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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게 절실하게, 백석 시 읽기
지난 달부터 평산책방 시모임에 간다. 오늘이 두 번째다. 참석자들은 매달 셋째 주 목요일에 시집 한 권 들고 모여든다. 박성우 시인과 함께 하는 모임이라서 전국 단위로 모인 듯하다. 부산, 양산뿐만 아니라 울산에서도 온다. 이번엔 백석이다. 백석 시를 모아놓은 책들은 참 많다. 그 중에서 박시인이 이 책을 권해 주었다. 백석 시 백 편을 어려운 평안도 방언의 뜻과 해설까지 함께 실어 놓았으니 아주 친절한 책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던 이견들까지 정리를 해 주어서 더 좋았다.
백석은 시인들의 시인이라고 하며 한국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첫모임에서 안도현의 시를 읽다가 다음엔 백석 시를 읽자고 했다. 박시인은 백석을 안도현 시인이 참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안도현 시가 백석 시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백석 생각
통영 바다는 두런두런 섬들을 모아 하숙을 치고 있었다
밥 주러 하루에 두 번도 가고 세 번도 가는 통통배
볼이 오목한 별, 눈 푹 꺼진 별들이 글썽이다 샛눈 뜨는 저녁
충렬사 돌층계에 주저앉아 여자 생각하던 평안도 출신이 있었다. - 안도현 간절하고 참 철없이」 중에서
모임은 백석의 박경련에 대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했다. 박시인은 한 여인에 대한 백석의 집착에 가까운 연정을 이야기했다. 통영의 ‘란’(박경련)을 친구 신현중과 찾아갔던 이야기, 그후 신현중과 ‘란’의 결혼, 자야 여사와의 이야기, 결혼과 아내들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통영
옛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 오리같이 말라서 굴 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줏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 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 냄새 나는 비가 내렸다 -1935. 12.
1935년 6월 경 친구 허준의 결혼식 모임이 장안여관에서 있었다. 그곳에서 백석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는 박경련과 만나게 된다. 이름을 ‘천희’라고 들었다지만 통영 사람들은 처녀를 ‘처니’라고 부른다고 하니 이를 잘못 들은 듯하다. 다음 해 1월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친구 신현중과 통영으로 여행을 간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경성으로 올라간 상태고 그녀의 사촌인 서병직만 만나고 온다. 그후 청혼을 하였지만 박경련의 부모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1937년 4월 신현중과 박경련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된다. 이후의 시들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애절함이 눈에 띈다.
바다
바다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여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 1937.10.
자신의 친구와 사랑하는 여인이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 쓴 시다. 바다만 보면 떠오르는 사람은 '란'일 것이다. 이후의 시에도 간간이 '란'을 생각하는 구절들이 등장한다. 그 중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것은’과 ‘흰 바람벽이 있어’ 두 편을 낭송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밖은 봄철날 따지기의 누긋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도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러 다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 1938. 4.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호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 글은 다 낡은 무명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다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의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굿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쟘’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1941. 4.
자신의 친구와 결혼한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상상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특히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는 친구 신현중에 대한 배신감도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임의 어떤 분이 “당시 ‘여성’이란 잡지에 이 시들을 실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박경련이란 존재를 알리는 것인데.. 시집 가버린 여인을 굳이 이렇게 거론하는 이유가 무얼까? 시인들의 사랑은 이런 건가?” 질문하셨다. 시인에게 ‘란’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대상이며 상실감의 대상이다. 경성의 모던보이로 잘나가던 백석에게 좌절을 안겨준 사람이다. 그래서 미련이 많이 남아 있었던 듯하다. 박시인은 또 '흰 바람벽이 있어'를 읽고 난 후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읽어 보자고 했다.
......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구,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 - 윤동주 「별 헤는 밤」 중에서
윤동주 시인 또한 백석의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시인은 요즘 같은 때라면 표절이겠지만 당시엔 이런 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백석은 시집 『사슴』을 자비로 100부만 출판한다. 그리고 지인들에게만 비싼 가격에 판매를 했다. 윤동주는 이 시집을 받지 못하고 필사를 했다. 그 만큼 백석을 좋아했고 그 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본다. 윤동주를 폄하하기보다는 백석의 시를 좋아하여 자연스럽게 비슷해진 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란 표현은 안도현의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안도현은 백석의 시에서 인용한 것임을 대놓고 알렸다고 한다. 그만큼 백석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백석의 연애 이야기보다는 시 자체에 끌린다. 특히 시인이 대상을 대하는 태도가 좋다. 대상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 시인은 자신의 주관을 개입하지 않는다. 대신 정경의 외관을 이미지로 전달한다. 독자는 그 이미지로 인해 시인이 숨겨놓은 정서를 함께 느끼곤 한다. 그래서 더욱 간절함이 느껴진다. 담백하게 전하지만 그 속에 간절함이 느껴진다. 모임에서 나는 두 편의 시를 낭송하자고 했다. 두 편 모두 시집 『사슴』(1936.1.20.)에 수록된 시이다.
적경寂境
신 살구를 잘도 먹더니 눈 오는 아침 나어린 아내는 첫아들을 낳았다
인가 멀은 산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짖는다
컴컴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아비의 시아버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음의 외딸은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쓸쓸한 길
거적장사 하나 산 뒷옆 비탈을 오른다 아- 따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쓸쓸한 길이다 산까마귀만 울며 날고 도적갠가 개 하나 어정어정 따라간다 이스라지천이 드나 머루전이 드나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 복이 서러웁다 뜨물같이 흐린 날 동풍이 설렌다
시집 『사슴』의 대부분 시들은 화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관조적이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있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대상을 이미지화한다. 이미지는 곧 정감을 극대화한다. 시들을 관통하는 기본 정조는 고독, 우수, 서글픔, 세계와의 불화라고 할 수 있다. 적막한 지역에서 손자를 낳은 며느리를 위해 미역국을 끓이는 시아버지의 마음, 거적대기 하나로 죽은이를 장사지내는 서글픈 장면에서 이스라치나 머루의 꽃이 펼쳐져 전을 차려주고 수리취와 땅버들이 소복 입은 것처럼 가는 길을 축복해주고 있는 장면들이 마음을 아리게 한다. 세상은 서글프고 쓸쓸한 일뿐이지만 그 속에서도 따뜻함을 전해주는 존재들이 있어 위안을 받게 된다. 여러 가지 정황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이미지로만 표현해 내는 시인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시들이다. 담백하지만 인생을 대하는 시인의 마음이 참 절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비록 ‘외롭고 쓸쓸’하지만 삶에 대한 ‘높은’ 지향점이 있기에 결코 생을 놓지 않는다.
“백석은 직장도 있었는데 왜 가난하다고 했을까요? 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닌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분이 또 질문을 하셨다. 그렇다. 신문 기자, 잡지 편집자, 영어 교사로 지냈으니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했다.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방향에서 멀이지면 가난해진다. 나는 그래서 백석이 유목민처럼 떠돌아 다니지 않았나 한다. 백석이 지향했던 삶이란 생의 아름다움과 순수함, 행복이지 않을까. 일본 유학, 경성에서 조선일보사 기자 생활, 함흥에서 영어 교사 생활, 만주로 이동, 또 신의주로 돌아와 고향 정주로 가기까지의 방랑은 무언가를 찾기 위한 것임을. 그것은 삶과 관련이 있음을. 간절하게 바라는 삶의 지향점. 삶의 ‘높은’ 지향점이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박시인은 시 '여승'과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두 시를 추천했다. 특히 「여승」이란 시를 처음 접했을 때의 놀라움을 전했다. 한 사람의 기구한 인생을 어떻게 이런 짧은 지면 안에 모두 담을 수 있는지 놀랐다고 한다.
여승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슬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이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가가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1948.10.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시는 이 책 마지막에 등장한다. 만주로 떠돌던 백석이 신의주로 돌아와 쓴 시이다. 아직 고향 정주까지 가진 못했다. 어쩐 일인지 고향으로 바로 가지 않고 잠시 남신의주에 머문다. 그곳에서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생각하며 쓴 시이다. 하지만 시인은 상실과 절망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며 극복 의지를 다진다. ‘쌀랑쌀랑’ 내리는 눈을 맞으면서도 자신의 의연한 모습을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박시인은 의성어 “쌀랑쌀랑” 이 탁월하다고 말한다. 이 말이 없었다면 눈오는 정경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도 가끔 의성어, 의태어를 사용한단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저자가 생각하는 백석의 삶의 지향점에 대한 구절을 소개해 본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에 대한 내용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아가도록 태어났고 그래서 넘치는 사랑과 슬픔으로 살아간다. 하늘이 가장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게 살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나는 하늘이 가장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존재다. 이 삼단논법의 결론은 시에 직접 제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화자는 그런 내적인 묵계 속에 자신의 발언을 하고 자신의 삶을 지탱해 가고 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의 처지를 열거하는 말 중 ‘높고’라는 말이 들어간 것에서도 확인되며 사랑과 슬픔을 동격화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외롭고 슬플 수밖에 없고 외롭고 슬프지만 ‘높은’ 자리에 놓이게 된다는 믿음을 그는 가지고 있다. 스스로 높다는 자존의 의식이 낙척의 가혹한 삶 속에서 그를 지켜 준 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를 위로하고 그에게 힘을 실어 주는 말이 바로 ‘외롭고 높고 쓸쓸한’ ‘넘치는 사랑과 슬픔의’ 존재라는 말이었다. p.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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