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단순한 설명이 최선'이라는 오컴의 면도날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요즘, 유투브 등 웹 상에는 어려운 과학 원리나 경제 이론 그리고 심지어 철학에 관해서도 친절하고 간략한 그러면서도 명료한 설명들이 넘친다. 그렇다고 이러한 설명이 부실한 것이냐 하면 오히려 정 반대다. 실제로, “진실은 항상 단순함에서 찾아야 한다. 복잡성과 혼란이 아니라.”는 아이작 뉴턴의 말처럼 진실은 단순함에 있으며 길고 복잡한 설명은 늘 거짓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추구와는 정반대로 비문(非文)을 남발하며 쓸데없이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고약한 글쓰기가 횡행(橫行)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미술계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는 수식이 포함된 매우 어려운 개념이지만 이제는 여러 시청각적 설명으로 정말 놀랍도록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반면, 비문(非文)으로 이루어진 미술 평론이나 미술관의 전시 글은 이해자체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닌 매우 해롭고 위선적인 것이다.
저자의 이 책이 미술계의 그런 관행적인 글쓰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이러한 미술 풍토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듯하다. 그러나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최선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름, 진심으로 비문을 배제하고 간략하게 쓰려한 노력이 엿보이나 중간 중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난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는 일부러 그러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불필요한 전문용어 아닌 전문용어들의 사용이 눈에 띈다.
일단, 이 책에서 제일 많이 사용되는 단어인 “커뮤니케이션”과 “무지”라는 말이 그냥, 일상적으로 흔히 쉽게 쓰이는 단어임에도 마치, 이것이 무슨 전문 용어라도 되는 양 장황하게 설명하고 복잡하게 규정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독자는 저자의 의중을 이해하기 위해 일상용어가 아닌 전문학술(?)용어로서의 “커뮤니케이션”과 “무지”를 번역해야하는 수고로움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프록터(Robert N. Proctor)의 무지학(Agnotology)의 내용(p.245~248)까지 정녕 알아야만 저자가 하고픈 말을 이해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길고 지루한 설명 끝에 결국, 저자가 하고픈 말은 의외로 너무 간단하고 조금은 식상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답답해하며 나름 제시한 해법은... 사람들이 하도 “나는 미술을 모릅니다.”라고 하니, 자꾸 그러면 이익을 취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미술계의 카르텔이 공고해지고 막강해지므로 정답을 찾지 말고 자신의 시각으로 창의적 모험을 떠날 용기를 가지고 창의적 “앎”의 세계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마치, 선거 때 기권하지 말고 투표하라는 거하고 비슷하다. 다만, 참여 독려 글이 너무 길고 지루하다. 이래서야, 장사가 되겠나 싶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
|
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전에 나는 미술이라고 하면 동양화나 미켈란젤로 같은 그림들이 미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장에서 소개하는 뱅크시는 원래 알고 있었던 화가이지만 책을 읽으며 더 자세하게 알게 되어 좋았고 이 책 내내 들었던 느낌은 미술이란 것을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라는 느낌이었다. 그냥 보기에 이쁘다고 해서 미술은 아니다. 난잡하기만 한줄 알았던 그림도 작품 해석을 들어보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미술을 좋아하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미술을 아는가 라는 질문엔 모른다고 답하였다. 이것에 관해서는 나도 모르지만 남들 대부분도 모를 것이라는 믿음이 기반되어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애초에 미술을 알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뒤의 내용은 나에겐 아직 어려운 내용이라 제대로 읽지 못하였다. 읽었긴 했지만 머리속에 남은 것은 하나도 없는 거 같다. 1장 2장만 읽어도 나름 의미있는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
|
저자가 진단하는 동시대의 미술은 산업의 가치 속에 종속되어 창작과 해석에 대한 무지와 창의 관계성을 잃고 헤매는 중이다. 예술을 받아들이는 대중의 반응 중 흔히 관찰되는 사례는 보통 두 가지이다. 우선 계급적 구별 짓기와 과시 열망의 표현 수단으로써 예술과 진리에 관한 관심보다는 예술의 실용적 효용을 잘 파악한 경우이다. 유명 전시회에서 찍어온 사진을 인스타 등에 SNS에 업데이트한다. 또 다른 사례로는 '미술은 잘 모르지만...'이라는 서두로 겸양하는 사람들로 동시에 미술에 대한 적극적 무지를 당당하게 표현한다. 집단적이며 자발적인 무지의 태도를 유지한다.
저자는 기국간은 학부에서 순수회화를 전공하고 한양대학교에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방일보 서기관으로 국방일보 편집인으로 있으며 한양대, 동국대, 충남대 등 출강하고 있다. 이 책 <미술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매체, 메시지로서 미술을 이야기하고, 미디어 기술 발전에 따른 미술 커뮤니케이션 변화를 설명하고자 한다. 대중화를 지향하지만 동시에 대중성을 꺼리는 동시대 미술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흥미로운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바탕으로 동시대를 지배하는 미학적 지식의 성격과 그 배 후에 존재하는 이념적 내막을 살핀다.
이 책을 읽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저자가 말하는 '동시대'와 '미술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개념부터 이해해야 한다. 미술에 있어서 '현대'와 '동시대'라는 개념은 실제로는 혼용되고 사용되고 있지만 현대 미술과 동시대 미술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통상적으로 '현대(modern) 미술은 20세기 전반부부터 후반부까지의 작품을 지칭한다. 이 시기의 미술은 다양한 예술적 운동과 실험적인 작업들이 등장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동시대(contemporary) 미술은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까지의 작품, 즉 그 이후의 현대적 예술작품을 일컫는 용어이며 컨템퍼러리 아프, 혹은 동시대 미술이라는 용어이다. 다시 말해 동시대 미술이란, 현재 우리 시대가 공유하고 있는 미술 전반을 일컫는 용어이며 당대의 시대성을 담아내는 미술이라고도 한다.
'미술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용어는 저자 기국간이 이 책을 통해 처음 제시한 합성어이다. 이 책의 <2장 미술 커뮤니케이션의 이해>에서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생산하는 가치 생산수단으로서의 미술과 그 가치를 공유하고 전달하는 과정, 즉 의미의 생성과 공유의 과정으로서 커뮤니케이션을 합쳐 '미술 커뮤니케이션'이라 칭했다.'라고 설명한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미술'은 커뮤니케이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 즉 매체의 역할을 포함하여 미술관이나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이자 예술가의 가치를 설명하는 광고 메시지, 혹은 산업의 구조에 속한 제품으로까지 확장된다.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한 저자는 커뮤니케이션 기본 개념과, 이론, 모형(본인이 변형한 모형을 포함), 과정 등을 정리하여 독자에게 설명한다. 그리고 나서는 미술과 예술 분야에 커뮤니케이션을 접목하고 동시대 미술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드러난 비판적 논의로 책을 전개한다. 책 전반에서 현대인은 유독 미술에 대한 앎에 소극적이고 되레 무지에 당당하며 집단적이고 자발적인 무지를 선언했다고 꼬집는다. 관람자인 대중은 무지하고 작품의 창작자는 산업의 가치에 종속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동시대 미술 보여주는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깊은 반성을 촉구한다.
미술은 동굴 벽화, 고대 조각 등 문자보다 먼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존재했다. 이 미술 커뮤니케이션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존재하나 대부분 전통적인 미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 연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미술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가진 연구자나 교양 있는 특정 계층이 아닌 경우에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작품 설명과 해석들은 대부분의 대중을 미술 커뮤니케이션에 소외되도록 이끌었다. 이 책에서는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솔직한 답을 제공한다. "세상의 그 무엇이든 미술계 커뮤니티가 예술이라 부르는 행위로 인해 비로소 예술이 된다고 말한다. 평론가는 고귀한 감성과 철학적 지식으로 포장하여 예술이라 부르고, 미술관은 작품의 전시를 허락하며 예술의 성스러운 세례를 내린다. 시장은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여 예술의 가치를 확인시키고 그 마지막 대중에 허락된 것은 그들이 정한 예술작품에 감탄해야 하는 일뿐이다.(p269)"
저자는 미술은 영원할 것으로 생각해도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미술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창의적 시각이어야 한다. 기술에 기대어 자신의 시각을 잃어버린 채 남들 다 가는 전시회라서, 인스타에 찍어 올리면 그럴싸해 보이는 전시회라서 시간과 돈을 들여 미술관람 소비를 하는 우리에게 이 책은 그 민낯을 해부하여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독자로써 덧붙이고 싶은 말은 이 책에서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 이론, 미학, 문화비평, 사회학, 현대철학 등 여러 분야에 대한 소개가 매우 유익하였다는 것이다. 최근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기나긴 혁명>을 함께 병렬 독서하고 있는데(이 책에서도 당연히 등장한다) 이 두 책이 상호작용하면서 나의 읽기를 좀더 촘촘하게 해주어서 매우 고마운 심정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
#곰탱이 #독서 #독후감 #미술커뮤니케이션 #기국간 #박영사 #YES24리뷰어클럽
“미술 커뮤니케이션스”, 기국간 글, 박영사, 2023
난해하다. 일반 교양 도서가 아니고 전문 도서같은 느낌이다. 아니 논문을 책으로 편찬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미술이라는 것에 대하여 제공자 즉 창조자와 관람자 사이의 관계를 “미술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매채를 통한 소통에 관한 논총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현대인들은 예술 특히 미술을 사랑한다. 지금의 시대에서는 영화 산업도 크게 발달되어 많은 관중들을 몰고 다닌다지만 미술 또한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 나서는 또 하나의 산업의 장이 되어 가고 있다. 실질적으로 미술에 대하여 잘은 모른다고 전제하면서도 꾸준하게 유료 무료 전시장들을 찾아 나서는 많은 이들을 볼 때마다 문화도 특히 미술도 이제는 대중화의 길로 들어 서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종종 덕수궁 옆의 시립미술관이나 덕수궁 안의 미술관을 찾아 보면 상당히 많은 관람객들이 예술품들을 감상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관람... 저자는 관람자의 입장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한다. 먼저 “무지”라는 단어로 “나는 잘 모르지만, 잘 모르는데...”하면서 미술을 감상한다. 나 역시 미술은 잘 모른다.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내 멋대로 해석하고 내 멋대로 상상하고 내 멋대로 감상하고 다는 천방지축형 관람객이기에 “ 잘은 모르지만..”으로 시작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는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이미 인터넷상으로 이론적인 문자적인 작품의 내용들을 알고 그 문자들을 확인하려는 것이 지금의 관람이 아닌가 한다. 틀렸나 그렇다면 진정한 관람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작가의 창조성을 찾아내는 것이야 말로 작가의 의도와 공통적인 생각의 교점을 만날 때에야 진정한 작품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지금은 문화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경제성을 가지고 작품을 평가하고 있다. 자연스레이 미술작품도 역시 경제성을 가져야 대가가 될 수 있고 거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다. 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작태가 싫은 것은 아닌지? 하기사, 작품에 큰 값이 정해져야 그 작품은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작품의 예술성이 증명되는 것이 현재의 실태가 아닐까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줄지언정 팔지 않았던 작가를 알고 있다. 사후에 그는 유족을 통하여 공공기관에 작품들을 정리해서 기중하여 괜스레이 전시를 통하여 개방하고 있다. 이런 분은 실패한 작가일까? 아니면 괴팍한 작가일까? 아니면 일반인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한 작가일까.
저자는 또한 예술의 위치 변동이 크게 변화 되어져 커뮤니케이션의 다양화가 이루어지고 잇다고 보는듯하다. 사진이 예술인가? 미술인가? AI 로 대량 생산 되어지는 작품도 예술일까? 또한 일상생활에서의 기기들이 용기들이 전시장에 들어서면 예술이 될까? 시장에서 몇 천원 몇 만원에 통용되는 그 기기가 미술로 둔갑하면 몇 천만원 몇 억으로 가격이 뛰어 오르는데... 과연 이것을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하여야 하나
저자는 프럭터의 논조를 이용하여 관람자 스스로가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수동적인 무지를 가지고 미술을 접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무지에도 원천적인 무지로 순수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 전략적 무지로 특정 지식에 대한 무지 그리고 수동적 무지 즉 주체가 무엇을 알고 이해할지 범위를 정하고 선택하는 무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지금 우리는 수동적인 무지를 이용하여 미술과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아마도 그 전제가 옳을듯싶다. 내가 스스로 범위를 정하여 놓고 그 부문에 대하여만 관심을 가지며 마치 그 부문에 한 전문가인양 아니면 이해자인양 아니면 창조자와 교감을 한 것같이 예술을 미술을 평가하고 있지 않을까나...
어렵다. 역시 이것은 미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다시 한번 더 읽어 보고 싶어지는 책이다. 한번 읽고서 무엇인가 놓치고 있는듯한 미련이 남아서 다시 한번 더 읽어 보고 싶어지는 책이다. 창조적 미술 작품을 대함에 나를 돌아보면서 무지에서 벗어난 새로운 소통의 눈으로 보고 싶어진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
미술 커뮤니케이션이란 제목만으로 미술이야기와 미술을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책장을 넘기면서 내가 이 책을 오해했구나 싶었다. 이 책은 단순한 미술과 미술을 감상하는 태도와 그 메세지를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역할만 나열한 책이 아니라 철학책이였다. 예술이라는 것을 빗대어 작가는 말하고 있지만 예술이 아닌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도 사유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예술가들은 미술관의 권위를 이용하여 마음껏 대중을 우롱할 특혜를 받는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작가가 가진 자신의 생각을 여과없이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졌다. 미술에 대한 무지를 이용한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하는 기준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꼬집으면서 말이다. 동시대의 미술이 예술적 가치를 가지기까지 현대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의 영향력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통적 가치 판단 기준은 사라지고 새로운 가치의 기준이 형성되었다. 유통 메커니즘의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는 사라지고 갤러리스트의 스토리텔링에 의해 작품의 가치 기준이 변할 수 도 있다. 작품의 가치는 결국 돈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꼭 돈이 가치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작품의 가치를 증명할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는 감상의 가치를 스스로 느끼는 감정 보다 평론가들의 써놓은 해석을 통한 이해로 미술의 앎을 느끼는 것을 꼬집고 있다. 예술이란 느끼는 감정일텐데 보고 난 후 글을 통해 이해 한다는 이 모순적인 형태에 대한 비판 아닌 비판도 참 와닿았다. 내가 미술관에서 느낀 감정과 평론가들이 써놓은 숨겨진 의미들을 보면서 그 틀에 끼워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야 미술을 이해한 사람이 되는 무지에서 앎을 터득한 사람이 되는 그 모순을 꼬집어 놓은 것에서 작가의 통찰력을 느꼈다. 작가는 미술이 가지고 있는 역설을 풀어 놓으면서 독자들이 미술에 대한 자신들만의 창의적 감상을 구축해 나가길 기대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미술에 대한 생각, 현대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태도들에 대한 깊은 공감을 하면서 정치, 예술, 문화 그리고 관계안에서도 빗대어 생각해볼 만한 책이라고 여겨졌다. 따라서 이 책은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
갈수록 과학은 발전해 가고 있다.
미술을 관람할 때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세하고 세세한 관찰과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소신 있는 용기가 커뮤니케이션 과정의 메시지 수신자와 생산자 모두에 필요한 시기. YES24 리뷰어 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
<이 리뷰는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박영사 출판, 기국간 지음의 『미술 커뮤니케이션』은 미술이라는 예술 형태를 바탕으로 현시대의 문화예술 상태를 진단하는 책이다. 이 책의 서평단에 신청했던 이유는 표지에 쓰인 "기술의 발전, 예술의 몰락"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고전적인 예술이 복사 가능해지면서 원본의 독창성과 원본성이라는 '아우라(Aura)'를 상실한다는, '아우라의 몰락'을 말했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이론에 평소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떠올리게 하는 문구가 호기심을 일으켰다. 책의 내용은 예상했던 바를 중점적인 문제로 삼고 있었으나 흥미로웠던 점은 현재 대중들이 '미술'이라는 예술 형태에 가지고 있는 '무지'의 선언을 오늘날의 기술 발전과 연계하여 난해해진 예술과 그것을 감상하는 수용자의 태도에서 사라진 창의성의 복원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술의 발전으로 고전적인 예술작품이 얼마든지 디지털화되어 복사가 가능해진 것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미술이라는 예술이 단순히 전통적인 방식처럼 캔버스와 물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로 형성되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미디어화된 예술의 원본성과 독창성에 대한 고민과 함께 고도로 난해해진 미술 형태를 언급한다. 현대 미술이란 작가나 비평가의 해석이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 되었고, 오늘날의 대중들은 그 어느 때보다 미술이라는 예술 형태에 관심을 가지고 폭발적으로 응하고 있으면서도 미술에 대한 '무지'를 고백한다. 이를테면 '미술은 잘 모르지만, 미술을 좋아해요' 같은 말들이 누구에게서나 발언되고 있고, 그런 무지에 대한 고백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라는 것이다. 여타의 다른 분야에 대해 무지를 고백한다는 부끄러운 일이 되지만, 미술에 한해서 만큼은 오히려 아는 체를 하는 것이 꺼려지는 분위기가 미술 분야 전반에 퍼져있다. 난해해진 미술 형태와 분위기 속에서 대중들은 자기만의 방식과 느낌으로 미술을 감상하는 능력을 상실했고, 더 이상 창조적인 수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비판한다.
'미술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용어는 '미술(art)'과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을 결합한 합성어로 저자가 처음으로 제시하는 용어이다(86). 기술과 함께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며 발전하는 미술이라는 예술을 "대상과 대상 사이의 정보 교환과 효과, 이해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인 커뮤니케이션학의 이론들에 기초하여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생산하는 '가치 생산수단으로서 미술'과 그 가치를 공유하고 전달하는 과정, 즉 '의미의 생성과 공유의 과정으로서 커뮤니케이션'을 합쳐 '미술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칭한다(87). 이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 생산자와 그것을 감상하는 수용자 사이의 창조적 의미의 순환이다. 현시대의 미술은 비평가의 해석 없이는 이해하기 힘들고, 수용자 역시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무지를 쉽게 고백한다. 미술에 대한 대중의 무지적 인정이 오히려 미술 분야의 비평가들에게 절대 권력을 유지하게 해준다. 예술이 사람마다 제각각 느끼는 것이고, 개인의 감상이 다 다른 것이라면 왜 미술에서는 그러한 관객 개인의 감상이 용인되기 힘든 것일까? 아니면 본인이 느낀 바가 비평가의 해석과 다른 것을 쉽사리 드러내기 힘든 분위기이기 때문일까? 저자는 예술의 의미있는 발전을 위해서는 비평가의 텍스트에 의존하지 않는 수용자의 독창적인 감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예술이 수용자의 의미생산과 공유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수용자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위로부터 관리되는 문화의 수용자"가 아닌 "자발적인 문화의 생산자"(238), 즉 '능동적 수용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성 고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무지'에 대한 개념을 철학적으로 탐색하며 수용자의 무지성 고백이 앎에 대한 추구를 동반하지 않은 차단된 무지가 아니라 학습 동기를 유발하는 무지, 광활한 수용성을 바탕으로 한 무지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음으로써 자신이 아는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앎에 대한 추구를 이어가는 것. 그것이 바람직한 무지의 상태이며 수용자와 생산자, 예술 전반을 건강하게 지속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이 책은 현시대의 난해한 미술 형태들을 짚어가며 고민하고, 비판도 하면서 예술 수용자를 분석하고, 나아가 건강한 미술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극복해야 할 무지의 신화를 철학적으로 탐구한다.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는 5장에 있는 '미술 커뮤니케이션 현상과 분석" 부분인데, 해당 장에서 저자는 미술 전공자로서 현업에 있는 사람들과 비전공자들을 인터뷰하여 현시대의 미술 현황과 상태를 분석한다.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미디어로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던 예술의 이미지가 아닌 미술 업계의 낯면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가 미리 고지하듯이 기존의 미술에 대한 관념을 버리고 읽어야 할 필요가 있고, 미술 분야 연구자라면 쉽게 읽히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지'와 '창의'의 관계를 발전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비단 미술이나 예술 뿐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이야기이기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앎을 추동하는 '무지'의 상태를 인정하는 창조적인 수용자의 태도는 곧 의미와 가치의 생산자로도 연결된다. 수용자의 창조적인 의미 생산은 다른 말로 또 다른 가치 생산이기 때문에 수용자의 창의성은 곧 생산자의 창의성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순환이 미술만이 아닌 모든 영역에서 잘 발휘된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풍성하고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