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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착한 영화.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건 단지 '재능(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것처럼)'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한계를 뛰어넘어 신의 단계로 접어들 수 있는, '호풍환우' 따위는 비교의 유가 아닐 만큼 초월적인 권능이다. 그런 엄청난 힘을, 1) 단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거나 사랑을 얻기 위해 쓸 뿐이며, 2) 자녀와의 추억을 올곧게 간직하기 위해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포기하기까지 하는 남자. 그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러했으며, 도중에 성별이 바뀌어버린 아들도 아마 그러할 운명.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으면서도 세계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티없이 간직하기 위해 순리에 즐겁게 몸을 담는 결단. 아니 천성.
인연이 아니면 집착할 필요도 없고 미련을 남길 이유도 없다. '마지막 날에 고백하는 건 왠지 아닌 것 같거든?' 말만 들으면 맞는 말이다. 뭔 놈의 고백이 상대에게 선택의 여지도 안 주는 셈 아닌가? 그런데 이건 다시 생각해 보면 영리한 거절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남자에게 마음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망설이다 이렇게까지 할까' 라며 잠시나마 그 성의에 호응을 해 줄만도 할 텐데. 여성들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 남자'를 거절할 때 이런 편한 방법에 기댈 만하고, (물론 영화배우라서 가능하겠으나) 최대한 밝은 표정을 유지하며('니가 좀 빨리 대시하지 그랬어?') 오히려 남자에게 덜 상처를 줄 필요도 있다(물론 나쁜 여자 평판을 안 듣기 위한 이기적인 이유에서).
허나 어리(석)고 순진한 팀(돔널 글리슨 扮)은 샬럿의 이 접대용 멘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그는 예의 비상한 재능을 발휘하여 휴가의 첫 날 과거에 안착해선, '지시대로' 시원시원 이른 고백을 착하게 그러나 용감하게 시도한다. 하지만 보는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팀이 눈에 안 찬 샬럿은 이번 역시 뭔 핑계를 대서라도 그를 차 버릴 생각임을. 여기서 눈여겨 볼 건 순진한 팀이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을 여실히 담은 그 꺼벙하고 무력한 표정이다. 남자란, 사내아이란 본디 저런 아픈 단계를 거쳐 어른이 되고, 더 멋진 수컷이 되어 더 근사한 여성을 제 품에 안는 것.
키도 늘씬히 큰데다 겉보기에 대단히 화사한 미모를 뽐내는 샬럿과 달리, 메리(엄마와 이름이 같은 - 이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지적이고 귀엽긴 하나 함께 세워 놓고 보면 왠지 남자가 아깝다는 느낌마저 주는, 오타쿠 냄새까지 은근 풍기는 아가씨다. 레이첼 맥아담스가 실감나게 표현(...)한 이 캐릭터마저 그러나 아직은 뭔가 설익고 어설픈 팀을 첫눈에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라고는 하나 직업 좋지 집안 좋지 인물 멀끔하지 뭐 하나 빠질 데 없어 보이는 이런 남자가 매번 이 꼴이라는 게 사실 이 장르 일반에서 드러나는 비현실적 관행임은 다시 지적하고 넘어가겠다.
이 영화에서 무대에 오가는 남녀들은, 어찌된 게 운명의 사랑을 가꿔 가는 경우가 없다. 물론 본인들은 다들 첫눈에 반하거나, 아님 상대가 영 아니다 싶어 단칼에 거절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홀로 과거를 거스를 수 있어 모든 사태의 객관적 리뷰가 가능한 남주 팀은, 결국 우연한 만남의 기회에 호르몬 분비의 장난으로 (얼마든지 다른 상대를 고를 수도 있었던)남녀가 지금의 짝과 엮이고 갈라설 뿐임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휴머니티, 다사로운 애정을 무진장 강조하는 이 영화가 은근 우리들에게 냉소적으로 가르치는 아픈 교훈이다. 인간은 알고 보면 다 찰나의 변덕으로 시간을 메꿀 뿐인, 고작 짝짓기하다 일생을 마치면서 엄청 호들갑, 허풍을 떠는 걸로 그 존재적 허무를 잊으려는 불쌍한 동물 신세일 뿐이라고. 니가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라고. 뭐 별 수 있는 줄 아냐고. 한 편의 동화처럼 안온한 내러티브에 젖게 하는 이 영화는 알고 보면 극한의 리얼리즘을 다만 가장 자상한 배려의 포장으로 관객들에게 들이대고 있었단 말.
이 영화에 '한 방' 같은 건 없다. 계속 보다 보면 격무 때문에 많이 피곤했던 사람의 경우 잠이 살짝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요거 다 안 듣고 자 버리면, 그래서 잔잔하나 완전 진국 진실인 메시지를 놓치면 내 손해다 싶어서, 꾸벅꾸벅 조는 도중 느닷 눈이 번쩍 뜨이기도 할 것이다. 인생은 사실 별 것 없다. 이처럼이나 사소하고 닭살 돋는 일상 속에서 존재의 진짜 이유를 頓悟하고, 단박에 성과가 안 이루어지는 권태와 실망 속에서 제 거친 마음을 漸修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 고행의 그릇이 달콤한 사랑이란 당의정 속이니 누가 인생이 불공평하다 할 것인가. 어느 인생에게나 산다는 건 그 자체로 특혜, 특권인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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