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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베총리조상의 고향
아베총리는 도쿄 (관동지방)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은 야마구치다. 그이 지역구가 야마구치일
뿐만 아니라 윗대 조상과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고향도 대마도 바로 밑에
있는 야마구치현이다.
10선의원으로서 '정의 황태자'였다.
야마구치현(옛 이름은 조슈번)은 일본 정치사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도 짓궃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19세기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자들과 한일병탄 후 조선을 통치하였던 주요
인사들이 바로 이곳 출신으로 이토 히로부미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의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도 야마구치의 풍수에 주목한다.
--- 보통 '조슈 타입'이란 말이 있는 데, 이 말은 머머리가 좋고, 분석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또한 행정 능력이 뛰어나고, 정치적이며, 권력행사 특히 인사에 능숙한 사람을
지칭할 때 쓴다. 메이지 이후 대표적 인물로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고, 2차대전 이후에는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두 총리가 있다. ...... 이곳에서 배출된 인물들을 볼 때
그 땅의 유전자라든가 혹은 특별한 바일이러스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되기도 할
정도다. --- [명치라는 국가]
조선 병탄의 주도적 인물 이토 히로부미,가쓰라 다로 ,명성황후 시해 당시 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 조선 총감을 지낸 야마가타 이사부로, 그리고 이들의 스승으로서 일찍이
정한론을 주창했던 요시다 쇼인도 이곳 출신이다.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 것이 아니라 야마구치가 조선을 병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아베 총리는 동아시아 침략의 책임을 외면하고, '일본의 주권회복'을 내세우며,
"천황 만세"를 외치고 있다. 야마구치가 그의 정치적 고향이란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이러한 야마구치 풍수는 역사적으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우주를 구성하는 4대 요소 지,수,화,풍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땅"이라는
일본인의 대지관과도 연결된다.
2012년 12월 아베 총리가 총선에서 승리하자 곧바로 선영을 찾아가 '정권 탈환을 보고'한
에서도, 그리고 조상이 사살던 집이 지금도 그곳에 온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그의
고향은 야마구치다.
우리는 시는 구로 나누고 도는 군으로 나눈다.
일본은 막부(도쿠가와 군사정권)시절 무신정권을 수호한다는 울타리란 뜻의 번으로
행정구역을 나눈다.
200여년의 군부독재이후 1868년 메이지천황을 옹립하는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고 곧이어
조선의 갑오개혁에 해당하는 폐번치현이 단행된다.
폐번치현은 무사의 칼착용금지,전국민에게 성씨를 나누어줄 것, 번을 현으로 바꿀것
군사정권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뒷방에만 앉아있던 메이지천황에게 이양한다는게 골자다.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주도적 번은 조슈(야마구치현)번,사쓰마번,도사번이다.
야스쿠니도 사실은 이때 죽은 사람들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만든 현충사 개념인데 여기에
태평양전쟁 전범들을 합사한데서 문제가 야기되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야스쿠니(초혼사)는 좋은 뜻으로 세운곳인데 후세들이 나쁘게 이용했다고
보면된다.
그럼 행정구역인 번은 모두 사라진걸까 우리주위를 보자.
번짓수 잘못찾으셨어요,번호,순번,주번,당번 모두 무신정권시절의 흔적이다.
후쿠오카공항에서 자동차로 3시간을 달려야 아베 총리의 고향인 야마구치현 나가토시
유야라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유야는 분지인데 서쪽으로는 바다가 이어지고 나머지 삼면은 병풍처럼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아베가묘소'라는 푯말이 길이 꺾이는 곳마다 박혀있어 선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야마구치에서 야마란 일본에선 대체로 산을 의미하지만 고대엔 야마토(경북고령)란 대가야를
뜻한 지명이었다.
85년 한국혈액원에선 전남지역에서 CIS-AB형을 찾아냈다.
보통AB형과 O형이 만나면 AB형이나 O형이 태어날 수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 서남부지방과
일본 큐슈(야마구치현)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서남부인 전북군산에서 옥포까지 일직선으로 활모양으로 연결하면 진도,목표쪽의
모든 지역과 일본 야마구치현은 바로 삼국시대 백제문화권과도 일치한다.
고사기,일본서기의 제작시기도 백제가 멸망한 후 본토의 백제지식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온 직후 쓰여졌다는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최근 학회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광주 전남지역 헌혈잘자를를 대상으로 혈액형을 분석한
결과 1만명당 3.5명꼴로 CIS-AB형이 나타나고 있다고한다.
다시 말해 아베총리조상의 고향은 큐슈의 야마구치가 아니라 전남의 목포,진도지역이라고
보아야 정답인 것이다.
제목 : 영화 해적을 보고
우리는 월드컵과 양대올림픽에서 뜨거운 환희와 함께 우리의 저력을 확인했다.
운동뿐 아니라 경제, 학문, 하다못해 세계요리대회 마술대회등 소소한 것까지
우리는 세계를 상대로 우리의 저력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했다.
ODA 받던 나라에서 베푸는 나라가 지구상에 유일하다는게 괜한 소리는 아닌듯 싶다.
이렇게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우리가 근세에 왜 그런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 역사를 가지게 된걸까
나부터도 우리역사가 부끄러웠고 그걸 극복하는데 이십년 가까이 걸렸다 생각하지만
우리민족 대다수 특히 역동성 있는 88세대 조차도 마음한구석엔 근세 우리역사에 대한 부끄러운
얼룩들이 지워지지 못한채 남아있을 것이다. 이걸해소하는게 나는 우리역사의 당면과제중
가장 시급한거라 생각한다.
역사의 과오로부터 배우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반복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했던가
흔히 우리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 나라가 이꼴이 났다고 말을하며 배워왔다 과연그럴까
만일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을 나라의 방향으로 잡던 그날 반대로 나라의 문호를 활짝열고
외부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유연성을 발휘했다면 그런 근세의 비참한 역사를 피할 수 있었을까
하나더해 그시절 왕이 고종이 아닌 세종이고 병부를 이순신장군이 관장하고 있었다해도 역사는 달랐을까
나는 우리가 배웠듯 단 한차례의 싸움도 없이 국권을 넘긴 현실에 더해 장렬히 싸우다 국권을
잃었다는 역사의 한페이지만 추가할뿐 모든 역사의 수레바퀴는 같은 위치를 굴러갔을거라 생각한다.
조선의 국시는 사농공상으로 정해졌다 또 외국에선 우리를 조선이 아닌 코리아로 부른다 왜일까
천하최고의 약수라해도 한그릇에만 담겨있다면 그것은 언젠가 썩어서 아무것에도 못쓰는 물이되고만다.
고려는 상업을 귀히여기고 장인을 우대하며 자주성이 강해 금속활자 고려청자 북진정책 여러대장경
코리아란이름과 불교예술 황제의 칭호까지 조선의 김치 불고기 누룩(여진어) 거북선등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지금 우리가 원조하는 아이티와 필리핀은 6.25직후엔 우리에게 원조를 주던 나라들이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길래 상황이 뒤바뀐것일까 어떤 생각을 하는 지도자를 세웠는가가 가장 클 것이다.
우리의 역량을 세계최고의 교육열에서 찾는분들이 많지만 만일 세계최강의 군대를 지도자가
함정으로 이끌고간다면 그 부대의 역량은 아무 쓸모가없게된다.
조선의개혁정책은 그들이 요승이라 말한 신돈이 만든것을 패러디한 것이며 불교예술 자기 그외 문화
공예품 어느것하나 독창적인 것은 없다. 한글은 두가지 의견이 팽팽하니 접어두고라도 세종이
아니었으면 조선은 있어선 안될나라라 난 생각한다.
몽고의 말발굽이 지나간 수에즈 오스트리아의 노이슈타트 무굴 베트남서북쪽 운남까지의 나라중
그 나라의 국명이 제대로 보존된 나라는 지구상에 단하나 고려뿐이었다. 외세의 침략을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말기 바란다.
고려는 군부가 여러개고 지금의 대한민국도 정당이 여러개다 왕이 정치를 잘못하면 군벌중
잘난사람이 실권을 잡다가 또 잘못하면 다른군벌이나 왕이 실권을 잡는것이 대한민국의 다수당제를
보는것같다.
조선은 어떤가 우선 탄생부터 사대다 자주성이 강한 고려인을 모두 제거하고 오로지 중국에
머리조아리는게 국시다. 조선 군벌들이 난립하면 왕권이 위험할 수 있다하여 모든 군권은
왕에게 집중된다. 북한도 수령이 모든 권력을 독점한다 그러니 오랜가도 마지막엔 비실거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과 고려는 외부에 대해 모든 문호를 개방했지만 조선과 북한은 특정국가 한둘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문호를 열었을뿐 모든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했으니 지금은 북한도
대원군시절의 조선도 오랜세월 바가지의 묵혀놓은 최고의 약수 신세가 되지 않았나 감히 생각해본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란 영화를 안보신 분이라도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장수이야기를 안들어본 분은
별로 없으실것이다. 왜 될 성부른 사람은 싹부터 잘라버리는게 조선의 관행이었다.
그 사람이 커서 왕권을 위협한다면 그보다 악한 상황은 없기에 이순신이 그렇게 잡혀갔나보다.
왜 우리는 위화도회군에 대해 관대하게 대하는걸까 오로지 내 생각엔 왕십리 같은 스토리텔링과 일부
내러티브적인 면이 사람들이 흥미를 유발했시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웃민족의 뇌리에 중화사상을 주입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삼국지 하지만 그 속엔 무한한
스토리텔링과 얼마간의 내러티브도 포함되었기에 중국을 적대시하는 나라에서도 중화민족주의를
은연중 심어놓는 삼국지를 널리 권장하는건 아닌지 의심해본다.
대장금을 중국국민뿐 아니라 지도부까지 열렬히 환영한다. 왜 을지문던 강감찬 같은 역사를 가진
민족이 별볼일 없는 벼슬을 하던 명나라의 사신에게 최고의 실권을 가진 조선의 정승이 벌벌기니
이미 우리 스스로가 중국의 속국임을 증명했다. 더이상 동북공정이 아니라 한반도공정을 해도
우리가 대장금에서 모든 명분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중국지도부가 좋아라할 수밖에 이제는 대장금을 중국에 수출해서 외화를 많이 벌고 한류가
뻗어나가겠구나란 생각은 버리자 조선시대에도 중국에 조공하는 물품보다 받아오는 물품이 더 많았다.
우리가 위화도쿠데타란 역사로 인해 우리민족에게 씻지못할 오류를 저지르고 있으때 명나라의
침략을 받은 월남은 항복한 명군을 선처해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아량까지 베풀었다 얼마나 대단한가
우리는 오피러스를 타는데 그들은 자전거밖에 못갖는 처지라고 으스
대지말자 김연아의 재능을 가진 우리겨레가 지난600년 동안 이성계가 자기일족의 영화를 위해
우리민족에게 굴레를 씌웠던 사농공상의 허상에서 이제는 빨리 벗어나 역사의 과오를 반복하는
일을 만들지 않는 각성이 온 국민적으로 인식될때 우리는 베트남에 대해 조금은 우월한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고려에는 벌리사란 직업이 있었다 한강이북에 왕기가 있다하여 오얏나무를 심었다 기른후 자르는
직업이었다.
그 오얏나무를 심은 곳이 강북구 번동이다.
제발 대한민국엔 벌리사란 직업이 없기를 바랄뿐이다.
제목 " 만약 권율장군이 역모의 수괴였다면?
학교에서 배운다. 소중화주의 한국은 작은 중국이라는 뜻이다.
중국은 여진,조선,일제목본을 오랑캐라 말하며 한국은 여진,일본을 오랑캐라 부른다.
권율장군은 충신이고 영웅이다. 소설을 한 번 써보자.
권율장군이 어디 권씨인지는 모르겠지만 철원권씨라고 가정해본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전 조선이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 시비를 건다.
연산군때까지 일본에 공녀를 바쳤던 조선은 중종때 자주개혁을 선언하며 이를 단절시키나
다시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은 이를 요구한다.
10만양병설(한국사상식 바로잡기)은 후대에 꾸며낸 허구이나 만일 실미도처럼 잘 훈련된
군대를 권율에게 맡기고 총지휘권을 주어 정벌하라 명했는데 낙동강쯤가다 지금은
농번기라 안되고 비가 많이와 화살이 느슨해지니 안되고 북쪽에 있는 나라가 남쪽에
있는 나라를 치는건 예의가 아니다라며 다시 회군해 개혁을 하고 있는 조선왕조를
쓰러뜨리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국명을 권율의 고향인 철원으로 하오리까 가야라
하오리까 여쭌다.
이에 고무된 도요토미는 가야란 이름이 아름다우니 (일본고대사서중 하나에 가야는
임라일본부 즉 일본의 식민지였다란 허구적이야기가 있다) 국명을 가야라하거라.
그후 가야의 태조 권율은 자신의 역모를 감추기 위해 소왜국주의사상을 내세워
조선은 작은 일본이라 칭하며 일본은 아버지의 나라라하여 큰나라에 빌붙여사는
사상인 사대주의로 일관한다 동국여지승람의 동국도 중국의 동쪽에 붙어있는
중국의 속국이란 뜻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칠 수는 없다. 그럼 권율(이성계)이 낙동강(위화도)에서 쿠데타를
일으킨게 정당화된다.
그리고 다시 공녀제도를 만들어 매번 공녀를 뽑아 왜국에 상납하고 그 반작용으로
조혼제도가 가야시절 내내 자리를 잡는다.
이게 오랫동안 정착되어 1909년 민적법에(노컷 조선왕조실록) 의해 성씨가 없는
노비나 백정,망나니,재주꾼들은 기왕이면 왕족의 성씨를 갖자며 철원권씨나 김해김씨를
가져가고 이들의 후손중 성공한 사람들은 진짜족보를 사서 종친회에 나온다.
한술 더떠 어떤 이들은 진짜임을 강조하고자 권씨가 아니라 궐씨라고 고쳐부르기도 한다.
몽고는 세계를 휘두른 국가다 원도 몽고족이 세웠고 러시아인도 한꺼풀 벗겨내면 속은
몽고인(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인도 무굴왕조,타타르까지 전세계를 휩쓸었다 황인종을 몽골리안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고려도 세계속에 그것도 몽고 바로 옆에 있다 모든 나라가 복속해야했듯 고려도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되고 앞에 충성충자를 왕에게 붙였으며 공녀를 바쳐야했다
이건 고려만의 일이 아니라 세계적인 일이었다.
명은 원을 물리치고 중원만 통일한다 그리고 고려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건다.
물론 여기엔 공녀도 포함된다. 고려 공녀는 공민왕이 등극함과 동시에 없앤제도다.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까지 영토를 넓힌 고려는 전군의 총지휘권을 이성계에게
맡기고 명을 치라 명한다.
고려는 문무를 겸비한 국가로 무인기질이 강했고 여러 전란을 거듭하면서 실전경험이
풍부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전권을 갖게된 이성계장군은 위화도에서 우기가 오길 기다리다 지금은 비가 많이와
화살이 느슨해져 안되고 농번기라 안되고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치는건 예의가 아니라며
창끝이 겨눈 방향을 반대로 돌린후 고려를 무너뜨리고 고려에 싸움을 건 적국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새로 생긴 왕조의 국명을 이성계의 고향인 화양이라고 하오리까
조선이라고 하오리까 묻고 명태조 주원장은 조선이라는 이름이 아름다우니 (고대 조선은
중국이 지배했다고 중국은 아직까지 우기고 있다) 조선이라고 하거라라고 명한다.
이 때 고려의 대신 이인임이 이성계의 선조라고 자기네 사서에 기록해 후손들이 조선에
대한 외교적 히든카드(조선도 몰랐던 조선)로 써먹도록 조치하고 이를 임진왜란 직전
오키나와 상인들에게 전운이 감돈다는 정보(풍수화/김용운)를 입수한 명의 관리들이
이 히든카드를 써먹는다.
홍역관과 병부상서 석성의 이야기는 얼굴마담일뿐이다.
공녀를 보자 이성계는 즉위하자마자 공녀제도를 다시 부활시킨다.
그리고 조혼의 풍숩이 조선내내 이어지지만 지금의 교과서엔 조선의 공녀이야기나
조선시대 조혼이야기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온통 고려공녀 충성충자 고려임금 이야기뿐이다.
우리 조상들도 항상 그랬으니까 조선이 중국을 사대주의로 떠받들고 사대로 일관하는건
당연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래야 자기들의 죄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공민왕이 개척한 갈라전(동북3성과 함경도일대)도 윤관의 동북9성도 흥남부두일대로
왜곡되어있거나 함경도로 국한되고 교과서엔 온통 세종대왕의 4군6진이야기뿐이다.
태종 이방원은 고려군관 출신이고 세종의 대마도 정벌도 사실은 태종의 작품이다.
다시 말해 고려의 무인기풍이 세종때까지는 남아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군권은 모두 임금에게 집중시키는 체제를 만들고 공맹사상만을 강조하는
문치시스템에만 역점을두어 결국엔 임진왜란과 36년국치를 만드는 원인을 제공한다.
몽골제국시절 세계가 몽고에 머리를 조아리며 공녀를 바쳤지만 명나라시절 세계에서
명에 머리를 조아리며 공녀를 바친건 조선뿐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진짜 전주이씨임을 자랑하기 위해 자신은 이씨가 아니고
리씨라고 주민등록증에 달고다닌다.
악인열전을 보자 히틀러가 있다 600만명의 유대인을 독가스로 살해한 인물 독가스를
누가 나치에게 팔았는가 유대인재벌 로스차일드가문 그 후손들중 일부와 관계자들은
AP,UPI,로이터,워싱턴포스트,헐리우드 ,뉴욕타임스,뉴욕포스트등등 모두 그들 것이다.
위인전을 보자 이성계.나폴레옹(지식의 미술관) 모두 역모의 수괴인데 그 잔당들이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너무 작아도 안보이지만 너무 커도 안보인다.
나폴레옹은 남의 나라 사람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역모의 수괴인 이성계 이제 그만
이완용 같은 반열인 악인열전에 올릴때도 되지 않았을까88
참고책
대쥬신을 찾아서 팍스 몽골리카와 고려 조선시대 궁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전통생태와 풍수지리 욕망하는 지도 노컨,조선왕조실록 가난한 아빠 부자 아들 한국사상식 바로잡기 풍수화
2019.5.28
제목 : 동해 일본해 & 성폭력범죄자의 특징
요즘엔 전자발찌를 차거나 화학적거세를 한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처벌수위는 비슷하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5분내지10분의 쾌락을 위하여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짖밟아버리는 범죄.
5~10분의 자신의 쾌락 떄문에 , 이게 성폭력을 즐기는 이유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페탱원수의 비시정부이다.(먼나라 이웃나라)
페탱원수는 1차대전의 영웅이었고 대통령까지 되었다가 2차대전떄 프랑스 온천도시 .
비시에 나치가 조종하는 비시정부의 수반이 되어 프랑스 국토의 1/3을 다스리다 전쟁이
끝난후 처벌받는다.
독일이 프랑스를 지배한건 3~4년이고 프랑스가 독일에게 문화적 혜택을 받은건 없어도
빼앗기거나 당한건 많다.
이성계를 보자 한족 부흥운동인 백련교도의 난으로 홍건적이 쳐들어왔을때 무찌르고
60년간의 일본남북조시대에 남조의 패잔병들이 남원쪽으로 진군했을때 황산에서
대파시켜 전쟁영웅이 된다.
여러대째 다루가치집안이었던 그는 (몽골은 왜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나) 명나라 토벌을
명받고 위화도까지 갔다 쿠데타를 일으켜 자주국인 고려를 멸망시키고 만주와 요동이
우리땅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을 모두 죽이거나 귀향보내고(오백년 도읍지를~)
명나라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나라이름을 지어달라고 애원한다.
조선은 500년내내 임금의 권한을 수행하려면 중국황제의 허락을 받아야했고 세자를
지명하려해도 그 지명이 유효하려면 중국사신의 허락이 있어야 그 지명이 유효한
중국의 유일한 식민지였다.(대장금)
500년동안 중국만 바라보며 사대주의 쇄국을 하던 조선은 근대 서양문물을 1543년부터
받아들인 일본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의 이권을 먹으려면 먼저
식민지관계를 청산해야되는걸 알기에 강화도조약 1조에 '조선은 독립국'이란걸 명시해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시킨다.
우리는 36년이라 배웠고 지금은 35년이라 가르치지만 사실 50년이 맞고 이건
이토 히로부미의 계략이었다.
3국간섭을 보자 중국땅을 점령했지만 서양세력이 간섭해 할양받을 땅을 포기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비스마르크를 보자 나폴레옹3세와 전쟁후 파리를 함락시키고 배상금을 요구하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대신 가지라고 했을때 그는 다른 나라들이 간섭할 걸
우려해 돈으로 달라고 한다. (비스마르크평전)
만일 2차대전후 미국이 전쟁배상금을 일본정부에 요구했다고치자 그리고 대신
조선을 가지라고 했다면 우린 기분이 어떨까 그런데도 우리는 프랑스를 찬양하면서
우리와 같은 역사를 안고 있는 월남은 무시한다.(호치민평전)
일본이 조선과 전쟁을 안한 두번째 이유는 군사력도 얼마안되고 아직도 활이
주력인 나라 학교도 지어주고 철길과 도로도 놔주어 조선사람들은 좋아하나 나중엔
조선을 삼키기 위한 포석인걸 안중근의사등 몇몇분만 빼놓곤 모른다. (시일야방석대곡)
그래서 1909년에 하얼삔에서 그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토의 자제 요청으로 조선을 삼키지 못한 일본은 바로 다음해 조선을 병합한다.
500년동안의 식민지배체제,쇄국정책을 이성계가 만들었고 그를 주도한 인물이 그의 군사(참모)
정도전인데 지금 이들은 자신들의 계략에 세뇌된 국민들에 의해 영웅이 되어 있고
너도나도 전주이씨라 자랑한다.
세계의 노예제도가 없어진건 1860~1870년 사이이고 일본도 1872년에 노예제도를 없앴지만
워낙 강고한 중국은 1903년에야 없애고 우리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제일 늦은 1909년에야
없앨 수가 있었다. (노컷조선왕조실록,청사)
누가 그런다 프랑스는 반민족 처벌했는데 우린 못했다고 그들은 3~4년 동안 우리는
50년 가까이 지배를 받았는데 상황이 같은가 앞이 안보이는 상황인데 같은가 해방후
빨치산들이(권오석) 남한을 전복하려고 총파업,도로,철도 운행중단시키는데 이걸 막으려면
남로당같은 공산당을 색출할 능력이 있는 집단은 친일경찰뿐인데(한국보수세력연구) 상황이
같은가 우리의 근대문물은 거의 100% 일본이라는 필터를 거쳐 들어왔다.(돈가스의 탄생)
교육,문화,법률,의료,과학 혈액형별성격테스트도 한국과 일본뿐이다.(헌혈,사랑을 만나다)
김구선생님꼐서 해방후 말씀하신다.
마지막까지 내곁을 지킨 사람은 넷뿐이었다고.....
지금은 보는 사람마다 자기가 거기에 속한단다.
이완용은 독립협회 회장이었고 갖은 수난을 당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지만
노후생활의 안락함을 위해 변절한다.(한국분,한국인,한국놈)
유신반대 독재반대를 하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철은 노후생활의 안락함을 위해 KTX승무원을
등친후 먹튀한다.(그대들을 희망의 이름으로 기억하리라:KTX여승무원문집)
그리고 우린 어떤 범죄자에겐 감투를 어떤 범죄자에게 전자발찌를 채운다.
다시 말해 조선은 중국이라는 다국적기업의 현지인 사장체제였고 36년식민지는
일본이라는 다국적기업의 본사파견제 사장체제였다는 이야기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보자 개막식때 천장철도가 잠시 나온다. 이건 티벳에 대한 식민지배
말뚝박기인데 우린 그런가보다한다.(중국의 거대한 기차)
폐막식때 보자 동해를 일본해라 표기하고 있다.
중국이 일본에 감정이 더 많을까 한국에 감정이 더 많을까
이건 이이제이,원외근공의 오랑캐토벌 수법이다.
한족은 강대국 요나라를 물리치기 위해 멀리 있는 오랑캐인 금나라를 이용해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여진이 세운 금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후일 원나라를 세운
몽골을 이용해 금나라를 멸망시킨다.
멀리 있는 오랑캐를 시켜 가까이 있는 오랑캐를 멸망시키는 원외근공전략 폐막식때
일본해가 바로 그래서 나온 것이다.
지금 양국에게 가장 급한건 서로때리기 서로방어하기가 아니라 전권을 위임받은 양국의
대표학자 몇몇이 모여 양국국민이 인정할 수 있는 동해,일본해의 새로운 대안명칭을 찾는 것이다.
지금 양국은 명칭문제로 막대한 국력을 외교전으로 소모하고 있고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중국은 어부지리한다.
몽고,거란,여진,한국,일본,오끼나와까지 모두 알타이어족인 흉노유목민의 후손들이다.
(대쥬신을 찾아서1,2,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성서의 뿌리 p63,254)
오랑캐끼리 싸움붙이는 중국의 이이제이전법에 이젠 그만 놀아나자 가장 좋은예가
임진왜란이다.(풍수화/김용운)
중국은 지금 칭기즈칸과 을지문덕을 중국인이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동북공정 고구려사)
만주와 요동이 한국땅이란걸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우리는 중국을 어버이로
섬겨야한다는 소중화주의를 자신들의 6년간의 치부를 위해 자손들에게 심어주고
우리는 오랑캐가 아니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몇몇 동이족 반역자들의 논리에
이제는 그만 놀아나자
성폭력범이 5~10분의 쾌락을 위해 한 사람의 일생을 망친것과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가
6년간의 왕노릇을 해보는 쾌락을 만끽하기 위해 나라를 500년간 중국의 식민지배체제로
만든 역사의 과오에서 이제는 벗어나야한다.
시간나시면 단양 도담삼봉에 한 번 가보세요
여기 한양의 풍수설계자이며 이성계의 오른팔인 정도전의 용비어천가가 있습니다.
Re-born 8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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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코와 같은 지도해설이 독특하고 방대하다.
바빌론에서 출발해 프톨레마이오스 조선의 강리도 풍수해설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알지못하는 이성계에
대한 평가까지 카시니,매킨더에서 구글어스까지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연구성과이다.대단하다.
서양식성과에 조선이 약간 구색맞추기로 끼인걸 대단하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책제목에서 '욕망하는 지도'의 본 내용은 백지원씨의 '대항시대개막'이 더 설명이 잘되어있는 것같다.
중앙아시아의 침략기를 다룬 '그레이트게임'에서 영국인들이 러시아를 제치고 중앙아시아를 점령하게
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저자는 세계지도를 만드는 일은 후원자,제작자,소비자 그리고 그들이 딛고 선 세계사이에서 서로 상충하
는 이해관계를 오가며 영원히 진행되는 작업이라했지만 현대지도의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에만 온 힘을 쏟
았다.
하느님의 지구에서 유럽이 애초에 다른 지역보다 뛰어나다는 우월의식이 아니라 유럽문명화에 나타난 종교적 배타성까지 서유럽이야기는 아주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다 적었지만 그 외의 지류는 없다 아랍도 아프리카나 잉카,마야,한국만해도 대동여지도 1903년 조선의 산악록까지 조선만해도 이럴진대 다른나라의 지도의 역사는 오죽이 길겠는가 또 명나라의 만주관할은 그들의 주관적 판단에서 그은것인데 이것도 그대로 받아들인다. 다른 지역에 존재하는 지도의 역사가 현대의 지도제작에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더라도 한장정도는 할애할
수 있지 않을까
조조(휘닉스),공군장교가 쓴 '전쟁과 기상'에서 삼국지가 허구라는게 진실인데도 과장이 심한 중국인의
지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글턴의 '화폐의 역사'에서 관자가 중국의 관리라고 하는데
관자(소나무)도 안읽었나보다 동이족인 관자의 형상을 입힌게 공자나 제갈량의 모습이다.
또 페이지236밑7줄 - 독일에서 활자가 발달한 시기는 1450년경으로 중국에서 활자가 발명된지 약400년 뒤다. ---(한국사상식 바로잡기) 좀 읽어보십시오
2006년 있었던 용산국립중앙박물관 100주년 기념북한유물전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북한 금속활자 한개 남한 금속인쇄활자한개가 전시됩니다.
또 함경도에서 출토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인 새의 다리뼈로 만든 피리가 전시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자연과학분야 최고권위자이신 최재천교수님도 번역하신분처럼 '통섭의 식탁'에서 종이,활자,나침반,화약이 모두 중국의 발명품이고 양력,음력(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에서 이집트에서 음양력이 탄생)도 모두 중국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전공이 다르니 그렇다치더라도 어떻게 역사를 전공하신분이 1989년 유네스코에서 한국에서 최초로 인쇄술을 개발했다고 인정했는데 아직도 모르고 계시다니 한술 더떠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마다 인쇄는 한국이 최초고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앞섰다고 귀에 못이박힐정도로 지겹게 들었는데 그런 기초적인것도 모르시다니 대단하시다.
프랑스가 한국유물 반환할때 '직지심경'만 뺀 이유는 아시나요
역사학자로써 부끄러운 줄아세요 나침반도 신라침반에서 나온 말입니다.
'대쥬신을 찾아서1,2 ' 읽어보세요 아니면 인터넷검색 하시던가요
고려대출판사에서 나온 '만주족의 청제국'읽어보시고 영화 '황비홍' 다시 한 번 보세요
느끼시는게 있으실겁니다.
노무현대통령때 부시대통령이 방한하여 불국사 석가탑앞에서 세계최초의 목판인쇄본이 이 탑안에서 나
왔다며 자랑하던 뉴스도 검색해보세요
글 끝내고 '미즈노교수와 종로 피맛골이야기'
'당신은 전주이씨가 아니다.'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다'
글 긴거 세개 올리겠으니 시간나실때 봐주셨으면 합니다.
페이지237 위3줄 1500년의 유럽총인구는 8,000만명이었다. --책 세권 진화의 종말,총균쇠,우리몸은 석기시대--3권 읽으시면 인구증가가 얼마나 심각한지 아실겁니다.
혼천의는 중국지도가 아니라 삼국시대이전부터 내려오던걸 조선시대 종이에 옮겨적은후 대동강을 건너가 실수로 강물에 빠뜨린겁니다. - '한국문화재 수난사'읽어보세요
이거 읽으시면 직지심경이 왜 프랑스로 건너갔는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컴퓨터에서 이진법을 자꾸 말씀하시는데 - '돈보다 운을 벌어라'에서 라이프니치의 사연이 나옵니다.
저자는 풍수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도안계풍수지리' 읽고 말씀하셨어야했는데 안타깝다.
영국이 풍수에 대해 잘아는 이유는 홍콩을 통해 풍수사상이 영국으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며 종이의 기원은 '종이로 사라지는 숲 이야기' 읽어보세요
한국풍수는 무학대사와 창신동의 동묘가 세워진 사연의 연관성 정도는 아셔야지요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 미국과 아프리카의 주나 경계가 왜 직선인지도 빼먹었습니다.
페이지210훈요십조 이건 최씨무신정권때 조작한겁니다. 이것도 '한국사상식 바로잡기'
페이지209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 다녀온후 '금'이란 경주김씨 김함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주원장의 할아버지묘소가 강원도에 있다는것 정도는 알고 풍수와 오랑캐를 논해야되는데...
628년 고구려는 당나라으 속국이 아니기 때문에 당나라가 열받아서 정벌을 한 것이며 당나라의 고종과 태종의 부인이 돌궐사람이었기에 영화 '용문비갑'에서 마지막 장면에 황후가 암살당하는걸로 설정됩니다.
만주족은 이민족지배자였다가 장륭의 '대륙의 딸들' 도입부에 이웃집할아버지가 고향이 만주인이라고 묘사되듯이 260년의 동화기간이 지난후 고향이 다른 같은 민족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황비홍에서 자꾸 만주족이 죽습니다. 이건 부패한 관리가 아니고 이민족 지배자라서 그렇습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개막식때 철도가 영상으로 나오는데 '중국의 거대한 기차' 이거 티벳공정의 결정판이고 가수 '비'에게 중국어로 노래하라는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것도 이이제이,원외근공 - 오랑캐끼리 싸워 중국이 이득을 얻는다, 먼 오랑캐(일본)과는 화친하고 가까운 오랑캐(한국)은 정벌한다는 한나라때부터 전해오는 수법입니다.
'진시환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 읽어보십시오
피맛골,단성사,중앙청부술때 뭐하시고 계셨나요 그 시대 그 공간과 시간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공간속엔 역사가 있다면서요 부끄러운 줄 아세요
중국신장,나는 왜 사라지고 있는가, 성서의 뿌리,거란제국사연구 - 정말 책 안 읽는 역사학자들
헌팅턴교수의 '문명의 충돌'에서 일본문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고했는데 '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읽어보세요
역자님 역사좀 제대로 공부하시고 번역하세요 마칩니다.
첫번째글 : 미즈노교수와 종로피맛골이야기
지금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생글생글 잘 웃던 미즈노교수가 방송에 잘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이 스튜디오에 모여서 토론하던 곳에서 미즈노교수는 "저희 일본에서는 자식이 사업자금이 부족해
시골부모님에게 가서 가만히 있으면 말을 안해도 부모님이 알아서 주십니다. 또 연인들끼리도 사랑한다
는 말을 안해도 다 압니다."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말에 주변사람들은 "에! 그게 뭐야 말을 해야지" 하
며 어이없어 했다.
이야기가 좀 다를진 몰라도 야만이란말은 18세기 프랑스에서 만든 말로 자신의 문화가 다른 문명보다 우
수함을 말하기위해 만든 말이다.
타문화를 자신의 문화적 시각으로만 해석하려는 극단적인 예가 '야만'이라는 단어다. 12세기 한국과 일본에는 모두 무신정권이 같은 시기에 등장한다.
청기백기게임의 원형도 알고보면 운동회때의 청백전이 아니라
백강전투후 400년동안 일본에 존재했던 시대가 헤이안시대고 그 이후가 700년간의 무신시대다.
수도를 두 번씩이나 옮긴 간무천황이 794년에 헤이안쿄(현재 천왕이 사는 도시 교토)를 도읍으로 정착시
킨후 1185년에 이르러서야 미나모토가문이 다카모리왕의 손자 다이라씨와 전장에서 맞붙었을때 서로를
구별하기 위해 한쪽은 등에 홍기를 꼽고 한쪽은 등에 백기를 꽂은데서 청백전이 유래한다.
이로인해 다이라씨가 궤멸하고 군사,경찰,행정권이 미야모토가문의 수장 요리토모에게 넘어간다.
이때 시작된 또 하나의 풍습이 있는데 무신정권의 호화로운 요리인 가이셰키요리와 승려들의 공양음식인
쇼진요리가 합해져서 현재의 일식요리의 원형이 탄생되기도 한다.
이런 전통이 1868년 메이지천황의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700년 동안 무신들이 전국에서 난립해 싸우는
전국시대가 계속된다.
우리나라에 군청단위가 있다면 일본에서는 현단위의 땅에 지배자인 영주가 있어 그곳의 무사집단과 농민
집단이 영주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경쟁하는 시대를 그들은 700년이나 지속시킨다.
만일 거기속한 사람이 자신의 불만이나 억압에 대한 표출을 하게되면 그곳 집단에 해를 끼쳐 단결에
해가된다하여 자신의 욕구불만을 자신의 내부로 내면화하는 문화가 뿌리를 내려 지금도 일본에선
제일 심한 욕이 우리가 잘아는 '빠가야로'라는 바보란 말이 제일 심한욕이라 알고있다.
어느 기자가 그런다 한국과 일본의 고소고발 사건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이건
단순비교가 아니라 원인을 역사적 유래를 놓고 비교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라마다의 문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건 무리가 따를 때도 있다.
그럼 한국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바보'는 욕도 아니다 그냥 애칭 정도일까
조선은 500년동안 양반중심의 중앙집권제가 뿌리를 내린다.
서민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멸시와 천대를 뒤에서 욕으로 푸는걸로 해소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외부의 억압으로 인해 생기는 불만을 욕으로 푸는 문화를 발달시키게 되었고
일본은 외부의 억압으로 인해 생기는 불만을 내면화하는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다 사대부의 발원지를 보자.
진,송시대이후 사대부라는 명칭이 직업은 비록 달랐지만 농,공,상과 같이 섞여 살았다가 후대에와서
사대부는 곧 문벌이 높은 집안을 가리키게 되었고 그들이 사는 곳은 농,공,상과 완전히 구별되도록
서로 섞여 거주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압구정도 중국 송나라의 정승 '한충헌'이 황제를 새로 세운 공을 이룬뒤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은후
벼슬을 버리고 갈매기와 함께 논다는 겸손의 뜻이 원형이다.
그 압구정이 조선으로 넘어와 '계유정난'을 기획한 한명회가 갈매기압으로 부르던 정자를
지은후 그곳의 뜻이 서민들에 의해 누를압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발원지를 알면 재미나는 것들이 많다.
한강의 발원지도 오대산 '우통수'와 태백 황지의 창죽동의 검룡소를 발원지로 보기도한다.
여기는 귀한 곳이기에 잘 보존되고 있다.
그럼 지금 한국은 발원지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문화유산은 또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을까
안압지,불국사,석굴암,첨성대,무령왕릉,고인돌,장군총등 거의 다인 문화유산은 모두 귀족이나
왕족들을 위한 유산이다.
그럼 우린 이런 문화유산을 정말 잘 지키고 있을까
우리는 약간이라도 불편하거나 보기 싫으면 싹쓸어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종로의 피맛골,중앙청,명성황후생가 담장의 일부,북촌을 밀어버리고 빌라단지를 만들자는 사람들, 창덕궁의 아기자기한 산책로를 시원스럽게 밀어버린 사람들,천재시인 백석과 길상사 자야여사가 사랑을 나누던 집,1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진 조선시대 세운 단성사가 헐릴때 우리 영화인들은 돈세는 일
만했다. 돈에 미친한국영화인들,올림픽 메인스타디움과 국회의사당을 지은 건축가 김수근씨의 집도 싹 밀어버리
거나 밀려고했다.
이제껏 나온 문화유산중 95%인 서민들의 유일한 유산 한국에 욕이 왜 많은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가 바로 종로의 '피맛골'이다. 종로통 대로변 정승판서행차의'말을 피하다'에서 유래된 피맛골은 종로통의 뒷골목이다. 지금 당장은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과거의 역사를 통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혜
안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문화유산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낡은 것은 허물고 처음부터 새로 짓는다는 한국식 개발과정은 한국이 지닌 약점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이
다. 세월이 지나면 무엇이든 잊혀지는 법이지만 역사의 현장은 고이 보존되고 간직되어 다시 후손들에게 전해져야하는 법이다.
우리는 지금 전통과 낙후를 구분못하는 혼돈에 빠져 있지않은지...
가난의 잔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구시대적 발상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하고 있는 것일
까 1392년 조선은 개국했고 그 시절 숭례문을 만들게된다.
숭례문은 한명회의 계유정난때도 있었고 임진왜란때도 있었고 흥선대원군시절에도 있었고
김영삼대통령이 치적이라고 내세우는 우를 범하며 근현대사가 그대로 녹아 있는중앙청을 부술때도
있었지만 69세 노인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고 그 노인은 국민들의 비난을 받으며 감옥으로 향했다.
종로의 피맛골은 1392년 조선의 개국시절 서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기게된다.
피맛골은 한명회의 계유정난때도 있었고 임진왜란 때도 있었고 흥선대원군시절에도 존재했고
김영삼대통령이 치적이라고 자랑하며 근현대사가 그대로 녹아있는 중앙청을 부술때도 있었지만 낡은 것
은 허물고 처음부터 새로 짓는다는 한국식 개발과정으로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국민들은 무관심하거
나 부순사람을 지지한다.
옛날 것을 없애는 것은 한국의 약점 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이다.
몇몇 정치인의 생각만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도시를 통째로 바꾸려는 발상 이제는 좀 바꿀떄
도 되지 않았을까
외국에서는 모짜르트생가 베토벤 생가에서 외국정상들과 칵테일 파티를 한다는데
왜 우리는 이런 야만의 시대에 살아야하는가
참고도서 몇권만 추려서 권한다
서울, 북촌에서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일생에 한 번은 독일을 만나라 세계는 기다리지 않는다 내사랑 백석 맨큐의 경제학 페이지230 (역사적건물의 외부효과) 구석구석 찾아낸 서울의 숨은 역사이야기
두번째글 : 당신은 전주이씨가 아니다.
얼마전 TV에서 젊은 아나운서 몇명이 월드컵공사중 남산도로에서 어느 친일파가 버린 비석이 나온것에
대해 토론을 하는 프로가 있었다.
그 사람은 아마 자신의 잘못이 부끄러워 해방후 이곳에 버렸을 것이는게 결론이었다. 다들 남의 이야기
하듯이 한다.
이건 그 방송에 나온 모든 패널들,방청객들,시청자들의 조부나 증조부를 욕하는 것이다.
만일 그사람이 자신의 행적이 담긴 비석을 버린후 내려와 아들이나 손자에게 자신의 행적을 숨기겠는가
자랑하겠는가 그사람의 증손자는 대학에 가서 친일청산을 외치고 이 패널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럼 친일파는 대체 얼마나될까 확실한 자료는 없지만 유추는 가능하다.
16세기 콜롬부스시절 스페인땅의 98%를 2%의 귀족이 가지고 있었다.
19세기까지 러시아인구중 90%가 농노였다.
1865년 링컨이 남북전쟁으로 노예를 해방시켰으며 이들 노예들에겐 피부색이란 차별화가 있어 우리는
아직도 피부색만으로 그들의 조상이 노예였는지 아닌지를 판별해 낼 수가 있다.
일본은 무신정권시대인 에도시대(도쿄)가 260년만인 1868년 막을 내리고 4년뒤인 1872년 조선의 갑오경
장에 해당하는 개혁인 '폐번치현'을 단행해 노비나 천민 일반 양인들에게 성씨를 나누어준다.
조선은 95%가 백정,노비,소작농 같은 상놈이었고 5%만이 양반인 사회였다.
1909년 일본의 폐번치현처럼 조선도 '민적법'을 단행해 성씨가 없는 하층민에게 전주이씨,풍양조씨등
세도가의 성씨를 마음대로 골라가지라며 나누어주어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때부터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
길을가다보면 가끔 대문앞에 '독립유공자의 집'이란 표시가 된 집이 있다 그런데 조선의 신분구조처럼
20배나 많았던 친일파의 후손이란 표지는 어느집 대문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김해김씨족보를 보자 수로왕의 10아들중 7아들이 구름을타고 바다를 건너 왜로 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일합병후 일본이 최초로 한 일이 김해김씨족보의 출판을 못하게 금지한 것이다.
4세기 야마토의 뿌리는 고령 대가야로 지난 1985년 일본고고학자들이 후지노키 고분의 발굴을 중단하는
사건도 이 고분에서 일본 천황가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알려질까 크게 염려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천손강림신화를 보자 천신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는 남매간으로 그 부모는 이자나기,이자나미였
다, [삼국사기]에는 고령대가야의 시조는 이지아키로 이후 16대가 520년간이어졌다고 쓰여있다.
임진왜란 때 20만의 왜군이 왔고 그중 1만명이 조선의 문화에 크게 감화되어 귀화한다.
이 중 일부는 인조반정때 세검정에서 칼을 씻고 반정무리에 참여하기도 한다.
1600년부터 오미(대마도 남쪽섬 큐슈북부지역)상인은 일본최초로 복식부기를 사용하였다.
복식부기는 네덜란드 상인이 1637년경 세계최초로 고안하여 사용했다고하는데 일본의 오미상인이 오히
려 더 빨랐다. 고려 개성상인이 1392년경 고려가 망하자 일본 오미지역으로 집단이주하면서 그들이 쓰던
복식부기가 그대로 오미상인에게 전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일본의 대표적 기업인 도요타자동차의 메카도 바로 이 오미지역이다.
일제시대 양국의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섞였지만 지금은 모두 순혈한국인,순혈일본인이다.
백제의 유중광은 본래 전주를 보관으로 하는 문화 유씨이지만 그를 일본으로 초청한 장본인이자 일본
최고의 실력자였던 쇼토쿠태자가 '곤고'라는 성을 하사했다. 곤고 시게미쓰는 586년부터 593년까지
오늘날 오사카 최대사찰인 시텐노지(사천왕사)를 짓는데 앞장선다 그리고 593년에 시텐노지가 완공되자
그는 쇼토쿠 태자로부터 또 하나의 지시를 받는다. 앞으로 곤고 시게미쓰의 집안은 대대손손 시텐노지를
보수,관리하라는 명이었다.
그 뒤 오늘날까지 곤고 시게미쓰의 집안은 1,400여년간 시텐노지의 보수,관리를 맡고 있다.
이후 곤고 시게미쓰의 집안은 곤고구미라는 사찰전문 건축회사를 설립하였다.
일본에는 지금도 "곤고구미가 흔들리면 일본열도가 흔들린다"란 말이 있다.
660년 백제가 망할때 열도에 있는 백제로 본국 백제인 20만명이 건너간다.
그리고 200년후 열도 전체인구는 600만명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때 일본군 총사령관 우히다 수가는 백제인의 후손이란 이유로 참전을 거부했다가 도요토미의 명
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전장에 나서기도 한다.
1598년 정유재란때 남원성에서 조선인 포로 80명이 일본으로 잡혀갔는데 그 가운데 심당길과 박평의
두 도공이 있었다. 심당길은 사쓰마(가고시마) 도기의 종가인 심수관가로 일가를 이룬다.
박평의의 후손 박무덕은 도쿄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직업외교관의 길을 걸어 태평양전쟁 시기에 도조
히데키내각의 외상을 역임한다 1945년 종전협상에 참여했으며 A급전범으로 감옥에서 옥사한 도고 시게
노리가 바로 박무덕이다.
이 정도만봐도 한일 양국의 피는 거의 같다고해도 될텐데 이제 감정대립 그만해도 될때가 되었다.
전라도 남서해안지방과 큐슈북부지방에만 있는 CIS-AB형의 분포도.
왜군에게 끌려간 조선인 왜구로 왔다 조선군에 포로로 잡혀 양반집에 하인으로 분급되어 나누어준 왜구
들 그리고 1909년 성씨를 받은 그들의 후손들 너무 많이 섞였다.
서재필 훌륭할까 훌륭하다 이완용 훌륭할까 글쎄
서재필은 독집지사가 맞지만 이완용은 어떠한 길을 걸었을까 우선 이완용은 이승만과 더불어 왕실에 출
입하던 전주이씨 종친이었다.
이완용은 명성황후를 측면에서 도와 일본의 침탈을 막고자 친러파로 활동했으며 독립협회의 열네명 발기
인중 한 사람이었고, 곧 운영위원회 초대위원장으로 선출된다.
학부대신(교육부장관)에서부터 외무대신까지 요직을 두루거친 그는 외세의 조선지배를 반대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고 정부의 압력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독립협회에서 탈퇴할 때도 그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후 1898년 윤치호가 부회장,남궁억이 총무, 이상재와 윤호정이 서기로 뽑혔을 때 그는 그 쟁쟁한 인물
들을 물리치고 독립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부에서 그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그를 전라북도 감
사로 임명하여 먼곳으로 보냈을때도 그는 회장의 직책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최후의 순간에 그는 변절이
란 카드를 꺼내들어 지금도 친일파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완용하면 연결되는게 독립문이다. 이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중국사신이 머물던 '모화관' 그들이 지났던문 '영은문' 무슨 뜻일까 인터넷검색을 해보자.
'모화'란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고 '영은'은 은혜로운 대륙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동국여지승람의 '동국'이란 중국의 동쪽에 붙어 있는 중국에 종속된 나라라는 뜻이다.
오죽했으면 강화도조약 제1조에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란 립서비스조항이 포함되었겟는가
500년동안 조선왕조의 강압에 의해 중국을 상국으로 떠받들어야 했으니 백성들의 분노가 독립문을 만든
것이다.
쿠데타로 왕조를 수립한 이씨왕조는 극도로 군비 확장을 기피하고 의도적으로 문명의식만을 고취한 것이
다.
조선사회는 의식주 모두 자급자족으로 기존의 생산양식에 만족했으며 금속인쇄술과 한글, 복식부기같이
조상이 만든 창조물에는 무관심했다. 조선왕조는 세계적인 장수왕조이면서도 너무나 허무하게 국권을 빼
앗겼다.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 이성계.
현대 군사정부들에선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끌어들여야할 역사적 인물을 찾아야했으니 그가
바로 쿠테타로 집권한 이성계이기에 드라마마다 그를 미화시키기 열풍이 집권시기마다 일고 그래서 아직
도 한국인들의 머릿속엔 이성계가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는것이다.
위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지금 중국이 랴오닝성(요동성)이라 부르는 요동(랴오닝)을 그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의 뒤를 봐주는 댓가로 세운 건축물 영은문 그리고 모화관.
천안이 한국땅이기에 천안함이라 이름이 붙는다.
중국이 건조한 최초의 항공모한 랴오닝(요동)호 왜하필 하고 많은 이름중에 랴오닝(요동)을 붙였을까 자
신들이 한눈팔고 있는 사이에 원주인(고려)에게 되돌려줄뻔한 위화도회군이란 위기가 있었기에 자신의
것이란 영역표시를 단단히 하고자하는 의도가 담긴 이름 항공모함 랴오닝(요동)호.
이성계의 첫재부인 신의왕후 한씨 그녀는 고려시대 명을 다하고 정릉에 묻혀 있는 신덕왕후 강씨의 계획
에 의해 조선건국의 밑그림이 설계되고 결국 고려는 멸망한다.
신의왕후 한씨가 고려 공민왕 16년에 함흥부 귀주에서 점치는 사람 문성윤에게 이방원의 사주를 물었더
니 대답하기를 '이 사주는 귀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조심하고 점장이에게 경솔히 물어보지 마소서
하였다.
중국인이 지은 환타지소설 '수호지'를 보자 고려황제와 송나라황제는 친구사이로 나온다.
한국인이 만든 드라마 '대장금'을 보자 조선임금이 명나라사신의 아랫사람으로 나온다.
왕위외교부장이 문재인대통령의 팔을 두 번이나 때린건 괜히 때린게 아니다.
종묘에서 행하는 종묘제례악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전주 이씨라고 자랑할일만은 아니다.
영은문,모화관을 보자
위화도역모를 보자
대장금을 보자
1909년 민적법을 보자
종친중 95%이상은 노비나 백정,소작농의 후손들중 성공한 사람들이 족보사서 으스대는 것일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은 남산의 어느 친일파처럼 자손들에게 조상의 행적을 말하지 않은것뿐이다.
제대로 알고 살자./
참고도서
풍수화 이이화 한국사이야기 구대훈 일본사 일본의 상도 대쥬신을 찾아서 노컷 조선왕조실록 한국분 한국인 한국놈 김두규교수의 풍수강의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식민의 바다 제국의 바다 광해군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었다 헌혈 사랑을 만나다 후쿠자와유키치 한국 보수세력연구 성서의 뿌리 전통생태와 풍수지리 욕망하는 지도 p181
세번째글 :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다.
다르다고 배척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최선의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포용이다.
요즘 우리사회는 사는게 힘들다하여 세계최저의 출생율을 보이고 옆나라 일본
도 출생율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외국인 백만명시대를 맞은 이때 우리가
갈 방향은 어디일까 해답을 찾기위해 역사여행을 한번 떠나보자.
서라벌의 벌, 황산벌의 벌을 다른 나라에서 찾는다면 말레이의 나그푸르, 수단
의 다르푸르 아프카니스탄의 카불, 터키의 이스탄불, 인도의 칸푸르와 니그푸
르 이것만 봐도 우리민족이 유라시아대륙의 아주 먼 곳까지 연결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얼굴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공통적인 말이 장동건의 얼굴도 아랍인과의 혼혈이
아니고선 절대 나올수 없는 얼굴이라고 한다. 그럼 장동건의 조상만 혼혈이었
을까 그는 단지 평범한 한국사람중의 하나일뿐이다.
한반도는 원래 다양한 사람들이 건너와서 서로 어우러지고 섞이면서 살던곳이
고 단일민족이란 개념도 구한말 권위를 잃은 왕정에 대신해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야하기에 만들어진 개념일뿐입니다. 누군가를 배척하고 세상을 더 넓게 포
용하는데 장애가 된다면 이제 과감하게 내려놓아도 좋지않을까요?
구석기인 죠몽인과 한반도에서 건너간 신석기인 야요이인의 신장은 3cm가 차
이가 난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갑자기 영양이 좋아진거라 우기지만 많은 유물적 증거로 보았을때
한반도인과의 혈연적 공통성이 100%라는게 증명된지 오래이고 전체 일본인의
90%가 한국인과 같은 핏줄이죠.
그럼 우린 어떨까요 먼저 인도와 흉노만 언급하죠
맛보기로 독고씨도 흉노족 도각씨에서 유래한거지요
흉노족이 동진해 세운나라가 신라이고 서진해 세운 나라가 터키이기에 2002월
드컵시절 그들은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 호칭했고 터키를 방문한 노대통령은 미
국보다 더 가까운 우방이라 발언까지한건 아닐런지요
구한말때도 양복을 입었지만 본격적으로 양복이 전래된건 무교동에 자리잡은
터키인들에 의해서라고 알고있습니다.
얼굴을 연구하신 조용진교수님은 인도남부 타밀인과 환난을 피해 넘어온 중국
화남인이 22%이고 흉노등 북방계통이주민이 78%로 이들이 섞여 한민족의 주
류를 이루었고 흉노 까오리족의 일부가 만주이남으로 진출했기에 우리의 국호
가 코리아라고 불리게 된 것이지요.
한글도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10년동안의 연구를 통해 만들어졌지만 그 뼈대
는 인도북부 드라비다어와 티벳의 팍파란 승려가 만든 파스파문자에 만주의 가
림토문자가 융합되어 만들어진 것이고 임진왜란때 왜인들이 한글을 가져가 신
사에 모셔두고 신대문자라 칭하며 여기에 참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고유 문자라고 아직도 잘못 인식하고 있지요
신사가 2만개이면 신도 2만개이고 신사가 10만개이면 신도 10만개이지요
인도의 힌두교도 폴란드평원에 거주하던 유목민이 북인도에 침입했을때 만들
어진것이고 힌두교도 일본의 신사와 다를바없죠 힌두교에서 파생된 종교가 불
교이고 불교에서 파생된 종교가 원불교이며 원불교에서 파생된 종교가 대순진
리회이듯 모든 종교가 똑같은 길을 걷는다고 보면맞을겁니다.
우리는 베트남을 업신여기지만 베트남 사람들도 한국땅에 많이 섞여삽니다.
대표적인 사람 몇만들죠 1995년 화산이씨 종친회 대표들은 780년만에 베트남을
찾아 대통령등 귀빈들의 깎듯한 예우를 받았고 고려 무신정권시절 14년간 무소
불위의 철권을 휘두른 이의민은 귀화인 이양혼을 시조로하는 베트남계 정선이
씨이며 이외에도 대표적 귀화성만해도 청해이씨 경주설씨 덕수장씨 우록김씨
등 이루 헤아릴수가 없습니다.
sbs개국방송때 일본 백제마을을 보여주었다. 이게다일까
군국주의시절 한반도와의 연을 단절코자 많은 지명을 바꾸었는데 그 중의 하나
가 백제강을 소가강으로 바꾼것이다.
소가씨는 원래 개로왕시절의 목만치로 부여연맹인 열도담로에게 보낸 신하로
그의 5세손이 소가씨인 것이다.
부여가 북부여,동부여,남부여하는 것은 부여의 담로제도가 있었기 때문인데 성
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고친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친인척들을 여러곳의 수장으로 두었기에 한곳이 망해도 다른 곳에
다시 국가를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장수왕에게 패한 개로왕은 설욕을 하고자 열도에 있는 담로에게 믿을만한
신하 목만치를 보낸것이고 그 목만치가 모신 담로가 오늘날의 천황이란 이야기
로 결론이 나는 것인데도 일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단일민족신화를 아직도 고
집하고 있다.
다시 신라로 넘어와 신라에는 괘릉이 있다 아랍인의 형상을 한 석상.
무덤에서 나온 목걸이에 있는 인물상은 중앙아시아인이고 부처의 몸에 있는 십
자가나 켈트족이 발칸반도에 있을때 만들어진 칼에서 나온 켈트족의 문양이 새
겨진 고분에서 나온 칼이나 가야의 고분에서 나온 인도의 쌍어문 어떻게 설명
해야할까.
미국에서도 가끔 백인과 백인이 결혼했는데 난데없이 흑인 아이가 나왔다는 이
야기를 가끔 듣는다. 우리나라 사람중에 흑인입술을 가진 가수가 있다는 이야
기 격세유전 즉, 먼 조상중에 흑인의 유전자가 세대를 여럿 건너뛰어 나타났다
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혼혈이란 결론이다. 우린 단일민족이 아니다 세상에 단일민족은
없다.
신라향가중 제일 유명한 처용가의 처용도 이미 귀화한 아랍인이란게 정설로 되
어있다.
문무왕비에 새겨진 '투후제천지륜전칠엽'이란 말은 흉노인 김일제 이후 7대가
흘러 김알지가 되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이 흉노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북쪽이 오늘날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 여기는 몽
고가 되고 남흉노가 원수로 여겼던 민족 거란이 된다.
아들형제 둘이 있다고 치자 하나는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 하나는 미국으로 이
민을 간다.
만약 한국에서 형제가 따로 운전을하다 둘의 차가 추돌을했을때 멱살잡고 싸움
부터할까 형제니 좋게좋게 넘어가자할까 그리고 8대가 지나 다시 도로에서 추
돌사고가 났을때 멱살부터잡을까 형제니 좋게좋게 넘어가자했을까 미국에 있
던 그 8대후손의 얼굴엔 한국인의 얼굴이 남아있을까 토종 어메리칸의 얼굴이
대부분일것이다.
장영실도 귀화한 중국인과 기생사이에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 사람의 결점만 지적하고 허물만 적발한다면,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벗
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는 것이 인재를 구하는 첫걸
음이듯 출생율저하만 걱정할것이 아니라 이제는 단일민족이란 낡은 사관을 과
감히 버리고 가슴을 열고 이민자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포용의 자세를 가져
야하지않을까 우리를 단일민족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난 후의 일이다.
그 나라의 문화와 풍습의 본질에 제대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잣대로 상
대를 평가하지 말고그들 나름의 고유한 전통을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주체적 구심력이 강할때만 인간을 포함한 외래의 문물을 순기능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우리는 배달겨레라고 한다 일본은 왜놈이라한다 왜놈부터 말한다면 삼국사기
삼국지연의등 한국과 중국의 고대서적을 종합해보면 '왜'는 큰강이나 바닷가에
살던 동이족을 가르키는 즉 고대 범한국인의 호칭이었다 그렇게 신라를 괴롭히
던 왜가 가야가 망한뒤 사서에서 사라졌다 즉 가야를 고대엔 왜라고 불렀고 고
구려의 마가,우가,저가에서 우리가 일본을 쪽..라고 비칭으로 부르듯 신라는
고구려를 말갈이란 말고 비칭으로 부른것이고 고구려의 마가 즉 말갈족이 200
년동안 서진해 세운 나라가 5음계를 쓰는 현재 헝가리이다.
배달에서 뒤에 달은 땅 벌판 산을 나타내고 배는 박 밝 즉, 밝게 빛나는 산 해뜨
는 알타이산을 나타내는 말인것이다.
단순설화의 곰이야기도 퉁구스의 많은 종족 예벤키족, 오로촌족등 많은 북방의
종족들이 조상으로 모시고 있는 이야기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도 실존인물이 아니라 그 이전에 살았던 성인급 인물들의 거룩하고 고상한
행적들을 총동원하여 짜깁기해 만들어낸 이야기로 당시 로마인들은 유럽세계
의 지배자였고 자신들의 모든 활동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을 남겼는데도 인간
예수에 대한 기록은 로마 문헌 어디에도 없었다고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에 지나치게 흔한 이름이었고 유대인 역사가들의 저술 속
에서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메시아의 전기가 아니라 이
교도의 유서깊은 이야기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신화'로 예를들어 오시리스-디
오니소스는 12월25일 동정녀에서 태어났으며 결혼식 때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
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냈으며, 영성체 의식으로써 자신의 몸과 피
를 나누어 주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했다.
고합니다. 예수의 생애의 일생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예수는 이교도들의 미스테
리아가 유대인들에게 수용될 수 있도록 유대인 메시아로 변장한 오시리스-디오
니소스이며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물
고기의 상징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상징이었던 바로 그 물고기이며 예수가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자로를 살려낸 것처럼, 엠페도클레스는 죽은 지 30일이 된
여자를 살려냈다고합니다.
미스테리아의 핵심은 죽어서 부활한 신인의 존재입니다.
신인을 고대 이집트에서는 오시리스 고대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 소아시아
에서는 아티스 시리아에서는 아도니스 이탈리아에서는 바쿠스 페르시아에서는
미트라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교에 따르면 예수는 3월 23일에 죽었고, 25
일에 부활했으며 소아시아의 신 아티스가 죽고 부활한 것과 같은 날입니다. 예
수는 사흘 만에 부활하는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오시리스도 역시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왜, 이 같은 일을 했을까요? 바로 아우구스투스의 제국과 같은
로마를 꿈꾸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입니다 그는 자신의 강력한 통치를 위해 자
신의 제국이 영원무궁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교를 이용했으므로 성서는 콘스탄
티누스 황제에 의해 철저히 국가적으로 기획되고 만들어진 국가 이데올로기 홍
보용책자입니다.
이집트의 많은 신들도 이름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어 그리스와 로마의 신으로
둔갑합니다. 교황의 모자는 수메르신들의 모자를 그대로 따왔고 교황의 행차와
파라오의 행차장면은 너무도 흡사합니다.
미라의 풍습은 사후에도 육신과 영혼이 불멸한다는 오시리스 신앙에서 연유하
는데 우리의 천주교 기독교도 그것을 고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뭐든지 배척하고요.
로마를 만든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기원전 13세기에 멸망한 트로이의 왕족 아이
네아스의 후손으로 그들은 포용정책을 펼쳤기에 그렇게 오랫동안 번성하고 현
대의 유럽에까지도 막대한 영향을 끼칠수 있었습니다.
지구상의 생물은 한 개의 세포에서 진화했다고합니다. 두 세포의 가장 최근 공
통선조가 분열할 때, 분열 직전에 이미 세포의 이쪽 절반과 저쪽 절반이 달랐다
는 것이다. 그래서 세포분열에서 탄생한 두 딸세포는 유전자는 같지만 그 주변
의 화학물질들은 서로 같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유전자가 켜지지 않는 것
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후손들의 운명이 바뀌는 것이다. 이런 원리가 발생의 맨
처음 시작에서부터 과정 전반에 적용된다. 모든 동물에게 있어서 분화의 열쇠
는 비대칭적인 세포분열이다.
인간과 침팬지도 아주먼 옛날 600만년전 공통선조에서 분열하기 시작했다.인류
가 다양한 민족으로 분화하면서 국가와 민족에 따라 다양한 식생활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는 단일민족일까 예를들어보자
845년경에 편찬된 아랍 지리서 <왕국과 도로 총람>에 의하면 아랍인들은 자연
환경이 뛰어나고 금이 많이 나는 신라를 동경하여 많은 아랍인들이 한반도로
건너가 영구 정착했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9-15세기 사이에 17명의 이슬람 학자들이 쓴 20여권의 책에서 아랍인과 신라인
의 빈번한 접촉을 다루고 있다.
또 이 책에서도 이슬람 지리학자였으며, 마수디는 한반도에 이라크인이 진출,
거주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다른 책에선 우마이야 왕조(661-759)의 박해를 피한
일부 알라위족들이 한반도에 망명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일본서기 753년의 기록에 의하면 장안에서의 궁중하례에 신라,일본 사절단이외
에도 아랍 사절의 참석을 전하고 있다.
아랍 상인들의 신라 진출을 나타내는 세계최초의 한반도 지도에 12세기 무슬림
지리학자 이드리시의 지도에 '신라'가 명기되어 있다.
기록에 없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그 대답은 영원히 주어지
지 않는다.
고려사에도 보면 대식국(아라비아)에서 열라자등 100명이 와서 왕을 만나 토산
품을 바치니, 왕이 그들을 극진하게대접하게 하였고 그들이 돌아갈 때 금,은,옷
감등을 선물로 주었다등 많은 기록이 전하며
그당시 개인무역이 금지되어 모든 국제교역은 왕실과 직접 거래하는 공무역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들은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이었고 1274년 고려 충렬왕의
왕비가 된 제국공주의 시종으로 따라온 삼가라는 회회인이나 현재 덕수 장씨의
시조등 위구르-터키계출신들이나 이능화가 쓴 <조선불교통사>에 보면 회회 집
단이 고려 개성에 예궁을 짓고 살았다하며 이 예궁은 이슬람사원이었을 것이
다.
세종실록에도 "예조에서 아뢰기를 회회의 무리가 의관이 달라 사람들이 이질감
을 느끼는 바, 이미 우리 백성이 되었으니 마땅히 우리 의관을 따라 차이를 없애
야만 자연스럽게 혼인하게 될 것이다.
...또 회회인들이 대조회 때 송축하는 의식도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하자 왕이
이를 승낙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정월초하루,동지,망궐례 때에 세종꼐서 문무백관과 외교사
절들을 초빙하여 의례를 가졌고 그 자리에서 이슬람의 대표도 참석해 송축하며
꾸란을 낭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양성에 대한 조화없이 나라는 지속되지 않는다.
출산율이 떨어진다고 무슨 걱정인가 많은 이주민들이 있지않는가
다양성이 포용된 공존과 조화의 회복이야말로 새로운 밀레니엄을 준비하는 진
정한 출발점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추가하자면 남북이 갈라진지 70년이 다되어간다 30cm의
얼음은 하루아침에 얼지않는다 한달만에 얼었다면 이 얼음이 녹는데도 한달이
걸릴것이다 헤어진지 70년이면 다시 하나가 되는데도 70년이 걸릴것이다.
북한을 다시 하나의 민족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유이민들을 꾸준히 받아들였던
선조들의 지혜를 계승하는 것이 다양성과 포용이 공존하는 강한나라를 만드는
기틀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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