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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롭다. 사람들 속에서 함께 일하고, 웃고, 투쟁하면서 매순간 외로움을 느낀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외로움이라는 감정기제에 취약한 피조물이다. 이 책에는 나쁜 요괴가 나온다. 사람들을 미혹하고, 공포에 떨게 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나쁜 요괴가 등장한다. 《요괴소년》은 슬픔으로 빚어낸 아동 문학이다. 폭력과 무관심, 왕따와 계급사회의 벽 사이에서 신음하는 아이들의 비명과 눈물이 만들어낸 가슴 아픈, 무섭도록 시린 외로움의 이야기이다.
경호는 ‘혹시...?’ 하며 요괴를 의심하게 되고, 자신은 소원을 빈 적이 없었기에 그럴 리가 없다고 애써 생각을 떨쳐내지만, 그 이후로 경호 주위에서 자꾸만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마침 나타난 퇴마사라는 여자아이. 퇴마사는 경호에게 다가와 요괴에 맞설 방법을 알려주고 함께 요괴를 퇴치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데... 요괴는 경호 마음 속 미움의 근원을 찾아 차례차례 제거해 나간다.
자신을 경멸했던 선생님이 자동차 사고로 죽는가 하면, 자신을 미워한 이웃집 아줌마의 아기가 다치고, 자신을 왕따 시킨 친구들에게도 이상한 일이 생긴다. 경호의 마음 깊은 곳 상처로 남았던 사건들이 요괴의 입을 통해 하나씩 밝혀지고, 경호는 그날의 일들을 회상하게 된다. 이쯤에서 요괴의 복수극은 일견 통쾌해 보이기도 한다. 지난 날 자신을 죽도록 때리고 괴롭혔던 아버지, 너 같은 건 낳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엄마, 냄새 난다고 피하는 친구들, 같이 놀지 말라고 부추기는 친구의 엄마. 경호의 슬픔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다 알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사람을 해치고, 이기심으로 경호를 이용하는 요괴이지만 그 순간, 내 마음의 깊은 곳에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해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음을(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기억한다. 어릴 적, 형의 주머니에서 100원 동전을 훔쳤다. 용돈은 늘 부족했고 새로 나온 과자가 너무 먹고 싶었다. 거짓말에 능숙치 않아서 금방 들통이 나고 부모님께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났다. 그리고 몇 달 후 형이 동전을 잃어 버렸다. 어머니는 당연한 듯 나를 의심하였다. 억울했던 나는 엄마 앞에서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어린 날, 나를 몰라주었던 어머니가 그렇게 미웠었다. 그랬던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그 때의 어른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이해는, '세상에 물들다' 와 유의어이다.
이 책은 어린 날의 아픔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요괴는 어린 날 우리 맘 속에 잠깐씩 깃들었던 원망과 두려움이다. 어렸을 적 우리는 고통을 받을 때마다 ‘미워 죽겠다’,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하고 말을 했다. 작가는 어린 시절의 그런 마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호의 어린 시절을 통해 우리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아 우리가 어린 시절 겪었던 아픔을 지금의 아이들에게 대물림하지 않도록 반면교사가 되어준다. 어딘가에 혼자 있어서가 아니라 도움을 구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은 혼자가 된다. 혼자이고 싶어 혼자인 것은 진정한 혼자가 아니다. 혼자라는 것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그건 버려지는 거니까. 책을 읽으며 어린 날을 기억했다. 이 책은 분명 아동 도서인데, 내가 철이 덜 들어서인지, 아직 덜 자란 것인지, 마음 한가운데 구멍이 뚫려버린 듯 허허로움이 밀려들었다. 결국 괴롭힘이라는 토양 아래 외로움의 씨앗이 자라 요괴가 되어 버린 소년과 요괴의 꾐에 넘어가 요괴가 될 뻔 한 소년은 한 쪽의 소멸을 통해 다른 한 쪽이 구원을 얻게 된다. 소멸의 슬픔, 그 슬픔의 눈물은 또 한 소년의 살아갈 힘이 되어 주었다. 억울함과 분노를 먹고 자란 아이는 지금 자라서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 이제는 내가, 우리가 아이들을 돌보아줄 차례다.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이 땅이 천국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위로하고, 놀아주고 싶다. 나는, 진정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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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겐 어째서 고통 따위가 있는 것일까? 누구나 밥을 먹어야 하듯이 살다보면 누구나 이런 의문을 떠올릴 때가 찾아오는 법이다. 생로병사란 그 누구도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구나 정의의 여신마저 장님이 아니라 운명의 여신 역시도 장님이기 때문에 때로는 그저 우연히 확률적 불운이 작용한 결과로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야 했을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전성희의 소설, '요괴소년'의 주인공 경호가 그렇다. 현재 그의 나이 열 두살. 사람들은 그를 당연히 어린이라 부르고 그렇게 어린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관심과 보호 그리고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경호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비유하자면 경호는 운명의 여신으로 부터 사납게 내쳐진 아이라 할 수 있다. 이유없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폭력으로 모든 삶의 의미를 잃고 아들에 대한 사랑마저 놓아버린 어머니. 그리고 친구하나 없이 외톨이로 보내야 하는 학교. 그러한 일상적인 폭력과 한없는 무관심 그리고 헤어날 길 없는 외로움 속에서 경호는 매일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맞은 곳곳 마다 시큰하게 느껴져 오는 통증. 집에 돌아가도 반갑게 맞아줄 이 하나없는 휑뎅그레한 공간에서의 고독 그리고 친구들의 냉혹한 등들이 보여주는 무시와 배척 가운데 경호 역시도 수백번 아니 수천번 그와 같은 질문을 똑같이 묻지 않았을까?
도대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그것도 나만! 그리고 이런 고통을 겪으며 이제 나는 어떡해 해야 하는지?
마치 그 의문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어느날 밤 불현듯이 요괴가 나타난다. 몽상이 빚어낸 산물이나 거짓 환영이 아닌, 진짜 생생하게 존재하는 요괴가. 더구나 경호와 비슷하게 생긴 소년의 모습을 한 그 요괴는 이렇게 말한다.
"원하는 게 뭔지 말해 봐."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단지 난 네가 그걸 네 입으로 똑똑히 말하는 걸 보고 싶었을 뿐이야."(P. 12 ~ 13)
경호가 겪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지금 경호가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건 지금의 고통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리라.
이렇게 사실 전성희의 소설, '요괴소년'은 살면서 우리에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고통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통을 주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 고통을 오히려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 이렇게 말이다.
그렇게 하나는 단순히 없애버리기만 하면 되니까 쉽고 다른 하나는 나 하나가 아니라 타인마저 포용해야 함으로 어렵다. 어려워도 정말 무지 어렵다. 누구나 다 감기에 걸려 본 경험이 있을테니 하는 말이지만 감기에 몸살까지 겹쳐 꼼짝없이 앓아누워야만 할 때 그 몸으로 다른 누군가를 위해 간호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그것도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거기다 아무런 의무도 아닌 일을. 그럴 때 과연 기꺼운 마음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고통을 참고 견디며 오로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걸 감내하는 사람이 정말 얼마나 될까? 정말 그 누구도 자신있게 '저요!'하고 손을 들 수 없을 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도 그래서 두번째의 길은 예수나 석가모니등 종교의 성인들만이 걸어 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예수의 십자가 승천이나 석가모니의 고행을 통한 열반은 모두 자신에게 가한 고통을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단적인 상징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내 고통은 그대로 껴안으면서 타인의 고통만 줄여주는 두번째의 길 보다는 내가 지금 겪는 고통의 즉각적인 해소라는 첫번째 길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리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인지 모른다. 어차피 암환자 말기의 타인이 겪는 고통보다 지금 당장 내 발가락에서 난 상처가 주는 고통이 훨씬 더 아픈 법이다. 아픔은 그렇게 냉정한 객관화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모두 자기가 겪는 고통이 가장 큰 법이다. 그러니 내 고통의 해결은 최우선이 된다.
경호에게 찾아온 요괴. 그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손쉬운 해결책을 상징하는 존재다. 단순히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대변하는 존재다. 요괴가 보여주는 행동을 보면 전성희 작가가 바로 이런 의미로 요괴의 존재를 빚었음이 대번에 드러난다. 그 요괴가 경호의 삶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두 존재, 그러니까 일상적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와 학교에서 자기를 경멸하고 왕따가 되도록 부추긴 4학년 때의 담임, 두 사람을 모조리 없애버리니까 말이다.
그렇게 요괴는 마치 외과의사가 악성 종양을 매스로 잘라내듯 단순히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손쉽게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우리의 바람을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도 잘 알고 있듯이 손쉬운 해결책은 늘 완벽한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법이다. 제거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건 단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치워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그 존재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고통은 특히 그렇다. 왜? 고통이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건 그것의 대체불가능성 때문이다. 고통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다. 이 말은 거꾸로 이 고통에서 헤어나도록 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우리 자신 밖에는 없다는 말이 된다. 고통의 원인은 외부에서 비롯되지만 그 외부의 원인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건 단순히 촉발에 불과하고 현존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들 뿐이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것은 그 '촉발'을 도려냄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 '촉발'이란 이미 총알이 발사된 권총과도 같다. 권총을 부셔버린다고 해서 총맞은 내가 느끼는 고통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고통의 손쉬운 해결책이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원인이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여전히 고통을 느끼는 내가 남기 때문이다. 아무리 복수한다고 해도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문제는 그것을 야기한 타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궁극적 해결은 내가 그 고통을, 혹은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달려있다.
최근의 진화론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이성이라는 것도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진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즉 주어진 환경에 보다 잘 살아남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발달시켜온 것이라는 의미다. 원시 시대 그 주어진 환경에서 우리를 가장 두려움에 젖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고통이지 않았을까? 근대 초기 홉스나 로크 그리고 루소들이 최초의 사회 상태를 얘기할 때 항상적으로 ' 고통에서 야기된 만인에 대한 만인의 두려움'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것의 방증이지 않을까? 이렇게 보자면 우리의 이성이란 고통과 마주하며 발달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좀 추상화하자면 현존하는 고통을 어떻게 헤아릴까 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이성이 지금처럼 발달해왔다는 말이다. 다소 무리가 있는 억측이긴 해도 이러한 진화론적 사실은 고통의 궁극적인 해결이 그 원인의 제거가 아니라 스스로의 헤아림에 있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과도 같다.
해서 요괴를 퇴치한다는 퇴마사의 존재 조차 결국 경호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것이다. 더우기 요괴는 퇴마사를 가리켜 이렇게까지 말한다.
"퇴마사의 주인은 요괴란 말이지"(P. 134)
이렇게 말할 때 요괴의 말이 전혀 과장도 거짓도 아닐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뿐이다. 즉 고통의 원인만 제거한다는 것이 궁극적 해결책은 아니라는 사실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퇴마사의 평가 때문에 전성희 작가의 고통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이 그 원인만 제거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걸 우리는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결국 퇴마사도 요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건 단적으로 퇴마사가 요괴를 헤아리기 보다는 단순히 그 존재만 없애려고 드는데서 바로 드러난다. 퇴마사의 해결 방법이나 요괴의 해결 방법이나 같은 것이다. 모두 그 '원인만! 원인만!' 하고 외칠 뿐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요괴가 해 준 모든 것은 사실 경호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던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죽어버린 아버지와 담임은 유령이 되어 경호 앞에 여전히 출몰한다. 경호는 그들의 존재 때문에 여전히 고통스럽고 이미 그들이 죽어버린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이렇게 손쉬운 해결책은 우리 스스로를 더 힘들게 만들 뿐이다. 그러므로 경호가 정말 천착해야 하는 것은 두 번째의 길이다.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 해도 고통에서 정말 헤어나오고 싶다면 걸어야 하는 것이다. 전성희 작가는 후반으로 갈수록 그러한 길을 걸어가는 경호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건 '받아들임'의 과정이다.
부정하려 들지 않고 순순히 긍정하며 그 의미를 헤아려 봄이다. 나 혼자만 존재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더불어 같이 걸어가겠다라는 포용이다. 칼로 가차없이 도려내듯이 쉽고 빠르게 해결하겠다는 조급증이 아니라 진정한 해결을위해 보다 더 오래 지켜보고 더 깊이 헤아려보겠다는 숙고이다. 이러한 여정을 전성희 작가는 소설에서 단적으로 '달래기'라 부른다.
그런데 퇴마사의 말 중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달래기'가 그것이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잊기 위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고 했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달랜다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벗어나거나 도망치거나 하는 것들과는 분명 다른 무엇이 그 안에 있는 것 같다.(P. 130 ~ 131)
달래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엄마가 아기를 달래는 모습일 것이다. 바로 그렇게 전성희 작가는 우리가 고통을 바라보는 태도 역시도 그것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달래기'는 무엇보다 대상의 긍정이요 엄마가 아기를 달래면서 아기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새심하게 관찰하듯이 그렇게 진정한 해결을 위해 상대를 계속 헤아려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의 후반 경호가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다. 경호는 무조건 없애고 보자는 퇴마사의 종용을 물리치고 요괴를 먼저 인간적으로 헤아리려 노력한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쩌다 요괴가 되었는지 그의 삶을 그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자 경호는 볼 수 있었다. 사실은 그 요괴가 자기와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요괴와 경호는 그 닮은 용모만큼이나 삶의 모습 또한 판박이였음을. 그 헤아림을 통해 경호는 요괴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었고 결국 그 공감이 바탕이 된 포용으로 퇴마사도 하지 못했던 요괴의 존재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떠나보낸다. 표면적으로는 요괴의 사라짐이지만 그 요괴의 삶이 바로 경호의 삶이었기에 본질적으로는 고통으로 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성희 작가는 우리가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건 단순히 내게 고통을 가하고 있는 원인을 무조건 없애는데 천착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 고통을 긍정하고 함께 하면서 그것이 왜 생겨났는지 그리고 또 어떤 식으로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헤아려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달래기'다. 그리고 그 '달래기'는 일종의 대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가 얼른 떠올리는 것은 그 대화의 과정이 어쩐지 프로이트가 말했던 정신분석가와 그 앞에 누워 자신의 고통에 대해 담담히 고백하는 환자 사이의 대화와 닮았다는 것이다.(영화에서 흔히 보듯이 지금 정신분석에서 많이 행해지는 '대화법'은 바로 프로이트가 주창한 것이다.) 그러한 대화법에서 나의 고백은 치유를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는 '달래기'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싶다. 결국 우리는 내 고통의 대상을 긍정하고 함께 하면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대화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고통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러한 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헤아려 보고 그걸 고백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대상으로서의 고통을 헤아림은 결국 나 자신을 좀 더 열고 바깥에다 내어주는 일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달래기'의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고통에서 진정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고통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시야를 수정하는 것 밖에는 달리 없는 것이다.
전성희의 '요괴소년'은 청소년 소설로는 흔치 않게도 고통이란 문제를 다루면서도 아주 깊은 곳까지 내려가 모든 걸 사유로 보듬으려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인상 깊었던 작품이다. 그 보듬어 안음을 통해 결국 그녀가 도달한 종착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말해온 대로 나 역시도 동의하는 바이다. 고통은 일단 생겨나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눈 위로 안대를 씌우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고통은 압도해오는 통증 때문에 자기 밖에는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의미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보다 제대로 된 구원은 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을 때 찾아온다. 아무리 고통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타인을 보지 않고 자기 세계에만 유폐되어 있으면 경호가 요괴를 통해 손쉬운 해결을 바라는 것처럼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안게 될 방법을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통에 빠질수록 더 넓게 더 많이 다른 것을 보게 하는 시야가 필요하다. 전성희의 '요괴소년'은 우리가 그러한 안대에 가리워져 있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스스로 그것을 찢도록 만들어주는 좋은 채찍질이 되어 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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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책을 한밤중에 어슴프레한 스탠드를 켜고 읽는데 등줄기가 서늘해지대요 도입부분에서는 머리카락이 쭈뼛서고 닭살이 통제불가능하게 돋으면서 오싹오싹했어요 기가 약한가:: 이야기 전개가 너무 뜸을 들이지도 않으면서 지나치게 앞서지도 않으며 빠르기와 세기를 적절히 조절하며 요괴에 홀린 듯 몰입상태로 봤어요 학교폭력뿐아니라 가정폭력 실태가 심각한 수위에 있다는 보도를 보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수면위로 들어나지 않은 건수까지 치면 더 하겠지요 아버지의 경제적 무능과 폭력행사로 엄마는 가출을 하게 되고 경호는 몇해동안 할머니와 행복하게 살지요 집으로 돌아온 엄마, 경호는 그렇게 바라던대로 할머니를 떠나 엄마, 아빠와 함께 살게 되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나 불행합니다 아빠로부터 물리적 폭행을 당하고 엄마의 무관심과 언어폭력도 견뎌야 합니다 아빠의 폭력이 있을때마다 마음속으로만 반복해 외칩니다 분노의 말들을 되뇌입니다 부모의 사랑과 따듯한 보살핌을 받아야 할때에 전혀 받지 못할뿐 아니라 학대수준의 가정환경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로 아직 피어나지도 못한 어린 나이에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아이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어느 날 요괴소년이 경호를 찾아 오는데요
요괴소년은 경호의 과거에서 상처가 되고 분노의 마음이 생겼던 때의 기억을 상기시켜주면서 경호 마음속에 증오심을 일게 해요 복수를 부추기지요 그 복수를 자신이 대신해 주겠다고 합니다 뜻하지 않은 아빠의 죽음, 요괴는 자신이 한 일이라 합니다 그 밖에 자신을 경멸했던 선생님, 친구의 엄마 한테 가서도 대신 복수를 해주며 마지막으로 경호의 엄마까지 해치려 하지요 요괴를 잡으려는 퇴마사와 자신의 분을 풀어주는 요괴사이에서 갈등하던 경호는 엄마을 죽이려는 요괴의 계획을 알게 되었을때 이전과 다르게 대항합니다 가정폭력에 고통받으면서 외부에 들러내지도 못하고 어디에 도움도 호소하지 않고 자포자기상태였던 경호는 부모, 친구와 선생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마음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그걸 억누르고 눈치만 보고 잠잠고 있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아요 무기력하게 받아 들이고 살아가지요 요괴가 한 복수소식은 희열도 있지만 마냥 통쾌하지만은 않은 경호의 복잡한 심리상태가 우리의 내면을 청동거울에 비춰주는 것만 같네요 누가 도와주기보다 아이의 병든 마음과 몸을 스스로 극복하고 치유하는 부분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요괴가 된 소년 또한 자신과 같은 아픈 상처가 있었음을 알게 되면서 퇴마사가 요괴소년을 물리치려고 요괴소년의 아빠를 영적힘으로 불러와 자신이 아빠에게 폭행당했던 것처럼 요괴소년이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요괴소년을 도와주죠 요괴소년(어찌보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을 보면서 자기 자신이 더 불행해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결심을 하지요 겉으로 보기에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마를 지켜주고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이 요괴의 유혹을 이겨내고 요괴마저도 구해주죠 요괴도 복수의 마음을 접고 퇴마사의 처분을 순순히 따르게 됩니다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는 요괴소년의 말이 귓가를 맴도네요ㅠㅠ 우리도 겉으로 표출을 안 했을뿐 마음속으로 나쁜 말도 하고 증오심도 불태우고 앙심도 품으며 그러고 살지요 대부분 행동으로 옮기지만 않을뿐. 자신을 요괴로 만들겠다는 요괴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요괴도 구해준 경호, 문제를, 문제가 될 상황을 침묵으로 회피했던 경호는 이제 엄마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말하겠다고 합니다 진심이 전해지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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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소년이라는 제목을 듣고 그냥 보통의 아이들 대상의 공포소설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무섭고 안타까워서 가슴을 짓누르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공포소설보다 더 무서운 소설인것도 같다. 어쩌면 우리 아이가 당하고 있는 고통일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아이마저 요괴가 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이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게 해야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도 하는 이야기다.
요즘은 아이들의 왕따 문제를 다룬 학교 폭력에 관한 책들이 참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어쩌면 이 책은 그 현실을 너무 적나라하게 하나도 꾸밈없이 보여주고 있어 더 무서운건지도 모르겠다. 사소한 이유로 아이게게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와 학교 친구들로부터의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늘상 주눅들어 마음속에 슬픔과 분노만 가득하던 한 소년이 요괴를 만난다. 그런데 그 요괴는 소년과 비슷한 또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너무너무 화가나고 억울하지만 소년은 전혀 죽일 마음이 없는데 요괴는 아빠도 죽이고 선생님도 죽인다. 그리고는 소년이 원해서 자신이 대신 그 일을 해주는것 뿐이라며 소년을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 하나 떠올려 그때의 소년의 본심을 깨닫게 만든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런 마음들을 말이다. 누구나 도둑으로 오해받고 이유없이 발길질을 당한다면 분노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요괴는 그런 소년의 마음을 교묘히 이용하면서 자신도 살아가고 있는듯 하다.
사실 소년의 아버지는 사회에 대한 불만을 소년에게 화풀이했으며 소년의 엄마는 남편의 폭력에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아들만 아니면'을 입에 달고 사는등 참 못나 부모다. 또한 소년이 당하고 있는 폭력을 해결해주려 선생님이 나서 보기도 하지만 오히려 상황만 더 악화될뿐. 그 기회만 노리던 요괴가 점 점 속으로 분노가 쌓여가던 소년앞에 등장한건 우연이 아닌지도 모른다. 소년이 요괴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라도 하는것 같은 이야기랄까?
퇴마사도 등장해 청동거울을 이용하고 활을 들어보는등 조금은 환타지한 이야기가 전개되기도 하지만 소년은 자신처럼 아직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한 요괴가 왜 요괴가 되었는지를 짐작고 요괴가 자신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소년과 같은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결국은 소년 스스로 요괴를 구하면서 요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다.
보통의 이런 이야기들은 엄마나 혹은 친구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거나 도움을 받아 상황을 극복하게 하는 힘을 얻고는 하는데 소년에게는 위로받을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소년은 그냥 엄마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힘을 얻는다. 그래서 이야기가 잘 끝났는데도 왠지 즐거운 기분이 들기보다 쓸쓸한 기분이 들고 소년이 안쓰럽기만 하다. 하지만 스스로 요괴가 되지 않기 위해 외로이 성장통을 잘 이겨냈으니 더 강인해졋으리라 믿는다. 따스한 손길 한번이 혹은 따스한 눈길 한번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깨닫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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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는 소릴 듣고 싶었어.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지 못했어. 그래서 요괴가 되어 잡아먹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책을 보는 내내 스산하고 음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괴소년]이라는 제목도 무섭지만 일단 표지그림이 이 책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어둡고 만나고 싶지 않지만 어쩌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을 문제를 직시해야할 시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듯 하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정말 요괴가 나타난 것이다. 책을 손에 쥐는 순간부터 무언가에 흠찟놀란듯한 두려움이 몰려오더니 휘몰아쳐대는 작가의 능력에 바로 빨려 들어가서 끝까지 읽어야겠다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오랫만에 쥐고 바로 읽어 버렸다. 그렇게 한번에 쫘악 몰아서 본다는 것은 그만큼 이야기가 흡인력 있다는 뜻이다. 얼마전에 흡인력있게 봤던 영화가 떠오른다. [박수건달]. 뭐 다른 이야기지. 아 생각해보니 그 영화에서도 건달이 귀신을 보는 이야기였던듯 하다.
이 책에서도 역시 그런 이야기가 담겨있다. 하지만 느낌은 아주 다르다. 무겁고 섬뜩하지만 내 내면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내가 무너지는 순간 바로 덥칠 내 또 다른 모습을 보는 듯했다. 경호에게 어느날 밤 요괴가 찾아온다. 마치 누군가 장난을 치는듯 찾아온다. 그 요괴는 정말 요괴였다. 우리가 요괴라고 말하는 순간 떠오르는 그 요괴.
그 요괴는 경호의 삶을 휘젓는다. 경호 스스로 원하는 것이기도 하고 아닌 것이기도 한 아니 생각만으로 분풀이를 했던 일들이 현실이 된다. 그 현실은 경호가 생각했던 것들이기에 더 당혹스럽고 두렵다. 가끔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저사람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문득 해버리는 그 순간. 그리고 정말 그런일이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한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한일이 아닐 지라도 마치 내가 그렇게 나쁜 생각을 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경호라는 존재를 지우기라도 하려는듯이 술만 마시던 아빠가 어느날 갑자기 누군가에게 죽도록 맞아서 죽게 된다. 그리고 경호를 4학년때 담임맡았던 경호가 아주 싫어하는 선생님 또한 갑작스럽게 죽게 된다. 그들을 죽였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요괴. 경호 네가 원했기에 네 소원을 들어준거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요괴.
경호는 점점 요괴를 만나면서 죄책감에 휩싸이며 퇴마사를 통해 정체를 알게 된다. 그리고 요괴를 없애야 하지만 요괴 또한 경호와 같은 아픔을 갖고 살았던 아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제 봤던 영화 [파라노말] 도 생각난다. 그 영화도 이 책속에서 처럼 죽은 혼령들을 만난다. 그러고보니 비슷한 이야기들도 많고 그만큼 시각을 달리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원하는 결말인것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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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안고 성장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인해 아이시절보다 더 힘들어한다고 한다. 학대와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에 관한 기사를 접할때면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더 공감이 되고 걱정이 되는 일이다. 사회적으로 이슈화가 많이 되어 다양한 의견이 모아진다면 좀더 희망적이 될 것 같다. 요즘 자주 듣는 단어가 힐링인데, 힐링은 치유이다. 힐링이라는 단어에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치유가 되고픈 사람이 많아서가 아닐까. 바쁜 일상에 쫓겨 나만 챙기고 내아이만 챙기기 보다 주위의 소리를 들어봐야겠다는 반성을 했다. 일그러지고 다친 영혼을 위해 요괴 소년이 나타났다.
요괴가 나타났다 6학년 남자아이 김경호 12시 53분 아빠가 죽기 전날 아빠가 던진 우산에 맞아 푸른 멍이 들었다. 이날만 맞아 멍이 든 게 아니다. 집에서 술만 마시던 아빠는 밖에서 술마시다 옆 테이블의 사람과 시비가 붙어 맞아 죽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난다. 잦은 폭력 아니 어린시절 내내 폭력과 사랑이 없는 가정에서 상처받아온 아이다.
요괴를 만났다. 푸른 빛이 몸전체에 감도는 하얏고 창백한 아이의 모습의 요괴는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본적 없는 경호는 믿지 못한다. 아니 경험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 손 내미는 법을 알지 못한다.
퇴마사가 나타났다 3학년때 아빠에게 죽도록 맞은 날밤, 경호는 처음으로 욕을 했다. '개새끼!' 폭력을 행사한 아빠에게 한 욕이 아니라, 개같은 자신의 인생에 대고 한 욕이라는 데에 그 구절을 읽을때 가슴이 아팠다. 어린아이가 '실망하지 않으려면 그래야한다'고 체념하는 모습이 삶에 대한 희망없이 살아가는 너무도 불쌍한 존재라 너무나 가엽다.
청동거울을 받았다. 4학년때 담임인 김은숙 선생은 냄새 나고, 거지꼴로 다니는 경호를 어른이고 조금은 우월한 위치에 있으면서 감싸안지도 않고, 아이들의 집단 폭행을 보고도 무시하는 비인격적인 선생이다.
화가나서 화풀이 하는 요괴, 복수를 위해서 또 시체를 먹기위해 죽지않는 요괴는 사라지거나 쫒아낼수 밖에 없다. 요괴의 정체를 알고 사연을 알아내서 한을 풀어준다면 가능하다. 요괴소년은 또 다른 김경호였다. 같은 처지의 외롭고 불쌍한 아이, 학대와 폭력에 견디지 못해 요괴가 되어버린 불쌍한 영혼이다. 요괴소년을 통해 김경호는 비로소 세상에 소리를 낸다. "나도 말해주겠다. 엄마때문에 외롭고, 슬프고, 그래서 화가 난다고. 참지 않겠다. 이젠 괜찮다.괜찮다." 자신의 영혼을 구한 김경호를 보며, 다른 아픈 영혼들도 용기내어 세상에 외쳤으면 한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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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 제목을 보고, 요괴 소년? 요괴같이 나쁜 소년인가 했었는데 정말 요괴인 소년일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읽을 때 깜짝 놀랐다. 특히 얼마 전에 방영되었던 '아랑사또전'이라는 드라마 생각나 너무 허구적인 이야기는 아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읽으면서 이런 설정이 한편으로는 동감이 되었다. 가족폭력이 많이 일어나는 현 시점을 생각하면, 인간이 요괴가 된다는 표현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너무 가슴이 아팠고,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드렸다. 이 책은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해온 한 소년이 아버지를 죽게함으로써 요괴가 되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주인공의 주위 인물들을 한 명씩 죽어나가는 이야기이다. 그 주위 인물들은 주인공을 무시하고, 마음 아프게 한 인물들이다. 요괴는 이런 인물들을 죽임으로써, 주인공에게 네가 바라던 걸 대신 해준다는 식으로 주인공에게 죄책감을 들게 한다. 주인공은 이런 죄책감의 괴로워 하다가, 결국엔 내가 그들을 미워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사랑받고 싶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이 책은 어린이를 위한 도서이지만 어쩌면 어른들이 더 많이 읽어봐야할 책이다. 어른들은 자식들은 자기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 책을 보면, 어린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계기를 말해준다. 어린이를 한 인격체로 대하고, 그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나무라기 보다는 먼저 생각하고, 그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주었다. 나도 그동안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 아이들을 나쁘게만 생각했지, 왜 그런 행동을 할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그런 행동을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알아주는게 그 아이에게 얼마나 큰 사랑으로 다가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폭력을 사용해본 적도 그리고 받아본 적도 없어서, 가족폭력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직도 조심스럽다. 하지만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폭력을 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건 아이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것이며, 폭력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아이더라도 아이는 사랑받을 존재이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어른들이 반성하고, 아이를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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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 이벤트에 당첨되어 책은 오늘(아니다, 시간상 이제 어제가 된다.) 아니 어제 받아, 오후 9시 30분 경부터 읽기 시작하여 2시간 30여분 만에 다 읽었다.
처음엔 다 읽으려기 보다는 절반정도만 읽고 자려고했는데, 읽다보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요괴소년... 제목만으로는 이 책의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은 가정폭력과 언어폭력, 왕따 등 현재 우리 사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제를 청소년(주인공이 4학년 이상)을 주인공으로 하여 써 내려가고 있다.
아빠의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요괴가 된 요괴소년과 역시 아빠의 폭력, 엄마로부터의 언어폭력, 무시, 그리고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의 폭력(무시와 편견도 엄연한 폭력이니까)과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경호. 이 둘이 만나면서 시작된다.
요괴소년은 경호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때리고 무시하고 왕따를 시키는 사람들이 죽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여 그런 경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경호의 주변에 나타나고 실제로, 경호의 아빠를 죽이는 것부터 시작하여 살인을 시작한다.
그러나, 경호는 아빠의 죽음에서부터 알게된다. 자신이 아빠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다는 것을, 다른 요괴소년의 살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역시 죽기를 바랄정도로 미워하지(증오히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요괴소년과 경호의 엇갈린 싸움은 시작되고, 경호는 알게된다. 요괴소년이 결국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용서한다. 요괴소년을, 자신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아빠를, 엄마를, 선생님을, 친구들을...
그리고, 나는 바란다. 경호가 세상도 용서하기를.... 또한, 더이상의 요괴소년(녀)은 생기지 않기를...
요괴는 말했다. “내가 네 소원을 이뤄 줄게.”
아빠는 경호에게 말했다. “할 짓이 없어 내 얼굴에 먹칠을 해! 이 개자식, 죽어, 죽어, 죽어.”
엄마는 말했다. “어이구, 등신, 하는 짓 좀 봐. 널 낳지 말았어야 해. 나가 뒈져.”
선생님은 울고 있는 경호에게 소리쳤다. “김경호, 복도로 나가. 시끄러워서 수업을 못 하겠잖아.”
가장 친한 친구의 엄마는 경호를 앞에 세워 둔 채 친구를 야단쳤다. “경호 같은 애랑 놀지 말라고 했지! 왜 반듯한 애를 두고 그런 애야?”
그리고 아빠가 던진 우산에 맞아 얼굴이 시퍼렇게 멍든 날 밤, 경호는 요괴를 만났다. 요괴는 자기 집인 양 익숙한 태도로 들어와 경호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다음 날, 술만 마시면 경호를 두드려 패던 아빠가 죽었다. 설마 요괴가 아빠를 죽였을까?
경호는 요괴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그렇지 않아, 아빠의 죽음이 내 소원은 아니니까. 아빠를 사랑한다고 하면 거짓이지만, 아빠가 죽길 바란 적은 없다.’
기억에 남는 문구
p.14 상처는 손으로 건드리지 않는다고 괜찮은 게 아니다.
혼자이고 싶어 혼자인 것은 진정한 혼자가 아니다. 혼자라는 것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그건 버려지는 거니까.
p.200 내가 할머니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면 엄마가 날 두고 다시 떠날 것만 같았다. 할머니와 사는 것이 좋았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 싶었다. 나에게 엄마 아빠가 없다는 것은 하늘과 땅 없이 살아야 하는 것과 같았다. _ 그 마음이 200% 이해가 되어서 마음이 아팠다.
ps.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나부터 말조심을 하자고...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하지 않는 내가 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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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한참동안 연쇄살인마니 싸이코 패쓰니 말이 많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범죄관련 책도 많이 나왔었고. 그 중에 읽었던 책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글귀 중 하나가 집에서 학대를 받고 자라난 남자아이같은 경우 연쇄살인같은 심각한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고 여자아이 같은 경우 나중에 부모가 되어 똑같은 일을 아이에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모두다 그런 건 아니다. 학대를 받고 자랐다해도 제대로 된 어른이 되는 경우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역시 어릴 때 받은 학대가 그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이 책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김경호라는 아이는 아버지한테는 매일같이 매질을 당하고 어머니는 아이에게 관심조차 제대로 가져주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요괴가 나타난다. 자신이 경호의 아버지를 죽였다고 하며. 그리고 요괴는 경호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이듣을 하나하나 괴롭히고 제거해나간다. 경호는 그런 일을 원하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요괴의 존재를 알고 경호를 도와주는 이는 퇴마사라는 한 여자아이밖에 없다.
경호가 가정에서 학대받는 건 학교에서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 그런 가정사에 개입하려하자 경호 아버지는 내 아들 내가 마음대로 못하냐 하는 식으로 반발하고 아동 복지사도 몇 번 집에 왔지만 그 뒤로도 생활은 개선되지 않는다. 미국 같은 경우 아예 부모 양육권을 박탈해버리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어떨까? 복지사 몇 번 집에 보내는 걸로 과연 문제는 해결될 것인가? 아이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게 제일 좋긴 하겠지만 그 부모가 도저히 부모의 자격이 없다면?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그런 경우가 있어도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게 불가능해보인다. 예전에 S방송국에서 하던 모 프로그램을 봐서 느낀 것이지만 아이가 자신의 처지를 호소할 데라고는 없다. 학교에서도 가정일이라고 손을 놓고 있고. 더군다나 양육권을 빼앗는 경우는 우리나라는 고아원에 대한 편견이 심하니까 고아원보다야 차라리 그런 가정에서나마 자라는 편이 나중에 취직이나 결혼에 유리하지 않을까. 예전과 다르게 이혼률도 높고 붕괴된 가정도 늘어나는 요즘 가정폭력도 예전보다 늘어난 것같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와 내 자식이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옛 유교적 사고 방식이 맞물려 학대와 가깝게 아이를 몰아붙히는 경우도 많고. 예전에 있었던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다.
책에서 경호는 요괴를 무사히 물리친다. 하지만 현실은 얼마큼 바뀌었을까? 아이 엄마는 여전히 그 애에게 무관심하고 학교에서의 따돌림도 여전할 것이다. 그에 대한 대책은 나라에서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