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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듣고 있다보면 수업과 관련된 내용들을 들을 때도 있지만 간혹 사설을 듣게 되는 경우들도 있다. 내가 다녔던 학교의 경우 학문적으로 매우 도드라지는 분이나,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행위 구원론자 아니냐는 오해와 번역하신 책들로 인해서 오해를 받았던 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분이 수업 시간에 했던 언급 중에 우리나라 교단의 70%는 장로교고 대부분의 장로교단이 칼빈과 그 신학의 계열을 추구하지만, 거의 모든 장로교 교단의 목사들이 누구보다 알미니안, 펠라기우스처럼 설교한다는 말이다. 듣고보니 그렇다. 지나온 장로교회들의 목사들은 모두 개혁주의 복음주의를 외쳤지만 정작 성화에 대한 삶을 언급할 때는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그래서 구원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말들을 당연하게 뱉아냈으니까,
책상과 사역현장의 거리가 먼 가장 큰 이유는 책상에서 배웠다고 생각한 것들이 사실 학적이거나 본문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누군가의 생각이고, 스스로 읽어본 적 없이 타인의 사유의 결과를 학습의 결과라 오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새관점도 그러한 오해 속에 있는 것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새관점에도 많은 계열이 있고, (헤이즈, 샌더스, 라이트, 저자인 던 .. 등등 읽다보면 동일한 관점의 같은 주장을 하고 있지 않으니..) 다양한 해석과 분석 속에서 어떻게 바울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고 그렇게 전파된 복음이 어떠한 내용과 방식으로 전해졌는가에 대한 해석과 결과를 도출한다.
그런데, 오해 속에 있는 이들은 아마 대부분 새관점을 하나의 생각과 관점으로 묶고, 행위를 강조하는 새로운 율법주의 정도로만 이해하면서 새관점에 대한 반감과 이해에 대한 가능성을 다 차단하는 것이 아닐까, 새관점만이 옳다고 할 수 없다면 기존의 관점이 정통적이고 오랫동안 공유되었다는 이유로 옳을 수는 없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바울이 어떠한 인물인지, 그들이 이해한다는 정통의 관점에서 올바르게 설교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그러니, 아예 새관점에 대한 소개,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은지, 그 주장의 기본적 내용과 토대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러한 책을 보면서 이해의 지경을 넓히고 그 다음에 좋아할지 싫어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지라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