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캉디드》는 18세기 당시 유럽에 만연하여 남용되고 있던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쓰여진 소설이다. 나는 예전에는 낙천주의란 개념을 보통 어떤 사람에게 ‘낙관적이다, 낙천적이다’라고 평가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캉디드》에서 ‘캉디드’가 몸소 ‘비판해주는’ ‘낙천주의’란 개인의 성격과 기질에 대한 것이 아니고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에 관한 시각이었다. 낙천주의란 더할 나위 없이 가장 좋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은 최선을 위해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그러한 낙천주의를 너무나도 강력하게 스스로 부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리스본 대지진이다. 캉디드의 여정은 볼테르의 낙천주의 이론 비판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여행을 통해 볼테르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서 낙천주의 이론이 통용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캉디드는 갖은 고통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사랑하는 퀴네공드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 실낱같은 희망에 의지하여 여행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 여행 과정은 언제나 그를 실망시키며 고통에 빠지게 한다. 그 스스로도 이 세상은 그의 스승 판글로스가 주장하는 만큼 그렇게 가장 잘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자신의 입으로도 스승의 말과 어긋나게 모든 것이 잘못되어 나가고 있음을 느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항상 포기 직전에서 판글로스라면 그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했을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는 캉디드가 무모한 낙천주의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했지만 극도로 처절한 상황에서도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못했다. 그가 겪은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이 좋은 결과의 원인이 된 것처럼 잘못된 인과관계 추론을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면서까지도. 그러면서도 그가 낙천주의를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의지의 원천인 퀴네공드에 대한 사랑 또한 경이롭게 느껴졌다. 캉디드는 퀴네공드에 대한 사랑으로 현실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그녀의 미에 의한 것이었다. 낙천주의는 이 세상이 최선으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외관상으로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퀴네공드가 추하게 변한 후 쉽게 식어 버린 캉디드의 사랑은 낙천주의에 대한 캉디드의 믿음과 의지가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는 낙천주의가 기대 설 수 있는 토대가 얼마나 빈약한지를 볼테르가 비판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볼테르가 생각하는 행복의 이상은 가공의 이상국인 ‘엘도라도’로 잘 묘사되어 표현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엘도라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더라도 아무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볼테르는 낙천주의를 패배시켰고, 이로써 이 세상 -또는 신- 에 대한 무조건적인 예찬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뜰’을 경작하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다분히 희극적이다. 《캉디드》에서 가장 지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판글로스마저도 유아적인 발언을 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을 늘어놓는 데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또한 희극적인 표현이 그 정도를 감소시키고는 있으나 매우 과격한 표현들이 눈에 띤다. 우리와 많은 점에서 다른 유럽 사회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는 없으나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당시대인들의 가치관이나 의식 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캉디드》는 볼테르의 저작 중 가장 통렬한 풍자와 비판으로 쓰여진 글이라고 하기에 《캉디드》에 나타난 시대상들이 비판을 위한 풍자에 의해 왜곡되고 과장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문 또한 든다. 자칫 쉽게 웃어넘길 수 있는 가벼운 내용처럼 보이는 이 소설이 그렇게도 심오한 비판과 인간사에 대한 통찰로 쓰여졌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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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재밌게 읽은 소설이다. 격식을 차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완숙한 볼테르의 철학사상'이 묻어나는 그의 대표작이며, '합리성의 내적 허구를 돌발과 우연성에 의해 무너뜨리는' 최고의 작품인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말로 칭찬할 것 무엇 있겠는가. 글 자체가 그렇지 않은데. '현 세계가 최선의 세계' 라고 배우고 믿고 자란 젊은 청년 캉디드는 사랑 때문에 그가 자라오던 성에서 쫓겨나 세상을 여행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와 잔혹한 인간 성품을 경험하게 되고, 죽을 뻔한 고비와 인생을 더 비참하게 살아온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최선의 세계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살아가게 되는 과정이 소설의 내용이다. 하지만 이런 요약된 스토리는 의미가 없다. 이 소설이야말로 직접 읽어서 맛봐야하는 글로 가득하니까.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소설이다. 어설픈 농담이 아니라 아이러니한 인간의 삶과 한심한 인간의 본성을 풍자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한다. 읽는 것도 전혀 부담이 없고 웃음에도 전혀 지저분함이 없다. 단지 [인간이란 것은,.] 하며 비웃어주면 된다. 이렇게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자신이 한심하다.
그냥 이런 식이다.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인생이 파탄났는데, 간신히 여인을 다시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고 나중에는 간신히 다시 만나서 자존심이랄까, 일이 꼬여서랄까, 불쌍한 신세가 되고 이젠 아름답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은 옛 연인을 데리고 살아주려고 하는데 옆에서 그의 오빠가 귀족이니 으쓱대며 반대하고 나오는 식이다. 설명력이 모자라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저자의 글 솜씨가 너무 뛰어나서 요약하는 것조차 내겐 역부족이다. 그의 글은 요즘 날리는 웬만한 필진들의 글보다 훨씬 멋지다. 읽으면서 이런 식으로 비꼬는 방법도 있구나, 라며 수시로 감탄했다. 별표를 주라면 5개 중에 5개를 주고도 아쉬워 할 소설이었다. [인상깊은구절] 그 발언은 새로운 성찰을 낳았다. 인간은 근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거나 아니면 권태로 무기력한 상태에서 살게끔 되어 있다고 마르탱은 특별히 결론지었다. 캉디드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아무것도 확실히 말할 수가 없었다. 팡글로스가 이렇게 고백했다. 정작 자신은 항상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지만 한 번 모든 것이 최선으로 되어간다고 말한 뒤로 그 이론을 계속 주장하고 있을 뿐이며, 실상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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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 제목은 들어봤지만 자세한 내용은 몰랐는데, 검색해보니 꽤나 흥미있는 얘기인 것 같군요.
일단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쓴 작품이라는 점에서부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일방적으로 한 면만을 믿고 고집하는 것의 불합리함과 부조리함을 풍자적으로 비꼬면서, 철학적 수양과 익살스러운 콩트까지 곁들여저 재밌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또한 생각하고 통찰할 거리를 주는 작품이네요.
책 자체는 오래전에 발간된 거라서 표지디자인은 별로지만 리뷰를 보니 주석도 꼼꼼히 친절하게 달려있다하고 읽기가 수월하다고 하니 번역도 성의있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표지나 나온 년도보단 알찬 내용이 정말 중요한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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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dide]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존재가능한 세계 중에 최선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의 증명에 대한 명백한 반증이다. 볼테르가 죽은 다음 세대에 등장한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는 존재가능한 세계 중에 "최악의 세계"라는 한 마디로 캉디드의 입장을 대변했다. 라이프니츠의 증명이 관념일 뿐 순전 엉터리라는 것은 주위를 잠시만 돌아보아도 알수 있다. 어떻게 이렇게 더럽고 잔인한 세계가 최선의 세계일수 있는가? 볼테르는 눈멀게 하는 현실을 소설 속에 몽땅 쏟아부으면서 어디까지나 학자일뿐인 라이프니츠를 비웃는다. 그리고 이 소설의 반증은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볼테르의 펜은 달리며 웃는다." 볼테르는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전근대적인 기득권층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모든 편지의 말미에 이렇게 쓰곤했다:"파렴치를 분쇄하라." 그러나 현실이 부조리하고 끔찍하기 때문에 신의 손길이 닿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던 볼테르가 더 순진했던 것은 아닐까? 볼테르가 숨이 넘어갈 정도로 공격하지 않아도 이 세계가 최선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수 있다. 이 혐오스러운 세상에서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 카뮈조차 <반항적 인간="">에서 인용했던 유명한 대사 -"자신의 뜰을 경작"하는 것뿐이라는 페시미즘이야말로 전근대적인 것은 아닐까? 부조리가 있기에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책상태는 옛날에 출간되어서 가격이 상대적으로 싼 것에 비해 좋은 편이다.반항적> |
| 내가 누군가의 말을 비웃기 위해 이야기를 쓴다면 이렇게 재미있게 쓸수 있을까? 볼테르는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를 비웃기 위해 캉디드의 모험이야기를 그려낸다. 서스펜스와 드릴, 진기한 구경거리와 신기한 세계의 모험이 아닌 진짜 18세기의 세계를 여행하는 모험담. 실재인물이었으면 몇번을 죽었겠지만 007처럼 캉디드는 불사조처럼 살아난다. 라이프니츠 (이책의 판글로스 선생님)의 철학이 옳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결국 처참함과 고통, 잔인과 추악함만이 가득한 세상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캉디드와 그의 연인 퀴네공드의 여정. 볼테르는 인생이 아름답고 완벽하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라는거다. 그자신이 이런 인생을 헤쳐나가려 돈버는데도 열심이고 이상주의 비웃는데도 빠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기 밭이나 갈아라.'하고 독자들을 내동댕이친다. 어쩌면 요새 우리들이 가진 인생관의 원본이 그의 현실적 가치관이 아닌지. 도저히 18세기 코믹 풍자소설이 아닌 것 같아 걱정이 된다.낙천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