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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을 처음 읽었던 건 중학 2년 때쯤으로 기억한다. 그 시절 즈음에는 무협지와 문학 소설과 시도 나름 좋아했었다. 언젠간 시를 다소 읽을 때는 아마도 그 시절의 향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문학은 소시민이 향유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풍요로운 대상이기도 하고 말이다.
오랜만에 데미안을 다시 읽고 든 첫 감상은 “내가 이 소설을 정말 읽었던 적이 있는 걸까” 하는 자기 의심 같은 것이었다. 소설 전반이 기억나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친구의 엄마에게 사랑을 느낀다거나 전쟁이 일어나 군에 징집되는 내용까지 청소년이 느끼기에 임팩트가 없지 않는 단락들 마저 전혀 기억에 없어서 더 그렇게 느꼈다. 내게 데미안은 그저 이번에 처음 경험한 것과 전혀 다름이 없다.
본서의 부록으로 작품해설이 있는데 데미안에 대해 문명 비판으로서의 기능을 논하고 있기도 했다. 천박한 물질 문명의 부상과 진정한 삶의 무산을 비판하기 위한 소설이라고 말이다. 그렇게까지 문학 비평가적으로 바라보지 않더라도 청소년부터 청년, 중년, 장년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든 의미로운 감상을 남길 소설이라는 감상이 깊다.
유년기의 아이가 청년기에 이르기까지의 역동들을 헤세 특유의 감성어린 필체로 그리고 있는 소설이 데미안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을 깨는 새의 이미지로 상징적 감상을 갖을 데미안이지만 나로서는 몇몇 상징만이 아니라 소설 속 등장인물 한 명 한 명과 배경묘사 하나하나까지 무엇 하나 상징적이지 않은 것이 없게 다가왔다.
청소년 싱클레어의 아니마인 베아트리체와 에바 부인 그리고 그의 롤 모델인 막스 데미안만이 아니라 프란츠 크로머, 알폰스 벡, 피스토리우스, 크나우어, 그리고 싱클레어의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등장인물 모두의 상징성이 다가왔고 낱낱의 장면까지 이 함의적인 소설에서 안배된 배치들이 아마도 다시 읽고 다시 읽는다면 읽을 때마다 달리 다가올 것만 같다.
유년기에 마주친 크로머는 그의 부정적 행위를 약점으로 잡아 싱클레어를 통제하며 그를 점점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존재였지만 그가 아니고서는 싱클레어는 자신의 그림자를 경험해 볼 수도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인 것과 같은 오이디프스적이며 자기방어기제와도 같은 양상을 자신이 보이는 상황을 경험해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대극 중 하나를 경험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였기에 크로머도 트릭스터의 외양을 띤 한명의 인도자였는지 모른다고 생각된다.
청소년기의 알폰스 벡은 싱클레어의 이성과 영성과는 상반되는 욕동을 자각하게 해준 존재라 여겨졌다. 데미안이나 피스토리우스와는 다르지만 벡 역시 크로머보다는 온건한 모습의 인도자였다고 생각된다. 크나우어는 그 누구보다 현실에 뿌리내린 인도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싱클레어 자신이 자신에게 갖는 심경 전반이 통합된 기대와 평가를 크나우어를 통해 다시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데미안과 에바 부인이 보이는 변성의식 상태의 양상을 청년이 된 싱클레어도 보이는데 이들 간의 교감과 영성적 소통이 크게 의아스럽게 보이지도 않는 건 오랜 세월 동안 이와 같은 류의 가르침들과 가까워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싱클레어의 정신을 성장시킨 건 크로머와 벡이 한 축이고 데미안, 에바 부인, 피스토리우스가 반대편 축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크나우어와 싱클레어의 부모는 그사이 경계에 있는 인물들이고 말이다.
그들에게 찾아온 전쟁은 사람이 자성하고 자각하고 성장한다고 해도 결국 세상이라는 변화는 주도해서 막거나 혁신시킬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일깨웠다. 자신의 깨달음과 깨우침이 전 우주적인 가치를 갖는 것만 같겠지만, 소수가 다수의 집단무의식을 자극해 가져온 인류적 차원의 변화나 재앙은 단 한 사람 또는 몇몇의 깨달음만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데미안을 통해 인류의 연대기나 자신의 역사를 돌아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자기 나름의 남다른 통찰을 갖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문학 비평가들이 무슨 수식어를 가져다 붙인다고 해도 데미안은 사람에게 성장이란 무엇인가 성숙이란 어떤 가치일 수 있는가를 인물의 성장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감상이 가장 먼저 든다. 청소년기에 한 번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 또 한 번쯤 다시 읽어볼 만한 소설이 아닐까 싶다.
여기까지 성장소설이란 방향에서 다소의 얕은 감상만 남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 사이의 카인과 아벨에 대한 대화에서 시작되는 긴 여정에 주목한 감상을 남기자면 너무도 장황한 언변들이 이어져야 할 것 같기에 성장소설과 심리에 대한 짧은 감상만을 남긴다. [밑줄 긋기]
-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면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양, 그래서 어떤 인간사를 훤히 꿰뚫어보고 이해하며, 신이 자기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라도 하듯 그렇게, 아무것도 은폐하지 않고 어디서나 의미있게 서술할 수 있는 것처럼 굴곤 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작가들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어떤 작가에게 자신의 얘기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내게는 내 이야기가 중요하다. 그건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이자,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자, 그 길로 가고자 하는 시도이며, 어느 좁은 길에 대한 암시라고 하겠다. 일찍이 그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누구나 그렇게 되려고 애를 쓴다. 누군가는 막연하게, 누군가는 보다 확실하게,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애를 쓴다.
“새는 힘들게 싸워 알을 깨고 나온다. 그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숴야만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데미안이 남긴 쪽지에
“... 만일 자연이 당신을 박쥐로 만들었다면 자신을 타조로 만들려고 해선 안 되겠죠. ...” - 피스토리우스
“지금 우리가 아브락사스라는 이름을 붙여준 우리의 새로운 신앙은 아름다워요. 친구여, 그 신은 우리가 가진 최상의 것이라오. 그런데 그 신은 아직 젖먹이죠!. ...” - 피스토리우스
“그래, 넌 내게 멋진 성자지! 네게도 죄악이 있다는 걸 난 알아! 현자처럼 행동하지만 나와 모든 사람처럼 똑같은 오물에 비밀스레 매달려 있지! 넌 돼지야. 나 같은 돼지라고, 우린 모두 돼지라고!” - 크나우어
나는 전에 자주 미래의 형상들과 유희했었다. 어쩌면 시인이나 예언자로서 또는 화가나 다른 어떤 것으로서 내게 배정되어 있을 역할들을 꿈꿨었다. 그런 건 모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짓거나 설교를 하려고, 그림을 그리려고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건 모두 부수적인 결과로 생겨날 뿐이었다. 각자에게 진짜 소명은 단 하나였다. 그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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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에 대한 사유와 통찰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을 읽고
"새는 힘들게 싸워 알을 깨고 나온다. 그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숴야만 한다."
-유년 시절을 지나 중년에 다시 만나게 된 책 <데미안>-
"새는 힘들게 싸워 알을 깨로 나온다. 그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숴야만 한다.
이 문장은 너무나도 유명하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세계문학 작품인 『데미안』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다.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 자아성장, 존재의 인식, 자아와 세계와의 갈등 등 이 한 문장을 통해 여러가지 해석들이 분분하다.
새가 알에서 부화하는 과정과 인간이 어미의 자궁에서 나와 태어나는 과정 등 그렇게 자아가, 존재가 세상을 만나는 과정은 그렇게 힘든 과정이 수반된다. 이 책『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 또한 데미안을 만나면서 자아 성장과 존재의 인식을 하게 된다.
두 가지 세계인 '밝음'과 '어둠'의 세계, 선과 악의 세계, 크루머의 세계와 데미안이 존재하는 세계 이렇게 상반되는 세계의 대립 속에서 싱클레어는 자아가 미성숙한 '어린 나'에서 데미안을 통해 자아를 성숙하고 깨어있는 존재인 '성숙한 나'로 성장하게 된다. 그런 자아성장의 과정을 헤르만 헤세는 주인공 싱클레어를 통해 보여준다. 그 모습은 정말 새가 알에서 부화하는 과정처럼 힘들고 자아성찰이 요구된다.
그런데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어미 닭이 밖에서 쪼고 병아리가 안에서 쪼며 서로 도와야 알이 순조홉게 완성되는 것을 의미하는 '줄탁동시'라는 말처럼 라는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 속에 밖에서 알을 깨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 조력자가 바로 데미안인 것이다. 그렇게 싱클레어는 데미안으로 자아를 인식하고 자아가 깨어있게 된다.
그 깨어있는 자는 데미안이 말한 '카인과 아벨'이야기에서의 카인과 같은 자, '탁월함'과 같은 특별한 표시를 가진 카인의 후예들이다. 데미안에 따르면 그 표시를 가진 자들은 서로 알아보고 만나게 된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만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카인의 표시를 가진 용기있는 사람들과 아벨과 같이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 세계는 서로 공존하며 맞닿아 있다.
"그런데 가장 신기한 건 이 두 세계가 서로 얼마나 맞닿아 있는가. 얼마나 가까이서 공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p. 15
이렇게 공존하고 서로 맞닿아있는 세계가 지향하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 문장에서 알 수 있다
"새는 힘들게 싸워 알을 깨로 나온다. 그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숴야만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나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르락사스다. -p. 146
책 속에는 다소 종교적인 내용과 철학적인 내용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다소 데미안이 이야기하고 있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와 같이 성경 속 내용들에 대한 해석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 내용과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헤르만 헤세는 칼 융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있는데 이 '아브락사스'는 칼 융의 저서인 <죽은 자를 위한 7가지 설법>에서도 언급된다. 그 책에 따르면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립되는 개념들 그 너머에 존재하며, 그 어떤 신보다도 가장 불분명하고 초월적인 존재라고 한다 또한 칼 융은 아브락사스를 자신의 저서에서 인간이 내적으로 성장해 자아를 형성하기 위한 통합, 성숙, 일체화의 과정을 추진하는 힘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책 속에서는 오르간 연주자인 피스토리우스의 말 속에서 우리는 아브락사스의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이 의미를 깨닫게 되고, 데미안이 말한 존재의 의미도 알게 된다.
우리의 신은 아브락사스입니다. 그는 신이자 악마예요. 그는 밝고 어두운 세계를 다 자기 속에 갖고 있죠. 아브락사스는 그대의 생각과 그대의 꿈들 중 어느 것에도 반대하지 않아요.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마세요. 그러나 그대가 흠잡을 데 없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면, 아브락사스는 그대를 버릴 겁니다. 그럼 그 신은 그대를 떠나 자신의 사상을 끓여낼 새로운 냄비를 찾게 되겠죠." -p. 175
이렇게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떠나서라도 우리가 이 책 『데미안』을 사랑하는 이유를 이 책을 통해 존재에 대한 사유와 통찰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둘러싼 세계는 어떠한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 나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자아성찰을 하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자아 성장을 가능하게 해 줄 존재를 만나게 된다. 그 존재가 데미안과 같은 친구나 선배 또는 부모, 선생님일 수도 있고 이 책 『데미안』과 같은 좋은 책일수도 있다. 아마 그래서 이 책이 중학생 필독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년 시절에 만난 『데미안』과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 다시 만난 『데미안』은 분명 달랐다.
항상 이 책 『데미안』은 나에게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책이었다. 역시 중년에 다시 만난 『데미안』도 쉽지 않았다. 삼독이었음에도 말이다. 언제쯤이면 이 책 『데미안』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히자만 새가 알을 깨고 세계를 만나듯, 이 책 『데미안』에 대한 나의 이해도도 조금씩 성장함을 느낀다. 나이가 들고 삶의 경험이 쌓이고 나의 존재에 대해 자각하게 되니 그나마 『데미안』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어렵긴 하다.
하지만, 이제서라도 다시 『데미안』을 만나서 너무 다행이고 감사하다. 30년의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나게 된 이 책 『데미안』 덕분에 다시금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다시 나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처음 던진 질문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30년이 지나 중년이 된 나에게 다시 던져본다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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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세 떨다가 수습 못하겠어 차라리 죽어버렸다면 ㅠㅠ 하던 극단적인 사고회로의 어린애가 사춘기 씨게 와서 중2병 토크에 과몰입하는 과정을 본 느낌 청소년기에 읽었으면 감상이 달랐을법도 하지만 이제 와서는 그냥 사이비.. 금단의 사랑 이런 것들만 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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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유명한 작가의 유명한 글이기 때문에 그 내용에 대한 언급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인문학 분야에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이 넉넉하게 쌓이면서 어떻게 해야 알차게 사용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던 차에 우연히 만나게 된 반가운 책이었습니다. 감각적인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들고, 오랜만에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볼 겸 대여를 해 봤습니다. 결론적으로 만족스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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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헤르만 헤세의 마음을 담아낸 심오하고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작품을 통해 느낀 점은 마치 우리 자신의 성장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 마주하는 여러 시행착오와 자기 탐색 속에서 숨겨진 진리를 발견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데미안의 내적 탐험은 독자에게 끊임없는 도전과 성장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그의 여정은 마치 우리 자신의 모험과 연결되어 있어, 작품을 통해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즐거움에 공감하게 됩니다. 헤르만 헤세의 문체는 감성적이면서도 철학적이며, 이는 독자에게 깊은 생각을 안겨줍니다. 작가는 데미안을 통해 우리가 어려움과 실망을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더 큰 의미를 찾아 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는 현실의 우리에게 큰 용기를 주며, 자아 찾기의 고민에서 태어나는 성장과 깨달음에 대한 묘사가 독자를 감동시킵니다. "데미안"은 마음의 여정을 탐험하는 데 있어 깊은 고찰을 선사하는 작품으로, 현대 독자에게도 여전히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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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헤세 작가님이 쓰신 데미안을 읽고 난 후 작성하는 리뷰입니다."데미안"은 마치 우리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을 하는 것처럼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주인공 데미안이 자아를 찾아가면서 겪는 성장과 모험이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거 같았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글씨는 마치 마음의 미로에 빠져든 것 같아서, 그 안에서 여러가지 감정이 끓어올랐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과 솔직하게 대화하게 되는 느낌이 들었고 작가가 다루는 주제들이 현실적이면서도 깊은 감성을 자극하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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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저/김연신 역 [데미안] 리뷰 입니다. 명작에는 이유가 있네요 엄청나게 몰입해서 순식간에 읽었습니다. 10살의 어린 주인공이 스무 살 청년이 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주인공의 고독하고 어려운 상황들이 너무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안쓰러웠습니다ㅠㅠ 어떻게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청춘들을 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과는 위태로운 청춘의 이야기였고 다들 한 번 꼭 읽어보면 좋을 작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