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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 2권 - 로마 왕정의 철폐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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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왕정의 제 7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 된 오만한 타리퀴니우스(Tarquinius Superbus)가 실정으로 폐위되어 쫓겨난 후 로마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한다. 민회와 원로원 그리고 선출된 통치자인 집정관으로 대표되는 로마 공화정은 제정이 가진 폐혜를 씻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명목상 법률의 아래에 있다고는 하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왕좌는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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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왕정의 제 7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 된 오만한 타리퀴니우스(Tarquinius Superbus)가 실정으로 폐위되어 쫓겨난 후 로마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한다. 민회와 원로원 그리고 선출된 통치자인 집정관으로 대표되는 로마 공화정은 제정이 가진 폐혜를 씻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명목상 법률의 아래에 있다고는 하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왕좌는 사라졌으며 임기 1년의 집정관을 2인 선출하여 통치함으로써 권력의 집중을 막았고, 전쟁처럼 힘의 결집이 필요한 상황을 대비해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독재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공화정이 도입되면서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로마 왕정의 제 6대 왕으로 세제와 군제를 개편)가 영주민들에게 의무(납세와 군역)와 권리(참정권)를 부여했던 방침은 더욱 확산되어 로마에 거주하는 영주민(상민)들이 상당수 시민권을 부여받게 됐다. 구시민권자는 명문 귀족이거나 기존에 시민으로서의 혜택을 받음으로써 부와 명성을 쌓았으며 이들은 원로원의 많은 의석과 권력을 쥐고 있었다. 반면 신시민권자가 된 상민들은 무역 등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해 원로원의 자리까지 진출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지만 상대적으로 구시민권자보다 열세의 위치에 있었고 어느 정도의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부와 명성을 가지고 있던 상민들이 원로원에 들어와 완전한 권리평등과 구시민권자들의 특권을 공유할 수 있었다면 두 계급(구시민권자와 신시민권자) 간의 갈등은 예방될 수 있고 협의를 통한 통치를 이어갈 수 있었겠지만 편협한 구시민권자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놓으려하지 않았다. 

 

구시민권자들은 드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노예를 부려 경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상민들이 가꿀 땅이 부족하리라는 것과 로마 사회의 부익부빈익빈이 심해짐을 방증하는 것이었고, 잦은 전쟁으로 인해 세금과 군역에 시달리던 상민들은 결국 기원전 495년 봉기하기에 이른다. 전쟁을 승리로 마치고 귀환했지만 채무만 쌓인 형편이 되자 단체로 궐기한 것인데 이는 자칫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고 귀족들(구시민권자들)이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상민들의 채무는 경감되었고 상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권리를 보호하는 호민관과 안찰관을 선출해 기득권층을 견제하게 된다.  

 

호민관은 상민을 대표하는 자리로 사법권과 거부권 등 집정관에 필적할 수준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따른 갈등이 심화되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귀족의 입장에서 호민관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고 호민관을 제어할 마땅한 수단 또한 없었으므로 나중에 가서는 귀족과 호민관은 서로를 암살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혼란스러운 정국을 겪으며 귀족이나 상민이나 적절한 타협안을 찾아가는 선택을 하게 되고 이 방향은 평등이라는 이상을 향하게 된다. 특히 잦은 전쟁으로 군역을 담당할 상민들의 필요성은 높아졌고 상민들의 가난과 그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는 내란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상민의 입지는 높아졌다. 

 

기원전 6세기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한 세력은 에트루리아였다. 에트루리아는 카르타고와 연합하여 이탈리아 서부의 재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지중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원전 6세기 말 로마에서 왕정이 붕괴되어 소요상태에 빠졌을 때 에트루리아는 로마를 침공해 복속시키고 라티움 정벌을 이어가던 중 라티움 동맹의 저항에 부딪혀 패배한 후 티베리스 강 이북으로 돌아갔다. 기원전 5세기 에트루리아-카르타고 연합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 편에 서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 편에 서서 참전함해 패함으로써 그 위세가 껶였고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북쪽의 켈트족의 침공과 남쪽의 로마 동쪽의 삼니움 등에 공격당하면서 에트루리아의 남은 기력이 다했고 결국 로마에 복속되었다. 

 

기원전 390년 에트루리아를 넘어 남하한 켈트족은 로마를 점령했고 수개월의 기간동안 로마를 약탈했다. 켈트족에 금을 제공하며 그들의 퇴각을 종용한 로마는 치욕스러운 패배를 가슴에 새기고 금새 도시를 수복하였고 전열을 정비하자 힘이 빠질대로 빠진 에트루리아를 공격해 영역을 넓혔다. 로마에 인접한 남부 에트루리아의 도시국가들이 먼저 정복되었고 다른 에트루리아의 도시들 또한 점자적으로 함락되어 3세기에 이르렀을 때는 에트루리아의 흔적만 남아있게 됐다. 

 

로마와 주변 도시국가들이 연합한 라티움 연맹은 처음에는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시작됐으나 정복전쟁이 잦아지고 거기서 로마가 주된 역활을 수행함에따라 점차 로마 중심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에 반감을 품은  라티움 도시국가들이 반기를 들기도 했지만 로마에 제압당하고 패배한 도시국가는 식민지의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상황에 따라 부분적으로 자치권을 남겨두기도 했다). 라티움 지역과 에트루리아를 평정한 로마는 캄파니아, 삼니움 등과 국경을 마주했고 향락에 취해 타락한 캄파니아를 손쉽게 복속시켰다. 하지만 기원전 4세기 당시 로마보다 큰 세력과 영토를 구축하고 있던 삼니움은 쉬운 상대가 아니였는데, 로마의 입장에서 다행스럽게도 삼니움은 그들이 감당하기 힘들정도로 넓은 영토에 퍼져있었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줄 강력한 도시 국가가 없었으며 부족들 사이의 내분으로 인해 힘을 모으지 못했다. 기원전 321년 카우디움 전투에서처럼 로마에 대승하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지만 결국 삼니움은 각개격파 당했고 로마에 복속당한다. 

 

22년의 기간동안 진행된 삼니움과의 전쟁이 있은 후 로마는 삼니움, 에트루리아, 캄파니아, 루카니아, 그리고 움브리아 등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지만 완전한 지배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삼니움과 에트루리아 등에서는 산발적 반란이 일었고 루카니아 등 또한 동맹의 관계이지 복속의 처지가 아니었다. 이탈리아 남부 도시인 타렌툼은 발달한 희랍 도시로써 로마의 팽창에 대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기원전 281년 에페이로스의 퓌로스 왕을 불러온다. 용맹을 떨치고 있던 퓌로스는 자신의 친척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룬 업적을 서쪽에서 행하고자 했고 타렌툼의 원조제의를 받아들이고 이탈리아로 넘어온다.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로마군에 대승을 거둔 퓌로스는 이어진 전투에서도 승리 혹은 적어도 패배는 하지 않았지만 로마의 시민군이 애국심과 자부심으로 더욱 강력하게 결원을 충원해 전장에 임하는 것과 달리 퓌로스의 희랍 연맹군은 한번 잃은 자원을 보충하기 어려운 처지였기에 잦은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그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 시기에 시킬리아에도 변화가 발생했는데, 시라쿠사이는 군주 아가토클레스가 죽자 내분에 휩싸여 전력이 약화됐고 이 틈에 카라타고가 시라쿠사이를 비롯한 시킬리아 전체를 점령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시라쿠사이는 이탈리아에서 로마와 대적하고 있던 퓌로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퓌로스라는 공동의 적을 맞아 로마와 카르타고는 동맹을 맺고 로마는 타렌툼을, 카르타고는 시라쿠사이를 얻고자 했다. 

 

기원전 279년 시라쿠사이로 진격한 퓌로스의 특유의 용맹을 발휘해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냈고 시킬리아 전역에 걸쳐 카르타고에 뺏겼던 영토를 수복한다. 전장에서는 천재적 자질을 발휘했던 퓌로스는 내치에는 약한 면모를 보였는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처럼 전제군주가 되고자했던 퓌로스의 바램은 자유를 숭승하는 스킬리아의 희랍인들의 열망에 대치하게 된다. 왕으로 군림하려는 퓌로스에 대한 반감은 점차 커져가고 시킬리아 곳곳에서는 퓌로스에 항거하는 움직임이 발생한다. 이런 분위기와 잔존하는 카르타고 세력을 완전히 척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퓌로스는 이탈리아의 구원요청에 응해 기원전 278년 다시 이탈리아로 넘어온다. 

 

이전보다 세력 면에서나 위상 면에서 저하된 퓌로스의 군대는 로마의 정돈된 군단에 승리할 수 없었으며 베네벤툼 전투에서 패배한 후 퓌로스는 원군을 모으기 위해 에페이로스로 귀향한다. 에페이로스와 마케도니아에서의 퓌로스의 위상은 그가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과 달라져있었고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퓌로스는 펠로폰네소스의 작은 전투에서 사망한다. 

 

퓌로스가 떠난 희랍 연맹은 힘을 잃고 로마에 대항하지 못했으며 결국 타렌툼의 군대는 자신들의 안전을 담보로 타렌툼을 로마에 양도했다. 로마는 타렌툼의 정복에 이어 루카니아와 브루티움의 반로마 세력을 척결함으로써  기원전 270년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 명실공히 이탈리아 통일을 이룬다. 

 

로마가 이탈리아 전역을 통일했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인 면에서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재해권을 강화해야 했다. 로마가 해군력의 강화에 힘쓰게 됨으로써 이미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던 카르타고와의 마찰이 불가피해진다. 퓌로스 왕에 맞서 동맹을 취했던 로마와 카르타고는 이제 지중해의 재해권을 다투는 경쟁의 위치로 돌아간다. 이어질 <몸젠의 로마사 3권>이 다루는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포에니 전쟁)은 로마사를 읽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재미를 선사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인데 몸젠이 이를 어떻게 설명/해석하는지 궁금해진다. 

YES마니아 : 로얄 t******8 2021.04.0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