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신 (비향)
설 : 백월국의 신녀. 태양신은 그녀를 귀히 여기고 아꼈지만 태양신의 누이 달신은 그녀를 너무나 미워했다.
건휘 : 백월국의 황태자. 황제의 적통은 아니나 황제가 될 운을 타고 난 남자.
"날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게 도와주거라. 아랫것들이 날 찾아 온 궁을 뒤지고 있을 것이다." "......" 건휘가 말을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신을 빼놓고 서 있는 그녀의 눈앞을 손으로 휘휘 저으며 채근했다. "무엇하느냐?" "아, 어서 이리 오시옵소서. 저쪽으로 가시면 궁의 후원으로 갈 수 있는 쪽문이 있사옵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문이었다. 그녀가 어서 들어가라는 눈짓을 보였다. 그곳을 향해 들어가려던 건휘가 멈칫 그녀에게 다시 시선을 던져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망설이던 그녀가 결국 입을 열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설이라 하옵니다...... 태자 전하." 설. 하얀 눈처럼 아름답고 투명한 여인인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신의 여인인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시선을 마주했다. "건휘. 내 이름은 건휘다." "아옵니다." "고맙다. 언젠가 내 이번 일에 대한 보답을 하지." "......"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렸다. 건휘는 서둘러 열린 문 사이로 몸을 던졌다. 이윽고, 문이 닫혔고 문 안으로 사라지는 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능라로 얼굴을 가리었지만 그는 그녀의 어여쁜 모습을 보았다. 어쩐지 꽁꽁 감춘 설만의 비밀을 알아챈 것 같아 입가가 저절로 말려 올라갔다. 당혹감에 놀란 동그란 눈, 능라에 가려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붉은 매화 같은 입술, 그리고 눈보다 하얀 피부에 잠시 피어올랐던 홍조. 그 모든 것을 낱낱이 눈에 담아버렸다. 다시 한 번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건휘는 설이 도망치지 못하게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말 위에 앉혔다. 복아를 다치게까지 하면서 자신을 잡아두려는 그를 거부하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건휘는 그녀를 더욱더 힘주어 안았다. "내게서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거라.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되니까......" 설이 눈을 꼭 감아버렸다. 이리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했다.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는데...... 신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에도 못 간다." 그가 설을 자신의 품에 가두며 작게 으르렁댔다. 설이 감은 눈을 떴다. 단단한 그의 품에 꼼짝없이 안겨 말에 올라탄 제 모습을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절망스럽게 바뀌었다. 다시 눈을 감으며 현실을 부정해보려 했지만 제 허리를 감아 안은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인정해야 했다. "다시는 도망가지 말거라. 이것은 내 명이니라!" 피하려 하면 할수록 운명의 실타래는 점점 꼬여갔다.
"말하라!" 설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건휘가 그녀의 두 팔을 잡고 흔들었다. "말해!" 보여준다면. 그 마음을 접으시려나. 보여준다면. 멈추시려나. 설이 손을 들어 그의 이마로 가져갔다.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은 이마의 정 가운데를 살며시 찍어 눌렀고 건휘는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잔상에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앞에 이 가녀린 여인을 취하고, 그녀로 인해 폭군이 되어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제 앞날에 대한 장면은 쓴웃음만 터져나왔다. 그는 여전히 눈물이 가득 고인 설을 바라보았다. "너로 인해 죽을 운명이니 널 가까이하지 말라는 것이냐?" "잊지 마시옵소서. 저는, 저는 신녀이옵니다. 신녀를 취한 자는 결코 신의 노여움을 면치 못하옵니다." 건휘가 코웃음을 쳤다. "신? 신 따위가 무서웠다면, 죽음 따위가 무서웠다면! 애초에 널 내 마음에 품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폐하!" "널 품을 것이다. 나는 두려울 것이 없어. 나는 이 나라의 황제니까!" 그가 이마에 올려진 설의 손을 거칠게 잡아끌며 품 안으로 품었다. 설이 힘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더 이상 몸부림칠 기력도 남지 않았다. 그의 집요한 태도가, 자신의 미래를 알고도 접지 않는 그 오기에 지쳐갔다. 건휘가 제 품 안에서 소리 없이 울기만 하는 설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뿐이다, 설아." 어떤 것도 필요 없다. 설사 정말 이 자리에서 죽게 된다 하더라도 그는 오로지 설만을 원하고 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