는 내용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작품 해설은 물론 작가와 창작 배경을 함께 친절하게 소개하는 이 책의 서술 방식을 통해, 한시는 물론 문학에 대한 당시 지식인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개 여겨졌다.
마지막 항목에서는 ‘인상비평부터 원류비평까지, 무엇으로 한시의 품격을 논하는가’라는 관점에서, 당시 지식인들의 한시에 대한 평가의 다양한 면모를 소개하고 있다. 단순히 작품의 내용과 첫 인상만으로 평가하는 인상비평이 있는가 하면, 작품에 내재한 의미를 탐구하여 깊이 있는 평가를 내리는 면모까지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비평 작업은 당시 지식인들에게는 매우 오래된 연원을 지니고 있으며, 한시 작품의 내용과 작가는 물론 작품의 수용 과정까지 소개하는 이른바 ‘시화집(詩話集)’이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엮어지기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러한 작업이 비평으로까지 여겨지지는 않았겠지만, 문학비평이 예로부터 존재했음을 확인시켜주는 내용이라고 이해된다. 이처럼 저자가 소개한 옛 지식인들의 한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친절한 정보를 접함으로써, 당시의 지식인 문화의 중요한 흐름에 대한 면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 ( https://cafe.daum.net/Allwithbooks )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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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삶을 담은 한시(漢詩) 시(詩)가 일상에서 얼마나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올까? 특별히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현대인들이 시를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왜 그럴까? 시가 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성찰하여 시인만의 언어로 표현된 시가 사람들의 일상에서 멀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 것이 원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의 일상을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삶이 자신을 돌아볼 기회조차 빼앗겨버린 탓으로 돌리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한시 작품을 남겼던 옛 선비들에게 시란 어떤 의미였을까? 조선을 살았던 선비들의 일상은 시, 서, 화를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선비 된 사람으로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풍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또한 선비 된 자의 사회적 의무가 관료로 진출해 뜻한 바를 펼치는 것이었던 시대에 시를 짓는 능력은 필수조건이었다. 조선을 이끌어온 한 축인 선비들을 웃고 울게 했던 시는 당연히 한시였다. 이런 한시가 한자가 일상에서 멀어지면서 동시에 한시도 멀어졌다. 그렇지만 조선 선비들에게 한시는 출세의 도구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았기에 한시에 담긴 옛 선비들의 정서와 뜻은 살아남아 온전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 한시를 보다 가깝게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김풍기의 ‘한시의 품격’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주류 문화인 한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그 속에서 조선 지식인 사회와 문화를 읽어낸다. 한시를 매개로한 당시 사회적 환경을 읽고 있다. 한시를 공유하며 한시를 매개로 교류했던 사대부를 비롯한 승려, 중인들의 교류 속에서 당시 살았던 선조들의 삶의 풍경을 살핀다. 한시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시마와 같은 말이 등장했을까? 또한 옛것을 인용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문화에서 표절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자존심을 건 문인들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었는지, 날선 비평의 세계에서 한시가 어떻게 살아남아 전해지는지 등 조선 지식인 문화의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서슴없이 들춘다. 한편의 시가 갖는 힘은 실로 막강했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 그 신분제도를 무력화 시기도 했고, 권력의 길로 나아가는 과거시험의 당락을 결정지으며 술한잔에 밥까지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는 호구책이 되기도 했다. 이런 시에 대한 당시 지식인이었던 선비들의 열망을 짐작을 넘어선 자리를 차지한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한시를 두고 선비들이 느꼈던 희노애락을 살펴 한시의 존재가치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인다. 일상에서 멀어진 한시에 대한 애정으로 한시를 다시 읽고 그 한시에 담긴 사람의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책으로 반갑다. 한시의 창작 배경이나 한시를 누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시를 독자들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배경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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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도 대필이나 표절이 있었다. 조선 중기 의고문파의 문장가 최립(1539-1612)은 영의정 유영경(1550-1608)의 그림자 작가였다. 중국 사신들이 왔을 때 주고받은 시문을 모아놓은 『황화집』에 수록된 유영경의 작품은 모두 당시 동지중추사로 있던 최립이 대신 지어준 것이다. 당시 윗사람의 지시에 따라 대신 문장을 짓는 '대작'의 관행이 존재했다. 옛선비들은 대작을 그리 커다란 문제로 보진 않고 업무상의 관행으로 간주한 것 같다. 그러나 노골적인 표절은 오늘날처럼 식자의 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특히 중화주의에 물든 조선의 문인들은 시문에 있어서 언제나 표절과 창작의 경계선을 위태롭게 오가곤 했다. 물론 예술적인 모방은 표절이 아니라 용사론(用事論)의 미명으로 정당화되기도 했다. 당송의 유명한 문장가의 글을 전범으로 익히다 보니 자연히 그들의 글을 모방하게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표절의 경계를 넘나들곤 했는데, 조선의 문인들도 이런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점화(點化)나 점철성금법, 환골탈태법 등을 표절과는 다른 차원의 문학적 장치로 언급한다. 서거정의 점화는 이미 존재하는 작품의 생각과 표현을 교묘하게 빌려 쓰는 것이다. 점철성금법은 옛사람의 별것 아닌 평범한 표현을 자기 시에 활용함으로써 본인의 시에서 빛나는 표현과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환골탈태법은 송대 문인 황정견(1045-1105)의 용어인데, 옛사람의 뜻을 바꾸지 않고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는 것을 '환골'이라 하고, 옛사람의 뜻을 본받아서 그려내는 것을 '탈태'라 한다. 고인의 작의보다 훌륭하게 만드는 것을 점화(點化) 혹은 장점(粧點)이라 한다. 창조적 변용에 해당하는 점화나 장점은 오늘날의 표절이나 모방과는 무관하다. 점화의 용례로 서거정은 고려 후기 문신 왕백의 작품과 소동파의 <길상사에서 모란을 감상하다>를 비교한다. 간밤 시골집에 비가 부슬거리더니 대숲 저편 복숭아꽃 홀연 붉게 피었다 취중에 양쪽 귀밑머리 희어지는 걸 모르고 무성한 꽃가지 꺾어 머리에 꽂고 봄바람에 서 있다.(왕백) 늙은이는 머리에 꽃 꽂아도 부끄러워 않지만 꽃은 늙은이 머링 위에서 응당 부끄러우리. 술 취해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 응당 웃으리니 십리길 주렴은 반쯤 걸어두었다.(소동파) 그러나 서거정이 내린 도습(蹈襲), 즉 명백한 표절의 예는 다음과 같다. 재수없게도(?) 고려 문신 홍자번이 딱 걸렸다. 홍자번은 매우 노골적으로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싯구를 훔쳤다. 서거정은 이런 졸렬한 도습 작품을 최악의 시로 보았다. 愧將林下轉經手 遮却斜陽向帝京 부끄러워라 숲속에서 경전 넘기던 손으로 비끼는 석양 받으며 제경으로 향한다. (고려 문신 홍자번)
惆悵江湖釣竿手 却遮西日向長安
한글로 번역된 시만 비교해 본다면 표절인지 아닌지 뚜렷하진 않다. 오늘날의 글쟁이들은 한자가 아니라 한글을 사용하는 것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글은 창조적 변용에 해당하는 '용사'가 한자보다 더욱 유리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위논문과 저서에 그대로 '졸렬한 가위질과 풀질'을 해대는 한심한 작자들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