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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최대의 교부, 최고의 신학자
"초대교회 최대의 교부, 최고의 신학자" 내용보기
어거스틴이 결국 그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로마서 13:13-14을 읽을 때 그 속박의 사슬을 끊어졌다. 세례에 앞서서 어거스틴은 카시키아쿰(Cassiciacum)으로 물러갔는데 그곳에서 그의 소수의 동료들은 기독교 철학자로서 그들의 훈련의 여가를 보냈다. 모니카 사후에 388년 아프리카로 돌아와서 그는 타가스테에 연구와 명상을 위한 수도원적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391년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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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이 결국 그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로마서 13:13-14을 읽을 때 그 속박의 사슬을 끊어졌다. 세례에 앞서서 어거스틴은 카시키아쿰(Cassiciacum)으로 물러갔는데 그곳에서 그의 소수의 동료들은 기독교 철학자로서 그들의 훈련의 여가를 보냈다. 모니카 사후에 388년 아프리카로 돌아와서 그는 타가스테에 연구와 명상을 위한 수도원적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391년 그는 해안의 합포에서 사제직에로 강요받았고 396년에 그는 카톨릭 주교가 되었다. 여생을 보내는 동안 그는 설교자와 목회자, 성례전의 집례자, 재판관과 중재자, 자선 단체의 관재인과 조직가, 또한 카톨릭 정통 신앙의 지칠 줄 모르는 방어자요 다작의 저술가였다. 힙포의 반이교적 카톨릭 교도와 완고한 도나투스파는 급속히 그를 기독교적 신플라톤주의자의 자신 만만한 인본주의로부터 인간의 본성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보다 성경적이고 비관적인 견해에로 돌아서게 하였다. 참회록은 이러한 새 전망에서 나온 초기의 결실이었고 하나님의 도성은 보다 더 성숙한 결실이었다. 어거스틴은 그가 마니교도의 합리주의에 반대하면서 "이해하기 위하여 믿으라"는 그의 영향력 있는 원리를 발전시켰다. 그는 그 원리를 수많은 저작에서, 무엇보다도 그의 삼위일체론(The Trinity)에서 사용하였다. 도나투스파에 대항하여 그는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 즉, 신자와 불신자가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는 서로 섞여 있는 밭이라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가 성례의 최고 집례자이며 따라서 만일 합당치 않은 사람이 집례하는 경우라도 그것은 여전히 참된 성례라고 주장함으로써 도나투스파의 재세례를 철저히 반박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연합과 사라의 울 밖에 성례를 받는 자들이 남아 있는 한 그 성례는 아무런 유익도 전해주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또한 의견을 달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강제를 사랑의 교정 행위라고 정당화하였다. 약탈당한 로마로부터 피난해 온 펠라기우스파는 411년부터 어거스틴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는 켈레스티우스가 유아 세례(어거스틴은 유아세례가 평범한 관례가 되도록 도와 주었다)에 도전한 후에 그들을 공격하였다. 서방의 페라기우스파에 대한 정죄는 주로 어거스틴에 의해 주도된 아프리카의 압력의 결과로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그를 자극시켜서 부패와 죄책으로서의 타락 과 원칙에 대한 그의 교리를 더 발전시키게 했다. 또한 그들로 인해서 하나님께 돌아가는데 있어서 의지를 자유케 하는 은혜의 필요성, 예정과 "확정된 수의 택자"의 보존 같은 교리도 발전하였다.
l****s 2000.08.09. 신고 공감 0 댓글 0