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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주인공 크눌프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는 나그네, 방랑자이다. 친구 집에 잠시 머무는 등 거처를 옮겨 다니며 생활하고 표면적으로는 방랑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달리 목적은 없어 보인다. 크눌프는 직업도 없고 돈도 없어 친구들의 화목한 가정, 안정된 직장과 자주 대조된다. 하지만 왜인지 읽는 내내 크눌프에게 연민을 느껴본 적도, 불쌍해 보인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도 없는 것 같다. 크눌프는 직업은 없지만 휘파람을 잘 불었고, 돈은 없지만 춤을 잘 추었다, 무엇보다 누구를 만나든 그들은 크눌프를 환영했기 때문에 어디든 머물 곳이 있었다. 크눌프는 어떻게 어디서든 환영받을 수 있었을까? 크눌프는 예의, 배려는 물론이고 친구 가정의 평화를 생각할 줄도 알았다. 생각이 깊어 보였고 언제든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크눌프는 어렵게 사는 것 같지도 않았고, 삶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놀 줄 알았다. 만나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크눌프가 무책임한 삶을 살아가고 자신들이 더 '성공한 삶'을 영위한다고 여기며 크눌프에게 "이제 그만 안정적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충고한다. 자신들은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는데 웬걸 직업도 없고 돈도 없는 친구에게 질투심을 느끼다니. 자신들의 삶이 무가치해지기 전에 방어기제로 상대방을 낮춘 것이다. 자존감 높은 크눌프는 기분 나쁜 말을 들어도 좋게 들을 줄 알았기에 이런 충고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성공한 삶은 무엇인가? 돈을 많이 버는 것, 결혼 잘해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 누구에게 자랑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 우리의 모든 하루하루는 처음이라 두렵고 무섭다. 삶은 돌밭을 걷는 것과 같고, 누구나 넘어지기 마련이다. 까지기도, 피가 날 수도 있다. 다른 이들은 다치지도 않고 왜 이리 잘 지내는 것 같은지 모른다(물론 그들도 넘어지고 다치겠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삶의 방향성을 의심한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헤세는 말한다. 각자의 내면에는 고유한 울림이 있고, 그렇기에 어떤 삶이 더 나은지 나눌 수 없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의 길이 있고 이 세상에 무가치한 삶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나와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이해하며 살아가면 된다. 하느님께서 방랑자를 그저 지긋이 바라보셨던 것처럼. P.S. 작가가 작품을 쓰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자아를 표현하고 싶은 충동에서, 쓰라린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충동에서, 각박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품을 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 분석학자들은 예술을 창작하는 행위를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라고 불렀다. 예술가들이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곧 현실 세계에서 얻지 못한 것들에 대해 예술이라는 환상의 세계를 빌려 대리 만족을 느끼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 이론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란 따지고 보면 예술가가 이루지 못한 꿈과 욕망에 대한 보상에 지나치지 않는다. (무기여 잘있어라 - 헤밍웨이) 크눌프와 같이 헤세도 어렸을 적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방황을 거듭했다. 탈출 소동을 벌이고, 신경 쇠약에 걸리고, 자살 시도까지 했다. 헤세는 시인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후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 공장 견습공, 서점 직원 등 여러 일에 전전했다. 헤세에게 이 시절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헤세는 이 쓰라린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살아온 삶의 의미를 찾고 이해하기 위해 "크눌프"를 그려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