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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실제로 감시하는 사람이 없어도 죄수들은 움츠러들었다. 누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 길이 없기에, 그들은 항시 감시하는 존재를 염두에 두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 놀라운 구조를 고안한 사람은 벤담이었으나 이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이는 푸코였다. 푸코는 1984년 세상을 떠났다. 스마트폰은커녕 개개인이 폰을 들고 다닌다는 개념조차도 성립하기 힘들었던 시대였다. 오늘날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앉은 사람들의 풍경을 푸코가 보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 본다. 복잡한 파놉티콘 형태의 구조물을 만들지 않아도 사람들은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정보를 불특정 다수에게 내어준다. 그 결과가 엄밀히 말해 감시라 할지라도, 자신이 그로 인해 어떤 문제점을 겪게 될지 훤히 앎에도. 감시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수십 년 동안 연구해 온 분야다. 1925년 태어난 그에게 시도때도 없이 변모하는 오늘날을 연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감시야말로 그가 살아온 시대로부터 현재까지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감시의 이면에는 ‘권력’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감시하느냐의 문제는 곧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감시할 힘을 지닌 존재와 감시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 이는 전형적인 국가 권력이 비대했던 오래된 과거에도 존재했으며, 자본의 힘을 등에 얻은 다국적기업 등이 판을 치는 현 시점에서도 유효하다. 지그문트 바우만과 함께 감시를 논한 인물은 데이비드 라이언이다. 그는 1970년대 말부터 다양한 분야에 걸친 토론을 바우만과 진행해왔다. 소재가 끊임없이 달라지는 가운데서도 한 가지 변치 않는 게 있었으니 바로 ‘감시’였다. 이제 감시는 형태를 달리해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저자들의 대담에서 접할 수 있었던 ‘유동하는 감시liquid survilliance’가 얼마나 끔찍한 것일지를 상상해 본다. 도처에 널려 있는 CCTV가 우리의 안전을 지켜줄 것인가. 국가 권력이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제 안위를 위해 이 괴물체(!)의 필요성을 옹호한다. 감시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에 거대한 안정감을 선사한다니, 그야 말로 아이러니다. 그나마 CCTV는 형체라도 파악이 가능하다. ‘감시’라는 목적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 일거수일투족이 지금도 읽히고 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무언가를 구입해본 사람이라면 다음 번 접속시 자신이 좋아할 만한 무언가를 추천하는 쇼핑몰의 친절을 경험할 수 있다. 신기하게도 제 마음에 꼭 드는 물건들을 눈앞에 제시해 놓았다. 알파고도 활동하는 세상이 뭔들 못하리. 그러나 이는 기기의 번뜩이는 창의력이나 추리력이 낳은 결과물이 결코 아니다. 내가 무언가를 구입하는 행위 역시도 나를 설명해주는 무언가다. 저들은 내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을 오랜 기간 감시한 끝에 나의 기호를 파악한 것이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며 위치와 취향을 읽히고, SNS를 사용하며 내 인간관계와 관심사를 들키고야 만다. 도대체 누가 날 감시하고 있는 건지 유심히 살피다 보면 제 발이 저려올 것이다. 도둑은 바로 우리 자신이니까. 익숙해진다는 건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학살이 지속될수록 나치에 몸담은 사람들이 무감각해졌듯 감시의 연속 속에서 사람들은 감시의 강도가 짙어진다는 것에 대해 하등의 문제의식도 드러내지 않을지 모른다. 감시가 일상이 되고, 내 간과 쓸개, 그 이상을 상대에게 내어준 뒤에도 더 내어줄 무언가가 혹 있지는 않을까 사방을 살피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이른바 빅브라더 영접이다. 내 자신이 빅브라더가 되어 남 아닌 나를 감시한다. 감시의 주체도 나요, 객체도 나인 상황이다 보니 감시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제기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해감서 우리는 관찰 당하고 싶어하던(?), 평소 우리가 품은 욕망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욕구, 무의식적으로 우리 안에 키워 온 바로 그 욕구가 우리 자신에 의해 채워진다. 이쯤 되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리는 게 당연하다. 두 인물이 대담을 한 시점은 2011년이다. 그로부터 다시금 5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나아지진 않았으리란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세련된 기제를 사용해 세상은 우리의 숨통을 옭아매고 있다. 그들의 기술은 실로 정교해서 우리를 질식시키지 아니하며, 심지어 우리에게 어떠한 갑갑함도 제공치 않는다. 감시를 당하는 것으로부터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기까지 하는 현대인을 어리석다 말할 순 없다. 알고 보면 우리 자신도 끊임없이 감시 당하고 있으며, 감시 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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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은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세계적인 학자들과 대담형식으로 나눈 이야기들을 책으로 내는 경우가 많다(물론 그 혼자 저술한 책들도 많다). 이 책도 그 책 중 하나인데, 지그문트 바우만의 독특한 개념들인 '유동하는 현대성', '권력과 정치의 이별' 등을 이전의 그의 책들에서 반복해서 읽어왔기 때문에 그의 사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었기 때문인지 이 책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읽혔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책이 다른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과는 다르게 번역이 상당히 매끄러웠던 것 같다. 어떤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은 번역투의 문체가 너무나도 심하여 가독성이 떨어져서 읽는데 한참을 낑낑거렸었는데, 이 책은 그에 비해 번역이 상당히 읽기 좋게 되어있었던 것 같다.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양날의 칼과 같은 감시의 문제. 어떤 이는 반기고 어떤 이는 우려를 표하지만, 확실한건 이 문제를 무자르듯이 쉽게 해결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인권 침해냐 범죄 예방이냐를 놓고 봤을때, '감시'라는 측면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 또한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고, 문제는 '자발적 복종'의 개념처럼 어떤 사람들은 기꺼이 스스로 자신의 정보를 제공하는것을 정말로 '즐기기' 때문이다(SNS) 개인적으로는 정보유출이나 감시당한다고 여겨지는 것을 불쾌하게 느끼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시놉티콘'(개념의 뜻은 책에 나온다)화(化) 되는 것을 반갑게 여기지는 않지만, 내가 또 다른 입장이나 환경에 놓여지게 된다면 나도 다른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는 단순히 장, 단점의 문제로만 살펴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철학적 가치들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려움은 공포를 낳고, 공포는 불안을 낳고, 불안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공포를 낳고.. 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될 뿐이다. 타자에 대한 공포는 인류가 존재했던 이래로 계속되어왔던 문제지만, 이렇게 나 아닌 모든 사람을 나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적은 있었던가 싶다. 감시가 만연하게 된 인류사적으로 고찰해본 철학적 이유는 1. 인간은 긍정적인 점보다 부정적인 점에 대한 충격을 더욱 크게 받는다 2. 인간은 두려움에 압도되기 쉽고 한 번 두려움에 휩싸이면 그것을 극복하기 쉽지 않다. 더군다나 집단 전체가 두려움에 휩싸였을때는 그런 상태를 '지속하는'것이 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장려되기도 한다 3. 인간은 좀 더 용기가 필요하다 4. 불안은 감염되는 측면이 있다. 우리가 부디 용기를 가지고 우리 사이에 놓인 장벽을 허물어버릴 수 있기를. 인간성의 진정한 회복이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