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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세계화 및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이 교류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에 학교 교과서의 첫 페이지에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라던지, 또는 본문에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이다"와 같은 문구가 삭제된 지도 꽤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어느새 우리 사회의 일부에 '자리잡고' 있고, 그들과 앞으로 더 '평화롭게' '공존'하는 미래를 지향하자는 '교과서적인' 이야기가 교과서에 담겨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찜찜한 구석이 없잖아 있다. 다문화, 인권, 포용 등의 수사는 현재형이라기보다는 미래형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그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교과서나 대중 매체에서 언급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동남아', '아프리카' 등의 지명과 비하적인 수식어가 결합된 채 묘한 공존을 하기도 한다. 특히 2018년 예멘 난민들이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글로벌 시민으로서 난민을 포용해야 한다는 낭만적 박애주의는 물론, 예멘 난민들과 이슬람 문화에 대한 혐오 감정도 동시에 폭발했다. 이쯤에서 궁금한 것은, "외국인 이주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정말로 왜 왔으며, 어떻게 지내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이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그들이 혹시나 우리에게 불편한 소리를 하지 않을까, 그들의 진정한 목소리에 관심을 굳이 가지지 않았다. 이미 이주한 지가 오래인 그들은 우리 사회에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다고 느끼는지, 또한 우리와 그들이 지금처럼 지내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 대해서 문제의식만 있었을 뿐, 이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글이 제한적이어서 아쉬움이 있었다. 추상적 수준에서 인권, 포용, 세계시민성 등을 운운하는 것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우리나라의 이주민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인류학자이고 우리나라에 온 이주자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연구를 꾸준히 수행해 왔다. 여러 이주자의 다양한 삶과 목소리를 들으려는 시도가 적기에, 이러한 저자의 연구를 담은 이 책이 반가웠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세계화, 이주민 증가와 관련한 우리나라의 상황과 원인을 새로운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왜 저자가 이주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지극히 폐쇄적이었던 한국 사회는 1990년대 '세계화 시대'를 선언한 김영삼 정부 이래, 2005년 노무현 정부의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의 이행' 선언까지 전 세계의 개방적인 흐름에 적극 동참했다. 한국 사회는 이주자의 존재로 사회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 견고한 국민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고 이주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우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촉발되었다. 기존에 당연하다고 여겨온 '한국인'이라는 개념 또한 새롭게 정의되고 있다. 문화적 다양성이 사회의 활력소이고 역동적인 경제를 만들어낸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런 현실은 지금껏 한국 역사에서 깊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이다. 이 때문에 이주자의 존재는 여전히 생소하고, 물샐 틈 없는 방어벽을 뚫고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외국인 범죄 증가와 이주자 집중 거주지의 우범지대화에 관한 뉴스는 한국인의 적극적인 방어 본능을 자극한다. 선주민과 이주민은 문화 접경지대에 살고 있다. 레나토 로살도는 문화 접경지대는 견고한 경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온 사람들에게 '접경지대 히스테리'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p.33). 이를 위해 이주자 경관과 이주자 정동(migrant affect)을 다룰 것이다. (...) 이주자 정동이란 한국에 온 이주자가 일터, 가정, 지역사회 등에서 정보와 감정을 어떻게 체험하고 이해하는지, 이주자가 선주민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느끼며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통한 이주자의 정서 구성과 행동능력 변화를 뜻한다. 한국 사회는 지속적인 경제 발전과 사회재생산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이주자를 필요로 하지만, 이들에게 공정한 사회적 장소를 제공하지 않은 채 손쉬운 방식으로 불러들여 대우하고 있다. '주변자의 영역'에 이주자를 격리하고 모른 척하면서 이들을 유용한 자원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믿었지만, 이주자 역시 행동하고 해석하는 행위자로서 한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p.35) 2부에서는 저자가 수행한 구체적인 사례 연구이다. 베트남에서 온 여성 결혼이주자의 삶과 여러 실천,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의 성공과 실패, '우리 동포'와 '범죄자'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는 조선족 이주자, 고용허가제로 온 이주노동자의 실상과 한계, 난민 이주자의 불안정한 현실적 지위에 대한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저자는 '고용허가제', '재외동포법', '난민 의정서' 등의 제도적인 용어는 물론, '역이주', '미등록 이주노동자', '현장 난민', '문화 표식'과 같은 익숙하지 않은 표현을 제시하면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한국의 여러 이주자 관련 사회경제적 지위, 제도, 우리들의 인식 등이 상호작용하면서 다양한 이주자의 경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주자도 그저 하나의 범주화로서 '이주자'로 규정하고 바라보는 것도 어렵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에 소개된 이들 외에도 수많은 이주자들의 모습을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이주는 국제결혼 가족이 급변하는 경제 상황과 이에 따른 어려움과 새로운 가능성을 감지해가는 과정에서 한국과 베트남 모두를 참조체계로 삼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노동시장에서 곧 퇴출될 연령대에 도달했지만 여전히 어린 자녀가 있는 한국인 남편은 한국에서의 사교육비를 감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베트남에서 아이들을 '국제적인 리더'로 키우는 것이 더 쉽고 값싼 방법일 수 있다. (...) 역이주는 베트남 가족의 협조와 배려하에서만 현실화될 수 있고, 이것은 한국 남성이 평소 '사위 노릇'을 잘했는지에 따라 좌우된다(p.60-61). '국경 장벽 대 사면'이라는 틀은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즉 '왜 전 세계적으로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증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차단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언제든지 추방할 수 있고, 동시에 열악한 노동 조건과 저임금을 주면서도 복지나 사회 통합을 위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가장 '효율적인' 노동력이다. (...) 우리는 소비자로서 이들의 싼 임금에 의지해 만들어진 상품을 구매하고 쉽게 버린다. 우리 삶의 전 영역은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노고와 비인간적 대우에 의존하며 영위되고 있다. 따라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추방할 것인가, 사면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판단자로서 우리를 위치시키기보다는, 왜 이들이 우리 곁에 남아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p.92-93). 2006년 영국 런던에서 인터뷰한 조선족은, 영국에서의 조선족의 문화 표식 그 자체로 차별을 받거나 배제를 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런던 자체가 전 세계의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는 도시라 영어도 제각각이고, 일의 종류와 내용에 대한 차별이나 '더러운 일'에 대한 차별이 없어 편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영국에 거주하는 '남한 사람에게 차별받는 것 외엔' 일상적 차별을 겪지 않는다고 말한다. (...) 나는 영국과 한국의 조선족 이주노동자를 연구하면서, 두 나라에 체류한 조선족이 이주한 나라에 대해 갖는 '감정적 귀속성'이 얼마나 다른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p.117-118) 탄민우 씨는 오랜 기간 미등록/미서류 이주 노동자로 일하다가 난민 신청을 한 경우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박해를 피해서 온 난민과 경제 이주자 간의 모호한 경계에 놓여 있었다. 한국의 난민 신청자 중 많은 수가 탄민우 씨처럼 다시 고국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을 맞아 난민 신청을 한다. 이런 난민을 '현장 난민(현지 체재 중 난민이 된 자)'이라 부른다. 탄민우 씨는 본국을 떠날 때부터 난민 사유를 갖고 있었지만, 오랜 기간 한국에서 '불법' 노동자로 일했고, 대표할 만한 정치적 경력도 없을뿐더러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도 아니다. 정치 난민에게 부여된 숭고한 '진정성'을 증명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탄민우 씨의 난민 신청은 곧 거부되었고, 이후 5년이란 시간 동안 난민 인정 절차를 밟아야 했다. 한국 정부은 탄민우 씨와 같은 난민 신청자는 대부분 불법 체류를 합법적 상태로 만들기 위해 거짓으로 난민 사유를 꾸며낸 것이라고 단정한다(p.155-156). ![]() * 이주민의 문화적 적응을 위해 한국어와 태국어를 함께 표기한 사업장도 있다고 해서 좋았다. 이전의 통상적인 동화주의 다문화 정책 하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2부에서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이주자 말고도, 어린이나 여성에 대한 이슈 등도 다루는 점이 좋았다. 이주민들도 우리와 같이 성별이 있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기 때문에, 다양한 연령과 젠더에 따라 경험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주 어린이와 여성의 위치성과 관련한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저자의 노력이 책에서 느껴졌다. 특히 이주를 했거나 한국에서 태어난 어린이, 청소년의 교육과 사회화에 대한 이야기는 학교에 근무하는 나로서는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인 남편이 아내를 신뢰하기 시작하는 것은 주로 자녀를 출산한 이후부터이고, 이후 남편은 아내에게 경제권을 넘기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 와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첫 아이를 낳았을 때'라고 말하는 여성이 많다. 아이에 대한 본원적인 사랑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아이의 출생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내 가족'을 구성한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친족 등 사회적 연결망이 없고 '외국인'으로 한국인과 늘 분류되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볼 때 아이의 탄생은 자신과 연결된 유일한 가족이 생긴 일이다. 남편과의 친밀성을 경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많은 이주 여성은 외롭고 불안한 생활을 상쇄해줄 유일한 대안을 '아이'로 여기게 된다(p.53-54). 고용허가제 등을 통해 한국에 이주하기까지 들어가는 비용은 이주자가 자국에서 벌어들이는 평균 월급을 2~3년간 합한 액수에 맞먹는다. 따라서 여성에게 개방된 합법적인 이주노동 통로가 매우 제한된 상황에서 자본이 없는 여성은 상대적으로 이주 비용이 적게 드는 분야, 즉 가사노동, '결혼', 유흥업 분야로 이주하는 경향이 크다. 고용허가제 같은 합법적 이주노동 통로가 남성에게 독점되기 때문에 여성은 노동권이 잘 보장되지 않는 가사 등 재생산 노동이나 남성이 기피하는 농업 노동 분야로 몰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이 집중되는 분야는 4인 이하 사업장이 많아 상시 5인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업장에만 적용되는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놓인다. (...) 무엇보다 여성 이주자가 집중된 영역, 즉 방문 취업이나 교포 비자로 일하는 조선족 여성의 취업 분야인 가사, 육아, 간병 같은 돌봄 노동이나 고용허가제로 오는 외국인 여성이 많이 몰려 있는 농업 분야는 대부분 일터와 주거가 분리되지 않아 고용주의 사적 통치가 전면적으로 집행된다(p.138-139). 이주 아동은 한국 아이들이 하는 행동과 말투, 음식 취향을 모방하면서 주류집단의 구성원다움을 연행한다. 때로는 얼굴색, 젠더, 계층적 지위 등의 '차이'를 모험심, 색다름, 유머 등으로 재포장하면서 과감한 자아를 구성하기도 한다. 주류집단에서 쉽게 '눈에 띄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주 아동이 소속감을 획득하기 위해 벌이는 노력은 성인 이주자의 그것보다 더 즉각적이고 절실하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에서 요청되는 '귀여움'과 '대담함'의 다중적 정체성 사이에서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경험하는 라딥처럼 이주 아동은 '사랑'과 '낙인'이라는 극단적 인정/불인정의 세계를 항해한다(p.172). ![]() 3부에서는 다른 국가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대안을 모색한다. 저자는 이주자에 대해 관용과 인도주의적인 대우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근거를 낭만적인 시혜주의로서 "글로벌 시민으로서, 불쌍한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와 같은 주장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유럽과 북미에서도 이주자, 난민을 얼마나, 어떻게,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사회적 논쟁이 치열하다는 점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선진국'에서도 그저 낭만주의적인 태도만 가지고는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대신에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주자의 문제가 그저 '그들'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우리와 그들이 평등한 위치에서 적극적으로 문제에 임하고, 협상하고, 해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그들과 우리가 함께 연대하면서 더 큰 권력과 자본에 맞서고, 이를 통해 민주적 사회를 함께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유럽의 요새화 전략은 유럽을 구성해온 다양한 배경의 시민들이 피흘려 이룩한 민주주의와 인권, 시민권의 개념을 약화시키고, 그 자리에 인종 혐오, 유럽 내부의 위계화, 정치의 퇴행 현상을 가져왔다. 이런 변화의 피해자는 이주자뿐 아니라 유럽의 시민이다.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성취했다는 유럽인의 자부심은 반이주 정책에 의한 노동권의 전면적 약화와 적대 정치로 인한 사회적 갈등으로 크게 손상을 입고 있다. 요새화 전략으로 이익을 얻는 이들은 누구인가?(p.219-220) 선주민 국민은 이주자에 대해 무조건 관대하거나 그들을 옹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이주민과 좀 더 호의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유입국가의 민주주의적 성숙도에 따라, 그리고 시민사회의 역량에 따라 선주민과 이주민 간의 관계는 좀 더 '공정'해질 수 있다. 즉 유입국 시민이 민주주의적 열망을 얼마나 가졌는지, 유입국의 시민사회가 정의와 평등에 대한 정치적 감각을 얼마나 가졌는지, 국민이 누리는 기본적인 권리와 복지 혜택을 이주자와 나눌 용의가 있는지에 따라 상황은 매우 달라진다(p.231). 저자의 연구는 그동안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불법체류자', '다문화 사회', '글로벌 시민' 등의 개념을 다시한번 재검토하도록 한다. 교과서에서, 그리고 언론 매체에서 당연하게 접해오면서도 문제가 무엇인지, 왜 이것이 문제삼아야 되는 것인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과서에서 단일민족 신화의 단어만 삭제했을 뿐, 실질적인 다문화 사회로의 길은 쉽지 않다. 무턱대고 다문화 사회로 달려가는 것이 정답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면 결코 안될 길도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보다 선진적일 것만 같은 서구 사회에서도 난민과 이주자 혐오, 극우 포퓰리즘의 세력화 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사회도 글로벌 세계의 최전선에 있기에 남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직시하여야 하겠다. 그리고 낭만적이고 시혜주의적인 태도를 넘어서, 이주자의 목소리와 삶에 더욱 귀를 기울이면서 그들을 진정하게 '주체'로서 인정하는 태도를 갖추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즉 그들과 우리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시도를 해체하자는 접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책의 사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더 많고 다양한 사회적, 지리적 차원의 이주자들에 주목하는 연구가 이어져야 하겠다. 많은 사람들과 학생들이 글로벌 차원에서의 이주 이슈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얘기임을 느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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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이주민들 관련 일을 시작하면서도 정작 이 주제에 관한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일하면서 항상 부족함을 느끼지만, 일에 바빠서 공부할 시간은 못 낸 것이다. 간혹 시간이 날 때에도 업무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고만 싶었다.
관련 책은 아마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서 읽은 "내 이름은 욤비: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이 유일한 것 같다. 센터에서 일 하다가 난민 신청한 아프리카 사람을 만난 후 나의 반응은, "와우, 우리나라에 난민이 있어?"였다. 유럽 같은 나라들에나 있을 듯한 난민을 바로 눈 앞에서 만난 뒤 친구의 추천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난민조약을 받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나, 정작 난민 신분을 인정받은 자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난민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생활의 보장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다시 시간이 흐른 뒤, 오늘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프로젝트 기안을 쓸 일이 있는데, 난민 쪽으로 할까 고민을 하다가 너무 아는 것이 없어서 도서관에 가서 책을 몇 권 빌려왔다. 그 중의 하나가 연세대 김현미 교수님의 이 책. 탁월한 선택이었다. 내가 센터에서 일하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부류의 이주민들, 이주노동자(특히 미등록), 결혼이주여성, 조선족(중국동포), 난민, 이주아동 등의 여러 케이스들을 실제 인터뷰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한국 이주 역사와 국가의 정책 등과 함께 설명을 해 주셔서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해하는데에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국가의 정책은 정책대로 변화하여야 할 터이고, 우리나라 국민들의 의식 또한 변화를 해야할 것이다. 교수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 함께 살고 있는 이주민들을 우리 사회에 통합시켜야 할 대상으로, 그래서 우리 문화와 언어를 얼른 배워서 한국 사람으로 동화되어야 할 사람으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해주고, 어떻게 하면 상호적으로 좋은 관계 가운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동등하게 살 것이가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들을 주변인이나 단지 도움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만 보는 것도 잘못된 태도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일하러 온 사람들을 우리 경제에 위협적인 존재로 본다든지, 단순히 우리 사회의 문제를 단기간 동안 해결해 줄 도구적인 존재로 보아선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을 해 주는 고마운 존재,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도록 받쳐주고 있는 존재, 더 나아가서는 그들로 인하여서 우리의 편협한 세계관이 넓어지고,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본다면 좋을 것 같다. 교수님 말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모두 집을 떠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나도 한국을 떠나 왜국에서 4년 정도 살아본 적이 있다. 외국에서의 경험은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자산이다. 그리고 그 때 만난 사람들 대부분 나에게 정말 잘 해 주셨다. 그러한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이 일을 하도록 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이 책 덕분에 다시 한번 초심을 다지게 되었고, 내가 만나는 이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더 존중하는 자세로 대하기로 결심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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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민족 신화에 기대어 오랜 세월을 버티었다. 고난이 닥칠 때마다 이는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기제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그러나 사회는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미 자본 분야에서는 국경이 사라진 지 오래다. 보다 질 좋은 일자리를 찾아 노동 역시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없는 국가는 없지 싶을 정도로 해외 대다수의 나라에서 한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해당 지역으로 이주했다. 학위를 취득하고 숙련된 노동력을 제공하는 등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백인 우월주의로 인한 차별에 분노를 표한다. 그러나 우리 안의 폭력에 대해서만큼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사실 외국인을 만날 기회는 그 동안 흔치 않았다. 우리와 그저 다른 외모를 지녔으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데 그쳤다. 직접적인 부닥침이 없었기에 더 이상의 관심도 필요 없었다. 근데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세계 경기가 불황에 빠지면서 한국 역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도처에 버젓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는 이들이 널렸다. 화살은 자연스레 우리나라 노동시장에 진출해 있는 외국인들로 향했다. 한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 적이라며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실상 한국인들은 가려 들지 않는 일자리여서 외국인 노동력이 아니면 공장은 돌아갈 수 없음에도 그리 굴었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나온 비겁한 행위였다. 여러 모로 우리 사회는 성숙하지 못했다. 이주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른스럽지 못한 우리 자신의 단면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이주의 원인은 다양하다. 본국에서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해외 이주를 감행한다. 한국에 오면 본국에 머물 때보다 배 이상의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한 사람의 이주가 한 가족의 미래를 바꾸는 셈이다. 오늘날 가장 흔한 이주의 형태로는 결혼이주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조금 나아졌으나 한 때 베트남 여성이 순종적이며 집안일을 잘 한다는 식의 광고 문구를 길거리에서 쉬이 볼 수 있기도 했다. 여성을 향한 가부장적이고 왜곡된 시선을 더 이상 한국 여성에게 드리울 수 없다보니 그 방향이 엉뚱하게도 동남아시아 여성들에게 향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아직까지는 마음에 와닿지 않는 형태의 이주도 있다. 난민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웃 일본의 경우만 보아도 앞으로 증가할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 국가는 생각 이상으로 많다. 그들은 한국을 자비로운 기독교 국가 즈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 모두에게 현실은 그리 녹록지가 않다. 우리의 정책은 폐쇄적이고도 소극적인 형태를 취해왔다. 산업연수생은 더더욱 그렇고 고용허가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제한된 기간 동안만 한국에 머무는 것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이주 노동자들의 가족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배제하는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또한 임신이나 출산의 가능성이 있는 여성 노동자에 대해서는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경우도 잦다. 한국 남자와 결혼한 외국인 여성들의 모습 역시 마냥 행복하지는 못하다.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국가 출신이라는 사실이 가정 내에서의 위계 관계로 이어진다. 게다가 남편은 자신보다 심하게는 20살 이상 연상인데다 아내의 문화나 언어 등을 배우려는 열의 또한 적다. 결혼 이주 여성은 결혼을 했음에도 고립을 경험한다. 자녀를 출산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게 그나마 그들에게는 희망이다. 난민은 더더욱 심각하다. 위급한 상황에서 몸만 겨우 빠져나온 이들에게 난민으로서의 지위 인정을 위한 서류를 요구한다. 당연히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난민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기 전까지는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조차도 금지다. 난민으로 인정 받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 본국에서의 정치적 박해보다도 더욱 혹독하다는 주장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불안정한 이주자의 지위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낳은 아이가, 그들의 본국 가족이 고스란히 그 문제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일을 하고 임금을 받는다는 점에서 우린 그들과 동등하다. 그들의 열악한 지위는 우리의 노동환경 악화로도 이어질 수 있다. 보다 열악한 지위에서도 노동을 받아들이겠다는 이들이 널렸다며 우리를 압박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주 노동자의 존재는 활용될 수 있다. 한때 우리 역시 이주 노동자였다. 현재도 많은 이들이 해외로 나아가길 꿈꾼다. 국가라는 협소한 개념에 집착하느라 보다 중요한 사람을 놓친다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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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어설프게 깨려고하면 꼭 문제가 생긴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상대방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에는 이런 예가 나온다. 모 기업이 후원한 공익광고 '당신처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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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엄마를 두었지만 당신처럼 이 아이는 한국인입니다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고 세종대왕을 존경하고 독도를 우리 땅이라 생각합니다. 축구를 보면서 대한민국을 외칩니다. 20살이 넘으면 군대를 갈 것이고 세금을 내고 투표를 할 것입니다. 당신처럼.
언뜻 보면 베트남 엄마를 둔 아이들도 차별 받지 않고 한국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훈내 물씬 광고다. 인종과 국적을 뛰어 넘는 공존 마케팅이라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인 아빠를 두기도 했지만 똑같이 베트남 엄마를 두기도 한 아이가 한국인의 모습(심지어 한국인도 다 충족하지 못하는)으로만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광고는 인종과 국적을 뛰어 넘은 것이 아닌 오히려 한국 사회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하는 의심이 든다. 실제로 많은 이주민들이 한국인과의 관계에서 약자로 위치하면서 한국 사회에 적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해 급하게 김치에 적응하고 한국말을 배워간다고 한다.
![]() * 함께 생각해볼 프로그램: 꼬꼬댁 교실 베트남 엄마를 둔 아이들이 엄마의 나라를 찾았다!
똑같은 상황에 처해보지 않으면 남 일은 모르는 법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저자 김현미 씨의 목소리는 유독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무엇이든 쉽게 판단 내리지 않는듯했고, 인터뷰를 통해 얻은 이주민의 목소리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하려는 듯했다.
그렇다면 왜 이주민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할까? 책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한국 거주자 36명 중 한 명이 외국인 주민이라고 한다. 저마다의 목적으로 점점 더 많은 이주민이 한국 사회에 늘어나고 있는데, 우리가 이들과 함께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갈등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내 삶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누구나 이주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와 '이주민'의 정의를 살펴보자면 이렇다. '12개월 이상 특정 국가에 체류하는 사람'. 1년 이상 타국에서 지내는 사람은 내 주변에도 있고, 나 역시도 미국에서 1년 가까이 산 일이 있다. 책 제목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처럼 해외 이주가 많아진 요즘 이주민을 이해하는 일은 '우리'의 문제이다. 아직 이주민을 이해할 여유가 없다면, 적어도 속단하거나 무시하지는 말자. 꼭 이주민이 아닌 사실은, 불특정 A가 B에게 가져야 할 조심스러운 자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