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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모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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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접근하였으나 어렵게 읽는다. 이 책은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 를 따옴으로서 여운을 정리하고 싶다."나는 세상에 있는 많은 빛나는 것들을 배웠지.하지만 여전히 불행하네. 슬프고 실망스러운 것들을 많이 보았기에... 솔직히 말해서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야" "모든 것들이 빛나는 것은 아니라네. 하지만 빛나고 있는 것들은 모두가 그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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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접근하였으나 어렵게 읽는다. 이 책은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 를 따옴으로서 여운을 정리하고 싶다.
"나는 세상에 있는 많은 빛나는 것들을 배웠지.하지만 여전히 불행하네. 슬프고 실망스러운 것들을 많이 보았기에... 솔직히 말해서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야" "모든 것들이 빛나는 것은 아니라네. 하지만 빛나고 있는 것들은 모두가 그러하지"
i****9 2024.12.25.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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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모든 것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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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부터 19세기 작가인 허먼 멜빌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사의 중요한 저자들을 소개하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안내하는 에세이다. 이해하기 쉬운 사례를 인용해서 최대한 독자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배려했다. 아마 이 책을 읽고 서양 철학에 관심이 생긴 분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이름만 들
"책 이야기 <모든 것은 빛난다>" 내용보기

  이 책은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부터 19세기 작가인 허먼 멜빌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사의 중요한 저자들을 소개하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안내하는 에세이다. 이해하기 쉬운 사례를 인용해서 최대한 독자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배려했다. 아마 이 책을 읽고 서양 철학에 관심이 생긴 분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이름만 들어도 난해하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서양 철학사로 사람들은 인도하는 매력적인 안내서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입구까지만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자,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하고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이 책은 사람들은 서양 철학사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자기만의 목적지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책은 자기의 목적지로 사람들을 데려오는 게 우선이다. 다만 도착해보니 어? 이리로 가면 서양 철학사로 들어갈 수 있겠는데? 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기차역이 있는 마을이다. 목적지는 마을이지만 원한다면 기차를 타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이 생소한 사람에게도 트로이 전쟁이라는 말은 낯설지 않다. 그리고 트로이 전쟁에 대해 안다면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헬레나 라는 여자에 대해서도 알 것이다. 우리가 트로이 전쟁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는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라는 서사시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그리스 군에 참전했던 영웅 중 하나인 오디세우스가 고향인 이타카로 귀환하는 여정을 그린 서사시가 <오딧세이아>다. <오딧세이아>를 보면 남편을 버리고 불륜의 도피를 감행하여 전쟁의 불씨를 당긴 헬레나는 다시 남편인 멜레라오스의 아내가 되어 아무렇지도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그녀는 남편의 손님이 모인 자리에서 트로이 전쟁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영웅과 그보다 더 많은 남자들이 죽었고 여자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있다면 자기 입으로 전쟁 이야기는 못할 텐데 재미있었던 추억거리 이야기하듯이 무덤덤한 그녀의 태도가 놀랍다. 그러나 더 놀라운 건 그걸 듣고 있는 메넬라오스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도망간 이야기를 손님들 앞에서 본인 입으로 하고 있는데도 그는 아무런 모욕감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인 휴버트 트레이퍼스와 숀 켈리는 이것을 헬레나의 방종 혹은 도덕적 타락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헬레나의 이러한 태도는 그녀의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 감정이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통제하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항상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요즘에는 귀감일지 몰라도 호메로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이 버린 자일뿐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수한 신들은 각자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감정의 상징이다. 요컨대 헬레나가 파리스와 눈이 맞아 트로이로 도망간 것은 그녀의 내면이 타락한 게 아니라 파리스와 만난 그 순간 아프로디테가 그녀에게 강림한 것이다. 반대로 전쟁이 끝난 후 다시 그리스로 돌아와서 메넬라오스의 아내 역할을 하고 있는 지금은 그녀의 어깨 위에 헤라가 앉아 있다. 이 시대에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나 충동은 모두 외부의 신들이 내려온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감정이나 충동에 얼마나 솔직하게 응답하느냐는 곧 신들과 얼마나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로 평가되었다. 여염집 아낙이 아니라 스파르타의 왕비였던 헬레나가 모든 것을 버리고 트로이로 떠난 것은 타락이 아니라 반대로 아프로디테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다. 그래서 그녀의 행위는 비난받기는커녕 그리스 최고의 여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이 기조는 기원전 5세기 즈음에 변하는데 이때도 신화의 신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의미는 조금 달라진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가 쓴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보면 이 희곡의 등장인물들이 자기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신들의 의지로 움직이는 점은 여전하지만 과거와 달리 이 신들은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대신 국가라는 체제를 위해 봉사한다. <오레스테이아>는 아가멤논이 출정을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죽이자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아가멤논을 죽이고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자식들인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죽이는 이야기다. 아버지가 딸을 죽이고 아내에게 살해당한 뒤 자식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이 골육상쟁의 끔찍한 살육은 분노의 신이 강림하면 그의 명을 충실히 따르는 호메로스 시대의 신들을 반영하지만, 호메로스와 달리 아이스킬로스에게는 ‘목적’이 있다. 그건 바로 이들의 싸움을 통해 그리스라는 체제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마지막에 분노의 여신과 아테네는 서로 화해하는데 이 화해로 인해 원래 싸움을 일으키던 분노의 여신은 사람들 간의 화해와 조정을 주선하는 자비의 여신으로 변한다. 즉 싸움이 싸움으로 끝나던 호메로스 시대와 달리 아이스킬로스의 시대에 싸움은 국가라는 체제 속에서 통제되고 있는 것이다.


호메로스 시대에 자유를 누리던 인간은 아이스킬로스 시대에 국가에 복속되었다. 인간의 행동 양식을 통제하는 이러한 현상은 예수의 탄생 이후 심화되는데, 이때는 모두가 알다시피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모두 소멸하고 하나님이라는 유일신만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유일신이 인간에게 의미하는 것은 정말로 세계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하나의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는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신과 무관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랑잎 하나 떨어지는 것조차 그 분의 의지라고 말할 때 신은 세상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누가 왕이 되고 누가 전쟁에서 승리하는지 같은 중요한 일부터 길을 가다가 짐을 도둑맞거나 기대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오는 소소한 일까지 모두 신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이러한 의미의 일원화가 잘 드러난다. 단테가 경험한 저승은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각의 공간은 그 안에서 제 1지옥, 제 2지옥 등으로 계급화되어 있다. 실제 저승의 모습이 이런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유일신 시대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던 저승의 모습은 알 수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저승이란 위계질서와 계급구조로 만들어진 세상이다. 정점에는 당연히 신이 있을 것이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즉 신에게서 멀어질수록 천한 존재가 된다. <신곡>의 이러한 구조는 단순히 저승이라는 환상의 공간을 상상력으로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신곡>이 재현한 것은 저승이라는 가상 공간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의미체계다.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그게 신과 가까운 일이라고 판단되면 그 일은 중요한 일이 된다. 반대로 신과 별 관련이 없어보이는 일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다만 일이라는 것은 원래 중립적이다. 그게 신과 가까운 일인지 별 상관없는 일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다. 아마도 그걸 판단하는 것은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왕이나 성직자가 아,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인데 라고 선언하면 중요한 일이 되었을 것이고 이까짓 것을 뭘 나한테까지 라고 하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상위 계급은 유일신의 메시지를 판독하는 권리를 독점함으로써 하위 계급과의 뚜렷한 위계질서를 세운다. 그러니까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단테가 저승에서 본 위계질서화 된 세계는 가상 세계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유일신 사상은 이렇듯 세계의 계급 구조를 구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기독교는 유일신을 등장시키는 것과 동시에 인간의 내면도 발견했다. 기독교는 말한다. 설령 다른 사람의 아내를 간음하지 않았더라도 마음으로 통정했다면 그것은 간음이다. 유대교의 십계명에도 간음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행위에 대한 지적이다. 내가 마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해도 그걸 실행하지만 않으면 나는 계율을 어긴 게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실행하지 않아도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죄를 범한 것으로 본다. 유대교에서는 죄를 범하는 방식이 외면의 행동이라는 한 가지뿐이지만 기독교에서는 외면의 행동 외에 내면의 생각이라는 방식이 추가로 도입된 셈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행동만이 아니라 생각까지 검열하고 수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상 불일치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다. 외면의 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지만 내면의 나는 눈앞에 있는 상대를 칼로 찔러 죽이는 상상을 할 수도 있다. 외면의 나는 그저 줄을 서 있을 뿐이지만 내면의 나는 눈앞의 여자를 간음하는 상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렇듯 기독교가 만든 혹은 발견한 인간의 내면은 하나의 인간을 둘로 분리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 내면은 초기 기독교에서는 감시해야 할 대상이 더 늘어난 것에 불과했지만 데카르트에 이르러 그 자체로 권리를 주장하는, 이른바 주체로서 부각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지한 ‘내면’은 마르틴 루터에 이르러 ‘추가적으로 감시해야 할 대상’이 아닌 신과 직접적으로 소통 가능한 창구로 변모한다. 그가 쓴 95개조 반박문의 핵심은 성직자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누구나 스스로 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의미들은 유일신이 내린 것으로 인지되어 왔으나 사실상 그것이 진정 신의 것인지 아니면 신의 의미를 해독할 권리를 가진 성직자나 왕의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세상의 모든 의미가 신으로부터 내려진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러나 그 의미는 왕이나 성직자가 아닌 자기 자신의 내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루터의 주장이다. 이것은 한반도의 사례를 든다면 통일신라 시기에 교종에 맞서 유행한 선종과도 비슷하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은 지방 호족들에게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근거로 여겨져 각광받았고 루터 역시 그러한 귀족들에 의해 지지받았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루터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생산자라고 한 것은 아니다. 단지 해석의 권리를 누군가에게 위탁할 필요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했을 뿐이다. 루터의 사상에서 신은 여전히 흔들림없는 권좌를 차지하고 있다. 이 권좌가 무너지는 것은 바로 17세기 데카르트에 이르러서다. 데카르트는 의미라는 것이 더 이상 신이든 자연이든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생산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내면은 단지 추가적으로 감시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욕망과 의지 그리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주체적 공간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저 유명한 명제는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생각이란 내면을 가리키며 존재란 의미이다. 나는 내면을 갖고 있고 그래서 내 스스로 세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게 데카르트가 말한 ‘주체’였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제 의미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도 기독교의 유일신도 내려주지 않는다. 인간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의미의 생산자가 되어야 하며 스스로 입각한 도덕률에 기대어 자기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칸트가 인간을 자율적 존재라고 말한 것도 이에 기반해서였다. 자율이라는 것은 스스로 만든 규율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이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율적 존재인 것은 아니다. 스스로 만든 규율이 있고 그 규율을 따르고 있는 인간만이 자율적 존재다. 칸트는 자율적 존재가 되기 위해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한 규율을 만들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곧 외부세계가 아닌 자기 자신에 근거해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기틀을 만들었다. 자기 자신이 만든 의미를 단지 혼자만의 세계에 국한시키지 않고 세상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니체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의미를 관철시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초인적인 의지와 신념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아가 샤르트르는 모든 인간은 자기 존재에 대한 책임이 있고 자기에게 일어난 일 중에서 자기의 책임이 아닌 것은 없다고까지 말했다.


여기까지 보면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철학사전 전환은 원래 외부에 있던 의미의 생산자가 자기 자신, 즉 내부로 이동하면서 발생했다. 모든 욕망과 의지가 내면에 있다고 말한 데카르트나 스스로 규율을 세워 자기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는 칸트, 스스로 만든 의미를 외부 세계에 적용시킬 수 있다고 말한 니체 그리고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고 말한 샤르트르는 헬레나를 그리스 세계의 최고의 여인이라고 불렀던 호메로스와는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다. 외부의 의지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발전적인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저자들이 지난 서양 철학사의 중요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의미를 대하는 인간의 방식이 변해온 과정을 설명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의미의 충만이 아닌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허무주의라는 것은 말 그대로 의미가 없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의미가 없으면 살지 못한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런데 외부로부터 의미를 부여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생산할 수 있게 된 인간이 왜 이런 무의미의 절망에 부딪히는가.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이유는 이렇다. 내가 생산한 의미가 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생각과 행동의 근거를 모두 나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건 자유로운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좋아, 오늘 점심은 피자를 먹어볼까. 일주일에 두 번은 피자를 먹기로 했으니까 같은 식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의 말과 행동은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른 사람도 자기 자신에 근거해서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타인과 교류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라면 자기 자신이 근거를 만들고 의미를 생산하는 일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모두가 의미를 생산하고 있을 때는 필연적으로 충돌이라는 게 일어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했던 행동이 타인에게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일 수도 있는데 문제는 중립적인 기준이 없고 단지 각자의 근거만이 존재할 경우 이 충돌을 해결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사람들은 개인적인 해결 대신 중립적 기준의 대표적인 법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높아지고 무엇보다도 타인과 관계 맺는 것 자체를 꺼려하게 된다. 요컨대 스스로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일이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자기가 만든 근거가 타인에게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나면 스스로 의미를 생산하고자 하는 마음조차 사라지게 된다. 요컨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허먼 멜빌의 <모디 딕>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허무주의 시대의 광기를 설명한다. <모비 딕>의 유명한 인물인 외다리 선장 에이헤브는 자신의 다리를 가져간 흰 고래, 모비 딕을 찾아 복수하는데 인생을 건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모비 딕을 잡으려는 이유는 다리를 잃은 것에 대한 단순한 복수심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 모비 딕은 고래가 아니라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세계의 거대한 손아귀다. 그것이 진리이든 태양이든 혹은 신이든 세계의 뒤편에는 이 세계를 조종하는 거대한 무언가가 있고 모비 딕은 바로 그 무언가의 대리인이다. 그러니 모비 딕을 잡는 것은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그 무언가에 맞서 저항하는 일이며 인간의 존엄을 찾는 일이라고 에이헤브는 말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의 의견은 다르다. 모비 딕은 대리인도 아니고 세계의 뒤편에는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절대자 같은 것도 없다. 모비 딕은 표면이자 동시에 심층이다. 모비 딕이 상징하는 것은 세계를 관통하는 거대한 진리 같은 것인데 에이헤브가 살고 있는 시대는 유일신의 시대도 아니고 이미 각자가 자신의 의미를 생산하는 시대이다. 에이헤브는 절대 진리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 진리와 맞서 싸우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 진리가 사라지고 모두가 각자의 의미를 생산하는 시대에 절대 진리에 집착하는 인간을 상징한다. 말하자면 에이헤브는 니체적 인간이 아니라 거꾸로 단테적 인간에 가까운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내는 의미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때 인간은 절대 진리에 집착하게 된다. 만약 내가 식당을 운영하는데 무공해 야채를 손님에게 제공하고 싶어서 직접 키운 작물들만 낸다고 치자. 시중에 판매하는 야채를 구매하는 것에 비해 당연히 시간과 비용과 노력이 들게 된다. 나에게는 그게 의미있는 일이라고 해도 그로 인해 적자가 난다면 아무도 그 의미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비효율적인 일을 한다고 비웃음을 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매출이 높아져서 가게를 확장하고 재산이 늘어나면 아마 모두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의미를 인정해 줄 것이다. 여기서 의미의 기준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있다.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느냐가 의미의 중요성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인간은 스스로 만든 의미에 충족하지 못하고 절대 진리를 좇아 귀의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생산하는 일을 그만두고 다시 일신주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들이 내놓은 해법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자기 자신만이 의미를 생산할 수 있는 허무주의도 아니고 거대한 이념에 복종하는 일신주의도 아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반짝이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건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에 합격했을 때일 수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과 단 둘이 남은 순간일 수도 있으며 한국 시리즈에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우승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이런 반짝임을 ‘퓌시스’라고 한다. 우리가 생을 의미있게 살아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퓌시스를 좇는 것이다. 퓌시스를 만들어내는 제조 방법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주문하거나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은 누구나 안다. 자기에게 퓌시스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하면 그 퓌시스를 느낄 수 있는지.


그러나 반짝이는 순간이라고 해서 그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히틀러 연설을 예로 들고 있는데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 국민들은 바로 히틀러의 연설에서 퓌시스를 느꼈고 계속해서 그런 반짝이는 순간을 위해 히틀러를 추종했으나 그것은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고 스스로의 삶을 진창으로 만드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반짝이는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게 아닌 것이다. 누군가는 사람을 때릴 때 발 밑에 꿇어앉힐 때 퓌시스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걸 계속 쫓으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퓌시스를 찾아 떠나는 여정으로 이끌어야 하지만 동시에 올바른 퓌시스와 타락한 퓌시스를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그 능력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포이에시스라고.


포이에시스란 간단히 말해 제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단순히 무언가를 만드는 모든 행위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장인적 기술을 뜻한다. 가령 고도로 숙련된 수레바퀴 장인은 나무를 만지기만 해도 이 나무가 수레바퀴에 쓸 만한 나무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똑같은 나무도 그들에게는 구별되어 보이며 심지어 그들은 나무를 자를 때 생기는 톱밥의 모양으로도 그 톱밥의 사용처를 분리한다. 이런 기술은 당연히 말로 설명해준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나무를 만지고 수레바퀴를 깎으면서 터득하게 되는 기술이다. 그러나 한 번 터득하고 나면 나무를 경험하지 않아도 나무의 본질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우리가 한 가지 기술을 고도로 계발할 때, 그 속에 비용과 시간과 노력과 자기 자신마저 아낌없이 쏟아부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퓌시스의 정체를 구별할 수 있게 된다. 각 분야의 장인들이 하는 말은 그 분야에 대한 말이면서도 오히려 인생을 관통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이는 그게 어떤 분야든 스스로를 갈고 닦으면서 포이에시스를 길러 왔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가 순수한 열정으로 우리 자신의 재능을 계발할 때 우리는 무엇이 진정으로 옳은 것인지 알게 된다.


물론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를 추종한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과연 장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겠느냐고. 기술을 극한까지 연마한다고 해서 꼭 무엇이 옳은지를 알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라고. 분명 그렇다. 아마 히틀러에게 추종한 사람들 중에는 평생에 걸쳐 자기 기술을 연마해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포이에시스에 멈추지 않고 그것을 객관화할 수 있는 메타 포이에시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내 능력의 부족으로 메타 포이에시스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렇게 생각한다. 포이에시스는 이용과 무관한 것이어야 한다. 공부를 하는 것은 포이에시스가 될 수 있지만 그 공부의 목적이 자격증이나 취업 혹은 어떤 물질적인 이득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포이에시스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공부는 어떤 종류의 이념에 복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포이에시스란 이용 목적이 없는 자기 자신의 계발이다. 그게 달리기라면 단지 달리기를 잘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누구보다 빠를 필요도 없고 누구보다 오래 달릴 필요도 없다. 단지 계속 달릴 뿐이다. 기록 상승도 사진의 전시도 인간관계 확장도 아닌 오롯이 달리기를 위한 달리기를 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묻게 된다. 왜 달리는가. 계속 해서 달린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만들어내고 또 대답한다는 과정을 영원히 이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만든 질문에 자기가 대답하는 과정을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자기라는 울타리에 갇힌 초라한 의미의 생산자가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기만의 무수한 답을 가진 실천가가 된다. 그리고 자기만의 무수한 답을 가진 사람은 바깥에서 오는 한 가지 대답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본 지식이 부족한 터라 두 번을 읽어도 첫 번째 읽었을 때보다 더 많이 이해한 것 같지가 않다. 오히려 처음 읽을 때보다 두 번째 읽을 때가 더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 속에는 얼마나 많은 모름이 있으며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읽고 또 읽어야 한다고. 나름대로 정리해서 글을 썼지만 아마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썼던 내용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내가 처음으로 같은 책을 연거푸 두 번 읽었다는 것. 나는 배우기 위해 방금 읽은 책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게 이 책이 내게 준 의미다.



2024년 10월 12일부터 2024년 11월 10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g*******1 2024.11.10.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