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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아마 없지 싶다. 얼마나 많은 면적을 차지하느냐가 제 소유 권력을 말해준다는 판단에서인지 사람들은 저마다 더 넓은 면적을 점유하기 위해 아등바등 굴기 바쁘다. 이 땅에 올 때와 그랬듯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결국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마치 이 생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는지. 앎은 곧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으므로 오늘도 적잖은 이들이 불행을 호소하며 밤을 지샌다. 영미권 중심의 사고를 오래도록 해온 입장에서 <어느날, 집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를 읽는 건 다소 고통이 따랐다. 그다지 멀다고만은 보기 힘든 곳인 대만출신이라는 저자의 소개를 읽기가 무섭게 나는 저자의 이름 린위안위안을 반복해 발음했는데, 좀체 입에 달라붙지 않는 것이 왠지 앞으로 읽게 될 이야기 또한 그럴 것만 같은 불길함을 느꼈다. 책 한 권을 이토록 짧은 한 마디로 표현하는 건 실례겠으나, 굳이 표현하자면 확실히 낯설었다. 저자의 출신으로부터 느끼게 된 물리적 그리고 심리적 거리감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건축이라 하였을 때 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그려지는 건 어떠한 형태를 지닌 건축물의 모습이다. 명확한 실체로서 다가와야 하는 분야가 바로 건축이요 집인데, 이 책은 그가 설계했으며 건립에 적잖이 관여했을 어떠한 건물의 실체도 제시하고 있지가 않았다. 난해하더라도 좋으니 도면 그림이라도 수록돼 있었으면 하는 엉뚱한 바람이 들 정도로 책은 글자 일색이었다. 그릇된 기대를 품고 있음을 깨달았으므로 난 변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이야기에 보다 귀 기울이고, 가능하다면 그와 소통에까지 나서는 게 적어도 이 책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196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인물이기에 아직은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편이다. 그러나 그의 나이는 다소 어중간한 축에 속해, 2000년대에 태어난 이들에게 그는 하등 나이 든 아저씨에 불과할 터이다. 공감을 하기 위한 공통점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일본의 점령을 겪었으며 강렬한 이념 대립으로 고통받았던 시절을 떠올렸다. 대만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역사이기도 했던 부분을 얼핏이긴 하였으나 저자의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꽤나 오래도록 지속됐던 계엄령의 시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민주주의를 표방한다지만 사회는 경직됐을 것이다. 정답과 오답이 분명히 존재하는 사회, 이쪽 아니면 저쪽에 속하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했을 터다. 게다가 그는 집안의 장손이었다. 아들딸 상관없으니 제발 아이를 낳길 바라는 오늘날의 시대 분위기와 다르게 그는 장손을 한없이 귀히 여기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억압에 가까운 제재가 가해지는 거 같으면서도 나름의 자율성이 보장됐던, 극과 극이 많나 자아냈을 긴장감이 왠지 그가 건축 분야에서 발휘해온 힘의 원동력일 것만 같았다. 마치 자신을 세상에 내놓는 것 같은 느낌으로 그는 자신의 작품을 대했다. 온갖 영감을 긁어모아 하나의 공간을 탄생시켰는데, 역설적이게도 건물은 그의 손을 떠남과 동시에 그의 것이 아닌 게 됐다. 세속에 속한 제 창조물을 이따금 찾아가는 그의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신선하게 느껴졌다. 마치 기기로 찍어내듯 속도에만 열을 올리는 일쟁이가 아닌 그의 모습이 정겨웠다. 어느 순간부터 낙후의 오명을 뒤집어 쓴 지난날의 모습들 또한 기록으로 옮겨졌다. 주거정비 등의 이유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공간들에는 저자의 10대 무렵 나날들이 버젓이 녹아 있었다. 그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존재마저 인정받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의 그리움에 박수를.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책의 말미였다. 총 여섯 개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열 달 간 머물렀던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출발한 공간 이야기는 마지막 순간 누구나 눕게 될 관에 이르러서야 끝이 났다. 벌써 인생이 마무리되었음을 한탄하며 태초로의 회귀를 꿈꾸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떨까. 부디 구차함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앞섰다. 모일 수 있는 순간순간의 존재에 힘입어 인생이라 하는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지금 이 순간을 성실히 감당한 그대였기에, 인생을 논할 자격은 충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